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원음에 가장 가까운 수행법으로 무애해도가 있습니다.
빠디삼바다막가(무애해도無碍解道, Patisambhidamagga)는 B.C. 250년 경에 성립된 아비달마시대 이전에 성립된 것으로 부처님의 원음이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윗수디막가(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 5세기경 붓다고사(불음,
각음)가 지은 것입니다. 실론의 싱할라어로 된 불교초기 경전들을 토대로 하여
집대성한 논서도 있습니다.
무애해도에서는 신수심법의 사념처를 설명하고 있는데, 신에 대하여 호흡을
통한 알아차림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길게 호흡을 들어 마시면서 들어마신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1) 길게 마시면서 알아차림
(2) 길게 내쉬면서 알아차림
(3) 짦게 마시면서 알아차림
(4) 짧게 내쉬면서 알아차림
호흡하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코로만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숨을
들어 마시는 것을 익힘니다.
(5) 온 몸을 느끼면서 숨을 마시겠노라 익힘
(6) 온 몸을 느끼면서 숨을 내쉬겠노라 익힘
외부적인 자극에 의해서 느끼는 고통과 즐거움의 육체적 현상을
가라앉히면서 숨을 들어 마시는 것을 익힘니다.
(7) 육체적 현상을 가라앉히면서 마시겠노라 익힘
(8) 육체적 현상을 가라앉히면서 내쉬겠노라 익힘
우리는 원래 부처다
우리는 원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회양선사와 마조선사의 이야기에서 마조가 부처 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때 하루는 회양이 확인하러 갑니다. 마조가 공부하고 있는 암자를 찾아가서 보니까 혼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회양선사는 마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날이 어둑해지자 마조가 방에서 나옵니다. 그 때 나이가 많은 스님 한 분이 계시는 것을 보고 ‘스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고 인사를 합니다.
회양 선사는 ‘자네 보러 왔네.’ 한마디 하시고는 돌을 하나 주워 법당 앞에 있는 바위에 갈기 시작합니다. 한참 보고 있던 마조가 스님, 지금 뭐하시고 계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회양선사가 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고 하자 마조가 빙긋이 웃으면서 ‘스님 돌은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안 됩니다. 돌은 돌일 뿐인데 어떻게 거울이 됩니까?’ 라고 합니다.
회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래 그럼 앉아 있다고 부처가 되느냐?’ 라고 합니다. 이 한마디에 마조가 크게 깨우치게 됩니다. 돌은 아무리 갈아도 돌일 뿐입니다. 부처 될 수 있다는 것은 원래 부처였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연기
불교를 믿는다 기독교를 믿는다 하는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기독교를 믿는다 할 때는 절대자인 하느님을 믿으면 됩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성경과 찬송가를 줄줄 외우고 있습니다. 불자들은 어떻습니까? 부처님 앞에 절만 할 줄 알았지 불교에 대해 물어보면 한마디도 못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일단 내가 이해하고 인식을 하고 체득해야만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믿는다는 것과는 관계가 없지만 절에 가자고 했을 때 상대방에게 왜 절에 가야 하는지, 가면 무엇이 좋은 지 설득할 중요한 핵심을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불교에서 믿는다 할 때 무엇을 믿으라 하면 될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였습니다. 그러면 연기를 믿으라 하면 되겠는데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연기라는 것은 너무 막연하고 어렵습니다. 설명을 해도 어렵습니다. 하느님 = 절대자, 전지전능 과 같은 등식이 있으면 되겠습니다. 연기 = 인과응보, 인과입니다. 바로 연기는 인연과의 법칙으며, 인과응보는 이 법칙이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그래서 연기를 믿는다는 것은 인과를 믿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인과를 믿는다고 했을 때 상대방은 인과에 대해 생각할 것입니다.
인과를 한번 알아봅시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골치 아플게 하나도 없습니다. 잘못한 일이나 행동이 있으면 하느님이 용서해준다고 했으니까 용서해달라고 기도를 하면 됩니다.
인과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행한 행동에 대한 그 과보를 내가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에게만 인과가 있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인과가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과는 믿고 안 믿고의 문제와는 관계없이 누구에게 한결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믿든 안 믿든 인과는 그대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인과는 모르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는 것이 좋겠습니까? 분명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릇의 물이 뜨거운 줄 모르고 마시면 입을 뎁니다. 그러나 뜨거운 것을 알고 조심해서 마시면 입을 데지 않습니다. 인과도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 큽니다.
이왕 인과가 있다면 모르는 것보다 알고 대비하는 것이 더 났겠지요. 모를 때는 끝도 없이 계속되지만 알게 되면 바른 길로 돌아서려고 노력하고 결국 바른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사염처관(四念處觀) (그림)
부처님은 연기를 가르치면서 체득할 수 있는 수행 방법도 설명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수행방법이 바로 사염처관(四念處觀)입니다. 사염처관을 통해 연기를 체득 할 수 있고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부처님께서 구로국 캄마에 계실 때 대염처경을 설하십니다. 대념처경에서 설한 사념처, 즉 네 곳을 생각하라 했을 때 먼저 신(身)입니다, 우리의 몸입니다. 나하고 가장 가깝고 나와 더불어 같이 있는 것이 몸뚱이입니다. 멀리서 찾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뚱이부터 한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누구에게나 끊임없이 정신 작용이 일어납니다.
수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감수 작용을 한 번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몸뚱이와 감수작용을 포함한 마음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몸뚱이와 관계있는 나 자신을 관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 살펴보아라.’는 것입니다. 대상을 살펴보는 것은 법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첫째 자신의 몸뚱이를 살펴보고 둘째 몸뚱이가 어떻게 둘러 쌓여 있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셋째 몸뚱이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느낌이나 감수 작용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한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탐심을 일으키고 어떤 순간에는 진심을 일으키고 화내는 마음을 일으키는지 마음을 잘 살펴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대상인 법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살핌으로써 연기를 터득하고 진리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염처관은 우리의 몸뚱이와 감수 작용과 마음과 법인 네 가지에 대하여 관찰하는 것입니다. 관찰을 통하여 끊임없이 정진하고 바른 생각 바른 지혜로써 허욕과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 먼저 몸을 관찰하고
수, 감정과 느낌을 관찰하고
심,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관찰하고
법, 나와 대상의 관계, 대상과 대상의 관계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신
첫째 몸(身)을 관찰하는 것인데 부처님께서는 대염처경(大念處經)에 자세하게 설명해놓았습니다. 우리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합니다. 숨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참선할 때 기본적으로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숨 고르기입니다. 숨이라는 것은 안의 세계와 밖의 세계를 연결시킵니다. 숨을 쉬는 호흡을 통해 들이쉴 때는 바깥에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기운을 들어마시는 것이고 숨을 내쉴 때는 내 속에 있는 맑고 깨끗한 기운을 우주의 끝까지 내보내는 것입니다. 나와 대상과 우주와 교합 할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숨을 통해서 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숨에 대해서 관찰해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숨을 내쉬고 숨을 들이쉴 때 혹은 숨을 짧게 쉬고 숨을 길게 쉬고 하는 이런 것들이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정신통일을 하게 되고, 또 숨을 통해서 육신이 훨씬 더 건강해지고 좋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몸의 동작에 대해서 관찰해 보라는 것입니다. 피곤하면 누워서 좀 게으름을 피우고 다리가 아플 때는 쉬면서 다리를 풀기도 하고 주무르기도 합니다. 게으름을 피워 누웠을 때 내 육신을 한번 살펴보고 또 포행을 할 때 육신을 한번 살펴보고 관찰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하루 생활하는 전부를 관찰해보라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생활을 관찰해 보고, 몸의 안팎에 대해서 관찰해보면 몸 안에는 오장육부도 있고 피도 있고 골수도 있고 내장도 있고 똥, 오줌도 있습니다.
우리가 먹은 음식은 몸속에서 소화되어 흡수되기도 하고 바깥으로 배설되기도 합니다.
죽으면 썩을 몸에 대해서 관찰해보라는 것입니다. 이 몸이 죽어 있는 상태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죽고 나면 흩어질 몸인데 온갖 애착을 가집니다. 지금은 옆에 있는 사람이 좋지만 죽은 후에도 좋다고 곁에 보관해 둘 수 있겠습니까?
죽어 지수화풍으로 돌아가고 남아 있는 것은 해골 뿐 입니다. 해골에 대해서 관찰해보고 또 부서진 뼈를 통해서 이 몸뚱이에 대한 집착과 애욕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이 몸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는데 관찰해보니까 몸뚱이는 결국 썩어 없어지므로 애지중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몸에 대한 바른 관찰을 통해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신, 몸에 대한 관찰입니다.
그 생각을 계속함으로써 이 몸뚱이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지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방법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지금보다 집착이 덜 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르게 살기 위해서 결국 이 몸에 대한 집착, 생각에 대한 집착,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연기의 세계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모든 것을 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는 바로 집착입니다. 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아집과 애욕이 생겨 모든 것이 생깁니다. 집착하면서 몸을 가꾸는 것하고, 집착에서 자유로우면서 몸을 가꾸는 것은 다릅니다. 집착에서 벗어난다해서 이 몸을 함부로 해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몸이 없으면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나가세나 존자와 밀린다 왕의 문답 속에서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나가세나 존자여, 당신은 몸에 상처가 나면 왜 상처를 싸 메느냐?’ 라고 밀린다 왕이 묻습니다. 나가세나 비구가 ’대왕이시여 상처가 귀하고 소중해서 싸매고 약을 바르는 것이 아니라 약을 바르고 상처를 싸매는 것은 몸을 낫게 하고 잘 보존하여 제대로 수행 정진하기 위해서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은 몸뚱이를 함부로 해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건강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집착하지 말라하는 것과 몸뚱이를 함부로 하는 것이 틀리다는 것을 이해해야겠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하는 그 실상을 사실대로 관찰하여 그 사실들이 눈앞에 나타나면 세상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몸에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은 세상 어떠한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는 그 가르침을 이 몸을 통하여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수
둘째 수, 몸과 마음이 감수작용 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몸에 자극이 오면 즐겁거나 괴롭거나 혹은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세 가지 느낌이 일어납니다.
몸이 괴로울 때는 내 몸이 괴롭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그것을 앎으로써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이 논리는 즐거움을 느낄 때는 즐겁다는 것을 알고 괴롭거나 즐겁지 않을 때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을 알아야합니다. 내가 감기에 걸렸을 때 감기 걸린 것 때문에 몸뚱이도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왜 감기에 걸렸을까 생각하면 원인도 알게 되고 감기를 관찰함으로써 감기 때문에 괴롭다는 것을 이해하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몸과 마음으로 쫓아 일어나는 괴로움이나 즐거움이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이 세 가지 감수를 여실히 관찰하고 또한 어떤 사람의 감수작용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되 그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고 또 그 작용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합니다. 그러니까 그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을 내가 살펴보고 관찰하면 그 관찰을 통해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면 감수가 수시로 변화하여 고정된 괴로움이나 고정된 즐거움이 없어집니다.
내 생각 속에 일어났던 괴로움도 즐거움도 영원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 알게되고 느끼게 됩니다. 감기가 걸려 괴롭더라도 그것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임을 알고 약을 먹고 견디면 감기가 떨어지고 다시 건강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정된 즐거움이 없음을 알게 되면 세상의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수를 관찰함으로써 이 세상에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아가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이 감수작용을 제대로 관찰함으로써 그런 마음에 도달하게 되고 내 자신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사념처관(四念處觀)은 자신에 대한 집착,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뜻입니다.
집착에서 자유로울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 일에 대해 자유로워집니다. 집착이 모든 것을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라는 것을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것입니다. 우리 몸을 생각하고 감수작용을 생각함으로써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애해도에서 수에 대한 느낌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9) 기쁨을 느끼면서 마시겠노라 익힘
(10) 기쁨을 느끼면서 내쉬겠노라 익힘
(11) 즐거움을 느끼면서 마시겠노라 익힘
(12) 즐거움을 느끼면서 내쉬겠노라 익힘
(13) 정신적 현상을 느끼면서 마시겠노라 익힘
(14) 정신적 현상을 느끼면서 내쉬겠노라 익힘
(15) 정신적 현상을 가라앉히면서 마시겠노라 익힘
(16) 정신적 현상을 가라앉히면서 내쉬겠노라 익힘
마하시 사야도
마하시 사야도는 사미 때부터 『대념처경』의 7년 혹은 7일 동안 수행을
하면 아라한 아니면 아나함이 된다는 가르침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증지부의 『칼라마경』에 제시된 스스로 확인한 진리만을
받아들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수행을 통한 개인적인 체험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수행을 하려는 사람은 많은 수행법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마하시 사야도는 마음챙김을 통한 통찰수행(사띠팟타나 위빠사나)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마하시 사야도는 28세가 되던 1932년, 타톤의 밍군 사야도에게 수행 지도를 받았습니다.
마하시 사야도는 4개월 동안 한 잠도 자지 않고 수행에 몰두하였습니다. 잠을 자지 않고 몸이 건강했던 이유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 념念, 택법擇法, 정진精進, 희喜, 경안輕安, 정定, 사각지捨覺支)를 경험하면서 마음이 정화되었고, 마음의 정화에 의해서 육체가 정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념처경”은 모든 삶의 깨끗함을 위하여,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정신적인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해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하여
심, 수, 심, 법에 마음을 챙겨 관찰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념처경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위빠사나를 세계적인 수행방법으로
확립하게 됩니다.
위빠사나(Vipassana)에서
위(Vi)는 접두어로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 가지의 의미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제법이며, 제행무상
諸行無常의 제행이며,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일체를 의미합니다.
빠(Pa)는 '자세히, 면밀히‘의 뜻이며, 사나(Ssana)는 '꿰뚫어 관찰한다‘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는 여러 가지를 면밀히 꿰뚫어 관찰한다의
의미입니다.
안반수의경
비구들이여, 삼매를 닦을 지어다. 비구들이여, 삼매에 든 비구는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린다(pajānāti).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어떠한가?
눈(眼)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시각대상(色)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눈의 의식(眼識)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눈의 접촉(觸)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눈의 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즐겁거나 고통스럽거나 즐겁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느낌(受)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부처님께서는 호흡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인 안반수의를
설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월지국의 사기유국에 머무실 때입니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앉아서 안바수의를 90일 동안 행하셨습니다. 다시 90일을 홀로 앉아 생각을
가다듬어, 온 세상의 모든 인간과 날아다니는 새와 굼틀대는 동물을
구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안반수의경은 안세고가 번역하였으며, 대장경 신수장 15권 P163, No 602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산스크리어로 아나파나사티 anapanasati라 합니다.
ana – 들숨이며, apana – 날숨이며, sati – 의식의 집중입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안반수의입니다.
안은 생명의 창조가 되고, 반은 그치는 것이 됩니다. 수의는 잘못되지 않게
하는 것이니 그것은 되어진 그대로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보호한다는 것은
일체의 것이 잘못되지 않도록 두루 지키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의식이 한
곳에서 쉬고 있는 것이니, 또한 마음의 본래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안은 생하는 것이 되고, 반은 멸하는 것이 되며, 마음은 인연이 되고 수는
도가 됩니다.
안은 수를 헤아림이 되고, 반은 서로 따름이 되며, 수의는 그치는 것입니다.
안은 도를 생각하는 것이 되고, 반은 맺힘을 푸는 것이 되며, 수의는 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안은 죄를 피하는 것이 되고, 반은 죄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되고, 수의는 도가 됩니다.
심
셋째 마음에 대한 관찰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탐욕 아니면 진심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탐욕과 진심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탐욕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과 사람에 대한 탐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진심은 감정에 대한 탐욕입니다.
탐욕과 진심이 우리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탐심과 진심의 뿌리는 치심입니다. 마음에 탐심이 일어나면 아! 이것이 탐심이구나. 좋은 물건이 있어서 갖고 싶은 마음을 일으켰을 때 이것이 탐심임을 알고 내 것을 만들고 싶을 때 그것이 탐심이구나. 생각하고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으로 하고 싶으면 돈 주고 정당하게 사야겠다.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탐심을 여의면 여윈 줄 알게 됩니다. 화내는 마음은 감정입니다. 진심이 일어나면 이것이 진심이구나. 화내는 마음이 일어나면 이것이 화내는 마음이구나 하고 알고, 화내는 마음이 사라지면 화내는 마음을 여윈 줄 알면 됩니다.
감정이 잘못되었을 때 감정이 잘못되었다 인식하고 포기하고 가라앉히게 되면 여윈 줄 압니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마음, 뒤바뀐 마음, 넓은 마음, 좁은 마음, 고요한 마음, 산란한 마음, 해탈한 마음, 해탈하지 못한 마음 등을 낱낱이 관하여 또한 안팎으로 관하여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관하고 또 마음이 사라지는 것을 관하여 눈앞에 대하듯 하면 세상의 집착도 놓아 버리게 됩니다. 결국 몸과 감수작용을 관찰함으로써 집착을 놓아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집착은 크게 두 가지인데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 과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상에 대한 집착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집착을 하지 말라고 계속 가르치고 계십니다. 마음을 관하는 법도 결국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고 집착을 놓아버리게 하는 법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애해도에서 심에 대하여, 느낌을 통한 익힘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7) 마음을 느끼면서 마시겠노라 익힘
(18) 마음을 느끼면서 내쉬겠노라 익힘
(19) 마음을 즐겁게 하면서 마시겠노라 익힘
(20) 마음을 즐겁게 하면서 내쉬겠노라 익힘
(21) 마음을 모으면서 마시겠노라 익힘
(22) 마음을 모으면서 내쉬겠노라 익힘
(23)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마시겠노라 익힘
(24)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내쉬겠노라 익힘
무애해도에서 법에 대하여 인식을 통한 익힘은 다음과 같습니다.
(25) 무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마시겠노라 익힘
(26) 무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내쉬겠노라 익힘
(27) 탐냄을 떠나 따라가며 보면서 마시겠노라 익힘
(28) 탐냄을 떠나 따라가며 보면서 내쉬겠노라 익힘
(29) 소멸을 따라가며 보면서 마시겠노라 익힘
(30) 소멸을 따라가며 보면서 내쉬겠노라 익힘
(31) 버리고 따라가며 보면서 마시겠노라 익힘
(32) 버리고 따라가며 보면서 내쉬겠노라 익힘
법
넷째는 법에 대한 관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섯 가지 장애물에 대한 관찰, 다섯 가지 요소에 대한 관찰, 열두 가지 대상에 대한 관찰, 일곱 가지 깨달음에 대한 관찰, 네 가지 진리에 대한 관찰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진리는 고, 집, 멸, 도, 사성제입니다. 다섯 가지 요소는 오온이 있습니다. 열두 가지 대상에는 12연기가 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관찰함으로써 집착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 가지 깨달음에 대한 고찰은 37조도품의 내용 중 7각분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첫째 택법각분은 지혜로 모든 법을 살펴서 선한 것을 골라내고, 악을 버리는 것입니다. 둘째 정진각분은 가지가지의 수행을 할 때 쓸데없는 고행을 그만두고, 바른 도에 전력하여 게으르지 않는 것입니다. 넷째 제각분은 그릇된 견해나 번뇌를 끊어버릴 때에 능히 참 되고 거짓됨을 알아서 올바른 선근을 기르는 것입니다.
다섯째 사각분은 바깥 경계에 집착하던 마음을 여윌 때에 거짓되고 참 되지 못한 것이 마음에 일어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여섯째 정각분은 선정에 들어 번뇌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일곱째 염각분은 불도를 수행할 때 잘 관찰하여 정과 혜를 고르게 하는 것입니다.
다섯 가지 장애물에 대해 한 번 살펴봅시다. 다섯 가지는 탐심을 관찰하라, 성냄을 관찰하라, 의혹을 관찰하고 소란한 마음과 혼침한 마음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애가 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데 장애가 되고, 바른 생각에 장애되는 다섯 가지로 마음의 상태에 따라 관찰하는데 탐욕이 일어나면 내 마음속에 탐욕이 있는 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 마음 속에 탐욕이 일어났으면 그 탐욕이 일어난 것을 알면 탐욕을 소멸 시킬 수 있습니다. 관찰한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관찰을 통해서 있는 것을 관찰하면 스스로 그것을 해결하게 만듭니다. 알고 나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가르쳐만 주었습니다. 가르쳐 주면 알게 되고 그 다음 단계는 스스로 해결합니다. 이것이 세세생생 마음을 닦아야 할 방법입니다. 바로 위빠사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음을 관조하고 내 마음에 탐욕심이 일어났으면 탐욕심이 있는 줄 알고 탐욕심을 일으켰다가 그 탐욕심이 사라지면 탐욕심을 여윈 줄 알고 또 탐욕스러운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그런 마음이 잘못됐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이미 탐욕이 일어났을 때에는 탐욕심이 없는 것으로 관찰하고 이미 없어진 것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냄도 의욕도 소란함도 혼침한 마음도 탐욕심과 같이 다섯 가지 마음으로 생각함으로써 성냄과 의욕과 소란한 마음과 혼침한 마음에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안으로 관찰하고 밖으로 관찰하여 일어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이 명료해지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방법입니다. 알게하고 스스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해결은 스스로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알면 바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몸과 수와 마음과 법에 관한 네 가지 관찰입니다.
화가 났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왜 화가 났는지 화가 나 있는 상태를 관찰함으로써 그 화를 스스로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화는 그냥 내버려두면 어디까지 갈지 알 수 없습니다. 엄청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화가 났을 때 그 화를 관찰하면 가라앉힐 수 있고 평화롭고 좋은 방향으로 해결 될 수가 있습니다.
사염처관은 이제까지 공부한 연기를 터득해가는 방법입니다.
내 몸뚱이를 닦아야 하고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르게 살아야 하는데 몸뚱이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있으면 제대로 바른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금강경에서 가르치는 공은 아무것도 하지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행위를 하되 그것에 대한 결과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그 집착하지 않은 자리에 끝없는 자비심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연기에 대한 인식으로 무상과 무아를 제대로 알고 존재의 본질에 대해 알면 끝없이 자비심이 내 속에서 충만된다는 것입니다.
사념처관을 통해서 집착을 벗어남으로써 집착이 있던 자리에 자비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자비가 충만되는 만큼 행함에 대한 과보도 결과도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행위 자체가 바로 빛이 되어 자비광명이 되는 것입니다.
사염처관은 부처님 당시 부처님과 더불어 공부했던 많은 제자들에게 매일 가르쳤던 내용들이며, 이것을 통해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사염처관으로 일 년 이상 열심히 수행하면 보살 성문 혹은 연각이 된다고 했습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중생들의 죄악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 근심과 슬픔에서 건져내고 괴로움과 번민을 없애며 정법을 깨달아 열반을 증득하기 위한 유일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염처관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염처관
우리가 지금 수행하고 있는 모든 것의 방법은 이 사염처관으로 부터 나옵니다. 사염처관의 기본 골격은 관조하는 것입니다. 살펴보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의 상태도 관찰하고 내 마음의 상태도 관찰하고 내 몸 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정신작용들도 관찰하고 대상이 되는 것도 관찰해서 제대로 한번 살펴보라 하는 것입니다.
사염처관을 지속적으로 하면 보살이 된다고 했습니다.
사염처관 자체를 인식하고 깨닫는 것이 위빠사나고 이것을 지속적으로 하면 사마타입니다. 결국 모든 공부는 위빠사나와 사마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가능한 것입니다. 견성성불 하려면 위빠사나와 사만타는 실과 바늘과 같이 동시에 따라다니게 됩니다. 위빠사나만 있고 사마타가 없다면 지혜는 있는데 사랑이 없는 것과 같으며, 또 위빠사나는 없고 사마타만 있다하면 이것은 절구통 앉혀 놓은 것과 똑 같습니다.
공부하여 성성적적하기 위해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둘 다 되어야 합니다.
절구통이 앉아 있어도 이 생명체가 끊임없이 활동하고 살아있어야 합니다. 절구통 같으면서도 성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이 위빠사나는 소란한 현상계의 움직임 속에서도 적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부처님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염처관의 내용은 내 몸뚱이와 감수작용과 마음과 법을 모두 관찰하고 지속적으로 관조하는 것입니다. 관찰을 지속적으로 함으로써 부처의 세계를 이룰 수 있고 부처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연기를 스스로 인식하고 체득하는 것이 사염처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염처관을 하면 기본적으로 생기는 속성인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와 대상이 가지고 있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사염처관의 속성입니다.
집착이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자비가 충만되니까 빛, 광명이 생기게 되고 바로 연기를 터득하게 됩니다. 사염처관을 통해서 스스로 연기에 도달하고 연기를 체득하고 연기에 나아간다고 가르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