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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강 야사의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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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작성일 21-07-22 08:36 조회 13,05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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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강 야사의 출가 



반갑습니다. 한 주 잘 계셨어요? 

부처되셨습니까? 매일 30분씩 참선하시고, 108 참회하시면 티끌모아 태산입니다. 저금통에 천원씩 만원씩 돈이 모여 큰 돈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매일 매일 실천하는 습관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결국 이 습관이 모여 부처되는 것입니다. 하루라도 빼먹지 말고 열심히 하십시오. 


 오늘은 부처님의 생애와 사상 중에서 야사의 출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고 난 뒤 가장 먼저 교화를 시킨 사람이 다섯비구입니다. 다섯비구는 부처님과 더불어 수행했던 수행자들입니다. 즉 출가 수행자인 다섯비구에게 부처님이 깨치신 연기를  사성제로 설함으로써 이해시킨 첫 제자들입니다. 그 다음은 세속제자로서 처음 출가한 사람이 야사입니다. 야사의 출가에 대해서는 의미 있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야사는 바라나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대부호 장자의 아들이었는데 야사가 출가함으로써 친구 50명이 함께 출가하게 됩니다. ‘야사는 성품이 온유하고 세련되었다’ 라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고 대부호의 아들이기 때문에 여름과 겨울 두 차례의 우기에는 별장에서 친구들과 즐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인도 상류사회의 자식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잘 알 수 있는 기록입니다. 인도의 신분제도 중 바이샤, 슈드라, 천민, 노예계급은 살기 어려웠지만 크샤트리아, 바라문 등 상류계급은 풍부한 물질문명의 혜택을 받으면서 풍류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부류 중에는 젊음을 즐기는 것만으로는 삶에 대한 갈증이 해소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낮에는 그토록 아름다웠던 여인이 밤에 깨어나서 보니 추하게 일그러진 모습들을 보면서 환멸을 느끼고 그 상황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젊음을 이렇게 보내도 되는가?’ 야사는 무상에 대한 인식을 하면서 새벽에 집을 뛰쳐나와 번민을 하게 됩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이렇게 고민하고 방황하다가 부처님이 계신 녹야원에 오게 되는데 거기서 선정에 든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에 취하여 바라보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 야사를 보고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여, 세상을 바로 보기만 하면 그렇게 괴로울 것도, 비참할 것도, 위태로울 것도 없다.”

 야사는 부처님 앞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부처님 : “젊은이여,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괴로운 것인가?”

야사 : "저는 이제까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추구하였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 “젊은이여, 그대는 괴로워할 것을 가지고 괴로워하고 있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추구해야할 목적이 없다면 아무리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더라도 순간적으로는 쾌락을 느낄지 모르나 세월이 흘러 정신이 들고나면 후회와 괴로움뿐이네. 진정한 

         즐거움과 기쁨은 정신적인 바름과 깨끗함과 깨달음(분명함)으로부터 오는 것이

         네.”

야사 : "무엇을 정신적인 바름이라 하며, 깨끗함이라 하며, 분명함이라 합니까? 저는 이제

       까지 장자의 아들로서 마땅히 해야될 것들을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것들이 저의 인

       생에서 스쳐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까지 즐거웠고, 모든 부유층의 젊은

       이들이 즐기는  육체적 쾌락이 갑자기 추하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부처님 : “젊은이여, 오욕락이라는 것은 원래 추한 것이다. 분명하고 바른 목적이 없는 삶

        은  죽음과 같은 것이다 (고, 苦). 

        이제까지 기존 타성에 젖어 무엇이 바른 것인지 세상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어

        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없었기 때문에 절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

        이다(집, 集). 

        만약 그대가 장자로서 진정으로 세상 사람들의 이익을 생각하고, 병과 가난에 시달

        리고 있는 백성이 모두 잘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한번 스스

        로 생각해보라.  먼저 그대자신이 능력이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아야 한다.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하면          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할 것이다. 

        가난한 백성들과 시녀들도 나와 같은 생명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한다면 

        어떻게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술과 여자를 하면서 가까이 

        무절제하고 흐리멍텅한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존경과 신뢰를 받기위해서는 자신

        을 더욱더 철저하게 지켜 바른 사람이라는 인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

        한 것들을 꾸준히 연마해 갈 때 사회와 세상을 보는 바른 인식이 싹터는 것이다

        (도, 道). 

        그렇게 할 때 자신의 삶도 뛰어나게 되며, 나아가 이 땅에서 자유와 평화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멸, 滅).”

야사 : "!!!!!!!!.......

       위대하십니다. 부처님이시여, 이제 불안하고 방황했던 저의 마음은 안정이 되어 편

       안해졌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목표도 정해졌습니다. 저도 이제부터 부처님처럼 

       청정한 삶을 원하옵니다. 저의 출가를 허락하여 수행자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이제

       부터는 부처님을 따라 청정하게 살겠습니다.“


자신이 느낀 무상과 삶의 방향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해답을 구합니다. 부처님께서 다섯비구에게 설한 사성제법인 고집멸도에 대해 설명을 하십니다. 야사는 고인 무상을 인식했고,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하는 문제를 갖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야사에게 새로운 삶, 진실된 삶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해 주는 바로 고의 원인인 집을 설명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야사와 그의 친구들은 젊은이의 꿈과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방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너의 삶을 되돌아보아라. 너는 과연 삶을 어떤 목적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 에 대한 ‘집’을 던집니다. 야사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자신이 하루하루 방탕하게 보내고 있음을 뼈져리게 느끼게 됩니다. 부처님으로터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삶의 목표를 찾게 됩니다. 부처님처럼 진리를 추구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으로부터 부처님이 던진 ‘집’의 원인을 스스로 찾아냅니다. 야사는 1시간 동안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출가할 것을 결심하고 부처님께 허락을 받습니다.  

 야사의 아버지는 새벽에 일어나 보니 아들이 보이지 않아서 걱정이 되어 찾아 헤매게 됩니다. 아버지도 아들을 찾아 헤매다 녹야원에 도착하게 되는데 거기서 부처님을 만나고 대화를 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야사의 아버지임을 직감하시고 법을 설하십니다. 야사가 왜 괴로워하고 불안해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진리에 대한 정견이 생기게 됩니다. 야사의 아버지는 뜻하지 않게 엄청난 보물을 얻게 되면서 부처님 법이 좋은 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다 야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야사는 아버지에게 청을 합니다.

 “저는 출가하여 부처님과 같이 살고 싶습니다.”

 야사의 아버지는 아들이 부처님과 함께 산다면 이 생이 얼마나 즐겁고 편안할 것인지 생각하고 허락하게 됩니다.

 그 당시 출가수행자는 걸식을 하거나 공양에 초대받기도 하는데 야사의 아버지는 부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공식적으로 공표를 하게 됩니다. 그 초청자리에는 마을의 장자들과 그 아들들도 참가하는데 바라나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야사의 출가를 선언하고 야사의 아버지도 불법에 귀의함을 선언합니다. 야사의 어머니도 그 거룩한 법에 동참하게 됩니다. 결국 출가수행자가 아닌 재가자로서 야사의 집안이 최초의 부처님의 제자가 됩니다. 야사는 출가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고 제가자로서 야사의 부모님은 나이가 많아 출가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처님과 같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지 부처님께 여쭙니다. 세속에서 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재가신도가 지켜야 될 계를 주게 됩니다.

 불법에 귀의하게 되면 먼저 삼귀의계와 오계를 받게 됩니다. 삼귀의계는 불.법.승 즉 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 부처님과 같이 되겠다고 수행하는 승에 귀의함으로써 부처님의 제자가 됩니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야사의 아버지에게 준 재가수행자들의 오계가 불살생. 불망어. 불음행. 불투도. 불음주입니다.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서, 바른 삶을 살기 위한 영원불멸의 진리가 오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재가수행자도 출가수행자도 똑같습니다.

 ‘불살생’ 살생하지 말라. 모든 생명을 살려라. 살생 중 가장 큰 살생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므로 내 자신이 깨어있어야 하고 진리를 추구하는데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살생하지 않을 때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게 됩니다.

‘불망어’ 거짓말하지 말라. 정직하라. 공부하는데 정직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연기 공부를 할 때 무아를 인식하면 살생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끝없는 자비가 무아를 인식하는 만큼 쏫아집니다. 

‘불음행’ 음행은 지혜의 종자를 죽이기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음행에 있어서 최고의 귀감이 되는 가섭은 부처님이 도를 이루고 난 둘째 해에 출가를 했는데 결혼하고 나서 8년간을 음행을 하지 않고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결국 가섭은 아라한도를 얻게 됩니다.

 ‘불투도’ 도둑질하지 말라. 주지 않는 것을 가지면 안 됩니다.

 ‘불음주’ 술을 먹지 말라는 것은 중독성 있는 것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나쁜 습을 키우게 됩니다.  출가수행자는 십계를 지키는데 기본적인 오계는 재가신도와 똑같습니다.

 이 오계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든지 진리의 문으로 나아가고자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계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야사의 아버지, 야사의 어머니에게 오계를 주시면서 재가 수행자로 생활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사비구 외에 재가자로서 최초 수행자는 야사이며 야사의 부모님은 최초의 재가신도가 됩니다.


 초기에 부처님 제자의 유일한 목적은 수행입니다. 수행과 더불어 유행하고 유행하면서 불법을 전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수행이라는 목표로 귀결됩니다. 출가수행자와 재가신도는 똑같기 때문에 계도 같습니다. 단 출가수행자는 공부할 조건이 좋고 재가신도는 조건이 어렵기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부대중 중에서 남자 출가수행자는 오비구와 야사, 남자 재가신도는 야사의 아버지, 여자 재가신도는 야사의 어머니 이렇게 삼부대중이 이루어집니다. 부처님께서 교단을 이루고난 다음 몇 년이 흘러 부처님을 키워준 마하파자파티 이모가 출가하여 여자출가수행자가 되어 사부대중이 성립하게 됩니다. 

야사의 아버지가 부처님을 공식적으로 초청하여 아버지의 친구와 야사의 친구들이 함께 거룩한 상황을 보게 됩니다. 야사의 친구들은 그 당시 인도에서 경제적. 학문적으로 완벽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야사의 친구 50명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출가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야사와 친구 50명, 오비구를 합하여 56명, 부처님까지 57명이 되어 순식간에 큰 집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사성제를 설하심으로써 진리에 대한 확신이 생기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는 과제의 제시로 우리의 고통과 고뇌는 고라고 인식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인식은 젊은이들이 본인 스스로 갖고 있는 문제가 왜 생겼는지 생각하게 하는 ‘집’이며, 그 당시 젊은이에게 설명한 이 부분이 가장 쇼킹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100% 믿고 실천했기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이는 속도도 빨랐고 도의 단계도 훨씬 쉽게 이루어졌으며 아라한을 얻은 분들도 많았습니다. 

불교를 이야기할 때 연기 즉 인연과 법칙이 결국은 발생의 원인, 왜 그 일이 일어났는가에 연결이 됩니다. 우리가 불교 공부를 하면서 불자이기 위해서 도를 이루기 위해서도 놓치면 안 됩니다. 이 발생의 원인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연기를 터득하게 하고 부처를 이루게 합니다.


 우리는 첫 시간부터 지금까지 연기를 공부하면서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하루에 한 가지씩 해결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된다면 편안하게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만 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우리가 죽다 깨어나도 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갖고 있는 아집 때문입니다. 집착에는 대상과 자신에 대한 두 가지가 있는데 자신이 갖고 있는 업의 덩어리인 아집 때문에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에 일어나는 많은 사건 중에서 한 가지씩만 일어난 일의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요. 금전적인 일이든 직장 동료와의 말다툼이나 나로 하여금 크게 사건이 될 만한 일을 가지고 주무시기 전에 일어난 원인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사건을 오늘 곰곰이 생각해 보면 70%는 내가 잘 했고 상대가 30% 잘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다음 날 다시 자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50% 잘 했고 상대가 50% 잘 한 것처럼 생각이 됩니다. 그럼 슬슬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쯤 되면 아집 때문에 이제 까지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루 더 생각해 보면 내가 30% 잘 한 것 같고 상대가 70% 잘 한 것 같습니다. 이제 보살이 됩니다. 화두를 들고 계속 생각한다는 것은 아집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아집을 깨뜨리는 방법이 부처님이 가르치신 팔정도에 나오는 정념인 위빠사나와 정정인 사마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수행하고 도를 이루는 방법, 아라한이 되는 두 가지 방법인 정념과 정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든 사물을 관조하고 관찰해야만 본질을 알 수 있고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생각에 나의 모든 것을 걸고 관조를 해야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두 개가 같이 병행해야만 아라한이 되고 부처가 되고 도를 이룰 수 있습니다. 도에 의해 멸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상대와 부딪힌 문제의 상황은 똑 같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상황은 같지만 내가 갖고 있는 아집이 깨뜨려지면 달라집니다. 3일을 생각하니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까지가 중생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살은 99% 자신이 잘 하고 1% 잘못해도 그 1% 때문에 상대방에게 가슴 아파한다는 것입니다. 보살이나 부처는 자기 자신 때문에 부처가 못되고 중생이 되었다고 끝없이 중생들을 제도합니다. 그것은 끝없는 자비에서 나옵니다. 내 속에서 아집이 깨어진 만큼 자비가 생기게 됩니다. 상대방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이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면 결코 남을 해치거나 악한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발생의 원인을 생각하는 방법인 정념과 정정을 생활화한다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내 속에서 오늘 미안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또 일어난 사건을 되풀이해서 생각하고 그리하여 계속 미안한 마음이 일어난다면 내가 변합니다. 내 것이 맞고 옳다는 아집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천년. 만년이 지나도 똑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아집을 깨뜨리는 방법은 정념과 정정 외에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야사의 출가와 더불어 부처님 제자에게 발생의 원인을 생각하게 했고 이 문제로 하여금 야사의 친구 50명과 함께 출가하는 폭발적인 사건이 생기게 됩니다. 야사는 부처님의 최초 출가 제자가 됩니다. 


오늘 강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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