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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강 부처님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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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960회 작성일 21-07-2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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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강 부처님의 능력 




반갑습니다. 한주 잘 계셨어요? 

한주 동안 공부 잘 하시고 저금통에 돈이 얼마나 모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매일 삼십분 백팔참회하고 한 십오분 참선 할 것 같으면 저금통엔 벌금 만원 안 넣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좋은 인연이 되었을 때 공부 한번 제대로 해봅시다. 기회는 두 번 다시 안 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회가 여러번 올 것 같아도 우리는 한번도 제대로 그 기회를 못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못 잡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이 소중한 인연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두 번 다시 안옵니다. 부처님께서 깨친 연기를 배운 것은 정말 다시 한번 접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이 공부가 내 삶을 변화시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제일 먼저 내가 부처다 생각하라고 했지요? 내가 원래 부처입니다.  

이 생에서 내가 꼭 부처를 이뤄야겠다는 원을 아침에 눈뜨자 마자 제일 먼저 생각하라 했지요? 

그 생각을 먼저 하고 백팔배 하시고 약 십오분 동안 참선하시고, 그렇게 하루 일과를 시작하시면 부처되지 마라 해도 언젠가는 꼭 부처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사는 삶은 결국은 습입니다. 습관일 뿐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습만 제대로 길들여지면 부처되지마라해도 부처되는 것입니다.  

그 습을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워요? 우리가 공부 시작하기 전에 선정에 드는 자세를 이야기 하면서 잠깐 언급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오계 중에 ‘살생 하지마라.’에서 평소에 내가 낚시를 즐겨 했습니다. 이제까지 해 온 취미생활이 습이 되어가지고, 안하면 내 삶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허전합니다. 그 습을 내가 이제까지 즐기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습이 바뀌고 나면 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까지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어있었지만 정말 내가 제대로 잘 인식을 해서 ‘살생을 하지마라’ 중에서 낚시를 했던 부분들이 떨어져나가도 또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얼마든지 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가면서 하고 있는 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습이 한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될 수도 있고, 지옥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습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매일 아침 일어나서 삼십분씩 공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생에서 이 몸 받아가지고 한 번 공부할 수 있는 습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만 될 것 같으면 다 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는 부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결국은 인도사회에서 가장 큰 승가를 이루면서 계급타파를 한 것입니다. 

불가촉 천민까지 부처님의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사성제 계급을 타파했습니다. 모든사람은 태어남으로써 존귀함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가는 행위에 의해서 존귀함이 정해진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출가승단에서는 누구나가 평등해졌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승단의 중요한 의의입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개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집단이 부처님 승가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처님의 능력에 대해서 공부할 것입니다. 


이제 부처님의 생애와 사상도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많은 제자들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부처님의 10대 제자들입니다. 천이백오십 제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열명의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과연 부처님께서는 성불하시고 어떤 능력을 갖고 계셨는지 궁금합니다. 성불함으로써 부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한 시간 살펴볼 것이고, 또 한 시간은 견성성불하신 부처님의 상호는 32상 80종호입니다. 그리고 또 한 두시간은 부처님의 십대 제자들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한 생을 살았는지 알아봅니다. 또 전생의 어떤 각오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한생을 잘 살 수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왜 출가하셨어요?

왜 죽어야만 하는가 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하셨어요.

결국은 마지막 선정에 들어 바로 부처님께서 성불을 하십니다. 도를 이룹니다. 

도를 이룬 그날 새벽녘에 부처님께서는 선정에 듭니다. 그 선정에 들 때 초선 제 이선, 제 삼선, 제 사선에 들어서 제 일 지혜가 열리고 제 이 지혜가 열리고 제 삼 지혜가 열리는 과정을 앞에서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런 부분들을 구체적으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스님께서 수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것 같으면 이야기하는 그 단계가 바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하고 똑같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말과 실제 수행이 일치합니다. 


세친같은 사람들은 그와 같은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행동과 능력이 일치했습니다. 그러니까 초창기 불교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분들이 대접을 받고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 여기서 구체적으로 선정의 단계를 알아봅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불교의 세계관에서 욕계, 색계, 무색계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태어나는 극락까지 육도윤회합니다. 지옥으로부터 시작해서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하늘 이렇게 육도 윤회 합니다. 

이 육도윤회하는 욕계가 있고 욕계를 넘어서면 색계에 들어갑니다. 색계에 들어가면 선정에 들 수 있는데 이 자체가 바로 욕계를 벗어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몸뚱이를 갖고 선정에 들어감으로써 천상에 태어나는 것보다 높은 이상의 색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선정을 구체적으로 구분할 때 제1선, 제2선, 제3선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규정을 갖고 지칭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1선과 2선의 구분이 잘 안 됩니다. 그런데 불사론에서는 정확하게 구분 되어있습니다.  


선정에 단계를 표현함에 있어 먼저 ‘심사희락의 구, 불구로써 사선을 구분한다’ 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심사희락을 구, 갖추었느냐 불구, 갖추지 않았느냐로써 사선을 구분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심사희락만 알면 사선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좀 더 구체적으로 구지의 부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선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지분 지단으로서 그 증에 수순하고 그 증에 자조하여 그 증의 의를 현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구지라하는 것은 지라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의 수순하고 증에 자조하여 그 증의 의를 현현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공부했던 불교용어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색성향 미촉법 육근은 안이비설신의입니다. 바로 육근에서 의를 현현하는 것이 바로 무엇이냐면은 증입니다. 즉, 우리 팔정도에서 나오는 증으로 바로 선정입니다. 안정입니다. 편안한 겁니다. 내가 선정에 듦으로써 이루어지는 정신상태가 이 증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이 증에 의해 수순하고 모든 것들이 순서대로 흘러가도록 합니다. 즉, 번뇌 망상이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능력을 받아 증의 의로 의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지라고 이야기합니다.


앞에서 의를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선정에 듦으로써 육근이 닿고 있는 의에 대한 구체적인 공부가 심, 의, 식으로 이것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또 의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식이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는 불교의 모든 공부를 의라고 했습니다. 의를 잘 해야만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식은 무엇이라 했습니까?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이라고 했을 때 생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마음입니다. 의라고 하는 것은 일어나는 그 마음을 한군데 모아 가지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라는 행위로 말미암아 선정에 드는데 이 때 우리는 화두를 든다고 합니다. 

뜰 앞에 잣나무라고 했을 때 왜 뜰 앞에 잣나무라고 했는가? 하는 이 생각을 가지고 밑도 끝도 없이 빠져 들어갑니다. 그럴 때 바로 선정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가지고 어떤 제자가 깨달음이란 것이 무엇인지 조주한테 물었습니다. 조주가 대답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뜰 앞에 잣나무니라 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공부합니다.

내가 ‘뜰 앞에 잣나무니라’ 했을 때 지금 여기 앉아 계시는 모든 분들이 생각을 합니다. 그 뜰 앞에 잣나무, 라 하는 것은 각자의 생각대로 받아들입니다. 


내 머릿속에서 ‘뜰 앞에 잣나무니라’는 그 말에 대한 생각을 일으킵니다. 누가 일으키는가? 식이 일으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업이 식에 의해서 ‘뜰 앞에 잣나무’라 했는데 뜰 앞에 잣나무란 무엇인가? 혹시 절 마당에 서 있는 잣나무라고 생각할 수 도 있고, 다르게 생각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식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뜰 앞에 잣나무라고 말한 사람은 조주입니다.

조주가 말한 뜰 앞에 잣나무라는 생각을 알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내가 갖고 있는 식이 없어야 합니다.

이 식을 나누어 보면 육식, 칠식, 팔식, 구식으로 나누어집니다.

일반적으로 의의 대성인 식은 육식입니다. 

현재 내 생각과 삶을 결정하고 하루 하루 살아가는데 모든 것들을 판단하는 것은 다 육식입니다.

내가 전생부터 지금까지 갖고 있는 이 업의 덩어리인 육식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 잠재의식인 제 7식입니다.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다시 태어날 때 내 업이 새로 태어나는 그 삶에 작용을 합니다. 

그 업의 근본 창고는 제 8식입니다. 자, 그래서 근본적으로 뜰 앞에 잣나무니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 생각하는 것은 내 육식이 합니다. 육식으로서 모든 형상들을 만들어 내고 잠재되어 있는 내 업의 총체에 의해서 뜰 앞에 잣나무니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이 때 팔식을 넘어서 팔식 자체가 맑아지는 겁니다. 팔식자체가 깨끗해지면 백정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구식이 됩니다.

제 구식 바로 견성성불 성품을 봤다, 견성했다는 것이 제 구식으로 구식을 아는 것이 바로 견성입니다.

바로 팔식이 맑아지는 상태가 구식입니다. 

우리가 무아를 인식한다고 했습니다. 불교경전에 볼 것 같으면 ‘본래청정커늘’ 이라고 합니다. 본래청정은 팔식을 넘어서면 원래 존재하고 있던 모든 것들은 그 말로부터 출발이 됩니다. 원래 청정했던 것이 우리의 업에 의해서 산하대지도 만들어지고 이 몸뚱이도 만들어 집니다. 

이것들이 만들어지기 전의 생각을 갖고 뜰 앞의 잣나무니라를 볼 수 있으면 제대로 보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뜰 앞의 잣나무니라’ 하는 것을 내 생각으로 바라봅니다. 

내 생각, 내 식으로 판단하고 이해합니다. 이제 그것이 화두를 타파했다, 깨우쳤다 하는 것은 바로 제 구식이 열려 세상을 인식하고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부처님의 능력은 바로 여기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색계 제 일선이라고 하는 것은 각과가 우리말로 설명한 것이 그래도 제일 잘 설명된 것입니다. 

각과 관으로 욕계의 악을 떠나는데 거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으로써 초선을 얻으며, 초선을 얻을 때는 말을 면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말로 표현하는 것을 면하는 것이 초선을 얻을 때입니다. 

자, 구체적으로 한번 보세요. 심사희락의 사를 갖추었는 것, 이것이 바로 제 일선입니다.

여기서 또 심사를 이해해야겠지요? 심사라고 하는 것은 각과 관, 앞에 설명한 것을 보십시오. 

각과 관으로 이 심사는 찾을 혹은 찾을 사로 결국은 심이라는 것은 

각이고 정이고, 사라고 하는 것은 관이고 염입니다. 심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염과 정이 심사로 표현된 것입니다. 우리가 선정에 든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심사를 갖추어야 합니다. 선정에 들기 위해서는 위빠사나도 해야 되고 사마타도 해야 됩니다. 두 가지가 나한테 갖추어진 상태에서 선정에 들어보십시요. 아, 우리가 희- 기쁨. 락- 즐거움에서 희와 락을 이해해야 됩니다. 

희라고 하는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육근이라고 했습니다. 육근과 육경이 부딪히면 나는 기쁘다 슬프다를 느낍니다. 


 내가 어떤 대상하고 부딪쳐서 아! 내가 기쁘다 슬프다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쁘다고 해서 꼭 락입니까? 기쁜 것이 전부 다 락은 아닙니다. 아무리 기쁘더라도 결국 그것은 고가 될 수도 있고 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육근과 육경이 부딪쳐서 일어나는 감정은 기쁨과 슬픔입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육근과 육경과 육식이 부딪혀 일어나는 감정이 고와 락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고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는 생멸하니까 고라고 했습니다. 결국은 모든 존재의 근본 출발에서 볼 때 존재하는 것들은 생멸합니다. 

태어난 것은 언젠가는 죽기 마련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언젠가는 허물어지고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모든 것들은 생멸하기 때문에 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고가 락이 되는 것은 생멸하는 원인과 이치를 알아서 연기를 알고 밝아지면 우리는 락이 됩니다. 깨달음의 락이 됩니다.  

앞에서 색계 제 일선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심사희락을 다 갖춘 것이 색계 제 일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선정에도 들고 위빠사나도 하여 락 즐거움도 느낍니다. 그러니까 즐거움이라는 것은 기쁨하고 다릅니다.

즐거움은 바로 근본적인 고와 락에서 느낍니다. 선악의 개념에서 선인 락과 악인 고를 배웠습니다. 바로 거기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심사희락 네 개를 다 갖춘 것이 제 일선이고, 그 다음 두 번째 설명을 볼 것 같으면 훨씬 더 구체적입니다.

심사희락 등시의 오지를 다 갖춘 것이 바로 사선이라 했습니다. 

초선이라고도 합니다. 

심과 사는 추세의 별로서 선정과 위빠사나 즉 정정과 정념이 됩니다. 

추세라고 할 때 추는 클 추, 거칠 추이며 세는 가늘 세, 세밀할 세로 옥편에서 찾을 수 있는 뜻입니다. 이 추세의 별. 추세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수정의 공이 있습니다. 

수정에서 정은 선정을 하거나 이 정을 닦음으로써 생기는 것이 공입니다. 그래서 선정을 닦음으로써 심과 사가 생기는 겁니다.

색계 층정의 색법을 발득하여서 색계 층정이란 것은 본래청정커늘 했지요?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본래 성품을 우리가 인식하고 이해할 것 같으면 그것이 바로 층정입니다. 색계 층정을 층정의 색법을 발득하고 내가 이것을 구하고, 터득하여 그 미성유의 공덕이익을 분별함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심과 사에 대한 설명입니다.

내가 위빠사나와 사마타를 해서 바로 깊은 곳에 들어가는 그 상태가 심과 사가 됩니다.

이 상태를 이해할 때 색계층정이라는 것을 가지고 내가 인식할 수 있을 때 바로 심과 사라고 이야기 합니다.

희는 희수로서 즐거움을 느낌으로써 소득의 이익의 환희가 있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기쁘다라고 하는 것은 내가 그 기뻐함으로써 환희를 느끼는 겁니다. 

환희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락이라고 하는 것은 경안의 심소라소 증에 이해하여 일심. 하나의 마음으로써 경이안락, 안정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등지는 심일경성적 증을 이야기 한다.’ 할 때 등지는 그러니까 네 개 다섯 개를 전부다 갖춘 것을 우리는 색계의 제 일선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결국은 내가 깊은 선정에 들어서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는 이 상태가 바로 색계제 일선이 됩니다.

내가 깊이 선정에 들어서 환희를 느낍니다. 그 즐거움을 느낄 때 내가 색계 제 일선에 다달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본래청정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제 색계 제 일선에 들어가는 겁니다.


색계 제 이 선은 말로 설명하면 마음의 평정을 취하여 증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 선을 얻으며, 이선을 얻을 때는 감각과 관찰을 면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감각과 관찰을 면한다는 것은 심사를 면한다는 겁니다. 다음 설명을 한 번 보세요.

심사의 두개를 이해하고, 떠나고 희락의 두개만 남아있는 것이 바로 색계 제 이선입니다.

색계 제 일선에서는 아직까지 내가 선정을 한다는 생각이 있는 상태입니다.

제 이선으로 들어서면 내가 선정에 들어있다 혹은 내가 위빠사나를 한다는 이 단계를 넘어 선 겁니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남아 있는 것은 기쁨과 즐거움 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고수가 되면 어떻습니까? 고수가 될 것 같으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가 참 선정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더 이상이 되면 걸으나 서나 앉으나 누우나 항상 선정에 들어 이 상태가 되면 벌써 선정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색계 제 일선에서는 선정이라는 형식이 남아있지만 제 이선으로 넘어서면 의묵동정으로 누워 있거나 자거나 항상 선정에 들어있는 상태입니다.

그 상태가 될 것 같으면 신과 사를 떠나게 됩니다. 

신과 사를 떠나고 오로지 남아 있는 것은 기쁨과 즐거움만 남아 있는 상태가 바로 색계 제 이선입니다.


 이것이 앞으로 내가 공부를 해 가면서 자신을 점검할 수 있는 두 번째 설명입니다.

등정 희락 등지의 사지를 구하는 것이 바로 색계 제 이선입니다.

등정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다 해놨어요. 내 등지는 신의 심소를 정이라 명하나니. 신, 믿을 신으로 믿음의 마음자리를 정이라 합니다. 정은 청정으로 결국 이 청정이 되면 모든 것들이 이루어집니다.

정이라고 명하나니, 선정이라는 이 정에 들어서면 정신이 생하여 정신이 일어나면 맑고 깨끗한 믿음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 우주가 본래청정이라는 것을 이해를 하면 바로 정신이 생하여 심사의 고동을 떠납니다. 고동이라고 하는 것은 북을 치고 북을 울리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요동하는 것이 있는 겁니다. 이것이 더 깊이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요동이 없습니다. 그냥 안정해 있을 뿐입니다.

이 요동을 떠나면 신과 사의 고동을 떠나고, 평등함 균등함만 있는 것입니다. 끝없는 평등 끝없는 평정 끝없는 안정만 있는 것을 바로 내 등지입니다. 희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내정을 극하여 환희가 있고, 락은 내정에 의하여 일심이 경리안락한 것이 락이고, 또 등지는 정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이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색계 제 이선에 들어서는 겁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내 상태를 점검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다음 색계 제 삼선은 동에 머물러 즐거워함으로 삼선을 얻으며 삼선을 얻을 때는 기쁨을 면한다고 합니다. 

기쁨을 면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번에는 심사희의 삼을 면하고 심사희의 삼을 떠나고 오직 락만 남아 있는 희와 락 이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 이선에서는 심사가 떠나 버렸고 오로지 남아 있는 것은 희락만 남아있었습니다. 

희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고의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삼선에 들어서면 심사희를 전부 면하고 오로지 락만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제 삼선입니다.

이것은 바로 생멸하는 것을 확실하게 터득하면 결국은 락만 남게 됩니다. 

바로 연기를 터득할 것 같으면 락만 남아 있게 됩니다.

그것이 제 삼선에 들어가는 경지입니다.

제 삼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행사, 정영, 정해, 수라, 등지의 오지를 봅니다.

이 다섯 개가 갖추어지면 내가 삼선에 들어가는 겁니다.

행사는 행온 소섭의 사의 심소로서 일심이 평등한 것을 우리는 심소라고 합니다.

여기서 행이라고 하는 것은 색, 수, 살, 행, 식 할 때 바로 행입니다. 오온 연기에서 이 몸뚱이가 생기는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그럴 때 행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들을 하나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육신을 내 업만큼 끌어모으기 시작하는 것이 행입니다.

애욕으로 말미암아 육신이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행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여기서 행사, 행을 버리는 겁니다. 이 단계가 바로 제 삼선에 들어가는 것으로 행사, 행을 버리고 행이 없어지는 겁니다.


 행이 없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다음 생에 받아야 할 업이 없어지는 겁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행이 사해지는 상태가 바로 제 삼선입니다.

그래서 정념이 되고 정혜가 됩니다. 오로지 락만을 느끼는 그런 상태가 바로 제 삼선입니다.

그래서 행사는 행온 소섭인 사의 심소로소 일심이 평등합니다.

이 마음이 일심으로서 평등한 것이고 정념은 염의 심소로서 삿된 사념을 버리고 정념에 주하는 것이 바로 정념입니다. 

바로 정혜의 혜는 침소로서 삿된 지혜를 떠나고 정혜에 주하는 것이 바로 정혜입니다.

수락은 락수로서 제 삼선의 극락을 말합니다.

극락, 한 생 잘 살고 어디에 태어날려고 열심히 기도합니까?

바로 락이 즐거움이 극에 달하는 것이 극락입니다.

이 몸뚱이 죽어가지고 태어나는 극락도 있지만 우리가 제 삼선에 들어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도 극락입니다.


 그 다음 제 사선에 들어가면 기쁨도 즐거움도 멸하고 맑고 깨끗한 정념을 통해 근본 자리에 들면 제 사선을 얻는데 제 사선에 들면 수결을 멈춥니다. 바로 수결, 모든 것들이 멈춰지는 상태가 제 사선입니다.

이 사선에서는 심사희락을 모두 떠나는 상태입니다. 여기에는 즐거움까지 모두 떠난 상태입니다. 제 사선은 성불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그래서 이 사선에서는 행사청전으로 삼선은 행사였던 것이 지금은 행사청전 영청전 비고락수 등지의 사지를 구하는 것이 바로 제 사선입니다. 그래서 행사청전은 제 삼선의 극락도 떠나고 불해하고 일심이 평등합니다. 

불해, 뉘우칠 것도 없이 오로지 일심이 평등한 행사청전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제 사선입니다.

여기에는 영청전이 잊어 자기의 공덕에서 정념에 주하는 것이 바로 영청전이고, 비고락수는 사수로서 느낌을 떠나는 겁니다.

사수, 우리는 가장 지극한 락을 느끼는 것을 떠난 것이 사수입니다.

그 사수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제 사선입니다. 그래서 사수는 고요하고 청정하여 마음이 번거롭지 않고 과거의 모든 것을 아는 숙명통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 제 사선입니다. 여기서부터 부처님의 누진통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날 새벽녘에 이 제 사선에 들어가지고 제 일 지혜를 얻습니다.

제 일 지혜를 얻어 무명을 벗어나 어둠을 깨뜨리고 연기를 깨달았습니다.

바로 제 사선에 들어서 일 지혜 때 부처님께서 연기를 얻은 겁니다.

교재에 보면 구체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나는 그 하나하나의 상 및 상세한 상황과 더불어 허다한 과거의 생애를 상기하였다. 이것이 내가 초경에 접어든 밤에 도달한 제 일의 명지이다.’

여기에 무명이 사라지고 능지가 생깁니다. 능지는 연기였습니다. 암흑은 소멸하고 광명이 빛을 발합니다. 


 그 다음 제 이 지혜에서는 나고 죽는 인명을 명상하시고 사람의 생사와 그 업의 흘러들어가는 상태를 아는 천안통을 얻으시고 나아가 번뇌가 멸진하는 지혜를 얻으시고 고의 원인과 결과. 고의 결과, 고의 멸에 도달하는 방법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사성제의 지혜가 얼마나 지고지난합니까. 결국 지금 불교를 공부하고 있는 출발과 마지막은 사성제에 의해서 전달되었습니다. 이 사성제를 잘하면 불교를 다 배운 것입니다. 

바로 사성제의 고집멸도가 부처님께서는 제 이 지혜 때 열립니다. 제 이 지혜 때 부처님께서 천안통을 얻으십니다.


 그 다음을 볼 것 같으면 ‘제 삼 지혜. 다음으로 제 삼의 지혜로 애욕과 무명에서 벗어나 해탈하셨다. 해야할 일을 다 성취하셨다. 성불하셨다. 바로 제 이 삼 지혜. 일체의 고통이라 여실히 알았다. 내가 그렇게 알고 그렇게 보았을 때 마음은 더러움에서 해탈되고 마음은 생존의 더러움에서 해탈되고 마음은 무명의 더러움에서 해탈되었다. 안전하게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긴다.’

여기서 제 삼 지혜가 열리고 선정에 들어가지고 제 사선에서 제 삼 지혜에 옴으로써 부처님이 갖고 있는 육신통이 구족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육신통이 전부 다 열리셨던 것입니다. 그 당시 연기를 터득한 최고의 성자를 아라한이라고 했습니다. 연기를 터득한 깨달은 자를 아라한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삼명을 터득하고 삼명을 얻으면 아라한이 됩니다. 삼명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육신통 중에 세 개인 천안통, 숙명통, 누진통으로 이것을 터득하면 아라한이 됩니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견성을 하고 난 뒤에 신통을 얻은 사람도 있고 못 얻은 사람도 있습니다. 

견성을 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위빠사나와 사마타에 의해서 우리는 견성성불한다고 했습니다.


 사마타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신통을 얻습니다. 그런데 위빠사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신통을 얻기보다는 지혜를 얻는 쪽이 많습니다.


 부처님의 육신통 중에서 첫째, 신족통을 살펴보겠습니다. 신족통은 생각할 수 있는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여기에서 서울가고 싶다. 바로 갈 수 있는 능력을 신족통이라고 합니다. 일념으로 서울로 가서 서울에서 일어난 일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상을 바꾸는 것을 전변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 몸뚱이를 하나에서 두 개, 세 개, 네 개 내 멋대로 만들기도 하고 모양을 다른 것으로 바꾸기도 하는 것 즉 상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이 전변입니다.

부처님께서 신통을 제일 처음 보이신 것이 언제입니까?

이것은 계획된 신통입니다. 그 당시에는 모든 사상가들을 부처님께 조복받기 위해서는 신통력을 보여야 합니다.

능력을 보여줘야 할 때 보여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안 믿습니다. 안 따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처음 신통을 보인 것이 가섭 삼형제를 설득시킬 때입니다.

가섭 삼형제는 바라문 족으로 1000명의 제자를 거느린 그 당시 인도의 최대의 집단입니다.

가섭만 부처님의 법에 귀의하면 천명의 제자가 생기고 인도의 사상이 통일될 만큼 엄청난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의도적으로 신통을 부립니다. 

가섭은 불의 신을 믿고 있었는데 신당에는 독용을 모셔놓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독용을 모셔놓은 곳에 하룻밤 묵으면서 독용을 제압합니다. 독용의 독을 부처님께서 선정의 힘으로 제압을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신통을 보인 첫째 사건입니다.

외계의 대경은 육경입니다. 색성향 미촉법 육경을 자유자재로 하는 능력입니다. 


 갑자기 여기에 불이 생기게 하고, 물이 생기게 하고, 비를 오게 한다던가 이 육경을 자유자재로 하는 것이 신족통에서 나오는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 원효스님 한번 보세요. 중국에서 절이 무너질 때 나무 판자를 던져서 중국에 있는 사람들이 판자가 공중에 떠 있는 것을 보러 나왔을 때 그 순간에 절이 무너져서 많은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이런 것과 같이 외계의 대경을 자유자재로 하는 능력이 신족통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성불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최고의 능력 중에 하나가 일반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신족통입니다.

또 부처님께서 말년에 부처님의 사촌인 대바달타가 반역을 합니다. 부처님을 죽이려고 여러번 모함을 합니다.

한 번은 땅을 파서 폭발물을 묻어두고 부처님께서 지나가면 터져서 죽도록 해 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지나가면서 거기에 연꽃이 피어납니다. 이것도 신족통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성불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다치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도 선정에 들어 열심히 공부해보세요. 세상의 어떤 마물도 침범하지 못합니다.

사천왕 중에 팔부신왕이 있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면 팔부신이 지켜줍니다. 팔부신이 뒤에 따라다니면서 지켜줍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공부 열심히 하면 본인이 지켜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숙명통은 본인과 다른 사람의 과거의 생존 상태를 모두 압니다. 본인 것만 알면 얼마나 좋겠어요. 본인 것만 알면 어떻게 살 것인가 판가름이 나버립니다. 


 우리가 선정을 해야하는 제일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숙명통입니다.

내 전생을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확연하게 결정되어 버립니다.  

부처님의 경전을 볼 것 같으면 숙명통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 같이 우매한 중생들한테 믿음을 주는 제일이 과거 전생입니다.

우리는 과거 전생을 모르기 때문에 이생에서 복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를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과거 전생이야기는 안 했는데 십대 제자들의 과거 전생이야기는 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묻습니다.

가섭은 저렇게 수행을 잘하고 이생에서 저런 복을 받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가섭의 전생이야기를 합니다. 

이와 같이 숙명통이 열리면 전부 다 알 수 있습니다. 숙명통이 제일 열리기 쉽습니다.

일 년만 공부해 보세요. 숙명통이 열리나 안 열리나. 삼십분씩 공부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이 삼십 분이라고 하는 것은 미끼입니다.

공부 삼십 분 씩 한 백일 쯤 하다보면 삼십 분으로 안 되겠다 싶어서 자연히 한 시간씩 하게 됩니다.


 한 시간씩 하면 한 달에 한번쯤은 서너 시간씩 해 볼 수 있는 힘이 생겨서 서너 시간씩 앉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선정에 들려고 하면 네 시간 이상은 앉아 있어야 합니다.

네 시간 앉아서 선정에 들어 볼 것 같으면 삼천배 하는 것 보다 더 좋습니다.

스스로 체험해 봐야 아, 공부하는 것이 정말 좋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다음 타심통.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생각을 아는 것이 타심통입니다.

그러니까 우주의 삼라만상을 느끼는 순간 무아를 얻게 됩니다. 

무아임을 느낄 때 이런 능력이 자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천이통으로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인간 소리만 알아 듣습니다. 천이통이 열리면 동물들이 하는 소리, 자연이 내는 소리, 모든 소리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인간만 소중한 줄 아는데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체 모두가 인간만큼 소중한 것이고 모든 생명들은 똑같습니다. 서로가 소통하는 소리가 다 있습니다.

천이통이 열리면 전부 다 들을 수 있습니다. TV 동물농장 프로에서 동물의 생각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천이통이 열리면 동물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다 알 수 있습니다.

천안통. 세간의 모든 원근과 고락과 수세를 아는 능력이 바로 천안통입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천안통이 열리면은 여기서 천리 밖에 있는 사건들도 아는 것입니다.

천안통이 안 열리더라도 선정에 깊이 들어있는 상태라면 멀리 떨어져 있는 일들도 알 수 있는 능력이 순간적으로 생깁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일이 있었지요. 홍수가 나서 사람이 죽었는데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선정에 들어 시체가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천안통이 열리면 확실하게 알지만 천안통이 안열리더라도 깊은 선정에 들면 순간순간적으로 그런 능력이 생기는 겁니다.

누진통, 번뇌를 모두 멸하는 상태를 누진통이라고 합니다.

결국 누진통이 열려야 성불합니다.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야 우리는 성불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왜 불교 공부를 해야하느냐? 지금까지 부처님의 능력을 이야기 한 것은 오로지 부처님의 능력이 아닙니다. 내가 진정으로 공부하면 이런 능력이 내속에도 똑같이 생깁니다.

부처가 있고 내가 있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뜨자 마자 내가 부처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부처다라고 했을 때 내가 안 믿는데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내가 부처다’라고 하라 한 것은 내가 부처임을 믿으라는 겁니다.

내가 부처라고 믿는 순간 거의 부처가 됩니다.

내가 중생이라고 생각하지 죽다 깨어나도 내가 부처다라고 안 믿습니다. 제발 이 시간부터는 내가 부처다라는 것을 꼭 믿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부처다라고 믿는 순간 부처가 됩니다. 오히려 쉽기 때문에 우리는 안 믿습니다.

못 믿지요? 왜 못 믿어요? 쌓여있는 이 육식 때문에 죽다 깨어나도 못 믿습니다. 

금강경에서 응무소주 의생기심 할 때 응무소주는 응당 머무름 바 없이 마음이 머문다.


 앞에서 뜰 앞에 잣나무니라를 이야기 했습니다. 내 생각으로서 뜰 앞의 잣나무니라가 아니라 응무소주 의생기심으로 바로 견성한 상태, 전경인 상태, 진리를 보는 상태가 응무소주 의생기심입니다. 

오늘은 부처님의 능력을 공부해 봄으로써 이것이 바로 내 능력입니다.


 우리가 왜 불교공부를 합니까? 세속에서 추구하는 이익보다 부처되면 어마어마한 이익이 있다고 했습니다. 큰 이익이 나한테 생기는데 왜 불교공부를 안하겠어요. 불교공부를 해야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가 부처되는 큰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알기만 하면 행복이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오늘 공부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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