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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제3강 무아와 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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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510회 작성일 21-07-09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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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2600년의 역사속에서 본질은 자꾸만 작아져 모래알만 하고 나머지는 여러 겹의 옷을 입은 상태로 변질 되었습니다. 불교를 제대로 알고 있을 때에는 삼사 순례를 하든 영가 천도를 하든지 다 불교가 될 수 있으며 기복 불교도 종교의 가장 아름다운 속성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의 본질을 모를 때는 형식적이고 기복적인 것은 불교가 아니라  엉뚱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의 본질을 알 때는 어떤 껍질을 덮어 쓰고 있더라도 껍질은 종교의 본질을 포함한 더불어 상생하는 그 종교의 사회성이 될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들의 기본 속성인 무아와 무상의 개념은 불교를 공부하면서 끊임없이 이해를 해야 하고 체득을 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것에 대한 인식이 완성되면 바로 부처입니다.


무상에 대한 인식 

무상이라는 것은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 몸뚱이 하나만 보더라도 계속 변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식 할 수 있는 변화의 종착역은 멸입니다. 죽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는 이 상황이 결국은 시간이라는 것을 인식하면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는 실체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그 과정이 무상인 것입니다. 

무상이라 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해가므로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변해 고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상이고 무아인데  우리는 자꾸 내가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내가 있다고 착각을 하여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내가 있다는 착각만 하지 않으면 관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욕심과 욕망으로 인해 탐진치가 생기는 것입니다, 


무아의 정의 

그렇다면 무아는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요? 무아의 정의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연관 되어 독립된 실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나라고 한 것은 없다고 했지만 결국은 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욕심이 생기고 욕망이 생기고 애욕이 생깁니다. 그 관계의 흐름을 알 것 같으면  우리는 객관적인 눈을 가지고 훨씬 더 잘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무아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이 세상은 어떤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존재를 기본적으로 나누어 보면 책상과 볼펜 같은 생명이 없는 물체와 생명이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연기에 인과가 있다면 생명체가 없는 무생물의 경우 원인을 알면 결과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에도 인과가 성립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연기가 결국 진리라면 무생명체에도 적용되고 생명체에도 적용이 되어야 됩니다. 물질에 적용되는 것과 똑같이 생명체에도 인과법이 적용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착한 일을 했을 때  착한 과보를 받는다고 하는데 100% 믿을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들은 앞으로 불교의 교리를 공부해 보면 구체적으로  증명되는 부분입니다. 존재는 무생물인 물질과 생명으로 나눌 수 있으며, 생명은 육체적으로 생명을 연장시키고 생명을 살게 하는 기본적인 생명작용과 좀 더 고차적인 정신작용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 우주의 모든 존재라고 하면 동시에 모든 존재가 무아라고 하는 것을 인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아다’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무아의 인식 (그림)

우리 육신은 기본적으로 안, 이, 비, 설, 신, 의인 6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안은 눈, 이는 귀, 비는 코, 설은 혀, 신은 몸뚱이, 의는 의지, 뜻으로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다 표현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무생물은  몸뚱이 밖에 없는 것이 되겠지요. 몸뚱이 밖에 없는 이것을 우리는 물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안, 이, 비, 설, 신까지가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의는 무엇입니까? 의는 우리의 정신작용입니다. 의의 인식입니다.  종교가 성립하는데 있어 기본적으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신이 창조했다’로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 사회에서도 종교를 창시한 사람이라든가 또 신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했던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신이 이 물질을 어떻게 만들었느냐? 인도 사회에서도 신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많이 나옵니다. 우주를 누가 창조했느냐? 했을 때 절대자가 있어 창조했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절대자를 누가 보았느냐? 아무도 못 보았습니다. 못 보았다고 인정할 때  우리는 무엇부터 생각해야 합니까? 무엇이 존재하느냐 했을 때 눈이 있어 대상이 보이고 코가 있어 냄새를 맡고 귀가 있어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부분은 없애고 우리가 볼 수 있고 감지되고 인식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안, 이, 비, 설, 신, 의까지는 나옵니다. 의意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에는 중요한 두 가지 생명작용이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려고 하지요? 살아있는 모든 것은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려고 하고 피곤하면 잠을 자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생명작용을 넘어서 의지작용이 있습니다. 내 뜻대로 무엇인가 움직이려고 하고 바꾸려고 하는 의지작용이 있습니다. 바로 불교를 탄생하게 만든 위대한 정신작용이 이 의입니다. 


미시세계에서의 무아에 대한 인식 

무아의 개념은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는 독립된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독립된 실체가 없다고 했을 때 물질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에서는 미시적인 세계도 있을 것이고 거시적인 세계도 있을 것입니다. 미시적인 세계에서 물질은 그 물질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최소 단위인 분자가 있습니다. 그 분자 알갱이를 더 나누어 보면 원자가 있습니다. 원자를 더욱 더 쪼개면 쿼크라는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입자가 있습니다. 지금은 이 쿼크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입증할 수 있는 힉스입자까지 설명되고 있습니다. 신이 만든 입자라고 하는 것이 바로 힉스입자입니다.

여기 물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물을 이야기 할 때 물은 H2O입니다. 수소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한 개가 모여서 물이 됩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했는데 물도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한 개가 연결 되어 물을 만들어 냅니다. 그럼 이 연결 고리를 끊어 버리면 수소하고 산소가 없어집니까?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물은 없어졌습니다. 분명하게 산소와 수소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데 물은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니까 없어졌어요. 여기서 부처님께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어짐으로써 저것이 없어진다’하는 생멸의 원리가 설명됩니다. 이 생멸의 원리와 생멸의 구조는  6근, 12처, 18계 연기를 공부할 때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생은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가 끊어져버리면  산소와 수소가 그대로 있어도 물은 없어져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멸입니다.

멸이라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끊어져 단절된 상태입니다. 물이 없어졌다고 해서 수소와 산소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물질세계의 미세한 입자에서 무아의 관계를 설명해 보니 결국은 독립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독립되었을 때는 멸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연관되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연관되어 존재할 때는 물이 그냥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만 관계가 끊어져 버리면 물이라는 것은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습니다. 물은 물분자끼리 연관되어 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물이 흘러가서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룹니다. 결국 모든 것은 미시적으로도 연관이 되어있고 거시적으로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주에서 무아에 대한 인식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입자인 쿼크와 힉스까지 이야기 했습니다. 그럼 우주의 거시적인 세계를 살펴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있고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지구가 이 우주의 가장 중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지구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태양계 주위를 돌고 있는 미세한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태양계가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했는데 큰 망원경으로 살펴보니까 태양계라 하는 것도 은하계의 구석에서 돌고 있는 한 부분입니다. 이 우주에서 볼 때 태양이라는 것도 하나의 입자밖에 되지 않습니다. 태양계와 같은 것들이 이 은하계 속에는 약 1000억 개가 있습니다. 

현재까지 천체 망원경으로 인식한 우주에는 이 은하계와 같은 것들이 약 1000억개 가량 존재합니다. 존재도 인식할 수 없는 미시세계부터 어마어마한 거시세계까지 얘기 했습니다. 무아와 무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현대 용어로 바꾸어 시간과 공간을 이해해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무아와 무상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에 대한 인식 

이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 존재로 있다 하면 시간이라는 것은 느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동쪽 하늘을 보면 해가 떠오릅니다. 또 저녁에 서쪽을 보면 해가 집니다. 천 년 만 년이 지나도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 내가 만 년을 산다고 하더라도 항상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 어마어마한 우주가 항상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개념을 느낄 때는 시간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 느끼는  시간이라는 개념도 우리가 이해하고 우리가 인식하는 것 속에서 시간이지 이 우주 속에서 시간은 달라집니다.

내가 이 지구에서 북극성을 바라봅니다. 북극성에서 출발한 빛이 지구에 오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했어요? 북극성에서 지구까지 오는 데 천 년이 걸립니다. 빛은 1초에 30만 킬로미터를 갑니다. 우주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대 속도가 빛의 속도입니다. 30만 킬로미터로 달리는 그 빛이 천 년을 달려와야 우리에게 도착합니다. 북극성은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구와 북극성의 중간쯤 위치에서 어떤 사람이 본다면 여기까지는 500년이 걸리겠죠? 

오늘이 2008년 6월26일 저녁 7시입니다. 지금 저 밤하늘에 북극성이 폭발했다고 합시다. 그럼 이 북극성은 2008년 6월26일 7시에 폭발했지만 실질적으로 북극성은 천 년 전에 폭발한 것입니다. 북극성에서 볼 때는 천 년 전인 1008년 6월 26일 7시에 폭발했다는 것입니다. 중간쯤 별에 있는 사람이 북극성을 쳐다보았을 때는 1508년 6월 26일 7시에 폭발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에서 시간을 인식할 때 절대적인 시간은 없습니다. 시간이라는 이 자체도 상대적으로 존재합니다. 상대성의 개념은 무아와 무상을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한 방법이 됩니다. 우리는 물질계를 이야기 하면서 어떻게 무아를 이해를 할 것인가?  하나의 물 분자를 생각해보더라도 연관되어 있어서 이 연관이 끊어지면 물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생물인 물질을  생각을 해 보았는데 생명으로 넘어와 버리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물질은 대부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즉 쉽게 인과의 법칙이 성립됩니다. 


공간에 대한 인식 

공간이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물질들이 놓여있는 집합체가 모여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공간을 잘 이해하면 무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질이 움직이는 것을 느낄 때 시간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뉴턴의 만유인력을 생각해봅시다. 하나가 움직이면 그 힘이 다른 곳에 끝없이 미칩니다. 모든 물체는 다 연관되어 힘 속에서 함께 놓여 있습니다. 또 하나가 힘을 내면 다른 것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뉴턴이 밝혔듯이 바로 공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힘이 작용하고 있고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정신세계도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들을 인식함으로써 무아라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내 속에 있는 본질적인 부분을 이해함으로써 자비 광명이 쏟아지고 그 자비 광명을 인식하면 열반적정이 됩니다. 이제까지의 설명으로 무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의 구성체, 세포 

생명은 기본적으로 성장을 하고 번식을 하고 또 자극을 주면 반응을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물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원형질과 후형질로 이루어져 있는데 생명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포에는 중심 부위에 핵이 있고 핵을 둘러싸고 있는 세포질 물질이 있습니다. 이 생명체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체계화시키고 신에 도전한 최초의 사람은 다윈입니다. 

즉 생명의 진화론을 이야기했고 자연도태설과 종의 기원을 이야기했습니다. 다윈은 생명체는 생물 고유의 특성을 특정지우는 생물학적 정보를 저장하고 그 정보를 이용하며 다음 대에 물려주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DNA의 구조를 밝히다 

다윈이 주장한 것을 더욱 깊이 연구한 사람이 멘델입니다. 멘델은 그것을 유전자라고 했습니다. 이 유전자를 구체적으로 연구해보니 나선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유전자의 본질을 밝혀낸 사람은 윗슨과 클릭으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DNA구조를 밝혔습니다.

DNA구조를 밝히고 보니 사람의 염색체 수는 기본적으로 46개인데 23개의 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22개의 쌍은 똑같고 마지막 한 개가 여자는xx고 남자는xy로 한 쌍이 틀립니다. 그래서 남녀가 구분이 됩니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23쌍 짜리 두 개가 결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2의 23승개의 가능성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을 계산하면 840억 개가 됩니다. 우리의 유전자 조합은 기본이 840억 개 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 조합은 840억 개의 가능성 중에 어떤 것이 나타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식은 부모의 빵틀이거든요. 틀릴 것 같은데 전혀 틀리지 않습니다. 우주는 시간에 의해 끝없이 커지고  혼돈이라는 기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적인 용어로는 엔트로피라고 합니다. 우주 카오스를 이야기 할 때는 혼란, 혼돈이라고 합니다. 혼란은 끝없이 증가합니다. 이 혼란도가 끝없이 증가하는 것이 우주의 기본 속성입니다. 


세포는 끝없는 질서와 조화 속에 있다

생명체를 좀 더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 몸 속에 있는  어떤 세포든지 질서와 조화를 벗어나는 세포는 한 개도 없습니다. 이것은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의 총체로 수억 겁을 살아오면서 우리의 업들이 만들어낸 작용입니다. 어떻게 이 몸뚱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끝없는 질서와 조화 속에서 많은 세포가 자기 마음대로 활동할 것 같지만 한 개라도 자기 멋대로 활동하는 것이 없습니다. 전부 다 끝없는 질서와 조화 속에 있어요. 질서와 조화가 깨질 때, 만약 세포 하나가 잘 났다고 모든 세포가 일정한 속도로 번식하는데 자기 혼자 빨리 번식하면 이것이 바로 암세포입니다. 


암은 질서와 조화의 파괴이며 정신의 흐트러짐이다 

우리 몸속에 있는 모든 세포는 일정한 속도로 번식합니다. 그 중 한 세포가 다른 세포보다 훨씬 빨리 번식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우리 몸속에 없던 암 덩어리가 생겨서 목구멍을 막으면 식도암이 되고, 폐에 생기면 폐암이 되고, 위에 생기면 위암이 되듯이 어디든지 조화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순간 바로 암이 되는 것입니다. 질서와 조화를 유지 시키는 끝없는 공동체 의식 속에서 한 개라도 깨뜨려지면 그것은  암이 됩니다.  우리의 정신도 똑같습니다. 끝없는 질서와 조화 속에서 무엇이 하나 허물어지거나 튀어나오거나 잘못되는 것이 정신병인 것입니다. 육체에 생기는 병이 암이라면, 정신에 생기는 것이 정신병이 됩니다. 생명체라는 것도 질서와 조화 속에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 개라도 잘났다고  하면 전부 다 파멸해 버립니다. 정신이라는 것도 정신적으로 모두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은 물질 속에서 내 손에 자극을 주면 내가 아픈 것을 느낍니다. 생명체가 떨어져있다면 나하고 상관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자극을 주어도 아픈 것을 못 느낍니다. 일단 내 몸에 붙어 있는 것이면 자극을 주면 내가 아프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 생명체는 전부 다 하나라는 것을 인식 할 수 있는데 정신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도 아프다, 무아의 연결고리 

자식이 아프면 부모가 아픕니까? 새끼줄로 부모와 자식이 각각 끝부분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자식이 아프면 부모도 아픕니다. 한국에 전쟁이 터졌다고 합시다. 우리 모두의 비극으로 슬픔과 아픔을 함께 느낍니다. 바로 이 인류애라든가 동족애와 같은 정신적인 느낌은 연결되어 있지는 않아도 우리는 함께 느낍니다. 무아는 독립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연결될 수 있는 뭔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습니다. 물질과 생명과 정신을 가지고  무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탐진치에서 계정혜로 이동/ 탐진치에서 계정혜로 이동

내 몸속에서 일어나는 탐진치를 계정혜로써 제거해야 합니다. 내가 무아를 인식하고 무상을 인식하면 본질에 접근해가므로 충분히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깨달음은 무엇이라 했습니까? 깨달음의 유용성은 느끼지 못했을 때보다 알았을 때 훨씬 더 큰 이익이 있습니다. 이처럼 내가 무상과 무아를 느끼면 마치 어마어마한 재산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부분 집합에서 세속적인 가치는 종교적인 가치에 포함된다고 했습니다. 즉 종교의 본질적인 가치가 바로 서면 세속적인 가치는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아상과 아집 때문에 잘 써야할 때 쓰지 못하게 됩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얻는 것은 이런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아와 무상을 경전에 분명하게 이야기를 해 놓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식이 풍부하기 때문에 부처님 당시 보다 훨씬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과학적인 부분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존재에 대해 인식을 시키기 위해서 반복법으로 표현합니다. 반복법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은 그 당시 스님들에게 이해시켰던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풀잎 하나도 다치게 하지마라 

부처님 경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스님이 산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산길을 가다가 도둑을 만났습니다. 도둑은 스님이 가지고 있던 은자를 다 털고 난 다음에는 혹시나 따라올까 봐 스님을 묶어놓으려 합니다. 그런데 주변에 묶을 것이 없어요. 그래서 길가에 있는 긴 풀을 가지고 스님을 묶었습니다. 스님은 묶여 있는 상태로 가만히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풀을 끊고 도망칠 수 있었지만 스님은 땀을 뻘뻘 흘리며 그대로  묶여 있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도 깊은 산속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침  임금이 사냥을 나왔다가 그 길을 지나가게 됩니다. 임금이 보니 스님이 풀에 묶여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하에게 스님을 풀어 드리라고 명령을 합니다. 스님에게 물어봅니다. ‘스님! 왜 뜨거운 햇빛아래 땀을 흘리면서 풀에 묶여 있습니까?’ 스님은 ‘임금님 고맙습니다. 임금님이 저를 풀어주셔서 저도 살리고 저 풀도 살렸습니다. 만약 내가 힘을 주어 풀을 끊어 버리면 풀들은 죽게 될 것입니다. 풀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땡볕에서 몇 시간을 땀을 흘리면서도 그냥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할 때 자신에게는 손해가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본질을 이해하고 나면 손해 보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혼란의 척도, 엔트로피 

본질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잘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갑니다. 더불어 살고 있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에서 존재의 속성입니다. 엔트로피 즉 혼란이라는 것은 우주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속성입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의 기본적인 속성은 혼란과 안정입니다. 혼란한 상태에서 안정해지려고 합니다. 안정해져야만 영생할 수 있고 연속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강의 마치고 경주에 놀러 가자고 했을 때 누가 갈 수 있어요? 결혼한 사람들은 가기 힘들겠죠? 그렇지만 결혼 하지 않고 혼자 있는 분들은 갈 수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은 혼란도가 그만큼 작은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정해진 테두리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혼란도가 작습니다. 그렇지만 결혼하지 않고 혼자 있으면 혼란도가 아주 큽니다. 예를 들어 방안에 두 사람만 있어도 알몸으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있으면 멋대로 할 수 있습니다. 둘이 있으면 부딪칩니다. 그러나 혼자 있으면 부딪치지 않습니다. 우주가 멸망하지 않는 한 수행자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우주가 존재하는 한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이해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는 멸망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있는 것은 혼란도가 100입니다. 그렇지만 혼자 선정에 들어가 있으면 혼란도가 0이 됩니다. 이 우주를 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혼란도를 만드는 것은 내가 선정에 들어 열반적정에 드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우주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결혼하지 않고 잘못 살면 빵점짜리 인생이 되지만 결혼해서 사는 사람의 인생점수는 못살아도 60점, 잘 살면 80점으로 비교적 안정적입니다. 그러나 혼자 살면서 잘하면 100점, 못하면 30점 짜리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인과와 무아와 무상에 대한 철저한 확신이 없으면 혼자일 때 훨씬 더 힘들게 살 수밖에 없어요. 스님은 스스로 묶인 풀을 왜 안 끊었겠습니까? 무아에 대한 인식이 철저했기 때문에 그 풀을 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윤회의 실체 

존재가 사라질 때 이생에서 다음 생으로 윤회하여 전생轉生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즉 ‘나’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나’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느냐? 부처님께서 잡아함경에 윤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윤회를 위해서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영혼과 같은 어떤 것이 반드시 옮겨가야 할 이유는 없다.’ 어떤 실체가 있어서 옮겨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윤회란 고정 불변하는 어떤 주체가 한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아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변화하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업이 이생에서 죽어 다음 생에 다른 몸뚱이를 받으면 그 업은 윤회 한다는 것입니다. 존재 그 자체가 계속 변화하는 것이 바로 윤회입니다.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업과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본체는 없다.’고 하십니다. 이 존재가 사는 것은 내가 이생에서 죽고 다른 존재로 계속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것을 좀 더 쉽게 나비로 비유를 들었습니다.  나비는 알의 상태로도 있고 애벌레의 상태로도 있고 번데기 상태로도 있는데 결국 알이 애벌레가 되고 번데기에서 나비가 됩니다. 우리가 볼 때 알과 애벌레는 다릅니다. 또 애벌레와 번데기도 다르고  번데기하고 나비도 다른 모습입니다. 이렇게 변하지만 알과 나비는 별개가 아닙니다.

 알이 가지고 있는 속성에 의해서 나비가 됩니다. 알이 변해서 나비가 될 뿐입니다. 이것은 윤회하는 실체인 나가 없는 무아인데도 윤회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이해해야 하느냐? 모든 알은 나비가 됩니까? 아니지요? 나비 알만 나비가 됩니다. 모기알은 나비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 나비알은 나비가 되고 모기알은 모기가 됩니다. 이처럼 인의 문제가 일어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윤회하는 실체가 없는 무아를 주장하면서 존재를 설명하고 이해 시킨 것입니다.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면 왜 이득이 되는가?

존재에 대한 명쾌한 인식은 연기를 잘 이해하면 됩니다. 

무명의 속성은 탐심이고 진심이고 치심입니다. 무명을 깨친 명의 속성은 깨끗함이고 올바름이고 지혜로움입니다. 무명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명의 상태가 되어야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명제에 대한 바른 결정을 하게 됩니다. 

왜 무아와 무상을 알아야 되느냐? 무아와 무상을 제대로 알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삶이 이생으로만 끝나겠는가? 

만약 윤회를 한다면 이생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생에서 몸 받고 살아가는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큰 문제가 안 됩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될 시간은 수억 겁입니다. 지금부터가 정말 중요합니다. 진리를 아는 순간부터 내 삶은 변하기 시작하여 잘못된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불빛이 없으면 어둡습니다. 불빛이 있으면 밝아집니다. 이런 부분들을 몰랐을 때는 욕심밖에 없지만 알고 나면 바르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하는 명쾌한 답은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는데 있습니다. 세세생생 사람 몸 받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바른 결정이 성불하게 만들고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은 곧 모든 중생이 이로운 것입니다. 결국 모든 중생이 이로우면 내가 이로운 것입니다. 


들판에 늘려있는 풀잎들

흩어놓으면 아무 것도 없는데

모아 엮으면 한 칸의 초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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