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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생애

제 14강 수행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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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1,036회 작성일 21-07-22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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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강 수행자의 삶


반갑습니다. 한 주 잘 계셨어요? 

나는 부처다 하는 생각도 하시고. 108배 참회도 하시고 참선도 하시면 하루가 행복하고 일주일이 행복할 것입니다. 한 생이 행복하면 세세생생이 행복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부처님이 도를 이루시고 난 다음부터 45년 동안을 연대 순으로 한번 훑어봤습니다.


또 불교의 본질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그 당시 부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하루하루 생활을 어떻게 했는가? 과연 어떤 삶을 살았는가? 만약 그 당시 부처님의 제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하루를 살았는지 우리가 알 것 같으면 지금 우리가 불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중요한 지표가 될 것입니다. 보통 절에서 하루일과를 보내는 스님들을 보면 스님들을 다양하게 나눌 수가 있습니다. 참선을 전문적으로 하시는 스님들도 계시고, 그 다음 또 강원에서 불교 경전을 공부하시는 스님들도 계시고 또 시중에 나와서 포교를 하시는 스님 등 다양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는 하루 종일 수행을 하면서 보내는 스님들도 계십니다. 또 불교 경전을 공부하면서 보내시는 스님들도 계시고. 또 시중에 계시는 스님들도 있습니다. 절에서 행해지고 있는 하루하루 생활을 생각해보면 새벽에 일어나서 예불을 합니다. 새벽 4시 정도부터 아침 예불을 합니다. 아침 예불 마치고 공양하고 만약 재가 있으면 재를 지냅니다. 신자가 찾아오면 신자를 만나서 상담도 해드립니다. 보통 스님들하고 신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담은 대부분 행사하고 관계가 되는 문제로 상의를 해가지고 재를 언제 지내겠다, 어떻게 하겠다고 상담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이 일반적으로 포교당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요즈음은 일반적으로 매주 일요일에 법회가 열리지 않습니다. 일요일 날 법회가 안 이루어지니까 대부분 초하루 법회라던가, 혹은 지장재일 법회, 관음제일 법회 이런 식으로 법회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절에 다니면서 접할 수 있는 법회의 형식들입니다. 선방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과 그 다음에 강원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 그 다음 시내에 있는 포교당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들을 살펴볼 때 전부 출가 수행자들을 위한, 스님들을 위한 교육입니다. 스님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이것은 어느 정도 전문적인 공부이고 수행입니다. 그런데 재가불자들을 대상으로 행해지고 있는 행위들은 보면 우리가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 주어져 있는 시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시내에 있는 사찰에서 재가불자들과 스님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들은 대부분 기도에 관한 것들입니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우리는 불교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불교를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불교 대학입니다. 비로소 불교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지금 대부분 어른들이 절에 평생을 다니지만 그분들은 자식 잘 되게 해달라고 열심히 부처님한테 기도드린 것이지 불교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가 불교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그런 기회가 한번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에게 불교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불교를 제대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포교당을 중심으로 배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 현재 지금의 불교의 상황입니다. 스님들은 나름대로 선방이나 강원에서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체계가 주어져 있는 반면에 재가불자들은 불교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이제까지는 주어져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하게 내가 불자냐, 불자가 아니냐 이 문제에서 불교를 우리는 일정한 기간 동안 공부를 해서 과정을 거치면 일단 불교를 안다고 인정을 하고 그 다음 삼귀의계와 오계를 받습니다. 오계와 삼귀의계를 수지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불자가 됩니다. 이런 공식적인 절차가 없이 오랫 동안 흘러온 것입니다. 기독교인과 천주교인은 신자냐 신자가 아니냐가 정확합니다. 불교에서는 아직까지 불분명합니다. 엄밀하게 삼귀의계와 오계를 받아야만이 불자가 됩니다. 일정 기간 동안 불교를 공부한 다음에 삼귀의계와 오계를 받음으로써 불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주신 삼귀의계는 불, 법, 승입니다. 내가 이승에서 불법을 만나 불법을 내가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까 진리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에 이 목숨을 거두어 돌아가겠습니다. 이 목숨을 거두어 거룩한 수행으로써 한 생을 살겠습니다. 이것이 불법승입니다. 재가불자든 출가자이든 간에 불교인으로서 진지한 삶을 위해서, 거룩한 삶을 위해서, 청정한 삶을 위해서 내가 이 한 생을 살겠다고 우리가 부처님 앞에 원을 세우고 맹세하고 그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불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삼귀의 계를 수지하고 오계를 받습니다. 이 세상의 절대적인 진리는 오계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적군이든 아군이든, 어떠한 상황이던지간에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을 살려내는 것은 오계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이 오계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진리인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성이 없습니다. 사람 목숨을 죽이지 말라, 도둑질을 하지 말라, 음행을 하지 말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내 생각을 혼탁하게 하지 말라, 내 생각을 항상 깨끗하고 맑게 가져라. 세세생생 가더라도 이것은 진리일 뿐입니다. 이렇게 살겠다고 우리가 원을 세우는 것이 바로 불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제대로 이해했을 때 부처님께서 그 당시에는 어떻게 사셨고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에 대해서 훨씬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신의 존재를 깨뜨립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존재의 첫 출발은 나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신이 이 우주의 모든 것들을 만들었다고 한 것이 아니라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나의 인식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이 나가 모든 것들의 주체가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삶의 모습은 신에 대한 예배가 아닙니다. 내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 바로 생활입니다. 금강경을 볼 것 같으면 그 당시 부처님께서 살았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예불을 올립니다. 부처님이 살아계셨을 그 당시에는 예불이 필요 없습니다. 매일 직접 부처님과 같이 생활을 하니까 제자들의 일관된 생활은 수행밖에 없습니다. 하루 생활의 단편을 금강경에서 보면 여시아문 일시불 제사위국 기수 ......... 이렇게 표현되는데 즉 걸식해서 다시 정사로 돌아와 공양을 들고 전부다 발을 씻고 선정에 듭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생활하는 것은 아침 전부다 위를 갖추고 마을로 걸식을 떠나가지고 공양을 빌어와서 먹으면 하루 먹는 것이 끝납니다. 하루에 대부분 두 끼밖에 안 먹습니다. 그 공양을 아침에 먹고 남겨서 오후에 먹기도 하고 오후 두시에 걸식을 하는 비구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수행자로서의 생활이 시작됩니다. 부처님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팔정도와 사념처관입니다. 사념처관이라는 것은 우리 몸을 관찰하는 것.. 또 우리의 감정을 관찰하는 것. 그 다음 끊임없이 산란하게 일어나는 마음을 관찰하는 것, 법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대상들의 관계를 관찰함으로써 내 자신의 평화를 얻고 이 평화를 통해서 진지한 삶을 걸어가면서 추구하는 행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마음 법을 일으키는 것은 탐심과 진심과 치심으로 인간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정이라던가 탐욕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잘 관찰함으로써 항상 내 자신을 편안한 상태로 이끌어 갑니다. 이런 삶들이 계속 지속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 살았던 많은 제자들의 삶은 바로 신을 예배하는 예배자들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의 본질을 찾아가는 진지하고 거룩한 수행자의 삶이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부처님을 따르는 그 무리들은 진지한 삶을 살아가면서 전부 부처가 되겠다고 합니다. 그 당시 부처라고 하면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의 도를 터득하기 위해서 진지한 삶을 살았습니다. 경전에서 보면 500명을 출가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어떤 마을에 가면 그 마을을 중재시키 위해서 500명의 제자들이 출가를 했고, 부처님을 길러주신 양모인 마하파자파티가 출가 할 때도 500 비구니들이 출가를 했습니다. 이와같이 아마 경전에 나오는 이 500이라는 숫자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출가를 했다는 뜻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래서 500 이라는 수는 숫자가 많다 라는 뜻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아침 예불할 때 보면 500성 독수성 내지 1200제대 아라한 이라고 합니다. 과연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의 경지에 버금가는 아라한을 얻은 제자들이 몇 명 정도 될까? 교단이 형성되든 초기에 집단이 출가한 그 숫자가 1250인 입니다. 그래서 이 1250은 불교 교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우리가 경전을 볼 때 금강경 같은 경우에는 1200 제대 아라한이라고 나옵니다. 예불할 때도 1200제대 아라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아라한의 도를 얻었을까? 원시 경전에서 추적하기로, 약 500명 정도는 아라한의 도를 얻지 않았을까 하는 근거가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 제 1결집이 이루어질 때 알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 3개월 후에 제 1결집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제 1결집이 이루어질 때 그 때 참석하는 숫자가 몇 명입니까? 500비구입니다. 제 1결집에 참석하는 비구의 숫자가 500입니다. 이 500 비구들은 전부다 아라한 도를 터득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아난만 아라한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499명이 모여 아난이 아라한도를 얻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일주일 만에 아라한도를 얻은 아난이 참가하게 됨으로써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의 제1결집이 이루어집니다. 그 당시 그 상황을 보면 아마 부처님보다 먼저 돌아가신 제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들을 추정해서 약 500명이 아라한도를 얻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이 숫자는 한 시대를 따질 때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로 500명이나 되는 여자들이 아라한과를 터득한 것입니다. 중국으로 넘어와서 선불교 시대가 열립니다. 육조 혜능 밑에서 누가 나옵니까? 남악회양이 나오고 그 다음 마조도일이 나옵니다. 이 마조 밑에서 약 80명에서 90명 정도의 제자가 나옵니다. 그 당시에 견성한 제자들의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마조 문중에서 이만큼 많은 견성한 사람들이 나왔으니까 마조 외에 다른 사람까지 포함하여 통틀어서 약 150명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출가한 스님들이 많습니다. 견성한 사람들이 몇 사람 정도나 될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볼만 합니다. 한 시대에 견성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복받은 시대입니다. 따지고 보면 인류문명의 정신세계가 가장 활발했던 시대가 바로 이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크게 견성한 사람들이 있는데 인구비율로 따져볼 것 같으면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만큼 도인이 나오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시대, 역사를 따져 보더라도 도인이 없는 시대는 없습니다. 이것도 묘한 진리입니다. 이 지구상에는 항상 부처님 이후로부터 어느 시대든 견성한 사람은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옵니다. 시대에 따라 그 숫자가 조금 더 많고 적고 할 뿐이지 끊임없이 있게 마련입니다. 

자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이 하루하루 살았던 삶은 수행자로서의 삶이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수행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소유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는 수행을 할 수가 없어요. 물질적인 소유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듭니다. 또 감정의 소유도 똑같이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듭니다. 물질과 감정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질 수가 있을 때 수행자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걸식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것이 없습니다. 수행자들은 평생 입었던 옷 한 두벌 이것만 갖고 살아 갑니다. 새 옷 한 두벌 더 입는 사람은 조금 부자고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은 평생을 입고 있는 것이 전부인 것이 수행자의 삶입니다. 내것이 없습니다. 내것을 가지고 우리는 수행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걸식이라고 하는 이 행위가 교단 자체의 무소유를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려고 하면 무소유가 반드시 되어야 하지만 먹는 것 자체가 없어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의미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근본정신은 무소유란 말입니다. 집단은 얼마든지 부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개인은 그 집단 전체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부를 가질 수 있지만 개인은 부가 없습니다. 개인은 무소유입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개인은 부자고 집단 자체는 가난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수행자의 삶이라 하는 것은 물질적으로는 무소유가 되고 정신적으로 무소유가 되어야만 수행자의 삶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걸식을 하는 것입니다. 경전에 표현된 것 중에서 매우 인간적인 부분들이 있는데 부처님께서도 걸식을 얻지 못하고 돌아옵니다. 밥을 빌지 못하고 돌아옵니다. 교재 4번을 한번 보세요. 부처님께서 하루는 걸식하러 갔다가 마침 마을 축제가 있어서 집집마다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걸식하러 가는 시간은 항상 정확합니다. 대부분 걸식하러 가는 시간이 아침 9시 전으로 해서 걸식을 갑니다. 걸식을 간 마을에 축제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축제하는 장소에 다 가버렸기 때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걸식을 하러갑니다. 차례로 일곱 집을 갑니다. 순서대로 일곱집을 찾아가는데 첫째 집에도 사람이 없고, 둘째 집에도 사람이 없고, 셋째 집에도 넷째 집에도 일곱 집 다 집이 텅텅 비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은 걸식을 하지 못하고 빈 밥그릇을 들고 돌아옵니다. 그러면 부처님도 하루를 굶어야 됩니다. 경전에 표현된 내용을 보면 부처님한테 ‘사문이여 음식을 얻었는가’ 하고 묻습니다. 부처님께서 ‘얻지 못했다’ 하고 이야기하니까 ‘그러면 다시 한번 마을로 돌아가라. 이번에는 공양을 얻을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겠다.’ 하자 부처님께서는 단호히 거부합니다. 이것은 마음속에서 오늘 하루를 굶어야 하는데 지금쯤 마을축제가 끝나가니까 사람들이 이제 집에 돌아와 있지 않겠나, 지금 다시 가면 공양을 얻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음식은 비록 얻지 못한다 해도 보라, 우리들은 즐겁게 사나니, 이를테면 저 광음천...... 기쁨을 음식삼아 살아가리다’ 그러니까 하루 굶어야 될 상황이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굶으면서 수행하겠다 하는 겁니다. 부처님까지도 걸식을 하면서 걸식을 얻지 못할 때는 굶는데, 그 모든 제자들도 똑같은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무소유적인 이 삶이 결국은 평생 수행자의 길을 걸어가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임을 하루의 삶에서 부처님께서는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교단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지금 우리와 똑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살 것인가? 한번 깊이 생각해본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바 하나도 없습니다. 똑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안 갖고 있으면 불안합니다. 근본적으로 내것이 없으면 불안해요. 이 몸뚱이를 만들어가는 오온의 가장 기본적인 뿌리가 불안이라고 했습니다. 불안이 아집을 만들어내고 탐진치를 만들어냅니다. 진정으로 내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우리는 수행을 잘 할 수 있는데 불안하니까 내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물질도 내것으로 만들고, 감정도 내것으로 만들어 갑니다. 우리가 제대로 수행을 할려면 이 부분을 훨씬 더 깊이 생각해봐야 되고 냉정하게 살펴봐야 됩니다. 

그 당시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수행자의 삶을 살도록 하면서 행해진 의식으로써 뭐가 있느냐 하면 포살과 자자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포살은 보름, 15일에 한번씩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자자는 안거가 끝나는 마지막날 행해졌습니다. 약 3개월 동안 공부 잘 하고 끝나는 마지막날 행해지는 것이 바로 자잡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매달 한번 정도는 점검을 해야 됩니다. 매일 살아가면서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가? 혹 잘못한 부분이 있는가? 이런 것들을 한달에 한번 정도 포살에서 점검이 이루어 집니다. 이것이 부처님 당시 있었던 교단에서 행했던 의식으로 포살과 자자였는데, 보름날 한번 행해지던 것이 지금 우리는 초하루 법회를 봅니다. 이것은 포살이 변형이 되어 초하루 법회의 형식으로 바뀌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지금은 법회를 보는 것이지만 부처님 당시에 행해졌던 포살과 자자는 내가 얼마나 바르게 잘 살고 있는지 없는지를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공개재판을 받는 겁니다. 포살과 자자가 행해지는 날은 부처님과 더불어 모든 제자들이 빙 둘러 앉습니다. 둘러 앉아서 한달 동안 행했던 행위 중에서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서로 지적해주고 지적받은 사람은 아 내가 그런 행동을 했구나. 앞으로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자기 입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당에 가면 고해성사를 하지요? 그것을 모든 대중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같이 하는 겁니다. 포살이라 하는 것이 어떻게 행해졌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교재 7번을 볼 것 같으면 ‘대중들이여 들어라! 오늘은 15일 포살날이니, 만약 대중들에게 지장이 없다면 교단은 포사를 베풀고 계본을 외우리라. 무엇을 교단의 첫 행사라 하는가 여러 대덕이 몸의 청정함을 고백함이니, 나는 이제 계본을 읽으리라. 대중은 여기에서 잘 듣고 잘 생각할지어다. 만약 스스로 허물이 있음을 자각한 사람은 나서서 드러내라.’ 그러니까 스스로 이 계본을 외우던 중에 오계와 더불어 자기가 범했는 것이 있으면 스스로 드러내라고 죄없는 이는 잠자코 있어서 잠잠하면 여러 대덕의 청정함을 알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무 소리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청정하게 잘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물을 때는 마땅히 대답해야 하리라’ 물으면 대답해라 하는 겁니다. ‘이같이 비구는 대중 속에서 세 번까지 질문을 받을 것이며 세 번 질문을 받고도 죄가 있으면서 고백하지 않는다면 고의적인 망어죄를 얻으리라. 고의적인 망언은 도에 장애가 되나니, 그러므로 죄 있는 것을 기억하는 비구로 청정하기를 원하는 이는 그 죄를 드러내라, 드러내면 그는 안락함을 얻으리라.’ 이것은 자신의 행위 속에서 잘못한 것이 있으면 드러내라는 겁니다. 이것이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공부하는데 있어서 부처님만큼 정직한 사람이 없습니다. 정직하지 않고는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교단이 왜 포살과 자자를 행하냐 하면 이 포살과 자자 속에서 허물이 있고 잘못이 있으면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한달 동안 공부하면서 내 머릿속에는 온갖 잡다한 생각이 있었다. 그 생각이 왜 잘못된 것인지, 그런 생각을 해도 되는 것인지, 드러내고 부처님이나 여러 대덕한테 이야기 하면 잘못을 고치고 청정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같은 구체적인 방법을 부처님께서 설명해 주실 것이고 또 대덕한테서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잘못을, 죄를 드러내면 해결하는 방법이 생깁니다. 그러면 바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드러내놓지 않고 있으면 눈덩이가 커지듯이 계속 커 갑니다. 처음부터 정직하면 속일 것이 없어요. 매달 사소하게 잘못한 것을 다 드러내고 고치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을 가만히 놔둬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가면 너무 커서 이야기 할려 해도 결국 못합니다. 결국 공부를 해도 안락함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드러냄으로써 스스로 안락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부처님께서 공부하는데 있어서 정직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강조한 것입니다. 그 다음 수행자들이 여러 명 모여서 살아갈 때 어떻게 하면 탐진치를 없앨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사념처를 함으로써 탐진치를 없앨 수 있다는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해 주십니다. 호흡도 해보고 또 백골관, 썩어 없어지고 뼈만 앙상한 그런 모습을 생각해보면서 내 속에서 일어나는 탐진치와 번뇌를 제거해 볼려고 애를 쓰고 노력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공부하는데 무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누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함께 공부하는 무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어떻게 아라한이 500명이나 나올 수 있었겠어요? 또 마조시대에 견성한 사람들이 100명이나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여기서 고등학생 한 명 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대 가고 싶어 합니다. 갈 수 있으면 서울대 가는 것이 제일 좋겠지요. 왜냐하면 거기 가면 공부 열심히 하는 무리들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가 좋습니다. 이 무리라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여기 우리는 공부하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러면 모두가 공부하는 이야기만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노름꾼만 모여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화투 잘 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누굴 속일 수 있는 그런 이야기밖에 안 합니다. 그만큼 같이 더불어 하는 무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 같이 더불어 공부하는 무리를 부처님께서는 우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서양에서도 시저(케이샤르)같은 인물은 우정에 대해서 크게 찬사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함께 공부하고 있는 무리가 도의 전부다 라고 할 만큼 강조를 합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우정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라는 젊은 청년이 출가를 했습니다. 신라 경덕왕 때의 이야기로 경남 창원에 있는 백운산에서 크게 발심을 해서 어떻게 하더라도 이 생에서 꼭 견성을 하여 도를 이루자고 맹세를 합니다. 백운산의 깊은 골에 노힐부득은 남쪽에 암자를 하나 지어서 열심히 공부하고 달달박박은 북쪽에 오두막을 하나 지어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하루는 옷을 남루하게 입은 젊은 여인이 찾아옵니다. 먼저 달달박박이 있는 북암에 찾아갑니다. 지금 같으면 여인이 먼저 하룻밤 재워주세요 라고 이야기 할 것인데 당시에는 한 편의 시처럼 청을 합니다. ‘길 더딘데 해는 져서 먼 산에 어둠이 내리니, 길은 막히고 마을은 멀어 인가는 아득하네. 오늘 이 암자에서 자려 하오니 자비스런 스님은 노하지 마소서.’ 하고 하룻밤 재워달라고 청을 합니다. 스님이 보니까 젊은 여인을 하룻밤 재웠다가는 남암에 있는 친구하고 누가 빨리 도를 이루는지 내기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여자를 하룻밤 재웠다가는 안되겠다 싶어가지고 재워줄 수 없다고 딱 거절합니다. 여인은 지친몸을 이끌고 할 수 없이 남암까지 찾아갑니다. 남암에 찾아 가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하니까 노힐부득이 여인을 보니까 너무나 불쌍해서 아무소리도 안 하고 여기서 하룻밤 편히 쉬라고 하면서 방을 내어 줍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보니까 여인에게 산기가 있어서 스님보고 빨리 물을 데워 달라고 야단을 칩니다. 그래서 스님이 물을 데워서 통에 담아놓자 여인이 통에 들어가서 몸을 풀고 난 다음에 노힐부득을 쳐다보면서 따라 들어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목욕통에서 황금빛의 관세음보살님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노힐부득이 목욕통에 들어가는 순간 바로 자신도 황금빛이 되면서 그 자리에서 도를 이루게 됩니다. 다음날 북암에서 수행하던 친구는 분명히 남암에 있는 친구는 어제 그 여인을 거절하지 못해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남암으로 달려갑니다. 달려와서 방문을 열고 보니까 성스런 빛을 띤 부처님 한 분이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까 친구 노힐부득인 것입니다. 노힐부득은 친구에게 아직까지 황금빛 목욕물이 남아있으니까 너도 빨리 목욕물에 몸을 담궈서 도를 이루라고 재촉을 합니다. 이 이야기의 근본 뿌리는 자비입니다. 도를 이루는 데에 있어서 진정 중요한 것은 자비라는 것입니다. 친구사이의 그 우정으로 둘 다 공부 열심히 하려고 애를 쓰는 한편 도를 이루는데 근본 뿌리가 자비라는 것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로 삼국유사에 실려 있습니다. 또 인도에는 재가불자로서 유마가 있습니다. 그 다음 한국는 또 누가 있어요. 혹시 부설거사라는 이름을 들어봤어요? 부설거사는 영조스님과 영희스님과 함께 선덕여왕 때 출가를 한 젊은 스님들입니다. 누가 제일 먼저 빨리 도를 이루느냐 경쟁을 합니다. 그래서 오대산으로 도를 이루기 위해서 세 사람이 출발을 합니다. 길을 떠나 남원쯤인가 지나는데 날이 저물어 하루를 묵기 위해서 무원의 집으로 갑니다. 유명한 재가신자인 무원의 집에 하루를 묵게 됩니다. 무원에게는 묘화라 하는 딸이 있었어요. 무원의 딸 묘화는 어릴 때부터 벙어립니다. 말을 못합니다. 영희스님, 영조스님, 부설스님이 무원의 집에 들어가는 순간 이 묘화가 부설스님을 보자마자 바로 말문이 트여 버립니다. 그래서 다음날 부설스님을 붙잡고 자기하고 결혼하자고 난리입니다. 만약 결혼하지 않으면 죽겠다고 합니다. 부설스님은 종일 고민을 합니다. 누가 빨리 도를 이룰 것인가 내기를 했는데 여기서 잡혀가지고 공부 못하게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이 생에서 이게 내 운명이라면 할 수 없다. 한 생명부터 살려야 하지 않겠나 하면서 결혼을 약속을 합니다. 영조와 영희는 오대산으로 공부하러 떠나고 부설은 결혼을 해서 남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십년쯤 지나서 영조와 영희는 부설은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 한번 찾아옵니다. 부설은 같이 도를 이루겠다고 결심한 친구들은 홀몸으로 떠났는데 자기는 혹을 하나 붙이고 살다 보니까 친구들 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그렇게 공부하다가 몇 년 후에 드디어 성불하게 됩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끝까지 도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자신들은 도를 이루었다고 생각을 하고 부설을 찾아옵니다. 그래서 부설이하고 내기를 합니다. 누가 더 도가 높은가 내기를 합니다. 물주머니를 달아놓고 영조하고 영희하고 부설이 돌을 던져서 물주머니를 깨고도 물이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는지 도를 실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영희가 돌을 던지니까 물주머니가 터져서 물이 전부 다 흘러버립니다. 그 다음 영조가 하니까 물이 반쯤 흘러내리고 조금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부설이 돌을 던져서 물주머니가 터져도 물은 그냥 매달려 있습니다. 십년 동안 훨씬 더 공부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던 영조와 영희가 부설의 도력을 보고 탐복하여 부설한테 무릎을 꿇고 교만했던 마음의 용서를 빕니다. 부설은 친구들한테 이런 말을 합니다. ‘도는 승려의 검은 옷과 속인의 하얀 옷에 있지 아니하며, 도는 번화로운 거리나 거친 들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란 단지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연민의 자비스러운 마음을 내는 것이 부처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이는 죽다 깨어나도 부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를 이루겠다고 자비심없는 공부를 평생을 해도 부처가 이루어는지. 우리는 무아와 무상을 배웠습니다. 무아와 무상을 터득하면 내 속에는 자비가 채워진다고 했습니다. 그 자비가 나로 하여금 도를 이루게 하고 부처되게 합니다. 혹시 월명암을 아십니까? 낙조가 가장 아름다운 월명암은 부설의 부인이 누구입니까? 묘화라고 했지요. 이 묘화하고 부설 사이에 등운이라 하는 아들과, 월명이라 하는 딸이 태어납니다. 등운은 부설거사가 지었던 묘적암 근처에 등운암을 지어서 공부를 하고, 월명은 월명암을 지어 공부를 합니다. 온 가족이 다 견성을 합니다. 부설만 도를 이룬 것이 아니라 묘화도 110살까지 살면서 도를 이루고 난 다음에 입적을 하고 아들 딸도 도를 이루게 됩니다. 일가족 네명이 전부다 도를 이루게 된 것은 바로 우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부설로 하여금 도를 이루게 하는 것도 우정이였고 거만한 영조와 영희의 기를 꺾고 순수하게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 제대로 공부 잘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도 바로 부설의 우정입니다. 우정은 우리로 하여금 공부를 잘 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힘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포살과 자자에 대해서 좀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나누어 준 복사물을 한번 보세요. 포살은 매월 보름에 하는 것이고 자자는 안거가 끝나는 보름날 합니다. 사위성의 녹자모 강당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 날은 7월 14일로 안거가 끝나는 전날입니다. 자자는 안거가 끝나는 저녁에 하던지, 혹은 안거날 보름날 행해집니다. 보름달이 뜨면 모든 대중들이 그 달빛 아래에 둘러앉습니다. 혹시 경주 반월성에 한번 가보셨어요? 경주 반월성이나 혹은 산중턱에 있는 절의 뜰에 많은 스님들이 빙 둘러 앉아있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세요. 그렇게 둘러앉아 자자를 행합니다. 대중들이여 들으시라. 오늘은 자자가 있는 날 만약 대중에게 의의가 없다면 곧 교단은 자자를 베푸려 하오. 나는 교만에 대해 자자를 행하노니, 이제 자자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석달 동안 생활하면서 교만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의 교만에 대해서 지적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느 때에 공양할 때, 걸식을 할 때 교만하더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행동이 교만하더라, 우리끼리 이야기 할 때 너무 교만하더라 등등 교만했던 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해 달라는 것입니다. 교단은 교만 외에도 진심에 대해서, 탐심에 대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갖고 자자를 행하노니. 나에 대해 무엇을 보고 무엇인가 듣고 의심을 지니신 분이 있다면 대덕들이시여, 나를 가엾게 여기어 말씀해 주소서. 죄를 알면 제거하오리다. 그러니까 지적해 주면은 내가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겠다 말입니다. 이렇게 달밤에 둘러앉아서 자기의 잘못을 드러내고 지적해주고 앞으로는 그런 잘못을 다시는 행하지 않겠다고 서원하고 맹세를 합니다. 이 모습이 너무나 거룩하고 감동스러워 반기사라는 비구가 감동에 넘치는 자기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 있습니다. ‘보름이라 달 밝은데 신구업 맑히려고 오백 비구들이 여기에 모였으니 번뇌의 올가미를 모두 다 벗어던져 윤회의 반복않는 성자들 뿐이로다. 세존의 아들이여 법의 씨 걷으리매 당치 않는 말 늘어놓는 사람이란 없소이다. 가련히 그 화살을 빼어버린 우리들이 으하 세존 우러러서 예하여 배우노라.’ 반기사는 자신의 감동스러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 그 다음 수행자의 삶에 대해서 바라문이 의문을 가집니다. 과연 모든 사람들을 이익되게 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 바라문은 신에 대해서 예배를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한테 이익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시여 당신은 당신의 제자들한테 스스로 자신의 몸을 잘 다스리라고 이야기 하고 스스로 편안하라고 이야기하고 스스로 안정되라고 이야기하면서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그것이 과연 다른 사람들한테 이익을 줍니까? 이것은 중요하고 냉정한 질문입니다. 그 당시 바라문은 다른 사람들한테 열심히 기도를 해 줌으로써 그 사람들이 안락해지고 행복해진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줍니다. 바라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공덕을 베푸는데 당신은 당신의 제자들한테 스스로를 잘 다스리라고만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당신이 다른 사람들한테 이익을 주느냐고 따집니다. 이 냉정한 질문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그렇다. 나는 나의 제자들에게 스스로 편안해지고 안정해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어떻게 다른 사람한테 이익이 안 되겠느냐. 이사람이 편안하다 하면 당연히 주위가 다 편안해 진다. 다른 사람이 편안해라고 기도해 주는 것 보다 자기 스스로가 편안한 것이 훨씬 더 다른 사람에게 편안을 준다고 부처님께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이 바라문의 질문에 부처님께서 하신 대답입니다. 그 다음 그 수행자들의 삶이란 사념처관과 팔정도로써 수행을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 1승, 제 2승, 제 3승, 제 4승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삼재를 공부했습니다. 삼재는 불과 물과 바람의 재앙이라 했습니다. 제 1승을 터득한 사람은 불의 재앙에 견디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제 2승을 터득한 사람은 물의 재앙에 견뎌내지 못한다 했습니다. 제 3승을 터득한 사람은 바람의 재앙에 견뎌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4승을 터득한 사람은 이 세상에 어떤 재난이 닥치더라도 그 재앙의 해를 입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개인한테 일어나는 삼재는 무엇입니까? 탐심과 진심과 치심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바로 삼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삼재가 불교의 것이 되었다면 불교적으로 이해를 해야하고 불교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탐진치에서 생기는 것이 삼재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좋은 일도 적당히 3, 4년이 지나면 한번씩 옵니다. 나쁜 일도 마찬가지로 3, 4년 지나면 한번씩 옵니다. 우리가 그런 개념으로 이해하면 훨씬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교단을 이끌어 갈 때 출가한 모든 제자들이 하루를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이끌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자유를 향하여 혹은 해탈하기 위해서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쳤다는 것을 수행자의 삶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이끌어 간 하루의 삶의 모습들입니다. 


오늘 강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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