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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제 22강 무엇이 정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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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1,782회 작성일 21-07-09 18:41

본문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합니다. 지혜는 부처님께서 깨치신 연기입니다. 그리고 자비는 연기의 내용인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고 나면 생기는 것입니다. 지혜의 속성은 연기이며, 무아와 무상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에게 쌓이는 그 능력이, 성품이 자비입니다. 


자비광명 충만하신 

부처님을 이야기할 때 자비광명이 충만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지혜복덕을 구족하신 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말이 얼마나 묘합니까. 자비와 광명을 이야기할 때 자비가 먼저 나오고 광명이 뒤에 나오는데, 광명이라는 것은 자비로부터 발산되는 빛입니다. 깨치고 나면 존재의 본질적인 성품이 자비임을 알게 됩니다. 그 자비로부터 솟아나오는 빛이 지혜 광명입니다. 

연기를 깨치고 나면 복덕을 구족하게 됩니다. 견성을 하고 지혜는 생기는데 복덕이 없는 분도 있습니다. 박복한 분도 있을 것이고 부처님 같이 지혜와 복덕을 두루 갖춘 분도 있습니다. 

 

정법의 속성 (그림)

정법의 속성은 해탈과 자비입니다. 해탈이 깨달음이며 깨달았기 때문에 연기와 결부되는 내용이 자비입니다. 연기를 깨치므로 내속에 충만된 성품이 자비가 됩니다. 결국 불교를 제대로 알고 나면 이 육신은 해탈과 자비의 덩어리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로 볼 때 해탈은 진정한 자유입니다. 깨달은 사람을 도인이라 하여 대자유인이라고 표현합니다. 해탈이란 진정한 자유이며 자비란 진정한 평등을 말합니다. 무아를 인식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무아의 근본 내용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나라고 하는 독립된 실체는 없으며, 서로 연관되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실체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한 덩어리가 될 때 평등이 됩니다.


정법은 개인적으로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추구에 맞아야 하며 나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도 모든 생명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에 기여하는 것이라야만 합니다. 정법이란 나와 남을 전부 다 이롭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지혜를 심화시키기 위해서는 위빠사나와 사마타를 해야합니다. 해탈을 이루고 있는 두 가지 속성은  위빠사나와 사마타입니다. 해탈하기 위해서 정념을 해야 하고 정정을 해야 합니다. 


자비의 터득 

절제된 계율의 실천과 모든 존재의 생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봉사에 의해서 자비가 쌓입니다. 조건 없는 베품이 자비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이 손을 평생 갖고 다녀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손에 무엇을 들고 다닌다고 생각해봅시다. 조금 들고 다니다보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아니면 다른 곳에 두고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손은 내것이기 때문에 잊어버릴 염려가 없습니다. 바로 자비란 내가 착한 일을 하고 보시를 했을 때 그냥 베풀 뿐입니다. 보시를 한 번 할 때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합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할까 말까 망설입니다. 세 번 네 번으로 넘어가면 하기가 싫습니다. 바로 생각이 일어남과 동시에 행동이 일어나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런 마음일 때 내속에 자비가 충만됩니다. 절제된 생각과 무조건적인 봉사에서 생기는 것이 자비심입니다. 무아와 무상을 인식함으로써 생깁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비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공부를 할 수가 없어요. 끝없는 자비만이 우리로 하여금 부처되게 하는 씨앗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지혜, 해탈의 속성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어떻게 설명하셨는지 한 번 살펴봅시다.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 마가다국의 대신 밧사카라가 찾아옵니다. 죽림정사는 불교의 최초의 정사로써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께서 전도하고 유행하면서 머물 곳이 없는 것을 보고 부처님을 위해서 마련해준 최초의 절입니다. 이 죽림정사에 계실 때 마가다국의 대신 밧사카라가 찾아옵니다. 밧사카라는 부처님께 이야기합니다. 바라문은 4가지 자질을 갖추었을 때 지혜 있는 위대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희 바라문은 지혜있는 자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베다의 내용을 이해하는 학문적 능력과 베다의 내용을 잘 암기하여 바로 생각해내는 좋은 암기력과 집안 일에 밝으며 부지런한 성실성과 재력이 있으며 모든 일을 바르게 잘 처리하는 추진 능력을 갖춘 사람을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 합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밧사카라와의 대화 

부처님이 밧사카라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있는 사람인가? 하시면서 밧사카라에게 말하십니다. 그 사람은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자신만의 안녕 뿐 아니라 존재하는 많은 사람의 행복을 함께 추구하는 사람이며, 사람들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올바른 길을 선택하고 공덕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의 삶에 바른 지표가 될 수 있을 때 지혜를 갖춘 사람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김구라든지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을 생각하면 그런 분의 삶이 표상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올바르게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공덕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 지혜라고 하십시다. 자기 자신이 전념하고 싶은 부분에 힘써 정진하고 잘 할 수 있는 부분에 전념을 하며, 가치가 없는 일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치가 없는 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완전하게 조복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부처되기 위한 조건 

부처님께서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깊은 자기 성찰에 의한 관조의 능력이 성숙되어야 합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원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불교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관조입니다. 관조의 능력이 성숙되어 있는 사람이 지혜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 번뇌가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다. 모든 번뇌는 탐심, 진심, 치심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번뇌이고 나누어져 108번뇌가 되고 팔만사천번뇌가 됩니다. 

셋째 번뇌의 소멸에 의해 마음이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 있기 때문이며, 

넷째 지혜에 의해서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갖추어진 사람은 지혜로우면서도 거룩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정념과 정정은 지혜롭게 지극하게 살아가는 위대한 삶의 지침이 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다 들은 밧사카라 바라문은 부처님이시여  당신은 지혜있는 사람에 대해서 정확하게 표현하시고 잘 가르쳐 주십니다. 라고 감탄하면서 불교에 귀의하게 됩니다. 


자비와 평등 

부처님께서 사위성의 기원정사에 머물러 계실 때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예를 들어서 자비를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땅에 구멍을 팠다고 땅이 화를 낼까? 허공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일까? 갠지즈강에 불을 지를 수 있을까?” 그 당시 예를 들 수 있는 상황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아닙니다. 땅은 화를 내지 않으며 허공에 어떻게 색칠을 하며 어떻게 갠지스강에 불이 나겠습니까?” 하고 대답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쁜 정념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마음에 품어서는 안된다.” 정념은 관조하는 것, 깊이 골똘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른 정념을 하되 나쁜 정념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대지가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갠지즈강이 불을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는 것처럼 그대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모멸과 부정을 견디고 어떠한 상대에 대해서도 자애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결국 자비란 기쁜 것도 함께 기뻐하고, 슬픈 것도 함께 슬퍼하는 것이 자비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자애하는 마음이 자비이고 평등이라는 것입니다. “자애는 영원히 흘러야 한다. 자기 자신을 대지와 같이 묵묵히 유지하고 공기와 같이 맑고 갠지즈강처럼 깊게 유지하라.” 투명한 공기와 같고 맑고 청청하고 깨끗하게 갠지즈강의 강물처럼 깊게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자애하는 마음은 흔들리지 않으며 적대하는 마음도 사라질 것이며 자애하는 마음이 강물처럼 흐를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자비와 평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귀족집 마님의 자비

 부처님께서 예를 하나 듭니다. 어떤 귀족집 마님이 한 번도 성을 내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온화하고 좋습니다. 하녀는 정말 우리 주인마님이 진정한 자비심으로 충만하여 화를 안내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렇게 보일 뿐인지 한번 시험해보기로 하였습니다. 하녀는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성실합니다. 하녀가 이렇게 부지런하니까 주인마님이 화를 낼 일이 없습니다. 시험을 하느라고 다음날 아침에 늦잠을 잤습니다. 당황한 주인이 늦잠을 잔 상황을 이해를 못합니다. 한 번도 늦잠을 잔 적이 없으며 부지런히 청소를 했는데 주인마님이 일어난지 한 시간 후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한 번은 그냥 봐줍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늦잠을 잡니다. 첫날은 문제가 없었지만 둘째 날에는 ”네 멋대로 하는 아이구나.“하고 나무랐으며 셋째 날은 막대기로 그녀의 머리를 쳤다고 경전에 나옵니다. 결국 주인마님은 자기에게 손해가 안 되니까 온화하고 순하게 보였는데 손해가 되니까 본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주인이 가지고 있는 그런 온화한 마음은 자비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고귀함은 태어남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바셋타여, 인간이 고귀한 것은 바라문으로 태어나서 고귀한 것이 아니라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처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 가장 높은 이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른 생각과 평등한 봉사이지 고귀한 태생이 아닙니다. 계급도, 불평등도 우월도, 열등도 없이 태어남에는 모두 평등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자신과 같이 보거라 남이 그러하면 자신도 그러하고 자신이 그러하면 남도 그러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평생 사성제계급을 타파하고 무너뜨리는데 앞장을 섭니다.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그 당시에는 사성제 계급이 타파되었습니다. 그 당시 부처님도 출가하는 제자들도 신분의 차이에 의해서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출가시기에 의해 순서대로 형님, 아우가 되었던 것입니다. 수드라 계급도 승가에서는 바라문 계급과 같이 평등한 것입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계율 제일은 우바리입니다. 우바리는 부처님 집안의 이발사였습니다. 부처님의 사촌이 모두 출가하겠다고 부처님한테로 몰려갑니다. 우바리도 아! 이렇게 있어서는 안되겠다. 나도 출가해서 도를 닦아야겠다고 부처님전으로 달려갑니다. 우바리가 하루 먼저 출가를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의 사촌들이 와서 보니 우바리가 자신들보다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사촌들은 우리가 어떻게 우바리한테 형님이라고 부르겠느냐고 하면서 우바리보다 늦게 출가할 수 없다고 자신들을 우바리보다 먼저 스님 만들어달라고 부처님께 간청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출가는 오는 순서대로 결정되는 것이지 계급도 신분도 아무 소용없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하기 싫으면 가라고 합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철저하게 계급타파를 하셨습니다. 


인과응보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 했을 때 연기를 믿는 것입니다. 연기는 믿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것입니다. 인과응보를 믿고 인과법칙을 믿고 인연과 법칙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이해시킬 수 있고 자기 자신도 불교를 잘 알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됩니다. 인과를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내용은 업입니다. 인과는 어떤 행위를 하고 나서 그 행위에 대한 당연한 결과를 받는 것이 업보입니다. 내가 행한 행위가 업이고 보는 행위에 의한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인과는 연속성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업보의 기본적인 속성은 연속성과 보복성입니다. 여기서 연속성이라 했을 때 인과란 엄밀하게 인연과입니다. 인연과에서 인은 삶의 주체 즉 내가 바로 인입니다. 연은 나 외에 대상이 되는 모든 연입니다. 주체인 내가 인이고 연은 대상이 됩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날자 배가 떨어졌는데 나무에 둥지를 틀고 있던 꿩이 떨어지는 배를 맞고 죽었다고 합니다. 다음 생에 까마귀는 사슴으로, 꿩은 산돼지로 태어나고 산 위를 가고 있던 산돼지의 발에 돌이 걸려 굴러 떨어집니다. 그 때 산 아래 풀을 뜯고 있던 사슴이 그 돌에 맞아 죽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과는 되풀이됩니다. 인과 연에서 내가 인이었고 대상이 되는 것은 연이었는데 인의 입자에서는 연속성이고, 연의 입장에서는 보복성입니다. 


에드가 케이시의 전생 레코드 리딩법 

전생과 윤회에 대한 인식으로 에드가 케이시가 최면술을 이용해서 전생으로 우리들을 인도합니다. 1800년대에 살았던 에드가 케이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어서 인식시킨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최면술을 걸어서 객별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알아내어 다른 사람의 전생을 알아내는 아카샤 레코드 리딩을 개발합니다. 아카샤 레코드 리딩이란 이 우주에 전생의 저장창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전생의 저장창고에 각자의 전생이 저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전생의 저장창고에 저장된 전생을 최면을 걸어 자기의 전생을 알게 하여 이야기 하도록 합니다. 아카샤 레코드란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 고유 주파수가 있어 주파수만 맞추면 그 사람의 전생을 최면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면에 대한 일대혁명을 일으킨 전생에 대해서 최고의 권위자로 평생을 활약한 사람입니다. 지금 우주에 저장되어 있다는 아카샤가 우주가 아니라 최면상태에서 뇌에서 발생한 알파파가 자기 자신의 염력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라디오 TV의 주파수를 맞추듯이 주파수를 일치시켜 전생의 삶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전생도 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김대성의 전생 

신라시대 김대성은 경주 모량리의 가난한 여인 경조의 아들이었는데 경조는 흥륜사의 점개 스님에게 그의 전 재산인 논두마지기를 시주하고 죽게됩니다. 그날 밤 신라 김문량의 아내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게 되고, 아이가 손을 펴지 않고 있다가 7일 만에 펴는데 손바닥에 大成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후에 현생의 부모(김문량)을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고 전생의 부모(모량리 경조)을 위하여 석굴사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 불국사와 석굴암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핸리포드의 윤회에 대한 믿음 

핸리포드는 ”내 나이 26세때 윤회를 인정했습니다. 천재는 경험에서 오는 것입니다. 천재를 천부의 재능이나 능력을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수 많은 생애를 살면서 쌓아온 오랜 경험의 소산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핸리포드의 전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소가 사람들의 물건을 지어 나르고 말이 사람들을 태워 나르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핸리포드는 왜 짐승들이 무거운 짐을 나르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결국은 이 생에 그로 하여금 차를 만들게 하여 사람들이 말을 타지 않아도 되게 하였으며 소들이 짐을 지지 않아도 되도록 하였습니다. 전생에 했던 생각들이 자동차를 만들게 합니다. 짐승들을 위해주는 마음이 결국 차를 만들게 합니다. 


응보는 보복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착한 일을 했을 때 끊임없이 착한 행위쪽으로 흘러갑니다. 이 생에서 내가 착한 행위를 했을 때 다음 생에서도 착한 일을 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인과의 연속성은 내가 이 생에서 열심히 공부했다면 그 공부했던 것을 바탕으로 다음 생에 더 잘 공부할 수 있는 조건을 받아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반복할려는 연속성은 인이 갖고 있는 속성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공부하려고 하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은 나쁜 일을 하려고 합니다. 결국 자신의 행위 때문에 지옥 불구덩이로 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인의 연속성입니다. 이와 같이 인은 한 가지 행위를 지속적으로 할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복성은 연이 가지고 있는 속성입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발로 돌을 찼는데 그 돌에 마침 지나가던 소가 맞았습니다. 그 소는 돌에 맞아 다리를 다쳤습니다. 다음 생에 이 소가 다시 소의 몸을 받든지 내가 인간의 몸을 받아서 이 소가 우연히 낮잠을 자고 있는 내 다리를 밟고 지나갑니다. 이런 것이 바로 보복성입니다. 연은 자신이 당한 만큼 돌려주는 보복성을 갖고 있습니다. 인과의 문제가 결국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바탕입니다. 인과를 믿느냐 하는 것은 윤회의 문제도 포함이 되는데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유전자에 대한 연구 

연기의 구조적 문제와 미세한 부분을 이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는 인과법칙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닫기 위해서 인과를 믿어야 합니다. 부지런히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이 생에 받은 이 몸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부지런히 애쓰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애쓰고 노력하는’ 말보다 더 아름다운 말은 없습니다. 부지런히 애쓰고 노력하는 만큼 행복한 삶이 이루어집니다.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일어나서 30분 공부하는데 있습니다. 인과를 믿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인과에 대한 중요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유전자에 대한 연구도 다른 것이 아니라 인과였습니다. 1996년에 시아노 박테리아의 유전자를 풀어보니까 거기에는 40억 년을 살았던 박테리아의 역사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전생과 인과가 고여 있었던 것입니다. 


인과와 확률 

2600년 전에 부처님께서는 인과에 대해서 인식구조론을 완벽하고 명쾌하게 풀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불자들은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 해도 부처님처럼 인간의 인식론에 대한 가르침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식론의 바탕은 존재에 대한 인식의 출발이 결국 부처님의 깨달음인 연기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연기는 존재에 대한 속성과 법칙을 명쾌하게 풀어놓은 것입니다. 거시적으로 볼 때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현상은 인과법칙입니다. 그래서 인과의 법칙을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과는 절대로 운명론이 아닙니다. 인과는 운명론이 아니라 전생의 어떤 일에 의해서 꼭 그렇게 되는 것이 인과의 속성입니다. 일어나는 사건은 확률입니다. 


인과를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바탕은 확률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개념입니다. 인과는 확률로 나타납니다. 인과가 확률로 나타난다는 것은 내가 전생에 행한 수많은 행위로 이생에서는 부처도 될 수 있고 또 대통령도 될 수 있고 혹은 또 평범한 시민으로 한 달에 월급 150만 원 받는 월급쟁이로 살 수도 있고 아니면 거지로 살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모습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것을 택하여서 어느 쪽으로 살아가느냐하는 것은 확률이 가장 큰 쪽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간혹 확률이 적은 쪽으로 살아갈 수도 있겠지요. 강력한 기도의 힘은 다른 사람의 삶의 확률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인과의 확률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이 인과의 확률론입니다. 연기의 정확한 표현은 인과의 확률론입니다. 어떤 행위를 했을 때 그 행위가 100으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어떤 행위든지 똑같이 100으로 나타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생에 이몸을 받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수억 겁 동안 살아오면서 갖고 있는 많은 다양성 중에 확률이 가장 큰 쪽으로 몸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생을 하고 어떤 사람은 병원에서 일하고 어떤 사람은 가정에서 일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수억 겁을 살아왔던 내 업이 가장 큰 쪽으로 나타나서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인간의 몸을 받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맹구우목”이라는 고사가 있습니다. 눈먼 거북이가 물 위로 한 번 올라왔을 때 바다에 떠 다니는 나무에 거북이의 목에 걸린다는 이야기처럼 그만큼 어려운 것이 인간 몸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 몸 받았습니다. 인간 몸 받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연기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대상이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겠습니까? 내 삶의 주체는 나 자신입니다. 내 자신의 삶이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것을 연기를 통하여 깨달아야 합니다. 이 우주에서 수억 겁 살아가더라도 오늘 이 하루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이 하루는 세세생생 살아가더라도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소중한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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