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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제8강 사성제의 체계와 연기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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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8,735회 작성일 21-07-0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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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연기가 어떻게 사성제로 체계화 되느냐?  연기가 사성제로 체계화 되는 과정은 부처님께거 가르치신 불교교리, 불교의 전반적인 부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부분에 속합니다. 그리고 이번 시간에는 연기가 사성제로 체계화 되는 과정과 또 사성제를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오늘의 목표입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공부한 것을 정리해 보면 기본적으로 우리는 존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존재에 대한 인식문제, 어떻게 존재하는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본속성이 무아고 무상이라 했으며 무아와 무상인 것을 모르는 것이 무명이라 했고 그러면 무아와 무상을 아는 것이 명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것이 무명이고 이것을 아는 것이 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고 아는 것이 연기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불교체계화는 근본적으로 무아와 무상에 대한 인식이 연기가 되고 이것을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불교의 교리체계인 삼법인을 통해서 불교화가 되는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해 나갈 것입니다. 무아와 무상과 연기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사성제로 체계화 되는 과정을 공부할 것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 (그림)

 무아와 무상을 모르는 것은 무명이라 했고, 아는 것을 연기라 했습니다.

사성제는 고집멸도입니다. 무아와 무상을 모르는 무명에 대해서 고와 집의 문제, 무엇을 모르고 있는 것인가? 고입니다. 무엇 때문에 모르는가? 집이 문제입니다. 모르는 이유가 집이고, 모르는 이유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고였습니다. 여기서 고집멸도에 대해 도식화해보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무명을 아는 상태가 바로 멸이 되겠지요.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고 멸에 이르는 방법이, 무명을 아는 상태는 멸이 되고 멸에 이르는 방법이 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두 세계를 나누어 놓고 보면 이것저것 다 우리가 속한 현실세계이고 이 세계는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세계입니다. 즉 깨달음의 세계로써 고집멸도는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고전적인 가치가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의 삶속에서 실천해야할 가장 중요한 불교의 실천론입니다. 여기서 존재의 인식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이며, 다른 하나는 인식하는 이 존재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불교를 안다고 했을 때 존재에 대한 인식론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연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연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12처 18계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육육법 연기가 처음으로 성립됩니다. 그다음 우리의 몸뚱이는 어떻게 생겼을까하는 오온연기를 설명합니다. 연기가 어떻게 끊임없이 생사를 윤회하는가? 육육법 연기는 시간에 대한 연기, 오온연기는 공간에 대한 연기, 12연기는 시공간이 통합된 연기입니다. 부처님께서 내 법은 점점 더 깊은 바다로 빠져들어 간 것 같다고 설명한 것이 바로 육육법 연기와 오온연기와 12연기에 대한 이해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인식론 구조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부분입니다. 그러면 존재의 인식론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행해야 하고 실천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바로 육육법 연기, 오온연기를 체득하는 방법인 실천론이 사성제의 실천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인식구조의 상부구조인 이성적인 체계가 연기입니다. 이것을 실천하는 방법론은 사성제입니다. 부처님께서 연기를 터득하고 깨닫기 위한 실천방법으로 팔정도를 설명하셨습니다. 제일 중요한 정견, 바르게 보라.입니다.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정견입니다. 

불교의 오랜 역사 속에서 부처님 당시 근본불교가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모든 백성들이 불교를 믿게 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지식인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때는 사성제 계급이 철저했습니다. 노예계급, 서민계급, 정치계급, 종교계급, 불가촉천민이 사성제 계급입니다. 인도에서 사성제 계급은 지금도 존재합니다. 부처님께서 제일 먼저 타파한 것이 사성제 계급입니다. 그 당시 타파되었던 사성제 계급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존재하는 곳이 인도입니다.

 많은 불가촉천민과 노예와 서민들에게 불교를 전하려고 하니 쉽지가 않습니다. 배우지 못한 서민계급과 노예계급을 포함한 전 백성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불교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새롭게 탄생한 불교가 바로 대승불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지금 불교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부처님 당시에 출발했던 근본불교 보다는 대승불교와 선불교에 바탕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대승불교에서 수많은 사람이 연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접할 수 있을까? 여기서 연기는 우리 생활 속에서 이해되는 공으로 표현됩니다.  연기는 우리의 실제 생활 속에서 터득할 수 있는 새로운 진리가치인 공을 창출해 나갑니다. 우리가 “보살님, 보살님” 하지요. 불교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인 보살이 대승불교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 보살입니다. 보살의 정의는 “상구보리 하하중생”하는 인간상입니다. 위로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정진하며 아래로는 우주에 있는 모든 가엾은 중생을 부처님의 세계로 이끌어가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이 바로 보살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보살과 새로운 가치체계인 공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불교의 전래 시기 

대승불교로 오면 근본불교에서의 팔정도가 육바라밀로 바뀝니다. 육바라밀이 실천방법인 도가 됩니다. 보시, 지계, 인육, 정진, 선정, 지혜가 육바라밀입니다. 팔정도의 여덟 가지 가르침이 여섯 가지의 가르침으로 좀 더 적극적이고 실천론적으로 바뀐 것입니다. 여기서 근본불교가 대승불교로 되면서 여러 나라로 전파됩니다. 한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입니다. 부처님 당시의 근본불교가 아니라 대승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입니다. 중국에는 백마사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래됩니다. AD 64년 경입니다. 64년 경이면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후 500년이 흐르면서 불교는 근본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넘어갔을 때입니다. 중국에 전래된 대승불교가 그대로 한국에 전래됩니다. 


대승불교와 선불교

일본에 전래된 불교는 밀교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옴마니반메훔’ 같은 주술적인 불교가 강합니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500년 경입니다. 500년 쯤 되니 인도불교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승불교에서 밀교로 넘어간 상태입니다. 그 밀교의 흐름이 중국으로 건너가 일본으로 전래 될 때 대승적인 불교보다는 밀교적인 성향이 강한 불교가 일본으로 전래됩니다. 이렇게 전래된 불교가 중국불교의 교리로 개발되고 발전하여 산스크리트어로 된 모든 경전이 중국의 한문으로 번역됩니다. 지구상에서 일어난 대표적 사건 중의 하나가 불경의 번역사업 입니다.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그 많은 경전의 번역이 이루어지면서 중국은 교종의 꽃을 피웁니다. 이 교종의 꽃을 피운 끝에서  만들어 낸 것이 선불교입니다.

바로 연기, 공, 이것이 불교의 근본적인 깨달음을 위해서 선불교로 탄생합니다.

스님들은 참선 수행을 할 때 화두를 받습니다. 선불교의 꽃인 새로운 진리를 체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화두가 등장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연기, 공, 화두 실천방법인 팔정도, 육바라밀입니다. 선불교에서는 우리에게 “참선을 하라”고 합니다. 복잡한 것보다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그래서 육바라밀 대신 계정혜 삼학으로 바뀝니다. 계정혜 삼학이 바로 선불교의 실천방법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출발한 근본불교가 대승불교를 거치면서  중국에 이르러 선불교의 꽃을 피웁니다.

약 7세기부터 12-13세기까지 중국에서 꽃을 피웠던 선불교는 지구상 가장 화려한 정신문화의 한 장을 마련합니다. 불교의 흐름이 근본불교, 대승불교, 선불교로 흘러간 것입니다. 육바밀은 누가 어떻게 이야기 하더라도 대승불교에서 가르친 진리구나, 계정혜는 선불교에서 이야기한 진리인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의 실천에 대한 하부구조이고, 상부구조인 인식론에 대한 구조는 연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대부분의 구조는 대승불교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존재에 대한 인식론인 연기에 대한 이해가 없어진 것입니다. 엄밀하게 불교의 실천이란 시대에 따라 항상 변화할 수 있습니다. 수행방법과 실천방법이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지만 근본불교의 모습을 지금은 다 잊어버리고 망각해 버렸습니다.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부처님 법 만나서 내가 부처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이 부분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이 인식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렇지만 이 육신은 저절로 움직입니까?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정신적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만큼 움직이게 됩니다. 정신적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만큼 실천방법도 병행되어야합니다. 선불교에서도 대승불교에서도 끊임없이 누구든지 이야기 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 지금의 불교 속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리고 없습니다.


대승불교의 두 줄기, 중관과 유식 

인도에서 한국으로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되고 일본으로 전래될 때 불교를 이루고 있는 이 부분들이 왜 미약해져 버렸습니까? 실제적으로 불교공부를 해 보면 부처님의 깨달음과 부처님에 대한 찬탄과 은혜로움, 그 은혜가 가장 큰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실천은 아무것도 몰라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이해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어려운 부분을 체계화 해 놓았습니다. 연기에 대한 인식체계가  불교의 큰 흐름인 중관과 유식입니다. 중관이란 바로 깨달음을 공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내용을 공이라 하면서 공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교리를 전개해나간 것이 중관파입니다. 

안이비설신의의 ‘의’에 의해서 생기는 우리의 인식에 대한 문제는 육식인 식입니다. 식을 끊임없이 연구하면서 우리의 본질인 마음을 연구하고 공부해가는 것이 유식입니다. 두 흐름이 결국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교종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이것이 불교의 2600년 흐름을 일괄적으로 전개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해를 공부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2600년 불교가 어떻게 흘러왔느냐 하는 것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흐름을 이해하고 나면 미아가 되지 않습니다. 스님이 어떻게 교리를 설명하더라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불교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신에 의해서 존재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를 이루고 있는 역사입니다. 불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역사적인 관점입니다. 어떤 경전이든지  내용 속에는 시대성과 사회성과 역사성이 들어있습니다. 부처님의 진리는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르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역사성을 이해하면 경전의 이해가 쉽습니다. 일반적으로 불교를 자비와 지혜의 종교라고 합니다.  인식론의 상부구조를 이루고 있는 초역사적인 불교의 진리가 지혜라면 자비는 이 땅에 실현되는 사회성이 바로 자비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 합니다. 또 부처님께서 가장 많이 사용한 말씀이 자비광명입니다. 자비광명이란 말에서 자비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면 자비를 알게 됩니다. 자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광명입니다. 대승불교의 교리의 어려움을 선불교로 넘어오면 간단하고 명료하게 표현됩니다. 선불교에서는 마음을 이해하고 바로 직관적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아직도 여인을 등에 업고 있는가

탄산스님이 제자 스님과 길을 떠납니다. 3개월 안거를 하고 3개월 유행을 떠납니다. 어떤 한 지역을 지나가는데 물이 불어난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다리가 있었던 자리가 물속에 잠겨 버려서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어떤 아주머니가 옵니다. 아주머니도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데 탄산스님이 “아주머니, 제가 건너드리지요” 하면서 스님은 여인을 업고 강을 건너갑니다. 강을 다 건너서는 여인을 내려놓고, 여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마을로 가버리고 스님은 산속으로 갑니다. 30분 동안 아무 말도 없이 가다가 제자 스님이 탄산스님에게 묻습니다. “스님! 우리는 출가한 출가자로 색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스님은 어찌 여인을 업고 강을 건널 수가 있습니까?” 하니까 탄산스님이 “그래! 나는 벌써 강을 건너고 여인을 내려놓았는데 스님은 아직도 그 여인을 등에 업고 있어요?” 하면서 한마디 합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가 선불교에서 말하는 화두의 한 예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복잡한 마음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선불교에서는 화두로 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고집멸도가 이루어지는 전반적인 2600년 불교의 역사를 이야기 해보았습니다. 고집멸도는 실질적으로 끊임없이 우리의 삶속에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집_왜 그 일이 일어났는가

고집멸도를 이해하는데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내일 죽는다고 했을 때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하겠습니까? 시간이 흘러서 내일이 되고 우리는 마침내 죽습니다. 내일 죽는 우리는 잠을 실컷 자겠어요?

무엇을 실컷 먹겠어요. 어쩔 수 없이 내일 죽는다 해도 매일 하던 것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우리가 공부해야 하고 수행을 해야 하고 정진을 해야 하느냐 하면 내일 죽는다 해도 오늘 하는 일은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백 년 후에 죽는다 해도 우리는 늘 하던 것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바로 알고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집멸도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집”입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나느냐?

이것은 부처니께서 “왜 죽어야 하나?” 하는 문제로부터 어마어마한 불교를 만들어 냅니다. “왜 죽어야 하느냐” 이 문제가 부처님의 평생 고민이었는데, 이것과 똑같이 왜 이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불교인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명제로 어렵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를 써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하루에 생기는 일 중에 하나를 고집멸도로 풀어봅니다. 

 24시간 동안 나에게 일어나는 많은 문제 중에 한 가지를 생각하여 고집멸도로 풀어봅니다. 

예를 들어 어느 집에서든지 고3 수험생이 있습니다. 오늘은 고집멸도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고3인 아이가 원하는 대학에 갈려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다. 떨어졌다 하는 것이 “고”이지요. 과제의 제시입니다. “고”란 것은 나타난 현상으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와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고 했을 때, ‘고’란 나타나는 현상 과제의 제시입니다. 그래서 ‘고’라는 것은 대학시험에 떨어진 상태입니다. 그 다음 ‘집’은 무엇입니까? 왜 떨어졌는가? 이유를 생각하는 것이 집입니다. 자식은 자식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어머니는 어머니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요. 엄마는 수능 백일 입제기도를 이절 저절에 올려놓고 열심히 했습니다. 백 일  수능기도를 부쳐놓고, 안 가본 절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했는데도 떨어졌어요. 떨어지고 난 뒤에 가만히 생각하여 이유를 아는 것이 ‘집’이 됩니다. 왜 떨어졌는가? 기도는 누가 합니까?  백중기도 49제 천도를 할 때, 결국 진정으로 천도시키는 주체는 누구라 했습니까. 본인입니다. 다른 누가 해줄 수 없어요. 본인과 가장 가까운 자신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주체는 누구였습니까? 기도의 주체는 인연과에서 볼 때 스님이 기도를 해 준 것은  연에 해당합니다. ‘과’는 시험에 떨어진 상태. 스님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연’ 이지요. 내가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인입니다. 자식이 공부 열심히 하고 내가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인’입니다. 가장 중요한 인은 기도비만 열심히 갖다 주고 친구들과 계모임을 하고 노래방에 가고 하면서 어머니인 나는 할 것을 다하면서 기도 열심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시험에 떨어지고 난 뒤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스님은 열심히 염불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연’은 무엇이 잘못인지 모릅니다. 가장 중요한 주체인 ‘인’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기도는 꼭 이루어진다

그래서 아이가 재수를 합니다. 사실 고3 수험생이 있다면 매일 108배 절을 하고 30분씩 참선을 해서 정성껏 기도를 합니다. 이제 제대로 기도를 한번 해봅니다. 매일 새벽5시 일어나서 꼭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30분 정도 절 하고 참선하는 공부를 진정으로 합니다. 일 년 동안 모임을 끊고 고3을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또 집에서는 밤12시까지 윙윙거리는 TV를 끄고 기도할 수 있는 상황을 갖추어 놓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30초 부처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30분 108배 절을 하고, 15분 참선을 한 마음으로 쌀을 씻어 밥을 해보세요. 여태까지 아무 생각 없이 눈비비고 일어나서 수험생에게 해주었던 밥이 아니라 정성껏 깨끗한 마음, 거룩한 마음으로부터 지은 그 밥을 먹는 사람이 딴 짓을 하겠습니까? 어떤 기도든지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다. 기도는 원하는 대로 결과가 나타납니다. 문제는 내가 원하는 기도는 90인데 20, 30만큼의 공을 들이고 그 기도가 들어진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도둑놈 심보입니다.  무아 무상을 이야기 하면서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도둑놈 심보를 버리는 문제에서 내가 손해 보는 것이 지나고 보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무아와 무상을 잘 이해하면 해결된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감응하게 되어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기도는 꼭 감응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거룩한 밥을 지어서 공양을 올립니다. 수험생이 그 공양을 먹고 독서실에서 학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수험생이 하루는 몸살이 나서 일찍 집으로 옵니다. 지난 해 고3일 때 어쩌다 집에 일찍 들어와 보면 어머니가 안 계시던지 아니면, TV를 시청하느라 고3 아들에게 건성으로 대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변하여 집에 들어와 보니 어머니가 거실에 단정하게 앉아서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습니다. 밤 12시쯤 독서실에서 돌아와 보니 어머니께서 아주 정성스럽게 기도를 하고 있어요. 이런 모습을 본다고 했을 때 기도의 감응은 어떤 형태로든지 전달이 됩니다. 공부라는 것이 내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면 목슴 걸고 공부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꼭 해야 된다고 생각했을 때는 목슴 걸고 공부를 합니다.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 속에 황소가 담을 넘어가고 도둑놈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담을 넘는 상황 말입니다. 극한 상황이 되면 그 담을 뛰어넘게 됩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우리 눈앞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이 진정으로 어머니가 기도를 한다면 수험생 아이가 분명히 무엇인가를 느끼게 되어 180도 달라집니다. 기도의 감응이라는 것도 어느 순간 어떻게든 전달이 됩니다. 어머니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한다고 아이에게 미리 이야기 해버리면, 그 기도가 잘 되겠습니까?  혼자서 알게 모르게 지극하게 하면 어떤 형태로든지 전달이 됩니다. 그래서 ‘집’ 왜 시험에 떨어졌는가. 고3 수험생을 위해서 내가 목슴을 걸고 지극정성으로 일 년 동안 한번 기도를 하면 바로 그 기도가 어느 순간 감응이 되어 수험생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바로 ‘멸’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게 됩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서너 번 정도는  목숨을 걸고 어떤 일을 합니다. 반드시 감응이 됩니다. 자신이 기도의 원을 얼마나 크게 잡느냐에 따라 감응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말 목슴걸고 해야 합니다. 100M를 달릴 때도 목숨 걸고 달려야 하고 40Km 마라톤을 할 때도 목숨을 걸고 달려야 하고 한 평생 살아가는 것도 목숨 걸고 달려야 합니다. 어머니가 진정으로 기도를 해보니 결국은 고집멸도에 의해서 해결됩니다. 


사성제로 문제 풀기 

우리에게는 매일매일 일어나는 문제가 있습니다. 집에 큰 아이와 작은 아이가 있어 아침에 나갈 때 둘이 토닥거리면서 싸움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큰아이는 큰아이대로 꾸중을 하고 작은아이는 작은아이대로 꾸중을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왜 둘이 싸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처럼 주위에는 친구사이에 말다툼, 직장에서 서로 직접 풀지 못했던 일, 집안에서 남편과의 문제, 자식과의 사이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왜 그 일이 일어났느냐? 하루에 한 문제씩 이 사성제로 해결하라고 한 것 입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연습하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열심히 다니는 학생들이 학교에서도 공부 열심히 하고 집에 오면 예습 복습 열심히 합니다. 왜 예습 복습을 합니까? 공부를 더 잘하려고 배운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예습복습을 합니다. 똑같습니다. 어떤 공부든지 예습과 복습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부처되는 공부도 매일 살아가는 이 삶이 예습 복습의 장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예습 복습장인데 이 예습 복습을 어떻게 하느냐, 하루에 한 문제씩 풀고 넘어가면 시간이 지난 뒤 보면 우리는 공부의 진척을 보게 됩니다.


매일 한 문제씩 풀어보세요 

선불교의 화두를 한번 들어보겠다고 앉아 있으면 죽다 깨어나도 안 들립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근본적으로 왜 그 일이 일어나느냐 이 문제를 한 번도 고민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내몸 속으로 들어와 머릿속을 한 바퀴 회전하여 3초후에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나느냐를 생각해 볼 때 거기에 대한 최선의 방법이 떠오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가 부처되는 방법인 사성제, 고집멸도를 가르친 것입니다. 어떤 현상이든지 나타나는 것은 고입니다. 아이들이 다툰다는 현상은 과제의 제시입니다. 왜 다투었느냐 생각하는 것이 집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현명하게 해결해 주는 실천방법이 도입니다. 두 아이가 마음 상하지 않고 흡족하게 해결해 주는 것이 도입니다. 친구든지 직장에서 남편 혹은 어떤 문제에서든지 고집멸도에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한 문제씩 꼭 고집멸도로 풀어나가야 합니다. 반드시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부처가 되지 못합니다. 불교를 많이 알아도 거기에 따른 실천이 없으면 허공일 뿐입니다. 내가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는 것이 허공을 조금씩 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불교에 대한 이론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만큼 실천에 옮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실천에 옮기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 고집멸도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겠다고 마음을 먹는데, 오늘은 그만 여섯 시에 일어났다 했을 때, 왜 6시에 일어났느냐 이것도 하나의 고민이 됩니다. 무엇 때문에 6시에 일어났느냐를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낮에 친구와 만나서 실컷 놀았던 것도 원인이 되고 저녁에 TV시청을 늦게까지 한 것도 그 이유가 됩니다. 그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면 다음부터 안하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느냐를 항상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불자 되는 방법이며 불교를 이해하고 풀어나가는 핵심이 됩니다. 


사성제로 문제풀기 예1 

구체적으로 수행상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부처님과 같이 수행하고 있던 비구의 이야기입니다.

붓다께서 비구들에게 묻습니다.

붓다 : 고행을 해서 마음의 편안을 얻었느냐? 비구 : 얻지 못했습니다.

붓다 : 무엇 때문에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느냐? 비구 : (대답을 못합니다)

붓다 : 너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보아라. 그래서 너의 마음의 편안을

       얻지 못한 이유는 집착 때문이다.

비구 : 잘 모르겠습니다.

붓다 : 너의 마음의 상태를 잘 살펴보아라, 집착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 탐심, 진심, 

       치심이 그것이다. 너의 마음은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우냐.

비구 : 아닙니다.

붓다 : 너의 마음은 네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화내는 마음에서 자유로우냐?

비구 : 그렇지 않습니다.


예문의 상황을 보니 부처님께서 왜 마음이 집착하느냐? 탐심, 진심, 치심을 마음 가득 채워놓고 수행을 한다고 앉아 있으니 공부가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어떻게 바르게 생각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다

그 다음 어떤 비구가 천당에 태어나려고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천당에 태어나려고 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바라문교를 믿고 있는 수행자도 최고의 목표가 천당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라문교에서는 살아 생전에 온갖 나쁜 짓을 다하고 죽고 난 다음 바라문이 천당에 태어나라고 기도를 하면 천당에 태어난다고 가르칩니다. 이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천당에 태어납니까? 기도를 해주면 천당에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회의를 느끼고 부처님을 찾아옵니다. 부처님이 그 바라문을 데리고 뒤뜰 연못가로 갑니다. 연못가에 가서 돌을 던집니다. 돌이 가라앉습니다. 부처님께서 “바라문이여,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고 물으니 바라문이 “돌이 가라앉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 바라문이여 돌아 떠라! 돌아 떠라! 기도를 하면 돌이 뜨겠느냐?” 아닙니다. 돌은 무거운 속성 때문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다. 바라문이여” 돌아 떠라 돌아 떠라 아무리 기도해도 저 돌은 무거운 속성 때문에 가라앉는다. 만약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나쁜 일을 했다면 나쁜 과보로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질 것이며 만약 그 사람이 착한 선업을 쌓았다면 천당에 태어날 것이다. 바라문이여, 어떤 종교를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곧 우주의 진리다.“라고 하신 내용이 바로 무아, 무상, 연기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당시에 바라문들이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었던 것입니다.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살아가느냐 하는 이 부분이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가르치신 진리의 핵심입니다.


사성제로 문제풀기 예2 

다시 어떻게 하면 천당에 태어날 수 있는지 어떤 비구가 부처님께 묻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고행을 하고 수행을 하는 목적은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지 천당에 태어나려고 하는것이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내가 추구하고 있는 목적이 잘못 되었음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 “고”의 성제이다. 바로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 “고”의 성제인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새롭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와 집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시 예를 보면 부처님께서 탁발을 합니다.

공양을 가지고 두 비구가 다투는 것을 보시고

붓다 : 너희 두 사람은 어제 다투고 화를 내었다. 무엇 때문에 다투었느냐?

비구 : 내가 탁발하여 온 공양을 상대방이 더 많이 먹으려고 하였습니다.

붓다 : 6년을 함께 고행한 벗들인데도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구나.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 터럭만큼이라도 있었으면 다투었겠는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조금 더 먹으려고 할까? 하는 자비심이 너의 마음에서 일어났다면 너의 공양을 한술 더 주었을 것이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인 ‘자비심’은 수행자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자비심이 없으면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진실하지 못하고 수행자에게 “자비심”이 충만되어 있으면 저절로 “도”의 성제는 이루어지지만 ‘자비심’  이 없으면 천 년을 다리 틀고 앉아 수행한다 하더라도 지옥에 갈 죄만 더 하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자비심이 중요합니다. 끝없는 자비가 나옵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나느냐 할 때 자비 때문에 광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의 근본 공부는 무아와 무상을 제대로 알고 있으면 마음속엔 자비심밖에 없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자비심이 내 마음속에 충만 되어 있지 않으면 모든 공부는 도로아미타불입니다. 보살님들 오대 적멸보궁 참배기도를 열심히 합니다. 적멸보궁 참배하러 갔을 때 보았지요?  좀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안달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이 자비입니다.


잊을 수 없는 스님 

법정스님의 수필중에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은데 특히수연스님의 일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수연스님은 법정스님과 같은 도반인데 젊은 나이에 병으로 돌아가십니다. 수연스님이 하신 행동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인사 선방에서 공부하실 때 수연스님은 언제 어떻게 청소를 했는지 스님들의 신발들이 깨끗하고 하얗게 씻겨져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지 제자리에 있지 않을 때 자기 일이 아니라도 가타부타 할 것 없이 먼저 해놓습니다. 한번은 법정스님과 함께 시골버스를 타고 갑니다. 그 옛날 시골 버스를 생각해 보세요. 차의 창문이 제대로 달려있는지, 앉은 의자가 제대로 붙어 있는지 말입니다. 비포장 길을 달리면 창문턱의 나사가 풀려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법정스님의 옆에 앉아 있는 수연스님이 주머니에서 부시럭 거리더니 조그마한 드라이브를 꺼집어 냅니다. 그 드라이브로 창문의 나사못을 조우고 있었습니다. 그 감동적인 장면을 법정스님께서 글로 잘 표현해 놓았습니다. 이와 같이 자비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에 가면 보시를 합니다. 한 번 하고 두 번 쯤 하고 나면 아깝기 시작합니다. 언제든지 할 수 있어야 천년  년만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자비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불교를 체계화하는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는 만큼 자비가 나에게 충만되는 것입니다. 자비는 가장 빛나는 광명입니다. 천하무적 자비앞에 어떤 것도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평생 다리 틀고 앉아도 공부가 안 되는 것도 바로 이 문제입니다. 내 속에 채워지는 것은 진정 자비이어야 하는 데 자만과 아만 이기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이 자비꽃은 그냥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불교를 아는 만큼 내속 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가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내속에 자비의 꽃을 피워 그 향기가 우주로 퍼져나게 하는 것 입니다. 바로 삶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부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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