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강 부처님 당시 인도의 역사적 상황 및 사상 > 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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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깨친 연기이야기

제 9강 부처님 당시 인도의 역사적 상황 및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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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8,699회 작성일 21-07-0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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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 

 부처님이 탄생하신 연대는 BC 624년 경입니다. BC 624년 경이면 기원 전 6세기입니다. 혹시 영화 ‘영웅’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영웅의 내용은 진시왕이 중국을 통일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진시왕이 중국을 통일한 것이 BC 221년입니다. 인도에서는 아쇼카왕 시대로 불교가 전 인도로 전파되고 세계의 종교가 되는데 일등공신을 한 왕입니다. 인도에서 최초로 통일왕조가 성립 되는 것은 BC 312년인 마우리아 왕조 때 입니다. 유럽에서는 카이사르 시저가 통일하고 나서 로마제국이 성립됩니다. 로마제국이 성립되는 것은 BC약 27년 경으로 아우구스투스라는 최초의 황제가 탄생합니다. 로마제국이 탄생한 것은 BC400년경이며 실질적으로 완전한 통일국가가 된 것은 약 BC 27년경이 됩니다. 그러면 중동의 페르시아제국이 통일되는 때는 약 BC400년 경입니다. 

이와 같이 BC5-6세기 경은 지구상에서 인간이 출현해서 일반적으로 의식을 갖고 씨족국가, 부족국가를 이루면서 나름대로 부족국가를 바탕으로 고대국가로 나아가는 길목입니다. 씨족사회, 부족사회에서 고대국가로 가는 길목이 BC5-6세기입니다. 이때가 세계적으로 사상의 가장 풍요로운 황금시기가 됩니다. 이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서로 비슷한 능력으로 생각하게 된 시기가 BC 5-6세기경입니다. 지금은 2018년입니다. 지금부터 약 2600년경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BC 5- 6세기경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보통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근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누가 우리 인간을 창조했는가? 입니다. 누가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었을까. 했을 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인간의 성품은 악한 것인가? 선한 것인가? 과연 우리가 몸을 받아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생각하게 되고 고대국가에 맞는 체계와 이념과 인간의 이상, 꿈이 새롭게 성립하게 됩니다. 이 당시의 풍요로운 사상을 바탕으로 지구상에는 고대국가가 이루어집니다. 


유럽에서의 사상적 배경 

BC 5-6세기경 이전에는 인간은 무엇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생각은 절대적인 무엇이 있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BC 5세기를 넘어 BC 1000년 - 2000년쯤 되면 인간보다 절대적으로 월등한 무엇이 있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절대적인 것은 신, 창조주입니다. 인도에서는 베다문화가 완성된 것이 약 BC 2000년 - 1500년 경입니다. 그러니까 인도에서 신이 인간을 만들었고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이론이 완성 된 것입니다. 구약이 집필되기 시작한 것이 BC1000년 경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신의 시대를 이루었던 BC 1000년을 넘어서 BC 500년 경이 되어서야 신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즉 인간의 인지능력이 성숙한 것입니다. 

신을 벗어나 인간중심으로 생각하는 시기가 BC 5-6세기입니다. 그리스 로마를 중심으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탈레스 등 많은 사람이 근본적으로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구성 물질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구성 물질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 구성물질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무엇이 그 구성물질을 움직이는가? 탈레스는 물이라고 했습니다. 헤라클레이스토스는 지수화풍이 구성물질이라 했습니다. 현재 불교경전에서는 지구의 구성물질을 지수화풍이라 합니다. 이것은 동서양을 통틀어 똑같습니다. BC 400-500년 전에도 동서양이 분명히 분리되어 있었지만 서양에서도 똑같이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고 인도에서도 똑같이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최초의 성찰이 소크라테스로부터 이루어졌고 소크라테스에서 시작된 성찰이 플라톤의 국가 등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사상적 바탕을 제공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서는 나름대로 '나'중심으로 된 유럽의 사상과 문화를 총정리합니다. 


중국에서의 사상적 배경  

중국은 이 시기에 제자백가들이 출현합니다. BC 5-6세기경에는 공자가 태어납니다.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가장 이상적인 나라는 바로 인의예지신의 덕목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또 맹자는 인간의 성품에 대해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성선설을 주장했습니다.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합니다. 인간이 사회조직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 형제들이 살아가는 것을 살펴보니 인간의 근본적인 성품은 악하다 라는 성악설로부터 출발합니다. 맹자는 바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딪쳐 악한 모습을 나타내지만 좀더 근본적인 뿌리는 선하기 때문에 그 선으로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성악설과 성선설은 BC 5-6세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인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누가 이 우주를 만들었고 무엇으로 만들어졌으며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을  고민하게 됩니다. 신의 시대에서 벗어나서 비로소 인간중심의 생각이 싹트기 시작해서 풍요로운 사상이 이루어진 것이 BC 5-6세기입니다. 


부처님 탄생 무렵 인도에서의 시대적 상황

 BC 1500-2000년 경에 인도에서도 베다문명이 완성됩니다. 인도에서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종교인 브라만교는 바로 신에 대한 예찬이고 신에 대한 종교입니다. 이것은 BC 2000년에 시작해서 BC 1500년에 완성되어 인도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인 브라만교입니다. 그런데 BC 5-6세기쯤 되니까 인도에서도 인간중심의 사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육사외도라는 사상가들이 출현합니다. 인도사회에서 가장 뛰어난 사상가 하면 여섯 명의 육사외도입니다. 여기서 부처님을 포함시키면 사상가 그룹이 일곱 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의 사상가를 육사외도라고 표현합니다. 


창조주_버스바카르만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범아일여사상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범우주적인 신과 내속에 들어 앉아있는 개개의 신들이 일치한다는 설입니다. 이렇게 신 중심의  인도에서는 최초에 이 우주를 창조한 조물주는 모든 것을 만드는 자입니다. 인도인들은 최초로 이 우주를 창조한 신의 이름을 버스바카르만 이라고 불렀습니다. 버스바카르만은 조물주이고 모든 것을 만든 사람 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사람은 버스바카르만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 신은 누구를 만들었을까? 입니다.

제2의 창조신이 탄생하는데 그는 생주 신 혹은 태어난 존재의 주인, 우리 몸뚱이를 만들어냅니다. 그 다음에 이 신은 우주 안에 있는가? 우주 밖에 있는가? 여기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 3의 창조신이 탄생합니다. 제3의 창조신이 브라흐만이며 브라만교를 탄생시킵니다. 일반적으로 인도의 종교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브라만교입니다. 

기독교나 불교, 유럽이나 어디서나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물질은 지수화풍입니다. 그래서 지수화풍이 만들어내고 수많은 복합물을 만들고 신은 자신을 쪼개어 자신이 내재되어 있는 수많은 생명체로 들어가서 우리 속의 신이 만들어집니다. 우주 속에 있는 신과 우리 속에 있는 신이 같다고 하는 것이 범아일여입니다. 이 사상은 일반적으로 BC 1000년 전의 일입니다. BC 5-6세기가 되자  인도사회에는 유명한 인간중심 사상가들 즉 육사외도가 탄생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탄생했던 그 시대에 인도에서 만연했던 사상입니다.


신화에서 인간으로

부처님께서 12처나 18계를 주장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육사외도입니다. 육사외도를 타파하면서 바로 불교가 성립됩니다. 이것이 불교가 성립되는 사상적, 환경적 상황입니다. 육사외도의 생각과 부처님의 생각의 차이를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다고 했을때, 차를 몰고 가다가 사고가 난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 왜 교통사고가 났는가? 전생 인연과 이 부분을 무시한다면 사고가 난 것은 아무런 인과도 없이 그냥 사고가 난 것이 될 것이고 또 숙명론이라면 어쩔 수 없이 사고가 날수 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해석 하겠습니까? 불교에서는 전생을 믿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해오면서 분명히 인연과가 있음을 배웠습니다. 인연과가 분명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다는 것은 바로 나타난 '과'입니다. 분명히 전생이나 현생에서 교통사고가 날 수 있게끔 인과 연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인과 연의 문제에서 예를 들어 전생에 길을 가는데 옆에 소달구지가 지나갑니다. 그런데 내가 돌을 뚝 차서 지나가는 소가 맞았습니다. 그 인과가  지나서 결국 이생에서 내가 소를 다치게 했으니까 다시 몇 생이 흘러서 그 과보로 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난 것입니다.

분명하게 내게 교통사고가 날 수 밖에 없는 어떤 인과연을 지어서 '과'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과는 숙명론이냐, 운명론입니다. 내가 받게될 과가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내가 죽든지 다치게 되는 것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것은 운명론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교통사고가 날 수 있는 인과 연을 내가 지었다는 것입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내가 죽을 수 있고 중상을 입을 수도 있고 또 상처가 조금 날수도 있고 혹은 차만 조금 상하는 정도로 다양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과'란 것은 이생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다르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12처와 18계를 제대로 알게 되면 인과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내가 이생에서 전생에 지은 그 인연에 의해서 내가 죽을 수도 있고 혹은 중상을 입을 수도 있고 혹은 경상을 입을 수도 있고 아니면 차만 조금 상할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생에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과보가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업이 내게 축적되면 축적된 업력에 의해서 어떤 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 속에는 부처될 수 있는 성품도 51% 가지고 있고 지옥갈 성품도 49%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암에 걸릴 확률도 49% 갖고 있고 이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갈 확률도 51% 갖고 있습니다. 이생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갖고 있는 49%를 통해서 조합이 잘 맞아 떨어진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맨날 술을 마시고 생활이 제멋대로이면 조합이 잘 맞아 떨어져 암에 걸리지만, 반대로 내가 49% 암에 걸릴확률을 갖고 있지만, 규칙적이고 바른생활을 한다면 암에 안 걸리겠지요.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30분씩 정진을 하는 바른생활을 한다면 암에 걸리지 않습니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나타나는 과보는 다 틀립니다. 그래서 교통사고에 의해서 죽을 수도 있고 다만 조금 다치고 마는 것처럼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받는 과보가 틀립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암에 대한 유전자가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고 한세상 잘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아지타 (그림)

아지타는 육사외도 중 한 사람입니다. 유물론적인 단견외도로서 세상을 지수화풍의 결합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부정하고 단지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과와 과보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입니다. 과보도 없고 다음 생도 없는 모든 인연과를 부정한 사상가가 아지타입니다. 부처님의 사상은 이 육사외도의 사상을 깨뜨리면서 불교가 이루어집니다.


파쿠다라

파쿠다라의 사상은 지수화풍에다가 고락명입니다. 아지타는 생각자체가 없다는 단견외도이고 파쿠다라는 무인외도입니다. 여기도 인과가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신이 없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지수화풍 고락명의 고는 괴로움의 덩어리, 락은 즐거움의 덩어리, 명은 생명의 덩어리, 이것들이 함께 일곱 개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 것이 파쿠다라이며 무인외도로서 인과를 인정하지 않는 사상가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끌려다니면서 느끼는 수용자의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괴로우면 괴로운대로 즐거우면 즐거운대로 주어지는 대로 살자는 평등이론을 주장한 것이 파쿠다라입니다. 


막칼리

막칼리는 지수화풍고락명에 생사득실을 더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태어나고 죽고 내게 득이 되고 내가 잃고 하는 득실을 더한 외도가 막칼리입니다. 이 막칼리가 사명외도입니다. 혹시 사명외도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마지막 안거를 끝내시고 쌍라상수나무 아래서 열반에 듭니다. 열반에 들기 전에 부처님과 더불어 많은 제자가 모두 다른 길로 전도를 떠납니다. 부처님의 가장 큰 제자인 가섭도 전도를 위해서 길을 떠납니다. 길을 가다가 바로 사명외도인 막칼리를 만나고 막칼리는 가섭에게 너의 스승인 부처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가섭은 사명외도의 말을 듣고 포교의 길을 접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다는 쌍라쌍수로 달려갑니다. 가섭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10일 만에 도착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가섭이 돌아와서 “부처님이시여”하자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그 상태에서 두 발이 곽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선불교의 기본이 되는 삼처전심 중에서 하나가 바로 곽씨상부입니다. 곽씨쌍부 화두가 여기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 보면 가섭이 길을 가다가 사명외도를 만납니다. 그 사명외도가 가섭에게 부처님이 열반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여기서 사명외도가 나오고 부처님은 삼처전심 중에 하나인 곽씨 상부 화두가 나온 것입니다. 


푸라나

푸라나는 숙명론을 주장합니다. 이 푸라나를 따라다니는 무리들을 숙명외도라고 합니다. 푸라나는 사람의 빈부귀천, 선악부정등 인간행위는 숙명적으로 결정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숙명론입니다. 숙명론은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인과를 받는 것은 숙명론이 절대 아닙니다. 잘못하면 숙명론과 운명론에 빠지게 되는 데 절대로 거기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숙명론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푸라나며 그것을 따르는 무리가 숙명외도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빈부귀천이 정해져 몸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니간타

 니간타는 지금도 인도에서 존재하고 있는 조아스트교의 창시자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두 개의 종교가 탄생합니다. 아직도 인도사회에서 불교에 버금가는 조아스터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칸타는 물질과 정신이 능동적으로 활동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불교의 인과라든지 이런 류에 상당히 접근하고 있습니다. 니칸타는 인간은 정신과 물질이 이루어져 있으며 이 물질과 정신이 능동적으로 활동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연기에 접근해가고 있는 이론이 나칸타의 주장입니다. 니칸타를 따르는 무리를 나형외도라고 합니다.  

나형외도들은 태초부터 정신과 물질은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대립하고 사람이 잘 살고 못사는 것이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업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불교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 당시 부처님 처럼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중에 한 사람이 니간타입니다. 니간타가 주장하는 것은 사람이 잘 살고 못사는 것이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은 업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여기서도 바로 부분적인 인과를 주장합니다.

니간타는 나름대로 존재의 본질에 대해 깨쳐 자신이 지은 업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니간타를 따르는 무리를 나형외도라고 합니다, 지금도 종교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때가 없었어요. 인간이 나름대로 집단을 이루어서 삶의 목표를 제시하는데 종교만큼 분명한 것이 없습니다. 분명한 그 목표가 부딪치니까 전쟁이 일어나겠지요.  그래서 종교가 탄생하고부터 종교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지구에서 종교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유일한 종교가 불교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불교의 역사이야기를 하면서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그 당시 부처님과 니간타도 나름대로 깨친 성자로서 따르는 무리가 많았습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고 난 뒤 많은 무리가 따르고 많은 교단이 이루어지니까 니간타가 샘이 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표적의 대상인 불교를 무너뜨리고 조아스터교의 천국이 될까 고민을 합니다. 


가섭 삼형제의 귀의 

 부처께서 도를 이루고 난 후 인도의 사상계를 평정하게 됩니다. 아마 초유의 일입니다. 인도에서도 중국에서도 그리는 로마에서도 이 세상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 부처님 한테서 일어난 것입니다. 부처님이 도를 이룬 당시에 가장 큰 사상가로서 가장 큰 무리를 이루었던 사람은 가섭 삼형제 였습니다. 불의 신을 믿는 가섭형제는 부처님의 교단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인 마하 가섭하고는 다른 사람으로 동명이인입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가섭삼형제는 나이도 많고 또 가장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큰형은 5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둘 째형은 300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막내는 2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일 먼저 가섭삼형제를 불교에 귀의시킵니다. 이 가섭삼형제를 귀의시키니까 부처님의 제자가 순식간에 천 명으로 불어납니다. 그 당시 인도사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초유의 그룹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산자야

 산자야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뛰어난 사상가들이 많았습니다. 실질적으로 능력있는 사람들을 제일 많이 거느린 사람으로 약 200명이나 됩니다. 산자야의 200명의 제자 중에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가장 뛰어난 제자 사라불과 목련존자가 있습니다. 이 사라불과 목련은 산자야의 제자였습니다. 하루는 부처님의 제자인 마성이 길을 가는데 마성의 거룩한 모습에 사라불과 목련이 반해 버립니다. 그리고 마성에게 묻습니다. “너를 가르친 스승이 누구냐, 너의 스승은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고 묻자 마성이 말하기를 나의 스승은 부처님이고 연기를 가르친다고 하면서 그 연기를 사라불과 목련에게 설명을 해 줍니다. 사리불과 목련은 그 자리에서 연기를 인식하고 터득합니다. 그리고 사리불과 목련이 “우리는 산자야를 스승으로 모실 수 없다고 하면서 더 뛰어난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부처님한테로 갑니다. 

여기서 회의가 일어납니다. 산자야의 200명의 제자들을 모아놓고 산자야를 따르는 무리는 여기에 남고, 나와 같이 부처님의 제자가 될 사람은 나를 따르라고 하니 200명의 제자들이 모두 사리불과 목련을 따라 부처님 한테로 갑니다. 갑자기 부처님의 제자가 인도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1200명의 집단이 됩니다. 개인으로 최초의 출가자는 야사입니다. 뛰어난 청년인 야사가 출가함으로써 인도사회의 가장 부유층이자 지식인층을 이루었던 50명의 청년들이 야사와 더불어 부처님의 제자가 됩니다. 한 명씩 출가한 제자와 집단으로 출가한 제자들을 합해서 1250명이나 됩니다. 예불을 할 때 십 대 제자 십육 성 독수 성 내지 1200 제대아라한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제자들이 엄청나게 불어납니다. 가섭은 개인출가를 합니다. 사리불과 목련은 많은 제자를 거느린 집단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됩니다. 또 부처님 교단 내에서 사리불과 목련의 위치는 대답합니다. 신통제일 목련이고 지혜제일 사리불입니다. 사리불은 항상 몸이 골골해서 건강하지 못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리불은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에 듭니다. 사리불이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에 더는 광경이 또 한편의 소설입니다. 


목련의 순교

부처님의 교단을 무너뜨리는 최고의 대상은 목련입니다. 자이나교 니간타를 따르는 무리들을 나형외도라고 하였지요. 목련이 나형외도의 무리가 던진 돌에 맞아 죽습니다. 목련을 돌로 때려죽인 무리가 니간타를 따르는 나형외도들로써 부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나형외도를 쳐들어가려고 하는 상황에서 부처님께서 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들은 잘 들어라, 목련이 왜 돌에 맞아 죽었겠느냐, 신통제일 목련이 만약 신통을 부려서 돌을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형외도의 돌에 맞아 죽은 것은 자신의 전생의 업을 청산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목련의 얼굴을 보아라 웃으면서 열반에 든 모습을 보아라” 목련은 자기가 지은 과보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과보의 마지막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형외도의 돌을 맞아 죽은 것입니다. 목련의 거룩한 모습을 거역하지 말고 조용히 수행을 해야 한다고 다독거립니다. 


회의론을 극복하고

 산자야는 회의론을 창시한 자로 회의외도라고 합니다. 회의론을 주장하면서 인도의 모든 지식인층과 사람에게 공감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산자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산자야의 회의론을 신봉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이 그 당시 인도  사상계의 현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산자야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이야기 할 수 있고 그 외의 모든 것은 부정합니다. 어떤 주장도 결정적으로 단언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도 주장할 수 없다는 주장과 답변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를 제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산자야가 주장한 회의론입니다. 이 회의론이 그 당시 인도사회에 만연해 있었고 모든 젊은이, 지식인들이 이 회의론에 대해서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간타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고 산자야는 사상적인 색채가 강한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산자야의 회의론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인도의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종교를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산자야의 회의론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새로운 사상을 태동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이 회의론을 극복한 사람이 니간타와 붓다입니다. 니간타는 결정적으로 단언할 수 없다고 한다면 가정은 할 수 있지 않느냐? 조건부적 개연설을 주장하여 회의론을 깨뜨립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주장할 수 있느냐? 이 회의론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깨뜨릴수 있는 과정에 대한 가설은 내세울 수 없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는 신이 있다고 가정할 수 있지 않은가?, 인과와 전생을 보지 못하지만, 전생이 있다고 가정을 해서 지금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지 않느냐?, 이와같이 조건부적인 개연성을 주장하면서 산자야의 회의론을 극복합니다.


‘나’에서 출발 

부처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좀더 확실하게 깨뜨립니다. 부처님께서는 “종교는 틀림없는 절대적인 답변을 제시해야 한다. 어떤 주장도 결정적으로 단언할 수 없다는 그 주장을 너는 어떻게 결정적으로 단언할 수 있느냐?” 장조경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여기서 출발한 것이 바로 ‘나’입니다. 회의론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주제는 나밖에 없습니다. 나만이 회의론을 깨뜨릴 수 있으며 모든 것은 부정해도 분명하게 ‘나’는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당시 가장 큰 문제인 산자야의 회의론을 깨뜨리고 극복하기 위해서 제시한 기본적인 구성의 원칙이 12처입니다. 바로 회의론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는 있다 하는 것은 다른 것은 다 부정해도 ‘나’는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에서 ‘나’라 했을 때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고 혀가 있고 이 몸뚱이가 있고 이것을 다 통일할 수 있는 것이 ‘의’이고 바로 안이비설신의로부터 가장 뒤에 나오는 ‘의’가 있습니다. ‘나’가 있다에서 의에 대한 모든 이론을 총정리한 것이 바로 불교의 탄생입니다. 여기서 나를 보고 모든 것을 다 부정해도 내 자신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나 자신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을 따져보니 눈이 있고 코가 있고 귀가 있고 혀가 있고 몸이 있고 의가 있습니다. 안이비설신까지는 쉽지만 마지막에 가장 어려운 의가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 이것을 육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구체적인 내용이 됩니다. 여기서 ‘나’가 있다했을때 눈이 있지요. 눈으로 모든 대상을 볼 수 있습니다. 눈이 없으면 볼 수 없지요. 눈이 있어서 우리 보살님은 이렇게 생겼고 룸비니법당은 이렇게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귀가 있으니까 지금 보살님은 이 강의 내용이 들립니다. 불교강의 하는 것을 눈만 있다면 이것은 듣지 못하고 보기만 합니다. 귀가 있기 때문에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것 말하는 것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이 있습니다. 눈으로 볼수 있는 대상이 있으며 코가 있어서  맡을 수 있는 대상이 있고 혀가 있어서 맛볼 수 있는 대상이 있고 몸으로 접촉하여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있고 ‘의’가 있기 때문에 즉 뜻이 있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대상이 있습니다. 여기서 색성향미촉법, 바로 ‘내가 있다’에서 출발되는 것이 육근이 나옵니다. 육근이 있어 대상이 되는 색성향미촉법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육경입니다. 육근의 대상이 있어 육경이 존재합니다.

나가 있으므로써 나를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6근과 6경이 합해서 12처가 됩니다. 결국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회의론을 극복하고 깨트릴 수 있는 근본적 출발은 ‘나는 있다’에서 출발합니다. 

육근과 육경과 12처설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보이지 않는 것은 일체 묻어 두고 눈에 보이고 인식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불교가 출발합니다. 법,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모든 것이 법으로 통섭됩니다. 


모든 것은 연기로 

모든 것을 회의하고 있는 회의론을 깨트리고 인간들에게 바른 인식을 시킬수 있는 것은 ‘나’는 있다 입니다. ‘나’가 있다는 것은 이 몸은 육근으로 이루어져 있고 육근에 대상이 되는 육경이 있고 이것이 12처설이 됩니다. 12처가 부딪치면 식이 생기고 그래서 존재는 통틀어 18계가 됩니다.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이 부딪쳐 18계가 만들어지고 이것을 바탕으로 인간의 모든 인식이 연기로 존재하는데 그것은 육육법연기, 오온연기, 그리고 12연기입니다. 결국은 12처설부터 구체적으로 연기법에 들어갑니다. 이 연기법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정말 탄복할 만큼, 체계적이고 과학적이고 우리가 이해하기 정말 어려운 이론의 구조가 여기서부터 나옵니다.

지금 말하는 연기들은 실상론입니다. 반야심경을 보면 색즉시공 공즉시생 불생불멸이라고 하는데 연기에서는 불생불멸이 없습니다. 이것이 실상론에 들어가면 불생불멸이 나타납니다. 연기론에서는 분명히 있는데 없어집니다. 그 부분은 12연기를 배울 때 구체적으로 공부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불교를 주장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구체화 시키는 근거가 12처설에 나옵니다. 이 부분이 불교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이 부분을 제대로 알기가 참 어렵습니다. 제가 한번은 연기를 강의하는데 어떤 분이 ‘저는 아함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는데 교수님께서 이야기한 그런 체계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함경을 수십 번을 보아도 지금 설명한 이 체계는 없고 그 속에서 만들어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어떤 인연으로 연기법을 같이 공부하게 되었는지 몰라도 이 부분은 어떤 일이 있어도 알아야 합니다. 세세생생 불교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연기법에 대한 이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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