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 중도와 팔정도 > 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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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제7강 중도와 팔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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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8,773회 작성일 21-07-0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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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와 팔정도를 보면 연기가 한층 구체화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겨나지도 않으며 없어지지도 않으며, 

영원하지도 않으며 단절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으며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생에서 수행과 정진을 하지 않고 한평생 살아갈 때 본전치기 밖에 안됩니다. 수행과 정진을 통해서만 이 생보다 더 나은 삶이 보장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고집멸도의 실천방법이 바로 팔정도입니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과 바른 실천이 팔정도를 이루고 있는 덕목입니다. 불교를 공부할 때 중도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중도와 팔정도를 같은 의미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부처님께서 6년 동안 고행하면서 갈비뼈가 다 드러난 고행상을 보았지요. 뼈가죽이 허리에 붙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고행을 하였지만 이 방법으로는 궁극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도를 이룰 때는 고행하는 것도 궁극적인 길이 아니라고 포기합니다. 우유죽으로 체력을 회복하고 마음을 쇄락하게 하여 길상초 위에 앉아 선정에 들어 마지막 도를 이룹니다. 이와 같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지나친 쾌락주의도 아니고 지나친 고행주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는 쾌락도 아니고 고행도 아닌 가장 안정되면서 바른 생각에 의해서 매일매일 생활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중도라 했을 때 쾌락도 버리고 고행도 버린 바로 그 중도의 길이 도에 이르게 하는 바른 길이라는 것입니다. 


실천적 중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를 보면 “벗들이여, 그대들은 두 극단(고행과 쾌락)을 달려가서는 안되나니, 그 둘이란 무엇인가? 온갖 욕망에 집착함은 어리석고 추하다. 범부의 소행이어서 성스럽지 못하며 또한 이로움이 없느니라. 또 스스로 고행을 일삼으면 오직 괴로울 뿐이며 역시 성스럽지 못하며 이로움이 없느니라. 나는 이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과 중지와 등각과 열반을 돕느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고행과 수행을 해보니 결국은 양극단을 버리는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임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보지도 않고 해보지도 않고서 양극단을 버리는 것이 바른길이라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도 한번 해봐야 겠지요. 부처님처럼 갈비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런 고행은 하지 않는다해도 육신이 견딜 수 있는 고행도 해보고 수행을 거쳐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고행을 해도 머릿속에는 번뇌망상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정신상태인 인식능력이 맑고 깨끗하여 선정에 들어야 하는데 육신이 고통스러우면 온갖 잡념만이 일어납니다. 산란한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양극단을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마음상태를 적정과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산란해도 안 되고 번뇌망상이 일어나서도 안 되고 무기에 빠져서도 안 되기 때문에 양극단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사상적 중도 

중도는 실천적 중도와 사상적 중도로 나눌 수 있는데 실천적 중도는 앞에서 이야기한 불고불락 즉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적인 수행관을 비판한 것으로 양극단을 버리는 것이 바로 실천적 중도입니다. 

천태지의가 주장했던 사상적 중도란 쌍차쌍조입니다. 

천태지의는 중국 교종을 확립하는데 정점에 있었던 스님입니다. 묘법연화경을 중심으로 천태종을 확립합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법을 설하시면서 어떤 경전을 어느 시기에 설했을까? 하는 5교8시의 교상판석을 완성합니다. 

그 내용을 보면 “원교란 중도를 나타내니 양변을 막느니라, 마음이 이미 맑고 깨끗해지면/ 양변을 다 막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면/ 두 법을 다 비추느니라. (심개명정 쌍차이변, 정입중도, 쌍조이제)” 실질적으로 마음이 맑고 깨끗해지면 쾌락과 고행을 막고 또 바르게 중도에 들어갈 수 있어서 두 법을 다 비춥니다. 어떤 쾌락도 어떤 고행도 다 그 안에 들어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천태지의는 중도를 쌍차쌍조라고 설명하면서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 중도라고 합니다. 


선불교에서의 중도

마조의 제자인 대주 혜해는 중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마음에 이미 양변이 없으면 가운데도 또한 어찌 있을 것인가? 다만 이렇게 얻은 것을 중도라 이름하니 참으로 여래의 길이니라.”  

대주 혜해가 처음 마조를 찾아가 인사를 드리자 마조가 물었습니다.

  '어디서 왔느냐?'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무엇을 구할려고 여기에 왔느냐?'

  '불법을 구할려고 왔습니다.'

  '너는 어째서 자싱의 보배 창고는 살피지도  않고 다른 곳을 찾아 방황하며 다니느냐? 도대체 너를 떠나 무슨  불법을 구하겠다다는 것이냐? 나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대주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습니다.

  '무엇이 이 혜해의 보배 창고입니까?'

  '지금 나에게 묻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그것은 일체를 다 갖추었으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작용이 자유자재하니 어찌 밖에서 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 말에 대주는 더 이상 의심함이 없이 직관으로  자신의 참본성을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후 6년 동안 마조  곁에서 수행을 한 뒤에 돌아가 ‘돈오입도요문론’ 1권을 지었습니다. 

밖으로만 향해 있던 나침반을 자신의 내부로 돌려 내면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진정한 보배창고인 중도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육신도 현상세계도 내면으로부터 울리는 자기 소리의 인식, 이것을 터득하는 것이 중도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중도 

용수보살이 설명한 팔불이 바로 중도로써 연기를 가장 적절하게 설명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팔불이란 불생불멸, 불상부단, 불일불이, 불래불거로써 용수보살의 연기를 중도라 표현한 가장 좋은 명문입니다.  “생겨나지도 않으며 없어지지도 않으며, 영원하지도 않으며, 단절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으며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는다” 이것이 용수가 중론에서 표현해 놓은 중도, 연기에 대한 표현인 것입니다. 여기서 용수는 연기의 본성은 무자성이다. 그러므로 연기를 공이라고 하였으며, 공이기 때문에 가명이며, 이것 또한 중도라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연기에 대한 공의 철학이 성립됩니다. 대승불교로 체계화되면서 연기가 곧 공이다의 내용이 확립됩니다. 그래서 팔정도가 바로 중도인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팔정도가 무엇인가? 실천을 바탕으로 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들은 팔정도에 다 나옵니다. 팔정도는 다 외워야 합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기본적인 용어는 전부 다 알고 외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숫자 1.2.3.4.5.6. 등을 모르고서 더하기를 할 수 없습니다. 더하고 빼고 나누고 곱하기는 숫자 1.2.3.4 등을 모르고는 할 수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가장 기본적인 용어는 다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들을 보면 연기, 무아, 무상 또는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로써 조금씩 양이 늘어갑니다. 부처님께서는 불교를 아주 묘하게 가르치십니다. 팔정도를 보면 정견, 정사, 정어 등 말 순서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순서대로 외워놓으면 실천하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좋습니다. 


팔정도 


내 나이 스물아홉에 집을 떠나

유익함을 찾기 어언 51년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닦고 

조용히 사색하며 살아왔다네

이 길을 떠난 수행자의 삶은 없는 것이네 

길은 팔정도 진리는 사성제 

욕망을 다스림에는 법이 최고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이 길 뿐 다른 길은 없네


이 시는 부처님이 45년 동안 전도를 마치시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면서 읊은 것입니다. 

팔정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된 수바드라와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 45년의 전도를 마무리 짓고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기 직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때 늙은 수행자 수바드라가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평소 품고 있던 의문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라쌍수의 숲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아난은 부처님께서 지금 매우 피곤하고 병을 앓고 계시니 번거롭게 해선 안 된다며 청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수바드라는 큰 소리로 부처님을 만나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진리를 알고자 찾아온 사람을 막지 마라. 내 설법을 듣고자 온 것이다. 그는 내 말을 들으면 곧 깨달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열반에 드는 순간에 찾아온 수바드라에게 설법을 들려주셨고,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때 부처님께서 수바드라에게 하신 말씀은

천 년 후나 만 년 후에도 부처되는 방법은 팔정도의 수행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정견 (그림)

팔정도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정견입니다. 정견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정견은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는 순간 생기는 견해입니다. 우리는 정견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정견의 의미는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여 사성제와 연기법의 도리를 바로 이해하며 선악을 구별하고 인연따라 나타나는 법을 보는 것이고, 정법을 지키는 것이며 정견을 가지는 것이다. 진리와 진실을 바탕으로 한 보편타당하고 편견이 없이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정견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까지 공부한 전부가 정견인 것입니다. 무아와 무상과 연기가 바로 정견입니다.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고 연기를 이해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함께 일어나는 생각이 정견인 것입니다. 사성제는  정견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느냐?’ 를 끊임없이 생각하다보면 원인을 정확하게 판단하게 되고 거기에 대한 처방을 할 수 있겠지요. 결국 정견이 생길 때 가장 합리적인 처방이 나옵니다. 정견이 안되면 다른 사람에게 상담을 해서 정견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하여 정견이 생기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집니다.

이 정견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중국 선불교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조주의 이야기입니다. 조주는 선불교의 천재 중에 한 사람입니다. “뜰 앞에 잣나무니라”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 하는 화두를 잘 알고 있지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화두 중에 조주에게서 나온 것이 많습니다. 

조주가 젊은 시절에 스승인 남전선사 밑에서 열심히 수행하고 있을 때입니다. 조주는 짓궂고 유머가 넘치는 젊은이였습니다. 출가하여 수행을 할 때에는 나름대로 직책이 주어집니다. 어떤 스님은 법당 청소를, 어떤 스님은 마당을 이런 식으로 직책이 주어집니다. 그 당시 조주스님의 직책은 부엌에서 불을 때는 화부였습니다. 

하루는 저녁공양을 한다고 불을 떼면서 부엌에 불을 냅니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워오르고 불길이 솟아오르자 사람들이 “불이야” 하면서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조주스님은 부엌 안에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그러자 밖에서 나오라고 야단입니다. 그러자 스승인 남전스님도 빨리 밖으로 나오라고 하는데 조주는 부엌 안에 앉아서 바른 말 한마디 일러주면 나갈 테니까 너희가 나를 밖으로 끄집어 낼려면 바른 소리를 한마디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안에서 불에 타 죽을 것이다. 하면서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조주스님을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해서 온갖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조주는 전부 다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스승이 돌맹이 하나를 창틈으로 던져줍니다. 옛날 부엌에는 창틀이 있지요. 창틀 사이로 돌맹이를 넣어줍니다. 

“조주야 받아라” 하면서 돌맹이를 던져 줍니다. 그러자 조주스님이 “쓸만한 놈이 하나 있구나” 하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옵니다. 

선사들이 하는 선문답은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만일 법당 안에 갇혀 있다고 했을 때 법당 안에서는 밖으로 나갈 수 있지요. 안에서는 문을 잠글 수가 없습니다. 조주 자신은 얼마든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한 뒤 나온 것 뿐입니다. 스님의 깨달음에서 나오는 모든 이야기들은 정견으로 다 이루어집니다. 

 남악회양선사가 육조혜능을 찾아 갔을 때 “어떤 물건이 왔느냐?”라 하자 남악선사는 대답을 못합니다. 8년 동안 수행을 하고 깨치고 나서 다시 혜능을 찾아갑니다. 혜능이 다시 물었을 때 “스님 어떤 한 물건이라도 맞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바로 정견이란 끊임없이 찾을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으로 화두로 깨친 것도 정견이 되며,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여 연기를 터득한 데서 나오는 생각도 정견입니다. 

마음을 깨친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바른 생각, 바른 견해가 다 포함이 됩니다. 


정사 

생각인 정사부터 나와야 하는데 정견이 먼저 나왔습니다. 정견이 되고나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래서 정견이 되기 위해서 바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정사는 바르게 생각하라 입니다. 

“번뇌, 망상과 삼독심에서 벗어나 주관이나 편견에 치우지지 않고 진심과 원한이 없는 바른 생각, 바른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정사가 됩니다. 이 정사가 되면 삶 자체가 바르게 연결 될 수가 있습니다.

무명의 속성은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무명의 속성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탐진치입니다. 탐진치를 크게 나누면 탐은 식욕, 형상이 있는 것에 대한 욕망이고 진은 색욕으로 감정적인 욕망, 치는 수면욕, 치에서 무명의 상태가 일어납니다. 치심에서 탐심과 진심이 나옵니다. 명의 속성은 밝음과 편안함입니다. 밝음과 편안함에서 바른말이 나오고 바른행동이 나옵니다. 바르게 생각을 하는 바탕에서 바른행동이 이루어집니다.


정어 

바르게 말하면 정어가 되며 바르게 행위를 하면 정업이 이루어집니다. 바른 생각만 되면 정어와 정업이  이루어지겠지요. 정어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고 바른 생각, 바른 마음을 갖게 하는 바른말,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욕하는 말을 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말 이간질 하는 말을 하지 않으며 허황된 말을 하지 않는다” 입니다. 법구경에 보면 ‘바른말 한마디가 참된 공양이구요’ 부처님께 올리는 가장 좋은 공양은 바른말 한마디입니다. 이 바른말 한마디가 정사가 되지 않으면 정어도 되지 않겠지요. 정사가 되면 정어가 되고 정어가 되면 바른 행위가 나옵니다. 


정업 

바른 생각, 바른 마음으로 하는 행동이 정업입니다. 

바른 생각과 바른 마음은 바른 행동을 하게 하고, 바른 행동을 계속하면 바른 습관이 생기게 되며, 바른 습관은 바른 생활을 하게 하고, 바른 생활은 바른 인생을 살게 합니다. 바른 생활은 현생에서도 내생에서도 복을 받게 합니다. 

학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것은 정업을 하라는 것입니다. 


정명 

행위가 지속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바른 행위의 연속이 삶입니다. 그래서 정업이 되면 정명인 바른 삶이 됩니다. 바른 생각인 정사부터 정어가 되고 정업이 되고 정명이 됩니다. 정명의 뜻을 보면 “십 악업을 멀리하며 또한 남에게 이익이 되는 바른 일로 직업을 삼아 바른생활을 영위” 하는 것입니다.

바른 삶이 정명입니다. 우리의 삶은 평생 바르게 살아도 본전치기 밖에 안 됩니다 이 생에 힘들게 받은 사람 몸을 본전치기보다는 나은 삶을 살아야겠지요. 바르게 살아가는 것까지는 기본적으로 본전치기 삶이고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정정진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정정진 

이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정진할 것인가? 정진하지 않는 삶을 평생 살아간다면 한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생에서 정진 한번 해보고 죽어야합니다. 그 정진을 바탕으로 다음 생은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세생생 살아온 습에 의해서 사성제로 하루에 한 문제씩 푸는 것도 안 됩니다. 정진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집니다. 정진은 어떤 문제를 놓고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같은 행위를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한 시간 씩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 한 시간이 바로 정진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하루 1시간 참선을 하겠다 하루에 절을 500배 하겠다고 정합니다. 그런데 시간을 정하지 않고 어떤 때에는 오전 10시에 했다가 어떤 때는 오후 8시에 했다가, 새벽에 했다가 멋대로 바꾸어가면서 하는 것은 정진이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정해 놓지 않고 내멋대로 하는 것은 정진이 아닙니다. 가장 간단하고 쉬운 것이지만 평생을 살아도 하기 어려운 것이 정진입니다. 

부처님의 법은 인연법입니다. 길 가다가 옷깃 한번 스쳐도 500생의 인연이라 했지요. 우리가 불교방송을 통하여 불교 공부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인연입니다.  공부하는 인연으로 다 견성성불 할 수 있습니다. 견성성불 하는 인연만 지어 놓으면 그 인연이 조건을 성숙하게 하며 그에 따른 정진하는 인연까지 성숙하는 것입니다. 

어느 생에서 한 번 정진하는 맛을 들여놓으면 그 힘에 의해서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정진도 하고 견성성불도 하게됩니다. 이렇게 정진해 놓으면 다음 생에 쉽게 정진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집니다. 지금 이생을 살아가는 모습은 99.9%가 전생에 했던 행위 그대로입니다. 우리를 바꾸는 원동력은 정진에 의해서 0.1%만 변해도 됩니다. 

일 년이 힘들면 20일도 좋고, 100일도 좋습니다. 백 일만 제대로 할 것 같으면 업을 바꾸어 갑니다. 우리의 업을 바꾸는 계기가 100일입니다. 백 일만 참선 할 수 있으면 평생을 할 수 있습니다. 세세생생 할 수 있습니다. 부처되지 말라고 해도 부처됩니다. 

그런데 백 일 공부하기가 정말 어려워요. 처음 공부할 때 매일 30분이라도 한번 해보라고 한 것도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제대로 한번 해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30분씩 참선을 하든 108배 절을 하든 30분을 100일 만 해보세요. 그 다음에는 하지마라 해도 돈 내고 할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이 내 습을 바꾸는데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100일만 잘 버티면 습을 바꿀수 있습니다. 습을 바꾸는 것은 목숨 걸고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어렵습니다. 기도를 하는 도중에는 끊임없이 일이 생깁니다. 100일을 성취하려면 목숨 걸고 해야합니다. 백 일을 못 채우고 70일을 했다면 그것만 해도 큰 일을 한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끊임없이 정진하겠다는 이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그 정진력에 의해서 우리의 삶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진함으로써 “이미 생긴 악을 제거하며/ 수억 겁 동안 살아오면서 생긴 나쁜 마음 탐진치를 제거하며/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며/ 내가 정진을 하여 내속의 악한 세포가 자라날 수 없으며/ 탐진치가 생겨날 수가 없고, 이미 일어난 선한 생각은 더욱 확대해 나가도록 하며/ 나한테 선한 업들이 정진을 하니까 점점 커지고 아직 일어나지 않는 선한 생각은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정념(위빠사나) 

불교공부하면 두 가지 큰 길을 만나게 됩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입니다. 한국 불교는 대승불교, 선불교 중심입니다. 그래서 선정에 드는 사마타 중심의 불교입니다. 남방에서 들어온 위빠사나 불교는 한 때 상당히 유행했습니다. 누구는 위빠사나가 더 맞다고 하고 누구는 사마타가 더 맞다고 합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부처님이 가르치신 두 가지의 정진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정념하는 것은 위빠사나이고 정정하는 것은 사마타입니다. 사마타의 지는 천태지의선사가 쓴 지관의 지입니다.

위빠사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지관에서 관조하는 것, 관찰하는 것이 관입니다. 마음속에 바른 지혜를 일으켜서 일체 대상의 실상을 그대로 관하는 것이 관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자세히 관찰하여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을 집중시켜서 아예 산란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지입니다. 그래서 지가 더 중요한 것도 아니고 관이 더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지와 관 두 개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사성제를 지관을 통해서 말 할 때는 관입니다.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느냐 하는 그 원인을 찾아가는 것이 관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와 부딪치면서 성 내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왜 성 내는 마음이 일어나는지 원인을 찾고 관찰하는 것은 위빠사나의 관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사성제를 제대로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위빠사나입니다. 

결국 불교는 위빠사나와 사마타의 두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두 기둥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됩니다. 정념은 위빠사나의 관이고 정정은 사마타의 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를 다 할 때 깨달음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정정(사마타)   

마음을 굳게 가지고서 일체의 대상이나 내부의 산란한 마음에 동하지 않고 특정한 대상에 집중시키는 것이 사마타의 지입니다. 스님들이 참선할 때 “이뭣고”하지요. 모든 생각을 여기에 집중시키는 것이 바로 사마타입니다. 

처마 밑의 돌이 한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에 구멍이 뚫립니다. 이와 같이 한 생각에 모든 것을 지속적으로 집중하는 것이 사마타입니다. 

팔정도에서 정사는 바르게 생각하면서 바르게 말을 하고 바른 행위를 하는 이것이 바른 삶이 되어 본전치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 단계 나은 삶을 위해서는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정정진을 해야 합니다. 정정진은 하나는 정념이고 하나는 정정입니다. 정념과 정정이 100% 이루어진 것이 정견입니다. 부처님께서 왜 정견을 제일 덕목으로 내놓았는지 이해하겠지요. 

연기로부터 나오는 인식, 생각이 정견입니다. 팔정도의 일곱 개 덕목을 다 터득하고 난 후에 나에게 일어나는 것이 바른 견해 정견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팔정도를 실천함으로써 부처가 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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