제18강 선악의 의미 > 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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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제18강 선악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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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167회 작성일 21-07-09 18:20

본문

불교에는 모든 생명체에게 이익이 되게 하는 다섯 가지 계율이 있습니다.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 - 나의 삶은 진리를 추구하는데 얼마나 철저한가? 

도둑질을 하지 말라 – 나의 삶은 청빈하게 살아가는데 얼마나 철저한가?

음행을 하지 말라 - 나의 삶은 순수하게 살아가는데 얼마나 철저한가?

거짓말을 하지 말라 - 나의 삶은 정직하게 살아가는데 얼마나 철저한가?

술을 먹지 말라 - 나의 삶은 깨끗하게 살아가는데 얼마나 철저한가?  

                                      

절대선과 상대선 

우리는 보다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려고 공부를 합니다.

행복하려면 육신이 튼튼해야 합니다. 또한 정신도 건강해야 합니다. 육신도 튼튼하고 정신도 건강하게 하는 좋은 방법은 절 하는 것입니다. 절 하고 참선하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설 하신 내용은 연기에 대한 응용입니다.

이제까지 공부한 내용은 어떤 물음에 대해서도 답을 할 수 있으며 또 모든 경전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연기를 바탕으로 모든 경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연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전부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내용입니다.

연기를 지탱하고 있는 거시적인 현상은 바로 인과응보입니다.

착한 일 하면 착한 과보 받고 나쁜 일 하면 나쁜 과보를 받는 연기법을 삶에 적용시키면 인과응보가 되고 연기의 거시적인 현상입니다.

밑으로 흐르는 도도한 물줄기는 연기이고 이 몸을 받아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인과응보입니다. 착한 일 했을 때 착한 과보를 받고 나쁜 일 했을 때 나쁜 과보를 받느냐에 대한 이론적인 배경과 선악에 대한 의미와 인과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은 삼세 윤회설입니다. 우리는 연기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행동으로 실천해야 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연기를 실천하는 공부방법은 사념처관입니다.

사념처관으로 육신을 다스리고 정신을 다스리게 가르쳤습니다.


선악의 개념 

인과응보를 이루고 있는 바탕은 선이고 악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 할 때 근본적으로 선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편안하게 하는 것도 있고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는 행위도 있을 것입니다.

또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는 행위도 있고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 행위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선이라 하는 것은 모든 존재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동시에 만족시키고 자신과 전체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전체를 이롭게 하는 생각과 행위를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에 반대 되는 생각과 행위를 악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의 불안과 괴로움을 유발시키고 자신과 전체를 해롭게 하는 생각과 행위를 일반적으로 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선에는 절대적인 선도 있을 것이고 또 상황에 따라 선도 되고 악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절대적인 선이라는 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어느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선이 되어야 합니다.

나만 잘 되고 다른 사람들은 잘못되면 안되겠지요. 나도 잘 되고 다른 사람들도 잘 되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나를 이롭게 하는 만큼 모든 대상도 똑같이 이롭게 할 수 있는 행위가 절대선입니다.

상대선이라 하는 것은 내가 이로운 만큼 다른 사람은 괴로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이익인 만큼 다른 나라는 손해를 보는 이런 행위들은 일반적인 상대선의 가치를 지니는 상대선에 속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절대선이어야 됩니다.

절대선의 바탕은 무엇입니까? 

절대선은 어떤 경우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가르치신 것이 5계입니다. 5계가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대상을 편안하고 이롭게 하는 절대선입니다.

절대선을 추구하는 것은 불교의 계율인 5계의 실천뿐 입니다.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도둑질을 하지 말라. 

음행을 하지 말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술을 먹지 말라. 

이것이 우리가 이 생에서 지켜야할 5계입니다.


상대선 

상대선이라는 것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 상반되는 이익 관계에 있거나 혹은 조직과 국가 간에 어떤 이익 관계에서 일어나는 선입니다.

우리나라 70년 대에는 북한에서 무장공비가 자주 넘어왔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북한에서 무장공비가 넘어왔을 때 잡는 것이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선입니다.

우리나라 이익을 위해서는 무장공비를 잡아야 되고

북한 입장에서는 안 잡혀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장공비를 못 잡으면 악이 됩니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무장공비를 안 잡는게 선입니다.

이와 같이 두 나라의 이익이 상충될 때 이것은 절대선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나라에는 선이 되는 행위가 다른 쪽에서는 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입장에서의 선이 북한 입장에서는 악이 될 수 있고 북한에서는 선이라 하는데 우리가 볼 때는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선악의 개념에서 볼 때 보편적인 개념보다는 좀 더 부분적인 선을 추구하는 상대선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진리, 자비  

진리를 추구하는데 있어 상대선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익을 추구하는데 있어서는 상대선이 필요하지만 진리를 추구하는데 상대선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육도 윤회를 합니다.

지옥중생과 범부, 성인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세요. 99% 잘못해 놓고도 1% 잘한 것으로 자기가 잘했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 바로 지옥중생입니다.

주지는 않고 받기만 좋아하는 중생이 바로 지옥중생입니다.

일반적으로 적당하게 주기도 하고 받는 이런 상황은 범부 중생입니다.

한 단계  올라간 보살은 아예 받을 생각을 안 합니다.

주기만 하고 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보살입니다.

99.9% 잘해놓고도 뭔가 잘못한 것이 없나 고민하는 것이 보살이라고 했습니다.

진리인 무아와 무상을 체득하고 나면 받을 수가 없지요. 줄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자비입니다.

자비가 충족이 되어 완전한 자비가 일어났을 때가 견성성불입니다.

견성성불은 참선 잘 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비로 채울 때 그 속에서 일어나는 빛이 바로 견성성불입니다.

자비가 없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견성성불 할 수가 없습니다.

지혜가 흘러 넘치는 자비에 의해서 연속되는 것이 견성입니다. 


인과의 법칙

우리는 선악의 의미를 생각할 때 인과의 법칙을 떠올리게 됩니다.

인과 법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한 행위를 했을 때 상대방도 선한 행위를 해야 되고 내가 악한 행위를 했을 때 상대방도 악한 행위를 일으켜야 인과가 성립하는데 의지가 있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해도 상대방이 선한 행위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선한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악한 행위로 보면 악한 반응을 보일 것이고 또 반응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의지가 없는 생명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의지가 있는 생명체는 하는 행위마다 어떻게 반응을 할지 아무도 예측을 못합니다.

생명체에 과연 인과법칙이 성립하면 인과법칙이 성립하는 것이고 생명체에 인과법칙이 성립할 지 알 수 없다면 인과법칙이 성립 안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연기의 이론에 맞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연기란 근본적으로 인과응보, 인과 법칙이라 했는데 이 인과법칙이 성립하려면 의지가 있는 생명체에도 똑같이 반응을 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생명현상에도 인과법칙이 성립하느냐? (그림)

일반적으로 의지가 없는 물질에는 어떤 행위를 가하면 똑같은 반응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인과법칙이 성립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돌을 던졌을 때 그 돌이 어느 위치에 갈 것인가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인을 정확하게 알면 정확한 결과를 예측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생물은 원인을 정확하게 알면 일어날 결과를 예측할 수가 있습니다.

의지가 있는 생명체에도 똑같이 작용할 수 있으면 인과법칙이 성립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이라는 중생이 박이라는 중생에게 가하는 작용이 업입니다.

 박이라는 중생이 받는 이것이 바로 과보입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했을 때 상대방이 거기에 대한 응답이 보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기는 인과이며, 인연법이며, 인과응보가 되는 것입니다. 

박이라는 중생의 반응이 예측 가능하다면 인과관계가 성립한다고 할 수 있고 예측이 불가능 하다면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지가 있는 여러 생명체에도 인과관계가 성립 하느냐 안 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선한 행위를 하면 우리는 좋은 과보를 받습니다.

선인낙과입니다. 선한 행위를 했을 때는 즐거운 과보, 좋은 과보를 받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합니다.

반대로 악한 행위를 했을 때는 고통스러운 과보를 받습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대원칙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돈을 만원 줄 때 싫어하는 사람 있습니까?

다 좋아합니다.

내가 한방씩 때린다 합시다.

두들겨 맞는데 좋아 할 사람은 없습니다.

돈 만 원을 공짜로 받았을 때 좋아하는 정도는 다 틀리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좋아하는 것이고 또 한방씩 때렸을 때 거기에 대한 반응은 틀리지만 일단은 전부 다 싫어합니다.

중요한 것은 오계와 같은 절대선을 행했을 때 거기에 대한 반응은 전부 즐거워하고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악한 행위를 했을 때 반응하는 보는 대부분 고통스러워 하고 안 좋아합니다. 거기에 반응하는 정도는 조금씩 틀릴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다 비슷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이루어 수억 겁 동안 살아오면서 다양성과 경우를 거쳐 왔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선한 행위에 대해서는 즐거워하고 나쁜 행위에 대해서는 고통스러워 하고 괴로워한다는 이 전제를 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신의 섭리에 순응한 것이 선일 것이고, 자연 과학 및 철학적 입장에서는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선이며, 불교 입장에서는 정견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이익을 꾀하는 행위가 일반적으로 선입니다.

그래서 6근을 편하고 이익 되게 하는 행위를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합니다.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고 자아의 실현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업을 이루는 행위를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합니다.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자연에 순응하는 6근을 편안하게 하고 이익되게 하는 행위가 비슷하게 맞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인과의 법칙에는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프랙탈이론 

이 세상에는 일어날 일만 일어나는 프랙탈 이론이 불교에서는 인과법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측 불가능한 사건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불자님께서 불교방송국에 오실 때 버스 타고 오셨어요? 택시 타고 오셨어요? 아니면 걸어 오셨어요. 그런데 지난 주에 오셨을 때는 택시 타고 왔다고 합시다. 그 때는 택시 타고 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고 오늘은 걸어 올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져서 걸어온 겁니다. 수만 번 불교방송국에 걸어 갔다 왔다 해도 똑같은 길을 간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버스 타고 올 때도 택시 타고 올 때도 걸어 올 때도 똑같은 길을 똑같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날 그렇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행위로 똑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향을 피웁니다. 향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생각 없이 보았습니다. 가만히 따지고 보니까 바람이 적당하게 불거나 혹은 여기에 많은 사람이 모였는가하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향 연기가 올라가는 방향은 항상 틀립니다.

모든 조건을 따지면 향 연기는 그렇게 밖에 올라 갈 수 없었다는 것이 프렉탈 이론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도 이렇게 밖에 살 수 없구나 하는 것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질 뿐입니다.

프렉탈 이론은 21세기가 풀어야 할 과학적인 인과론입니다.

과학으로 인과론을 푼 것이 프렉탈 이론입니다.

엄밀하게 인과론 자체가 프렉탈 이론입니다. 이 세상에는 예측 불가능한 사건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측 불가능한 사건이 없다는 것은 일어날 일만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예측 불가능 한 것이 없고 전부 다 예측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잘 이해해야 될 것은 숙명론입니다. 전생에 지은 업에 의해서 이 생에 딱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 절대 숙명론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는 죽다 깨어 나도 숙명론은 아닙니다. 끊임 없이 변하고 바뀌는데 결과를 예측 할 수 있다 하는 것은 내가 착한 행위를 하면 거기에 대한 착한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고 나쁜 행위를 하면 나쁜 과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전생에 지은 업에 의해서 나쁜 행위를 할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내가 만약 전생에 나쁜 행위를 했다면 나쁜 행위를 할 수 있는 부분이 꽉 차 있는 것입니다. 부처 성품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행위는 훨씬 더 나쁠 수 있습니다. 나쁜 행위를 할 가능성이 훨씬 더 많지만 의지와 노력으로 나쁜 행위를 절제하고 지향하면 착한 행위 쪽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착한 행위를 하려고 애쓰면 착한 행위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숙명론은 아니지만 선인낙과라든가 악인고라는 근본적인 명제는 맞습니다.


절대선_ 5계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첫째 계율인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어떤 종교에서든지 산 목숨은 죽이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없습니다. 

다른 생명들은 죽여도 좋지만 인간은 죽이지 말라. 하는 상대적으로 살생에 대한 금지는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선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죽이지 말라는 것이 첫째 계율입니다.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고 했을 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외부적인 다른 생명도 산 목숨이지만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도 산 목숨입니다.

궁극적인 산 목숨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죽이지 않을 때 비로소 다른 대상들도 죽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죽이지 말라는 의미는 자신의 삶을 바르게 사는 것이 바로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삶을 헛되이 보내는 것도 바로 산 목숨을 죽이는 것에 속하는 것입니다.  좀 더 궁극적인 의미는 자기 자신을 살리는 것이 모든 것을 살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살리지 않고 다른 생명을 살린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을 살릴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생명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대명제의 궁극적인 뜻은 이 몸을 받아서 이렇게 살아가는 삶을 진리를 추구하는데 철저하게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입니다. 부처님께서 수행하고 계실 때 비둘기 한 마리가 독수리한테 쫓겨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독수리는 나찰이 변한 것으로 부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도망가는 비둘기가 수행하고 있는 부처님 뒤에 숨어버립니다. 독수리는 부처님한테 비둘기는 자신의 저녁꺼리니까 내놓으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가만히 생각하시더니 비둘기 대신 내 살을 떼어가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독수리는 비둘기의 무게만큼 부처님의 살을 먹겠다고 합니다.

부처님과 비둘기가 저울에 올라 무게를 저울질 하는데 부처님께서 신체의 일부분만 저울에 올려놓으니 비둘기의 무게와 맞지 않아 결국 부처님 몸을 다 올려놓으니까 저울이 평형을 이룹니다. 

이것은 비둘기의 목숨이나 사람의 목숨은 똑같이 소중하다는 생명의 존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다른 생명도 죽이지 말아야 하지만 좀 더 본질적인 문제는 자기 자신을 죽이지 말라, 자기 자신을 죽이지 않는 것은 항상 내 삶 자체가 철저하게 진리를 추구하는데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생명체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를 이롭게 하는 것이 바로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입니다.


도둑질을 하지 말라 

둘째 계율인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것은 노력하지 않고서 댓가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청빈하게 살아가는데 우리의 삶은 얼마나 철저한가? 하는 문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그 댓가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행위를 하던 내가 노력한 것만큼 원한다면 잘못 될 것이 없습니다.

대부분 노력한 것보다 많이 요구하니까 항상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다니가비구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니가비구는 관리에게 나라의 목재를 가져다 절을 지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목재를 담당하는 관리는 부처님과 왕이 사전에 이야기가 된 줄 알고 목재를 내어주었습니다. 절을 다 지어놓고 부처님께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니가비구는 거짓말을 하였고 또 나라 물건을 도둑질한 죄를 물어 출가 수행자로서 최초로 퇴출을 당합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다니가비구여, 너는 거짓말과 도둑질 한 죄로 우리들과 함께 수행할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상가가 생기고 나서 최초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욕심이 앞서면 도둑질도 할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음행을 하지 말라 

셋째 계율은 음행을 하지 말라. 우리는 순수하게 살아가는데 얼마나 철저한가!입니다. 

부처님의 경전 내용에 보면 부처되는 성품, 자비의 종자를 종식시키는 가장 나쁜 행위가 바로 음행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음행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경전에 보면 남근을 뱀의 아가리에 넣어줄지언정, 음행은 하지 말라고 부처님께서 강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몸뚱이를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행위들이 애욕과 결부되어있기 때문에  그 애욕을 만들어 내는 행위가 바로 이 음행으로 부터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자비의 종자도 끊고 결국 견성성불 하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음행을 경계한 것입니다.

엄밀하게 음행을 해서는 안되지만 어떤 조직과 관계 속에 살면서 융통성을 가지돼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 

넷째 계율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 정직하게 살아가는데 우리는 얼마나 철저한가?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고 정직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공부는 정직해야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위대함은 바로 정직성입니다.

부처님은 자기 자신한테 철저하게 정직했습니다. 공부의 한 단계를 나아가려면 반드시 정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직함이 모든 공부의 바탕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정직만큼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항상 30분 쯤 참선을 해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한 번 되돌아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술을 먹지 말라 

다섯째 계율은 술을 먹지 말라.

깨끗하게 살아가는데 우리는 얼마나 철저한가?입니다. 

술을 먹지 말라는 것은 단순하게 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독성이 있는 모든 것을 가까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은 물론이고 TV도 포함되고 노래방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집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술을 먹지 말라는 것은 중독성 있는 것에 빠지지 말라는 뜻으로 중독성 있는 것에 빠지면 타락하게 되고 부패하게 되어 결국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멀어지게 됩니다.

절대선인 이 5계를 실천하면 진리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 한 번씩 5계를 읽고 실천을 해야 진리에 가까운 삶을 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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