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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제2강 부처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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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488회 작성일 21-07-0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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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찻잔이 넘칩니다

옛날에 뛰어난 한 선사가 참선을 하고 있는데 불교를 잘 안다는 대학자가 찾아왔습니다.  스님하고 불교에 대해서 한 번 논쟁해 보겠다고 찾아왔다고 하니 스님은 먼길 온 학자한테 차를 대접합니다. 차를 따르는데 찻잔에 차가  넘쳐도 계속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대학자가“ 스님, 차가 넘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선사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 자네가 이것과 똑같네. 머릿 속에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어떻게 나하고 불교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인가”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수도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내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들을 다 비워버리고 시작합시다. 


가장 큰 행운은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제일 큰 행운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부처님 법 만난 것 보다 더 큰 행운은 없습니다. 

세세 생생을 살면서 부처님 법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입니다. 최고의 행운인 불법을 제대로 알아야겠습니다. 불법 아는 것 만큼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그래서 불법을 안다고 하면  부처되지 말라 해도 부처가 됩니다. 우리는 불법을 만났고 불법을  알고 나면 실천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니까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정말 불성이라는 것이 있는가? 즉 내가 부처 될 수 있는가?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 부처되는 것이라면 내가 부처가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부분집합에 대한 이해

 그러면 부처되는 것이 목표인데 내가 부처 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이 집합관계에서 이해해야합니다.  집에서 손자 손녀들이 공부를 합니다. 1,2,3,4를 가르쳐 주니까 며칠 만에 100까지 알았습니다. 한 달 후에는 1000까지 알게 된 것입니다. 100까지 아는 것이 1000에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100을 알고 1000을 안다고 할 때 당연하게 100을 안다는 것입니다. 100하고 1000하고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100이 따로 있고 1000이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내가 1000까지를 안다고 할 때는 100까지 알고 또 1000까지 아는 사람은 당연하게 100까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의 개념은 앞으로 전개되는 불성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에서 드러납니다. 선불교 경전에 보면 ‘내가 곧 부처다’하는 말이 나옵니다. 앞의 예시를 이해할 때 선불교 경전에 나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00까지 아는 것은 1000까지 아는 부분에 속하는  부분집합입니다.


돌을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될 수 없다 

남악회양하고 마조도일의 이야기입니다. 젊은 스님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회양선사 귀에 까지 들려옵니다. 그래서 회양선사는  마조도일이 수행하고 있는 수행처를 찾아갑니다. 마조도일은 산 중턱에 있는 암자에서 혼자 공부하고 있습니다. 남악 회양선사가 하루 종일 혼자서 참선을 하고 있는 젊은 수행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밖에서 몇 시간을 지켜보고 있는데 마침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 젊은 스님이 바깥으로 나옵니다.  소변보러 나오는  젊은 수행자를 남악회양 선사가 한참 쳐다보다가 “젊은 수행자여 자네는 무엇이 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앉아 있는가?” “부처되기 위해서 수행하고 있습니다” 고 마조도일이 대답합니다. 그러자 회양선사가 주위에 있는 벽돌을 하나 집어들고 법당 앞에 있는 큰 돌에 슬슬 갈기 시작합니다 화장실 다녀오던 젊은 수행자가 한참 쳐다보다가 ‘스님 지금 무엇을 하십니까?, 하고 묻자 “거울을 만들려고 돌을 갈고 있네” 그러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돌을 간다고 말합니다. 돌은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안 됩니다. 거기에서 회양선사가 젊은 수행자에게 한마디 합니다. “그럼 자네는 앉아 있다고 부처가 되나?” 결국 이 말 한 마디로 마조도일을 견성하게 만든 계기가 됩니다. 돌은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안 됩니다. 거울이 될 수 있는 성분을 갖고 있어야 거울이 되고 때가 끼여 있으면 때를 벗기면 거울이 되겠지요. 즉 돌과 거울의 관계에서 돌이 결국 거울에 포함되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돌이 거울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죽다깨어나도 거울이 안 됩니다. 바로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은 돌이 거울에 포함되어야만 거울이 됩니다. 


중생은 부처의 부분집합 

 중생이란 무엇입니까? 무명의 상태, 모르는 상태가 중생입니다. 중생과 부처는 별개가 아니란 것을 이 부분에서 이해해야 됩니다. 회향선사와 마조도일의 대화와 어린손자가 공부하고 있는 부분집합을 잘 이해해 보세요 결국 중생이란  무아와 무상을 모르는 상태입니다. 연기를 깨달아 알게 되는 상태가 부처입니다. 이것이 불교를 인식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 불성의 존재 즉 중생은 부처의 부분집합입니다. 

중생이라는 것은 부처속에 포함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모르는 것 하고 아는 것을 비교해 보세요. 아는 것하고 모르는 것을 비교할 때 어느쪽이 더 큽니까? 모르는 것은 항상 아는 것에 포함됩니다. 중생이란 모르는 상태에 있는 것을 아는 상태에 포함되는 부분집합일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처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대승기신론에서 우주를 덮고 있는 일심이며, 중론에서 이야기 하는 공이며 무자성인 것입니다. 바로 중생이 곧 부처다 했을 때 어떻게 중생이 곧 부처입니까? 이 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에 중생이 곧 부처가 되는  것이고 중생으로서 열심히 노력하면 부처가 되는 겁니다. 중생은 부처의 속성과 부처의 씨앗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부처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하고 깨쳐서 알 것 같으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불성의 존재라는 것은 바로 부처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가 부처 될 수 있어야함으로써 삶의 목적을 부처에 둘 수 있습니다.


중생보다 부처가 되는 것이 훨씬 이익이 크다

 모르는 것은 아는 것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처가 되어서 세속의 탐진치 속에 묻혀 사는 것보다  이익됨이 없다면 부처 될 필요가 없습니다. 중생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 크다면 부처될 필요가 없습니다. 천 원 보시하여 만 원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돈을 벌고 기도합니다. 똑같은 문제입니다. 부처가 되었을 때 중생으로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이익이 크고 가치가 높아야만 부처되도록 애를 쓰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속적인 가치와 불교가 추구하는 가치가 서로 어긋나는가의 문제입니다. 세속의 가치가 우리가 진리로 추구하는 가치에 위배된다고 하면 문제가 됩니다. 대부분의 생각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식입니다. 지금 깨뜨려야 되는 것은 바로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는 생각입니다.  부처 아니면 중생이다는 아닙니다. 중생이라 하는 것은 부처에 포함되어 있는 부분집합입니다. 중생은 언젠가 부처가 될 수 있는 씨앗을 갖고 있어서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력하면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속적인 가치가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 가치와 어긋나는 것이냐? 세속적인 가치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이 진리법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 전역에 불교를 전파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이 아쇼카왕 입니다. 절대권력을 갖고 있었던 아쇼카왕이 마음 한 번 돌리니까 불교를 전 인도에 전파시키는 큰 역할을 합니다. 세속적으로 갖고 있는 권력도 크면 클 수록 얼마든지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선혜보살 이야기 

 선혜보살은 전생에 부처님께서 성불 수기를 받은 부처님의 전생입니다. 다시 말해서 석가의 전생이 선혜였습니다. 선혜는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돌아가십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인도에서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어린 나이의 선혜는 부모가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무상을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인도에서 제일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는데도 돌아가실 때는 그 재산을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했습니다. 

어린 선혜는 평생을 살다가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 갖고 가야 될 가치는 재산이 아님을 알고 임금한테 고합니다. ‘임금이시여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모든 재산을 백성들한테 나누어주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다음 날 선혜는 임금이 북을 쳐 가난한 백성을 모우자 전 재산을 나누어 주고 출가 수행자가 됩니다. 


세속적인 가치는 진리적인 가치의 부분집합이다 (그림)

세속적인 가치라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려고 하는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돈도 많으면 많을 수록 좋습니다.  절에 보시를 할 때 적게 내는 것 보다 많이 내면 훨씬 더 기분이 좋습니다. 권력이나 돈이나 전부 다 똑같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가 절대 진리의 가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다 보니까  무명에 갇혀 활용을 못해 악이 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가치도 활용만 잘 하면 부처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선재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은 세속적인 가치도 진리 가치에 어긋나는 부분이 아니라  진리 가치에 포함되는 부분집합이라는 것입니다.


감정의 뿌리, 불안 

지금 달나라에서 태어난 누군가가 지구에 온다면 주차위반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자기 멋대로 차를 몰고 다니면서 무엇이 주차위반인지 모릅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차를 운전 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기 때문에 위반인지 아닌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세속의 법도 이러한데  좀 더 구체적인  부처님의 법인 무아와 무상을 알고 내가 실천 할 줄 모른다면 안 됩니다. 모르면 불안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주차위반을 하거나 신호위반을 하는 사람들은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 위반합니다. 그렇지만 아는 사람은 위반하더라도 다음에는 위반 할 가능성도 낮아지고 또  본인이 위반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불안해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인식, 감정 등의 기본적인 속성은 불안입니다. 


내일 죽는다면 

 몸뚱이가 왜 생긴 것인지 왜 인간 몸을 받은 것인지 왜 죽어야 하는 것인지 하는 문제를 풀어 보면 가장 근본적으로 생기는 감정은 불안과 두려움 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국 불안과 두려움이 이 몸뚱이를 만들어 냅니다. 세속법도 어겼을 때 불안하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처님 법을  모르기 때문에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모르는 만큼 위험 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인식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내일 죽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일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평소처럼 보낼 수 있습니까? TV보고 친구를 만나려 가는 등 무한정  살 것처럼 보내집니까? 내일 당장 죽는다 하면 그렇게 안 되지요. 내가 부처님 법을 모른다고 온 종일 TV 시청해도 괜찮고  친구를 만나서 수다를 떨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인 것입니다. 오늘 한 시간 노력하는 것은 나이 들어 십 년 노력하는 것보다 더 좋습니다. 은행에 돈 넣어 놓으면 이자가 붙습니다. 공부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모르니까 이자가 안 붙는 것 처럼 보이지만 적금과 같이 이자가 붙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도 똑같습니다. 은행에 적금 든 것 이상의 복리 이자가 붙습니다. 그런데도 확신이 생기지 않으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자비광명

우리는 주차위반과 신호위반 등은 가능한 한 안 하려고 애를 씁니다. 내가 손해 안 보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도 피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서 질서를 지킵니다. 결국 연기를 깨닫고 나면 이 보다 더 세상을  복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나에게서 일어나는 자비와 광명이 나한테만 덕이 되는 것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자비와 광명보다 더한 복과 지혜는 없습니다. 최고의 복덕입니다. 나와 더불어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와 중생들에게 매우 큰 복입니다. 스님들이 선문답할 때  본래청정이란 말을 자주 합니다. 불교의 근본적인 속성은 청정이며 자비광명일 뿐입니다. 밝음은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모르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궁극적으로 내가 다 알고 나면 편안해집니다. 이 몸뚱이가 만들어지고 온갖 문제의 해결을 알게 되면 편안해집니다. 편안이라는 이 자체가 바로  적정이고 적멸입니다. 그래서 무아와 무상을 깨치면 열반 적정이 되는 겁니다.  자비광명과 열반적정은 반드시 청정해야 합니다. 맑고 깨끗하다는 것은 광명을 아는 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며 적정은 하나의 속성일 뿐입니다. 부처님 법을 알게 되면 하지마라 해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오늘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인 ‘내가 부처다’ 라고 말 할 때 내가 부처될 수 있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연이란 없다

로또 복권 10억짜리가 당첨되었다고 합시다. 복권 당첨자가 볼 때는 우연하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사람은 세세생생 살면서 어떤 경우에는 농사꾼으로서 몇 생을 사는 동안에 일을 해주고 품삯을 못 받은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전생에 했던 자신의 노력의 대가들이 우연하게 인연이 잘 맞아 떨어져 이 생에서 대가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그냥 된 것 같지만 절대 우연하게 돌아오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보살님들 그냥 여기에 공부하러 왔는 것 같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여기에 오신 보살님들은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앞으로 이 시간은 두 번 다시 안 옵니다. 정말 귀하고 귀한 시간입니다. 이 귀한 시간에 왜 여기에 와 있어요? 왜 불교 공부를 해야 합니까? 일어나는 일들은 필연입니다. 전생의 인과들이 있기 때문에 이 생에서 그냥 일어날 뿐입니다. 기적이라는 것도 우리가 모르니까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목숨을 걸고 기도를 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다 죽어가는 암 환자가 기적적으로 나았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생각 속에는 100% 믿음이 안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100% 믿음이 생기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그렇지만 100% 믿음은 죽다 깨어나도 안 일어나기 때문에 어떤 일이나, 기도를 열심히 했지만 결과는  80% 정도 성취되기도 하고 70% 성취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전혀 안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기복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기도를 하면 99% 정도는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기복이라고 치부하고 있는 부분은 정말 기복이 아니라 연기를 잘 이해하고 내 속에 있는 인식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일 뿐입니다.


기적은 종교의 꽃

그래서 기적을  종교가 갖고 있는 아름다운 꽃중에 하나라고 여깁니다. 평생 절에 다니신 분들은 나름대로 기도를 했습니다. 이래저래 소원성취가 되었기 때문에 누가 뭐라해도 열심히 나옵니다. 부처님의 가피를 못 입을 때 자신이 조금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들면 다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나 평생 손해 본 것 보다는 이익되는게 더 많기 때문에 계속 나옵니다. 누구든지 본질적으로 손해 본다면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기복은 종교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보면 그 본질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의 부분집합입니다. 종교가 갖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속성입니다. 불성의 존재문제와 더불어 종교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 기복이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행은 무명에서 연기로의 이동이다

금강경의  앞부분에 보면 지극한 마음을 일으킨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마음을 내었을 때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수행하고 어떻게 마음을 지키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고  수보리가 부처님께 묻는 구절이 나옵니다.  즉 견성성불이 바로 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의 목적은 견성이며 부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순간부터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부처될려고 애를 써야 미래의 삶이 보장됩니다. 인과는 정확합니다. 절대로 엉뚱한 인과는 없습니다. 본인이 평생 살아왔던 모습을 생각해보세요. 그것은 내가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지었던 업의 덩어리를 이 생에 표현하고 가는 것입니다. 내가 부처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바로 이 순간부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 무명에 가깝던 내 삶을  연기쪽으로 이동을 시켜야 됩니다. 이동시키는 작업이 바로 수행입니다. 어떠한 상황이든 우리는 이 생애서 한 번은 수행해 봐야 합니다.


내 삶의 목표는 부처 

지옥중생은 99% 잘못해놓고 1%로 잘 한 것으로 자신이 잘 했다고 인식합니다. 보살은 99% 자기가 잘 해놓고도 상대방이 마음 아파하면 그 1% 때문에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보살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요? 세속적인 가치도 결국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세요. 자기 스스로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더 잘 압니다.  그래서 무아를 인식하는 상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부처님 법 만난 것이 바로 최고의 행운인 것입니다. 다음 생에 누가 불교공부 하겠어요? 불교공부 했던 사람들이 또 불교공부를 합니다. 이생에서 공부를 잘 해놓으면 다음 생애는 쉽습니다. 전생에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이생에 공부할려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공부했는 것 만큼 해결됩니다. 다음 생애도 지금 공부했는 것 만큼 해결이 됩니다. 해결 못한 부분이 다음 생애 해결된다면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연도 있을 수 있고 행운도 있을 수 있지만 이생에서 해결 안 된 문제는 다음 생에서도  해결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하고 수행을 해야 하며 내 삶의 목표가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세속의 가치와 종교의 가치 

이렇게 진리를 알고 보니 세속에서 추구하는 권력이라든가 명예라든가 부와 같은 세속의 가치도 결국 종교의 가치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목적은 견성이며 부처되는 것입니다. 종교의 본질, 종교의 진정한 의미와 이해, 기복에 대한 내용을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기복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종교의 본질을 잘 이해하면 기복도 종교의 본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종교인으로서 신앙을 더욱 성숙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부처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부처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만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자기 남편만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자기 자식만 공부 잘 하게 해달라고 기도 하겠습니까? 자신과 가족만 배부르면 소말리아와 같은 이웃이 굶주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겠는가? 나만 즐겁고 나만 잘 될 수 있다면 다른 생명은 무참히 죽여도 좋다고 생각하겠는가? 내 자식이 학교에 잘 다니면 청소년범죄와 무관하고 사회윤리가 무너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겠는가? 오늘 어떤 생각을 해놓고 내일 당장 그 일이 이루어지길 바라겠는가? 백년도 되지 않는 이 소중한 삶을 텔레비전이나 보며 술이나 마시면서 그렇게 보내겠는가?  쓸데없는 일에 시시비비하며 그렇게 살겠는가? 지금까지 언급한 것은 부처가 되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을 나열 한 것입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결국은 그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고 목적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생에서 불법 만난 것이 최고의 행운입니다. 그래서 불법을 제대로 알아야겠고 불법을 제대로 알았을 때에는 인생의 목표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내 삶의 가장 소중한 목표는 부처되는 것임을 알고 그렇게 원을 세우고 맹세하고 나면  이 생의 삶이 훨씬 더 행복하고 아름다워집니다. 이 생이 좋아지면 다음 생도 당연히 아름답고 좋아지겠지요. 


미륵의 의미

미륵보살은 도솔천에서 부처되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도솔천에서 수억 겁을 있는 다고 부처가 됩니까? 부처되는 곳은 바로 이 사바세계 밖에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왜 사바세계에서 부처가 되었습니까? 미륵보살도 지금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미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륵입니다. 미륵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열심히 수행정진하고 원을 세우고 있는 사람이면 모두 미륵입니다. 그 중에서 누가 먼저 미륵이 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되려고 목표를 세우는 순간부터 바로 내 속에서 개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내가 갖고 있는 탐진치를 계정혜로 바꾸는 작업입니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바로 무아의 인식이라 했습니다. 무아를 인식하는 만큼 세상이 열리고 부처 세계가 열립니다. 100% 인식한 사람이 부처이고 70%, 80% 로 인식한 사람이 보살이며 1%로 인식한 사람이 지옥중생입니다.  

목표가 부처이기 때문에 끝없는 자비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99% 잘 해놓고도 1% 잘못으로 아! 내가 잘못했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끝없는 긍정적인 마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잘 되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끝없는 긍정적인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님의 마음 

 우리가 부처 되는 목적을 세웠다면 과연 커트라인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대학교 입학 시험에는 커트라인이 있습니다. 어느 점수 이상만 합격하고 그 점수 이하는 떨어집니다. 어떤 시험이든지 커트라인이 있습니다. 부처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에서도 커트라인이 있습니다. 커트라인이 없으면 아무도 공부 안 합니다. 커트라인 없이 다 된다면 누가 공부 하겠어요. 예를 들어 이 생애에서는 공부 한 시간만 해도 부처되고 부처님 당시에서는 10시간씩 공부해야 부처된다고 하면 불공평하겠지요. 부처님 당시에도 10시간씩 공부했던 사람이 부처된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도 10시간씩 공부했던 사람이 부처되는 것입니다. 즉 부처되는 커트라인 합격점은 시대가 변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평가입니다. 상대평가가 아니라 커트라인 이상이 되어야만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무아와 무상을 100% 인식해야 부처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70%만 인식해도 부처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천년 후나 만년 후나 부처되는 합격점은 똑같습니다. 무아와 무상을 100%인식 할 때 부처되는 것이니까 그때 합격통지서가 날아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부처될 수 있는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요 내용들은 근본적으로 불교가 무엇인가? 부처가 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며 우리도 부처 될수 있는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계략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다음시간 부터는 무아 무상 연기 사성제 팔정도를 공부하면서 부처가 되기 위해서, 부처님이 걸어가신 그 과정을  체계적으로 배울 것입니다. 불교의 기본적인 용어와 개념들을 배우게 되면 불교가 쉽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도 내가 알면 쉽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스님들이 도를 깨칠 때 보면 세수를 하다가도 도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기본개념과 용어만 제대로 알아도 불교가 쉬워집니다. 선불교에서 나오는 그 황당한 이야기들이 황당한 것이 아니라 기본개념들을 모르기 때문에 황당합니다. 바로 논리의 초월일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개념을 설명할 때 하나하나 설명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불교에서는 한 줄 설명하고 건너 뛰어버립니다. 논리의 비약 때문에 황당하고 엉뚱한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 본질을 알고 있으면 바로  유추해서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기본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제대로 알면 불교만큼 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본개념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세세생생을 절에 다녀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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