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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제4강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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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124회 작성일 21-07-09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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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가르침인 연기를 설하신 부처님께 

이 목숨 거두어 돌아갑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 생기고 

이것 없어짐에 말미암아 저것 없어지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우리가 연기라고 하는 것은, 빨리어로 ‘빠띠짜사무빠다

 Paticcasamuppada‘ 라고 합니다. 빨리어는 부처님께서 법문하신 언어입니다. 이 빨리어 ’빠띠짜사무빠다‘는 세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빠띠짜는 ---로 인하여, ---을 원인으로 하여 라는 뜻이고, 삼sam은 잘, 분명하게, 정확하게, 바르게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우빠다uppada는 발생이라는 뜻입니다. 

---을 원인으로 하여 정확하게 결과가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의존하여 발생하는 법칙입니다. 이것이 나타내는 의미가 윤회이며, 연기입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표현을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 생기고 이것 없어짐에 말미암아 저것 없어지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입니다. 상응부 경전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연기를 설명할 때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하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육육법연기와 오온연기, 12연기는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의 이것으로부터 모두 나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다고 표현한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앞으로 공부할 연기입니다. 

 무아와 무상에 대한 인식이 연기였고 왜 죽어야하는가? 이 부분에 대한 결론도 생각해 보니까  모든 것이 연기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일이 왜 일어나는가의 그 원인을 밝히는 것이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볏짚 두단으로 연기를 보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볏짚 두 단을 놓고 설명을 했습니다. 볏짚 한 단은 서 있을 수 없지만 볏짚 두 단이 맞대어 서 있는 것을 빗대어 연기를 설명해 놓았습니다. 팔공산에 연기가 났다면 연기 피어오르는 것으로 불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직접 불은 못 봤지만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연기를 설명할 때 일어난 원인, 그 원인을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피어오르는 연기만 보고 불이 났구나 하는 것을 알 때 왜 연기가 일어나느냐, 연기가 일어나는 것은 볏짚이 타든 나무가 타든지 그 부분에서 불이 일어났기 때문에 연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경전에 구체적으로 볏짚에 대한 이야기 혹은 산 넘어 불이 난 것을 통해 연기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놓았습니다. 결국 연기는 부처님께서 왜  죽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 결과입니다. 이 삶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연기를 한 번 생각해 보면 반드시 어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결과입니다. 이 결과를 보고 과연 무엇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났는지 원인을 생각해 보는 것이 연기에 접근해 가는 방법입니다. 

불이 일어난 것은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아, 왜 연기가 나는가? 불이 일어났기 때문에 연기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가 나를 부처로 만든다  

우리는 왜 죽습니까? 안 태어났으면 죽지 않는데 태어났기 때문에 죽습니다. 왜 태어났느냐하는 이 문제로 12연기를 공부합니다. 12연기의 마지막이 무명입니다. 무아와 무상을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고 했습니다. 왜 태어났느냐, 왜 죽어야만 하는가하는 문제의 출발점이 다시 무명으로 돌아갑니다. 무아와 무상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엄밀하게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야기로 결과를 보고 무엇이 원인이 되어 그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연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과법칙이 바로 연기입니다. 우리는 인과를 믿습니다. 분명히 전생을 믿고 51% 인과를 믿는다고 했습니다. 51% 믿는 이 인과를 나 자신도 100% 믿을 수 있게끔 불교를 제대로 알자는 것입니다. 연기는 인과의 법칙입니다. 인과는 구체적으로 보면 인연과因然果의 법칙입니다. 인에 의해서 어떤 결과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결과의 원인을 찾아보니 구체적인 원인이 있었고 그 원인이 되는 부수적인 환경까지 생각을 한다면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 인과를 믿느냐하는 문제가 남았습니다. 인연과의 법칙에서 이해해야 할  중요한 개념은 인입니다. 바로 어떤 일의 근본원인이 되는 것이 인입니다. 즉 어떤 일의 주체가 자기 자신입니다. 어떤 일의 원인이 되고, 씨앗이 되는 자신이 바로 인이 됩니다. 

그러면 연이라 하는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 환경이 되겠습니다. 이 작용에 의해서 나타난 현상이 바로 과가 됩니다. 인과의 법칙하면 생각나는 격언이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콩 심은 데는 분명히 콩이 나고 팥 심은 데는 팥이 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콩 심었을 때  다 똑같은 콩이 납니까? 만약  비옥한 땅에 콩을 심었다면 콩이 잘 자라서 수확이 엄청나게 많겠죠? 그런데 콩을 자갈밭에 심었으면 제대로 자라겠어요? 잘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콩이라 하는 씨앗은 인이 되며 그 콩을 심은 땅은 바로 연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인이 아무리 좋더라도 연이 좋지 못하면 인이 제대로 나타나지 안겠지요? 반대로 비옥한 땅이라도 튼튼하지 못한 콩을 심었다고 하면 콩이 제대로 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연이 좋더라도 인이 시원찮으면 제대로 결과가 안 나타나겠지요?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할 것은 몸 받아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바로 인연의 문제인 것입니다. 바람이 스쳐가도 오백 생의 인연입니다. 그 인연의 의미가 이렇게 깊습니다. 인과 연의 문제에서 인이 무엇이며 연이 무엇인지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변하면 학생도 변한다

선생님과 학생의 입장에서 선생님을 중심으로 보면 선생님이 인이고 학생은 연입니다. 선생님이 인일 때 그 가치 기준은 90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학생들을 가르쳐 보면 학생들은 죽어도 선생님의 가치 기준인 90점에 못 따릅니다. 문제는 60점밖에 안되는 학생들을 어떻게 해서 90점을 만드느냐? 중요한 것은 인이 바뀌면 쉽다고 했습니다. 즉 선생님이 바뀌어야 됩니다. 학생들은 안 바뀝니다. 똑같은 것을 가르치더라도 알아듣는 학생이 있고 못 알아듣는 학생이 있지요? 그러면 못 알아듣는 학생을 위해서 밤새워가면서 연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가르치는 방법과 애들한테 접근해가는 방법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결국 선생님의 끝없는 노력이 학생으로 하여금 90점을 만들게 합니다. 예를 들어 미운 학생도 있고 고운 학생도 있고 공부 잘 하는 학생도 있고 공부 못 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쳐 주어야만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치기 전에 다 압니다. 집에서 예습을 하면 선생님이 가르치기 전에 다 압니다. 문제는 예습을 해도 모르는 학생이 있습니다. 결국 선생님들이 고민해야 되고 끌어올려야 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습 복습해도 모르는 그 학생들이 문젭니다. 그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선생님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가르치면 이해를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학생이 숫자를 이해못한다면 구슬을 갖고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합니다. 학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선생님이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해서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학생은 시점이 되면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쉽습니다. 결국 선생님이 바뀌면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법이 달라지게 됩니다. 


연기의 법칙은 내가 먼저 변해야 된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해서 삽니다. 부부가 되어 살아가는데 있어 남자가 인이라면 여자는 연이 되겠지요? 남자가 인이라면 여자는 연이 되고.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주체니까 인이 되고 남자가 연이 되겠지요? 여성불자를 중심으로 생각해 봅시다. 즉 여자가 주체입니다. 여자가 인이면 같이 사는 남자는 연이 되겠지요? 

그런데 결혼하기 전에는 100점짜리 남자라고 생각을 했는데 결혼해서 살아보니 영 형편없다 말입니다. 나의 가치기준으로 90점짜리 정도만 되면 좋겠다 싶어 90점을 카트라인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나와 같이 사는 남자는 최소한 90점짜리는 되어야만 하는데 90점 밑으로 갈 때는 계속 잔소리를 하여 90점 이상을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60점짜리 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인이 갖고 있는 가치의 기준은 90 정도 되는데 연이 만들어 내는 것은 60점 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계속 전쟁이고 투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인이 60점짜리인 이 남자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갖고 있는 가치기준을 60점으로 낮추어 버리면 이 남자가 100%로 마음에 듭니다. 가치기준을 90점에서 60점으로 낮춰 주위를 둘러보면  60점짜리 남자지만 마음에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이 남자를 90점짜리로 만드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것을 택하겠어요? 당연히 후자를 택합니다. 본인은 죽어도 변하지 않으면서 상대를 자꾸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 중생입니다. 


내가 바뀌고 나니 상대도 바뀌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공부를 합니다. 나를 변화시키느냐, 주위를 변화시키느냐의 문제에서 나를 바꾸기가 쉽습니다. 죽어도 주위는 안 바뀝니다. 

나를 바꾸는 것만큼 쉬운 것이 없어요. 바로 여기서 연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 나옵니다. 왜 공부하고 수행해야만 하는가? 세상에서 바꾸기 제일 쉬운 것이 자기 자신입니다. 나를 바꾸는 것이 주위를 바꾸는 것보다는 훨씬 더 수월합니다. 

부처님께서 왜 견성성불하라고 하셨습니까? 주위를 변화시키는 것이 쉽다면 주위를 변화시키라고 했겠지요? 결국 스스로 변하는 것이 훨씬 수월한 방법입니다. 내 자신을 바꾸어야만 연도 바뀝니다.  

인과 연에서 주체가 되는 것은 항상 인입니다. 강의를 처음 하면서 이 세상에는 행복한 한 사람만 있어도 이 우주는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행복 때문에 이 우주는 행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연기에 대한 결론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바뀜으로써 연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부처될 씨앗은 60점이고 지옥에 갈 중생심은 40점입니다. 아직까지 부처 쪽이 가까우니까 부처되기가 훨씬 더 쉽습니다. 연기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내가 바뀌어야 바로 연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인이 바뀌면 연도 따라 변한다 (그림)

부처님께서는 무아를 인식하는 것만큼 연민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내가 90점을 생각하다가 60점으로 낮추었을 때 얼마나 가엾고 불쌍하게 보이겠어요? 연민의 마음이 60점짜리 밖에 안되니까 60점으로 만족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60점에 만족해서 끝없는 연민을 느끼면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까 60점짜리가 70점이 되어 있고 80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원력입니다. 연민이 상대방인 연을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축원할 때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우주평화를 위해 계속 기도합니다. 어떻게 보면 황당하고 무모한 짓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절대 아닙니다.  누군가가 이 우주와  지구의 평화를  축원하고 기도하는 기운 때문에 우주는 평화스럽고 또 좋은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연기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인연과에서 인을 끝없이 바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변하기 위해서 가치기준을 낮춘 것처럼 보이지만 무아에 대한 인식에서 생기는 연민 때문에 상대방이 60점짜리라도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을 볼 때 얼마나 한심하겠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우리에게 끝없는 연민 밖에 없습니다. 즉 60점짜리 우리의 삶을 보고 부처님은 끝없는 연민을 느낍니다.  내가 90점짜리에서 60점짜리로 가치 기준을 하향시켰을 때 변한 것은 그 점수가 아니라 무상에 대한 인식 때문에, 연민 때문에 60점 되는 상대방에게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가 지옥을 싫어하겠습니까? 지옥에 가도 부처는 부처일 뿐 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이 확실하면 연은 아무런 문제가 안됩니다. 내가 확실히 부처이면 주위가 지옥이라도 문제가 안됩니다. 

우리는 상대를 탓합니다. 내가 무상과 무아를 이해하면 탓할 대상이 없습니다. 연민인 끝없는 자비밖에 없습니다. 자비에서 볼 때 상대방이 30% 잘 했으면 30%로 잘 한 것이 반갑고 대견한 것입니다. 어린 자식을 키울 때 잘못했다고 해서 아이가 미워요? 그래서 세상을 보는 눈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인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부처의 속성은 자비광명 

만약 누가 옆에서 잘못했을 때 그 잘못 때문에 내가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잘못을 한 상대방이 고의로 잘못을 한 것이 아닐 때는 그 상대방이 불쌍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비가 나옵니다. 지난 시간에 부처가 바로 자비광명이라 했습니다.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면 일어나는 것은 자비광명 밖에 없습니다. 끝없는 광명과 자비가 일어나게 됩니다. 

제대로 된 불자는 어디에서 살던 상관이 없습니다. 천 년 전도 좋고 지금도 좋고 만 년 후도 좋고 어느 시기에 나타나도 똑같은 것입니다. 내가 확실하게 부처이면  태어나는 시기도 태어나는 시대도 태어나는 곳도 문제가 안됩니다. 

그래서 내가 부처되어야 하고 내가 바뀌어야만 연이 끝없이 바뀌는 것입니다. 서로 상관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 한 명을 감동하게 하면 세세생생 그 인연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선생님을 따라 다닙니다. 감동이라 하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선생님의 노력에 의해서 문제를 이해하면 수만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짜릿합니다. 그럴 때 감동이 옵니다. 그런 감동을 받는 학생은 선생님을 평생 존경할 것입니다. 

연기가 거시적인 현상에서 볼 때는 인과법칙이고 인과법칙을 좀 더 풀어쓴다면 인연과의 법칙입니다. 연기의 문제에서 변해야 되는 것은 자기자신입니다. 인인 주체가 변해야 됩니다. 결국 주체인 내가 변하기 위해서는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지 않고는 변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인식하는 것만큼 내가 변하게 됩니다. 


의가 부처되게 한다 

부처님께서 연기는 곧 무아와 무상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상과 무아를 인식하는 순간 일어나는 마음이 적정입니다. 그 관계의 이해가 바로 연기입니다. 연기를 이해하는 순간, 내가 달라져 있고 주위가 달라져 있습니다. 

연기에서 ‘안이비설신의’를 설명했습니다. 부처님이 위대하신 것은 이 의 때문입니다. 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풀어낸 것이 연기이며 모든 것은 의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생명체들은 기본적으로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번식해야 될 시기가 되면 새끼를 낳습니다.  생명체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의식 활동은 먹고 자고 번식하는 이 세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냥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부르면 안 먹으면 됩니다. 그런데 의지가 없으면 맛있는 빵이 있을 때 나중에 먹기 위해서 서랍에 넣어 두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개한테 빵을 먹어라고 주면 먹고 싶은 만큼만 먹고 아무리 맛있어도 더 이상 먹지 않으며 또 내일 먹어야지 하면서 자기 집에 넣어두지 않습니다. 또 피곤하면 자고 잠 안오면 자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피곤해도 안 자려고 애를 써면서 하루에 4시간 자고 버티면서 공부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의 때문입니다. 동물은 번식을 시도 때도 없이 합니까? 발정주기 외에는 일체 번식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은 의에서 생겨납니다. 결국은 먹는 것에서 탐심이 생기고 생식에서 진심이 생기고 자는 것에서 치심이 생깁니다. 이런 문제들이 다 의 때문에 생겨납니다. 의를 이해하면 우리 몸뚱이가 갖고 있는  탐진치의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다 나오게 됩니다. 

연기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인 인연과에 의해서 내가 바뀌면 주위가 바뀐다는 것을 인식해야하며 이 인식에서 불교 공부가 시작됩니다.  


연기의 꽃, 12연기 

연기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12가지 속성인 12연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오온연기나 12연기가 만들어지는 체제와 구성을 생각해보면 부처님 은혜에 탄복할 뿐입니다. 인간의  정신능력에서 생기는  열두 가지를 아주 절묘하게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불자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불교를 이해하면 됩니다. 우리도 12처부터 시작해서 6근, 6경  6식을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가르쳤던 방법대로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오늘 배우는 12연기의 처음은 무명입니다. 불교의 첫 출발은 무명입니다. 무명 다음에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가 12연기입니다. 12연기에서 왜 죽어야하는 문제는 노사에 있습니다. 왜 죽어야 하는가 바로 앞에는 생입니다. 태어났기 때문에 죽습니다. 왜 태어났느냐? 바로 존재할 수 있는 인연이 성숙되어 태어났습니다. 


(무명)

무아와 무상을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정견이 아닌 부정사유에서 무명이 생기며 그 다음 행이 일어납니다.


(행)

행은 잠재적 형성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주는 카오스라고 했습니다. 혼돈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혼돈이 생깁니다. 무명, 모르는 것에서 이런 행위들이 나옵니다. 카오스를 만들어내는 잠재적인 형성력, 만들어진 것, 만들어내는 힘, 이것이 바로 행입니다. 


(식)

무명에 의해서 행이 생기고 이 행에 의해서 식이 만들어지고 식은 행동을 일으키는 생각, 인식작용, 또는 인식판단의 주관적인 능력이 됩니다. 우리는 6식으로 판단을 합니다.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6식을 느낍니다. 이 식에 대해서는 앞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할 것입니다. 


(명색)

식이 생기고 나면 명색이 되고 명은 ‘라마루파’로 생각을 일으키는 환경이라든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5가지 요소인 오온이 바로 명색이 됩니다. 이 때 명은 수상행식을 나타내는 정신적인 능력이고 색은 물질 즉 육체를 나타내며, 육체와 정신을 통틀어 명색이라고 합니다. 


(육입)

육입은 6경의 환경을 느끼게 하는 감각기관입니다. 명색이 세분화 되어 감지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대상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체인 육근을 만드는 근원적인 능력입니다.  


(촉)

6근인 눈, 귀, 코, 혀, 몸, 뜻을 바탕으로 해서 촉이 일어납니다. 부딪치는 자체가 촉입니다.  눈으로 부딪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 몸으로 부딪히는 것은 촉감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근과 경과 식이 촉하여 수가 생깁니다. 


(수)

촉에 의하여 수가 생깁니다. 접촉의 결과로 발생되는 느낌이 생기게 됩니다. 바로 이 느낌에 의해서 희노애락의 감정들이 생깁니다. 


(애)

이런 느낌의 결과를 애라고 합니다. 느낌과 감정의 결과로 생기는 갈애, 탐심과 진심이 생기는 것이 바로 애입니다. 


(취)

애욕 때문에 집착하게 되고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소유욕인 취가 생깁니다. 취는 곁에 있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작용입니다. 


(유)

집착 때문에 이 몸둥이가 만들어지며 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유는 생존, 미혹한 생존, 윤회하고 있는 생존, 욕망충족의 행업 이런 것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유입니다. 


(생)

유로써 우리는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노병사) 

태어나서 한평생 살아가는 것이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입니다. 이것으로 12연기의  흐름을 알아보았습니다. 


변화의 시작 

불교란 무엇인가, 내가 깨달을 수 있는가, 내가 불성을 갖고 있는가? 무아와 무상 그리고 연기는 불교를 이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내가 부처될 수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공부를 해서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부처가 됐을 때 세속적인 이익보다는 훨씬 더 큽니다. 바로 세속의 이익은 내가 부처되고 난 뒤에 받는 이익의 부분집합에 지나지 않습니다. 깨치고 나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불교 공부를 해야 합니다. 

연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떤 상황이든지 인과 연의 문제에서 인이  바뀌면 연은 아무런 문제가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다 깨어나도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이것을 바꾸는 작업이 바로  내가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기 전에는 안 바뀝니다. 바뀐 것 같지만 하루만 지나면 제자리로 되돌아옵니다. 안 바뀌는 이유는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고서 상대방이 바뀌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기를 알면 바뀌지 말라 하여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무아와 무상이 깨어지는 만큼 

채워지는 것은 연기의 도리 

무아무상 모두 깨어져 연기로 

가득차 버리면 그것이 부처이며, 법성이며 

진공묘유인 공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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