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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생애

제 10강 불교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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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3,050회 작성일 21-07-22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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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강 불교의 본질




반갑습니다. 한 주 잘 지내셨습니까? 항상 똑같은 이야기지만 ‘내가 부처다’라는 생각을 자고 일어나면 하십니까? 그 생각 때문에 부처 됩니다. ‘내가 부처다.’ 라는 그 생각을 지금부터 해서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석 달, 여섯 달, 일 년이 지나면 그 생각 때문에 어떻게 부처될 수 있는지, 부처 되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이렇게 살아도 좋은지 본인 스스로 그 해답을 찾아갑니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설하신 내용을 지난 시간까지는 역사적인 시대 순으로 공부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시고난 후 한 해, 두 해가 흘러가면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쭉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내용을 갖고 제자들한테 가르치신 불교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그 당시 인도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런 부분에 대해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공부했던 부처님 일대기를 통해서 45년 동안 설하신 불교의 본질이 과연 무엇이며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기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용어를 좀 더 현대적 용어로 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20강 동안 배웠던 가장 중요한 것은 연기였는데, 연기를 좀 더 현대적 용어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불교가 갖고 있는 속성, 깨달음의 속성은 연기였습니다. 연기를 바탕으로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세계적이고 보편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예를 들어 뉴턴이 이룬 세계를 절대주의 세계라 했습니다.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신본주의, 절대주의 사고라면 불교의 입장은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합니다. 현대적 용어로 풀어볼 때 불교의 본질은 무엇이냐? 하는 이 문제에서

 첫째,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연기라는 깨달음의 속성에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기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써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하고

즉 연기라 하는 그 자체의 이것과 저것의 관계 속에서 주어집니다. 상대라는 개념이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우리는 상대주의라고 이야기합니다. 나 혼자의 어떤 절대를 어떤 절대자한테의 귀속이 아니라 불교가 지향하는 것은 상대주의적 입장입니다. 신본주의나 절대주의 사고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하나의 양상을, 흐름을 일으키는 불교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종교입니다. 여기서 연기라는 것으로 상대주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불교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불교는 이상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내세적인 종교가 아닌 현실적인 종교입니다. 현실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불교는 리얼리스트의 사상입니다. 즉 현실주의 종교입니다. 불교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세계적이고, 현대적인 용어로 나타낸다면, 불교는 과거와 미래를 다 포함할 수 있지만 결국은 현실적인 리얼리스트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눈이 있는 자는 보라, 눈이 있는 자는 보라. ’이런 식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을 45년 동안 설법하셨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바차코타’ 라는 외도 이야기를 잠깐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사위성 제타숲에 계실 때 바차코타가 찾아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난 뒤에 천당에 태어나는 문제라든가, 수행을 하고난 다음 천당에 태어나는 문제, 극락과 천당이라는 세상에 태어나는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 당시 불교에서 그 당시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해탈하는 것, 열반하는 것으로 아라한이 되어서 해탈하고(아라한이 된 상태를 해탈) 열반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바차코타도 부처님께 해탈한 뒤 어디에 태어나느냐고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해탈하고 난 뒤에 어디에 태어나느냐는 것은 내가 가르친 본질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차코타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열심히 공부 하고 난 뒤에는 천당에 태어나든지, 어디에 태어나든지 과보가 있어야 되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시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바차코타에게 장작에 불을 붙일 때에 일어나는 현상을 예로 들어서 설명을 하십니다. 

 “바차코타여 어떤 현상이 있느냐?”

 “예, 지금 장작에 불이 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장작이 다 타고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났느냐고 다시 물으시니

 “부처님이시여, 장작이 다 타고 꺼졌습니다.”

 부처님께서 바차코타에게 묻길

 “그럼 그 불은 어디로 갔느냐, 장작이 있어서 타다가 장작이 다 타면 없어진다. 그러나 그 불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부처님께서 해탈하고 난 뒤에는 어디에 태어나느냐고 묻는 물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차코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얼마나 모순된 질문을 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한참을 생각한 뒤 바차코타가 

 “부처님이시여 당신은 정말 위대 하십니다” 

라고 말하면서 바차코타는 부처님께 귀의하여 제자가 됩니다.

 셋째, 불교의 사상은 그 당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가장 중요한 내용인 눈이 있는 자는 보면 아는 것, 현실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즉 예를 들면 아침에 수행하면 그 수행결과를 저녁에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행위의 과보가 죽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지 않고 과보를 받는 것, 지금 내가 하는 행위를 바로 과보로 받을 수 있는 것을 부처님께서 설하셨던 것입니다. 

 넷째, 그 다음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누구든지 와서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잘 듣고 이해하면 그대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이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닙니다. 능히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념처경을 보면서 연기를 터득하기 위해 수행했던 모든 것들이 결국은 연기를 터득하고 나서 마음상태가 도달하는 것은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면 바로 열반에 들 수 있습니다. 마음을 편안한 상태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무아와 무상을 인식 함으로써 내가 본질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편안하고 안정되며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확신을 갖고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지혜 있는 자는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사성제법을 설하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 설명을 해주고 나면 누구든지 스스로 곰곰이 원인을 생각해서 알 수 있도록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설하신 중요한 내용이 이렇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내세주의 혹은 염세주의가 아닌 가장 현실적인 현실주의입니다. 그래서 리얼리스트 사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용어를 떠나 세계적 종교사상에서 볼 때 불교의 본질은 이런 특성에 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불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휴머니즘 사상입니다. 가장 인간적인 인본주의 사상이다. 결국 종교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전부 신격화됩니다. 불교의 첫출발인 윈시불교, 근본불교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은 우리 삶에 바탕을 둔 인간적, 인본적인 가르침이었으며 부처님 스스로 신격화되기를 거부합니다. 이런 휴머니즘 사상이 본질인데 부처님 입멸 후 삼백, 오백년이 흘러 대승불교로 발전하면서 부처님은 신격화 되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불교를 바라다보는 새로운 눈길은 부처님은 가장 인간적인 면을 갖고 있고 그런 부분이 불교를 이루는 본질적인 내용들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마가다국 왕사성에 계실 때 옹기장인 박카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인도 당시 불가촉천민인 슈드라, 바이샤들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옹기장이인 박카리는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박카리는 이 생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죽는다면 원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이웃사람이 부처님 제자에게 말하여 부처님께서 몸소 바카리 집에 문병을 오게 됩니다. 그 때 바카리는 

 “제가 죽기 전에 부처님을 뵙게 되어 한이 없습니다.” 

하자 부처님께서는

 “바카리여,  중요한 것은 진리를 보는 것이지, 너가 보는 썪어 없어질 이 몸뚱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어 바카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게 됩니다. 그 가난하고 병든 바카리를 부처님께서 친히 가시어 위로해 주신 것은 참으로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대부분 불교를 볼 때 대승불교적인 눈으로 접하게 됩니다. 금강경을 보더라도 부처님께서 석가라는 이 생의 몸을 받아 도를 이룬 한 인간으로 출발했지만 우리가 느낄 수 없는 큰 격차를 보입니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대승불교가 성행한 모든 곳에서는 신격화 되어있는데 불교의 본질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본질은 가장 인간적이고 휴머니즘 사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휴머니즘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여래십호를 보면 법회 염송문에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이 바로 여래십호입니다. 여래라는 것은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는 그냥 존재하는 것, 깨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응공은 응당히 세상의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 가장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정변지란 모든 것들을 샅샅이 깨달아 아는 사람입니다. 명행족은 지혜와 실천을 겸비한 사람입니다. 명이란 무아와 무상을 아는 것으로 명과 행을 구족한 것, 그 진리를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선서는 다시는 윤회를 하지 않는 사람, 깨치고 나서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중생은 업으로 태어나고 보살은 원에서 태어납니다. 즉, 깨치고 나서는 원에 의해 태어나지만 업에 의해서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세간해란 세간의 모든 것을 잘 아는 사람, 세상의 원리. 이치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의 명호는 가장 인간적인 이름입니다. 천인사란 하늘과 인간의 스승, 모든 중생의 스승인 사람, 깨치고 나서 진리를 아는 사람은 모든 이의 스승입니다. 무상사란 가장 높은 사람, 조어장부란 마음을 조복 받아 잘 조정할 수 있는 사람, 불세존이란 불은 진리를 깨친 사람, 세존이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열가지 명호 중에서 불세존과 여래는 누구든 함부로 쓸 수 없고 부처님만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든 깨치고 나서 아라한과를 얻으면 응공은 쓸 수 있습니다. 자비광명이 충만하고 지혜 복덕이 구족한 부처님만이 쓸 수 있는 것은 불세존과 여래입니다. 부처님의 열가지 명호를 볼 때 ‘신이다’ 라는 느낌은 나지 않고 인간적인 면모를 나타냅니다. 불교가 지향하는 가장 본질적인 사상은 휴머니즘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교를 이루는 교단은 공부하는데 가장 소중한 집단이며 가장 좋은 벗의 집단입니다. 자식을 키워서 왜 서울대에 보내려고 합니까? 좋은 벗의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모여 있으면 경쟁도 되지만 공부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외국 유학 보낼 때 우리나라서 박사학위 따는 것보다 미국에 가면 박사학위를 받기 쉬워요. 왜냐하면 그 분야에서 세계적인 대가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 밑에서 공부하고 또 그 무리 속에 있으면 공부하기가 훨씬 쉬운 것입니다. 특히 신이 존재하지 않는 종교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공부하는 이 집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한 번은 이 문제에 대해 아난이 생각해 보니 자신이 부처님을 모시고 이렇게 수행을 잘 할 수 있는 것은 같이 공부하는 무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가섭같이 뛰어난 수행자는 항상 귀감이 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열심히 수행하게 만들고, 사리불처럼 겸허하면서도 지혜로운 자가 부처님 곁에 계시니 보기만 해도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하루는 부처님을 모시고 아난이 여쭈어 봅니다.

 “부처님, 우리가 공부하는 이 집단이 도를 이루는데 반쯤 정도는 영향을 미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난이여, 이 좋은 벗의 집단은 도를 이루는데 전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속담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 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벗의 집단 때문에 공부하기 싫어도 하게 되고 부처되기 싫어도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같이 공부하는 무리가 불교를, 진리를 머무르게 하는 가장 좋은 힘이 됩니다. 오늘 공부한 내용을 보면 불교의 본질을 부처님께서 좀 더 현대적인,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해 보면 상대주의 입장, 리얼리스트 사상, 휴머니즘 사상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과연 부처님께서 깨치시고 난 다음 고민한 문제는 고에 대한 구조와 세계, 무상과 무아와 연기, 늙고 병들고 죽고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고통, 이런 것들을 이해하고 인식함으로써 해결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문제를 상대방에게 인식시킴으로써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런 문제를 인식시킴으로써 상대방이 해결할 수 있다면 가르칠 필요가 있겠는데 아무리 가르쳐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가르칠 필요가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학교서 수업하는 것은 배우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더 고차적인 지식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깨친 존재의 본질인 연기를 인식시킴으로서 스스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해결될 수 있다면 가르칠 필요가 있는 것이고 해결될 수 없다면 가르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연기는 무아와 무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무아와 무상을 인식함으로써 과연 그것이 해결될 수 있을까? 여기서 부처님께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상대방이 인식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가에서 만들어 낸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사성제 즉 고집멸도가 탄생한 것입니다. 고제, 집제, 멸제, 도제입니다. 고라는 자체는 고통스러운 상황이 일어난 현실입니다. 부처님께서 누군가가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는가? 즉 해결방법이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깨치신 연기를 사성제의 가르침에 적용시킵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면서 불자냐 불자가 아니냐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기를 인식하느냐 인식하지 못하느냐, 무아와 무상을 아느냐 모르느냐, 이 문제를 터득하고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집입니다. 즉 발생의 원인인 집, 이것이 불교로 나아가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발생의 원인인 ‘집’을 설명해 주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죽은 손자를 끌어안고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파가 부처님을 찾아옵니다. 부처님께서는 노파에게 왜 죽은 손자를 안고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물어봅니다. 노파는 어린 아이가 왜 죽어야 하는지 이해를 못합니다. 나이든 자기는 안 죽는데 왜 어린 손자가 죽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노파가 어린 아이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함을 인식하시고 노파에게 설명을 해 줍니다. 

 “왕사성에서 사는 사람의 수만큼 되는 많은 손자가 있다면 행복하겠느냐”

하고 물으시니 노파는 손자 하나가 있어도 행복한데 그렇게 많은 손자가 있다면 당연히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명의 손자가 죽어도 슬픈데 매일 몇 명의 손자가 죽어간다면 너는 그 슬픔을 어떻게 겪겠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래서 노파는 그 사건에 대해 본질적으로 이해를 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설명하신 방법이 ‘집’,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스스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겨자씨에 관련된 고타미에 대한 이야기도 ‘집’에 대한 것입니다. 고타미가 죽은 어린 아들을 안고 부처님께 와서 살려달라고 생떼를 씁니다. 그 당시 인도 왕사성에는 겨자씨가 흔했는데 부처님께서는 고타미에게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아들을 살려 주겠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고타미가 대답합니다.

 “겨자씨를 얻어오되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의 겨자씨를 얻어오라”고 하십니다.

이집 저집 다 다녀 봐도 사람이 죽지 않는 집이 없자 고타미는 ‘모든 사람은 다 죽는구나. 내 아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은 다 죽는구나.’ 생각하고 아들을 잃은 절망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무릎을 꿇고 부처님의 위대함에 감동하여 평생 비구니가 되어 부처님을 모시고 살겠다고 합니다. 

고타미처럼 문제의 원인을 설명해주면 해결 가능하다고 생각하시어 45년동안 설법을 하시게 되어 방대한 경전이 남아 있게 된 근거가 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고통, 고뇌도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해결할 수 없지만 원인만 알면 다 해결할 수 있으며 그 원인을 찾아가는 방법 즉 연기를 터득하는 방법은 ‘집성제’입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그 원인이 이해되고 이해가 되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해결이 되면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서 본래의 자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구체적인 내용을 불교의 본질로써 우리가 받고 있는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집성제입니다.

 ‘고집멸도’에서 고는 고통이 일어나는 현상, 집은 원인을 생각하는 것이고, 멸은 고통이 해결된 것이고 도는 실천방법입니다. 원인을 모르면 죽다 깨어나도 해결할 수 없지만 원인을 알고나면 실천방법을 스스로 찾을 수 있습니다. 모르면 부처님께 물어보면 됩니다. 고통의 원인을 알았으니까 부처님께 실천방법을 물어볼 수 있습니다. 절을 해라, 독경. 참선을 해라, 어떤 방법으로든 이겨내고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은 45년 동안 설하신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포괄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불교의 본질을 보고 공부한 것입니다.

 다음 시간은 45년 동안 설하신 내용 중 제자들을 교화하고 포교하신 부분에 대해서 공부합니다. 또한 야사의 출가, 카사파 삼형제의 부처님께 귀의를 통하여 불교의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과정에 대해 공부합니다. 개인의 출가, 집단의 출가를 통하여 전도 선언을 하시고 불교가 인도 사회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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