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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강 아난, 부처님의 시자(侍者)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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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1,463회 작성일 21-07-22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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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강 아난, 부처님의 시자(侍者)가 되다




반갑습니다. 한주 잘 계셨습니까? 오늘은 17년째 되던 해 부터 공부해 보겠습니다. 


17년째는 부처님께서 52세 되던 해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죽림정사에 계시면서 안거(安居)를 보내셨는데 이 해에 유명한 의사 지바카의 누이동생인 창녀 시리마가 죽었습니다. 앞에서도 암라팔라라는 창녀가 나왔지만 지금 말하는 창녀 시지마도 왕사성의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고급 창녀 시리마가 죽은 해가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신지 17년 째 되던 52세입니다. 의사 지바카는 평생 부처님의 곁에서 부처님 몸을 치료해 주던 인도의 의술을 연 시조나 마찬가지입니다. 지바카의 태생은 정통이 아니고 밖에서 낳아 데리고 온 자식이라 왕족이었지만 푸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바카는 똑똑했기 때문에 무엇을 하면 내가 대접을 받고 살아 갈 수 있을까? 고민을 합니다. 정치나 학문에는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의술을 배워 의사가 되면 충분히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의사가 되기로 합니다. 청년이 된 지바카는 의술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 인도 전역을 유랑합니다. 인도를 떠돌아  다니다가 최고의 의술을 지닌 스승 밑에서 10년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됩니다. 세상에 나가서 의술을 펼쳐도 될지 시험하는 마지막 관문으로 인도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약이 되지 않은 풀을 찾아오라고 합니다. 그 당시 모든 약은 거의 풀이었습니다. 약초가 아닌 풀을 찾아오라고 스승이 주문을 합니다. 지바카는 쉽게 생각하고 인도를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넉 달이 가도록 다녀 보았지만 우리 몸에 약이 되지 않는 풀은 없습니다. 독이 있는 풀도 잘 사용하면 우리 몸에 약이 됩니다. 일 년을 돌아다니면서 찾아보았지만 약이 되지 않은 풀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풀이 죽어서 스승을 다시 찾아옵니다. 스승이시여! 저는 처음 출발할 때 우리 몸에 약이 되지 않는 풀이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했었는데 일년 동안이나 다녀보았지만 약이 되지 않는 풀은 없습니다. 어떤 풀이든 잘 사용하면 모두 약이 됩니다. 저는 찾지 못했습니다. 스승은 지바카의 말을 듣고 ‘너의 경지가 그 정도면 세상에 나가 의술을 베풀어도 좋다.’ 그래서 지바카는 세속으로 돌아와서 의술을 베풀게 됩니다. 평생 부처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됩니다. 삼국지에 보면 유명한 의사 화타가 나오는데 화타는 관우도 수술하고 위나라의 왕 조조의 뇌수술을 하려고 합니다. 조조가 의심이 많아서 결국 뇌수술을 안 받고 죽게 됩니다. 그 당시 중국의 화타가 뇌수술을 했고 지바카도 부처님 당시니까 BC 580년경에 장이 꼬인 아이를 수술 합니다. 위세척을 하는 어려운 수술을 이 당시에 지바카는 한 것입니다. 인도의 의술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면서도 실질적으로 새로운 전통을 세운 사람이 지바카입니다. 지바카의 누이동생인 창녀 시리마가 그 해에 죽습니다. 의사 지바카의 동생 시리마의 장례식에 참석한 부처님은 왕에게 말하기를 시리마의 시체를 사가지고 갈 사람을 찾아보라고 합니다. 살아 있을 때 여러 사람들이 서로 좋다고 난리였으니 죽고 난 지금 시리마의 시체를 가져 갈 사람을 공고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을 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던 몸뚱이를 돈은 커녕 그저주어도 누구 하나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사람들을 향해 읊으셨습니다. 무상과 무아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 나옵니다. 

“보라, 이 분칠 한 모습을, 상처투성이의 (뼈마디로) 

몸의 엉성한 사대에 들끓는 구더기와 병과 근심덩어리 

견고한 것도 지속되는 것도 없는 

이 무상한 육신을” 

부처님께서 죽은 시체 앞에 모인 많은 대중들에게 이렇게 읊으면서 육신의 무상함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게 합니다. 

18년째 53세 되던 해에 부처님께서는 찰리야 바위성에 계셨습니다. 찰리야 바위성에 계시던 때 가난한 직조공의 어린 딸이 부처님을 친견하고 죽음을 염(念)하는 공부를 부처님께 배웁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아와 무상을 체득하기 위해서 죽고 난 다음 우리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고 뼈만 남아 있을 무덤을 상상하기도 하는 여러 가지를 가르쳤습니다. 죽음을 염하는 공부법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은 어린 소녀는 다음해에 다시 부처님을 친견했을 때 부처님께서 질문한 4가지에 대해서 정확히 대답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피상적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린아이는 철학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이를 칭찬하고 대중들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습니다. 


“이 세상은 눈멀었도다. 분명히 보는 자 적도다. 

겨우 몇몇 사람만이 좋은 세계(천상계)로 가는 구나. 

그물을 벗어난 새처럼.” 


그물을 벗어난 새처럼 어린아이가 터득한 깨달음의 경지를 칭찬합니다. 그 소녀는 어린 나이에 요절합니다. 이 이야기가 어린아이가 오래도록 살았다면 경전에 남아 있지 못했겠지만 어린아이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그렇게 열심히 했던 기억을 부처님께서는 고마워하시고 아이가 천성적으로 부지런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성위(聖位)의 첫단계 예류과(預流果)를 성취한 것입니다. 예류과는 금강경에 보면 4단계의 성인(수다원과(須陀洹果), 사다함과(斯陀含果), 아나함과(阿那含果), 아라한과(阿羅漢果)) 4과가 나옵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면서 제일 먼저 터득 하는 단계가 수다원과 입니다. 그다음 사다함과, 세 번째가 아나함과 네 번째가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을 터득했다하면 연기를 터득 한 것이고 부처라고 이야기 한 것이 아라한과입니다. 여기서 아이가 예류과를 터득 했다고 했는데 예류과는 깨달음의 첫 단계인 수다원을 한문으로 번역하면 역류 혹은 예류과 입니다. 이 수다원과는 영원한 평안에의 흐름을 탄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바로 공부할 힘을 얻은 사람이 수다원과를 터득하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공부와 멀어지지 않습니다. 수다원과를 얻으면 공부와 인연이 지어져서 세세생생 가능합니다. 두 번째 사다함과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한번만 다시 태어나서 깨닫는 자(者)로 이생에서 몸 받아 공부하고 다음 생에 태어나면 바로 아라한과를 얻는 과가 바로 사다함과입니다. 끝도 없이 윤회하는 생명이 이렇게 공부하다가 한 번 더 몸을 받아 태어나서 깨닫는 사람이 바로 사다함과입니다. 그 다음에 아다함과는 이제는 결코 다시 태어나거나 오지 않는 자(者)로 이제 태어나지 않는 자(者)가 아다함과 입니다. 그 다음 아라한과는 존경 받을만한 사람을 말합니다. 집착에서 벗어난 존경 받을만한 사람이 바로 아라한과를 터득한 것입니다. 한문으로 번역하면 수다원과는 역류 예류과로 번역할 수 있고 사다함과는 한번만 다시 온다는 일왕래(一往來) 번역하고 아라함과 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불안으로 번역하고 무정 무쟁(無諍) 무쟁삼매(無諍三昧)라고 이야기 할 때 바로 무쟁(無諍)이 아라함과 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4과를 설명해 보면 수다원이란 영원한 평안에의 흐름을 탄 자(者)라고 설명했습니다. 한문으로 번역하면 역류라고 하고 태어남과 죽음에 거슬러 육진에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 바로 수다원입니다. 우리는 육근 육경을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육근은 나 자신이고 나 외의 대상이 육경입니다. 여기서 육진은 육경을 초기에 많은 경전이 육진이라고도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육진은 육경하고 같은 것입니다. 대상에 물들지 않는다 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과 죽음에 거슬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고 태어남을 끝없이 반복 합니다. 거슬리지 않는다 하는 것은 벗어나는 겁니다. 죽음과 삶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단계가 바로 수다원과 입니다. 깨달음의 세계를 향하여 첫발을 들여 놓는 것이 수다원과 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부처다’ 생각하라 했습니다. 이생에서 나는 꼭 부처를 이루겠다는 이 말(言)이 씨가 된다고 했습니다. 내가 부처다 내가 이생(生)에서 꼭 부처를 이루겠다. 이 말이 어떤 계기가 되면 이 말 때문에 이생(生)에서 공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1학년 때 멋모르고 이생에서 꼭 부처를 이루겠다고 세운 그 원으로 계속 불교 공부를 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항상 부처님께서 깨치신 이 연기에 대해서 거듭 생각하게 했던 그것이 인연공덕으로 지금까지 이렇게 붙잡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비록 우리가 내가 부처다 꼭 부처를 이루겠다고 뼛속까지 사무치는 맹세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계기가 되면 그 맹세를 스스로 지킬 때가 올 것 입니다. 이생에서 그 맹세를 스스로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성공한 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다원과 입니다.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이 원이 바로 수다원과입니다. 사다함과는 한번만 더 다시 태어나서 깨닫는 자(者)입니다. 인간에게 죽음, 수명이 다하여 죽어서 다시 인간으로 한번만 더 다시 태어나 깨달음을 성취하는 자(者)가 바로 사다함과 입니다. 아나함과는 불안한 세상의 속박에서 영원히 벗어난다는 것이 바로 아나함과 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 단계의 깨달음은 아나함 입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 아나함과는 불안, 이제는 결코 태어나 오지 않는 것, 애욕의 집착에서 벗어났으므로 다시는 인간의 몸을 받지 않는다 하는 것이 아나함 입니다. 죽고 태어나는 삶의 끝없는 수레바퀴에서 근본적인 것은 아집이었고 아집이 결국은 애욕이고 이것이 거시적으로 12연기로 돌아갔습니다. 이와 같이  아나함이라 함은 애욕에서 벗어나 불안입니다. 애욕의 집착에서 벗어나 다시는 인간의 몸을 받지 않는 자(者)는 불안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라한 입니다. 네 번째는 아라한은 집착에서 벗어나 존경 받을만한 사람으로 모든 것이 성취되어 집착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애욕의 뿌리에서 벗어나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으로 무죄, 탐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을 조복 받아 모든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 항상 안과 밖이 적적하다는 뜻이 바로 아나한 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다 보면 500 아라한이 나오는데 바로 부처님 당시 초기에는 연기를 터득해서 부처가 된 사람이 바로 아라한 입니다. 4과를 공부함으로 우리는 매일 내가 부처다 나는 꼭 부처를 이루겠다는 원이 뼈속까지 사무쳐서 이생에서 그 원이 내원이 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론적으로 충분히 공부를 했고 이론이 내 삶 속에서 부처될 수 있는 깨달음의 단계가 4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18년째 53세 되던 해 찰리아바위산에서 직조공의 어린 딸이 예류과를 터득한데서 그 어린 아이를 칭찬하시면서 깨달음의 단계를 4단계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 다음해인 19년째 되던 해도 찰리아바위산에서 머무르고 계셨습니다. 54세까지는 부처님께서 일반적으로 도를 이루시고 약 20년 정도 지난 후라 어느 정도 교단도 완성이 되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연기 등이 체계화된 상태입니다. 불교라는 거대 집단이 어느 정도 완성된 단계가 이때입니다. 그때까지는 부처님께서 계속 법을 설하고 다니셨고 법을 55세 되던 해를 기점으로 해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그 법이 기록에 남기 시작합니다. 20년 동안 즉 33세부터 54세까지는 법을 설하셨지만 시자가 없어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그 법을 기록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다음해 55세 되던 해에는 새로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부처님께서는 도를 이루시고 20년 되던 해에는 왕사성 죽림정사에 계셨습니다. 이때 부처님의 시자가 된 사람은 아난입니다. 불교 경전을 보면 맨 처음에는 항상 이 ‘여시아문’ 으로 시작하는 것이 그 뜻이 ‘나는 이렇게 보고 들었노라’고 얘기할 때 바로 아난이 송출자입니다. 부처님에게서 들었던 그 많은 경전을  아난이 모두 송출합니다. 부처님께서 55세 되던 해 아난이 부처님의 시자가 되어 그 많은 기록들을 송출합니다. 아난이 누구였습니까? 부처님의 사촌으로 지난 시간에 배운 제바달다가 아난의 형제였습니다. 부처님에게 평생 가장 소중하고 고마움을 느끼게 한 사람은 아난이고 부처님으로 하여금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을 갖도록 한 사람은 아난의 형 제바달다입니다.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모반을 일으켜서 새로운 교단을 만들겠다고 떠들면서 교단을 분리해서 부처님을 가슴 아프게 했던 사람은 제바달다이고 또 부처님의 모든 법이 지금까지 이어져 이렇게 공부할 수 있게끔 한 고마운 사람이 아난입니다. 얼마나 묘한 인연입니까? 아난은 부처님께서 생각하셨던 것이 20년 동안 설하신 법을 다음에 이 법이 다음 생에 다음 생에도 내가 죽고 난 다음에도 누군가에 의해 공부 할 수 있도록 기록에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부처님이 55세 되던 해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시자(侍者)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내가 법을 설할 때 그 법을 듣고 기록할 시자가 필요하다고 부처님께서 이야기합니다. 그 당시에 부처님께는 제자가 많았습니다. 10대 제자 중에서 가섭(迦葉). 목건련(目犍連). 사리불(舍利佛) 등은 부처님 경전에 가장 많이 나오는 제자들로 부처님의 시자로 적합하지 않을까 했습니다. 당시 부처님께서 처음 출가했던 그 때 함께 공부했던 교진여도 시자로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교단에서는 중진들이 모여서 여러 사람을 추천합니다. 부처님의 시자(侍者)는 지금 대통령 비서실장 쯤 될 것 같은데 교단에서 막강한 힘을 가질 수 있는 위치가 될 수가 있겠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시자라면 당시 덕망이 높았던 사리불과 목련 가섭이 거론이 되고  부처님과 더불어 같이 5년 동안 고행을 했던 교진여 여러 사람들을 시자로 추천하는데 부처님께서 거절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시자를 무엇 때문에 원했습니까? 부처님 법이 세세생생 전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인데 이 사람들이 그 법을 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법을 전할 만큼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거절합니다. 그래서 신통제일(神通第一)목련이 선정에 들어서 보니까 부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도 늙었으니까 시자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단순하게 그냥 시자라고 생각했는데 선정에 들어 부처님의 마음을 읽어보니까 부처님이 나이가 들어서 시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법을 제대로 기록하고 전하는 그런 시자를 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목련이 부처님의 마음을 읽고 가섭과 사리불등과 같이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그리고 아난을 추천합니다. 기억력하면 아난이 제일입니다. 한번 들으면 세세생생 잊어버리지 않은 아난이기에 부처님께서는 법문을 할 때 자신을 따라 다니면서 법을 듣고 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난 밖에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아난을 시자로 원했던 것입니다. 회의를 해서 아난을 추천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시여 아난이 부처님의 시자가 되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여쭙고 부처님께서 승낙을 하십니다. 아난에게 부처님의 시자가 되어 달라고 하자 아난은 나는 혼자 공부하겠다며 부처님의 시자가 되면 시기 질투를 받을 수도 있는데 나는 시자가 되기 싫다. 절대로 되지 않겠다. 냉정하게 거절을 계속합니다. 그래서 목련이 아난을 불러서 부처님께서는 그냥 시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법이 다음 세상에도 전해지기 위해서 기억이 뛰어나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인 아난을 시자로 두기를 원한다고 설득합니다. 목련의 말을 듣고 아난은 부처님의 뜻이 그렇다면 내가 부처님의 시자가 되는 대신에 조건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조건을 들어주면 부처님의 시자가 될 것이고 조건을 들어 주지 않으면 시자가 되지 않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 곳에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이 아난이여 너의 조건은 무엇이냐? 이야기 합니다. 교단에 보시가 들어오면 누구한테 많이 들어오겠습니까? 그 교단에서 가장 대단하신 부처님을 보고 보시를 합니다. 그 많은 대중들이 먹고 살 양식과 옷과 약도 모두 부처님을 보고 보시를 합니다. 그러니까 아난은 ‘내가 부처님의 시자가 되면 누구보다도 풍족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며 또 부처님께 들어오는 많은 보시물들을 아난이 가져 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할 것이다’ 그래서 아난이 생각한 첫째 조건은 부처님한테 들어온 보시는 부처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하고 무관하다.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합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냐고 합니다. 대중들도 생각해 보니까 아난의 말이 맞기 때문에 모두가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 두 번째 부처님께서는 많은 재가신자들 집에 초청 받아서 갑니다. 법을 설 할 때는 내가 시자가 되지만 부처님의 재가신도집이나 다른 일로 초청받아 갈 때는 내가 시봉하지 않겠다. 그것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 초청받아 가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개인적인 초청을 받아 갈 때는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자 대중들이 그것도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조건은 정해진 때가 아니면 부처님을 모시지 않아도 좋다고 약속을 해라.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설법을 할 때나 정해진 시간만 하겠다. 개인적인 일에서는 부처님의 시자가 아니다. 공식적으로 정해진 시간에만 시자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조건들을 대중들이 모두 허락을 합니다. 결국 아난은 부처님의 시자가 되는 조건으로 세 가지 서약을 받아냅니다. 대중들이 전부다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에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찾아갑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이 부처님의 시자가 되는 것을 승낙 했습니다. 하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아난이 그냥 승낙했느냐고 묻습니다. 아닙니다. 아난이 3가지 조건을 제시해서 그것을 들어주기로 하고 승낙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난은 참으로 지혜로운 수행자구나. 그는 시끄러운 문제를 미리 예방하고 있다. 수행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아난이 나에게 들어오는 보시 때문에 시봉한다고 할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시봉한다는 오해를 받을 것을 알고 미리 예방한 것이다. 또 아난은 여래를 만날 수 있는 때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수행자들이 언제 만나는 것이 좋은 때인지 알고 있다. 또 신도와 이교도가 여래를 만나기 위해 어떤 시간에 어떤 장소로 찾아가야 좋을 것인지 알고 있다. 여래가 차를 마시고 여래가 설법하기에 적합한 시기가 언제인지 알고 있다. 아난은 정말 현명한 수행자이다. 또한 출가 수행한 것도 도를 이루기 위하여 생업을 뿌리치고 목숨을 걸고 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부처라 하더라도 어느 누구에게도 시봉을 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부처님께서 이 때 이렇게 말씀 하신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출가 수행한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해서, 도를 이루기 위해서,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생업을 버리고 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부처라 하더라도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을 위해 시봉을 들라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암기력이 뛰어난 아난에게 시봉을 부탁하는 것은 내가 열반에 든 후에도 진리가 계속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며 어떤 시대에서도 진지한 수행자들이 많아 세상의 복밭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다. 아난이 거절하지 않고 나의 청을 들어준 것은 아난이 나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렸기 때문이다. 아난의 결정은 정말 고마운 것이다. 너희들은 아난에게 내 마음을 전해라. 결국은 부처님의 마음이나 아난의 마음이나 목련의 마음은 같은 것입니다. 아난이 시자를 승낙 한 것은 부처님의 법이 열반에 드시고 난후에 이 법이 끊어지지 않고 세세생생 전해지기 위해서 승낙한 것이고 부처님께서도 그러한 마음으로 아난을 시자로 받아들인 것 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처라고 해도 어느 누구에게 시봉하기를 강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출가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부처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라도 강요 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으로 하여금 시자가 되기를 원한 것은 이 법이 전해지기 위해서 시자가 되라고 한 것이지 부처님께서 몸이 늙어서 거동하기 힘들어 편하기 위해서 시자를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20년째 되던 해를 기해서 불교는 일대 전환이 됩니다. 이제까지는 부처님께서 유행하시면서 법을 설했던 것이 지금부터는 그 많은 법들이 아난으로 하여금 기록에 남길 수 있도록 된 것입니다. 


  부처님의 일생에서 45년 동안 설하신 법을 19년째를 기해서 마감하고 20년째 아난을 시봉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제2막의 부처님 생애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난은 부처님께서 20년째 되던 해부터 시봉을 들기 시작해서 80세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시봉을 듭니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그 내용들이 전해져서 지금 우리들로 하여금 공부 할 수 있게끔 내용이 다 남아 있습니다. 아난이 그 방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모두 기억합니다. 그래서 아난이 제1집 때 송출자로 선정이 됩니다. 선정 되었을 때 아난이 500아라한과를 터득한 500비구가 제1결집에 들어가는데 아난은 그 500명 속에 포함되었지만 아란한과를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아난은 25년 동안 부처님의 법을 그렇게 많이 들었으면서도 아라한과를 터득하지 못했으니 500명 중에는 포함되지만 아라한과를 터득하지 못했으니 세상에서 자신 만큼 똑똑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기가 아라한과를 터득하지 못해서니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그래서 아난은 그 분심에 용맹정진해서 7일 만에 아라한과를 터득합니다. 우리가 용맹정진(勇猛精進) 할 때 일주일을 합니다. 일주일만 목숨 걸고 용맹정진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일주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일주일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도 어느 한군데 몰두해서 죽기 살기로 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경험 한 것인데 방학 때 일주일 동안 다른 공부는 하나도 안하고 수학책 한권을 가지고 공부 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수학이라고 하는 것에 자신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생기니까 어떤 문제도 어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내가 풀 수 있다 생각하니까 시간이 걸려도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힘이 생겼습니다. 불교 공부뿐만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언가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일주일만 몰두해도 기적같은 자기 능력이 깨어 날 수가 있습니다. 자신감 이상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한번 씩 하는 이야기 속에서 내가 꼭 부처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라고 하는 것은 내가 부처 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기면 얼마나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뇌 속에서 폭발적으로 생겨 공부가 저절로 됩니다. 이것이 앞부분에서 공부한 예류과 수다원과 입니다. 수다원과를 내가 터득 할 수 있게 됩니다. 아난이 용맹정진((勇猛正進)해서 일주일 만에 아라한과를 터득했듯이 우리도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한번쯤 집중적으로 해 본다면 깜짝 놀랄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백 년을 산다고 이야기 합니다. 백 년중에 일주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 년중 일주일을 목숨을 걸고 꼭 해보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목숨걸고 한번만 해 볼 수 있으면 훨씬 더 잘 살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이 자기 속에서 생겨납니다.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 되는 씨앗, 부처 되는 힘을 개발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해봅시다. 

오늘 강의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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