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강 계율의 제정 > 부처님의 생애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부처님의 생애

제 16강 계율의 제정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0,189회 작성일 21-07-22 08:42

본문

 제 16강 계율의 제정


 반갑습니다. 한 주 잘 계셨어요? 이제는 아침에 30분 공부하는 것 안 물어봐도 되겠지요? 아마 백강이 끝날 때쯤이면 여기 앉아 계실 분은 한 분도 없을 것 같습니다. 모두 부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계율의 제정입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삼귀의를 했습니다. 삼귀의는 불, 법, 승 삼보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보물 세 가지가 삼귀의입니다. 

 불은 진리를 깨치신 부처님 즉 깨달음입니다. 깨달은 사람 부처님이 불입니다. 법은 부처님께서 깨치신 내용 즉 교리입니다. 부처님께서 깨치신 내용이 법입니다. 승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자라고 하면 맞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부처가 되기 위해 이루어진 집단입니다. 즉 정확하게 승가입니다. 개인이 아닙니다. 승이라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집단, 진리를 깨치기 위해 모여 있는 집단입니다. 이 세상의 가장 중요한 보물 세 가지가 불, 법, 승이라 했을 때 불법은 바뀝니까? 천년만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습니다. 깨친 자와 깨친 내용은 어떤 상황, 어떤 시대에서도 바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부처가 되고자 실천하는 승가의 집단은 끊임없이 바뀝니다.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오늘 우리가 배워야 될 계율이라는 것은 어디에 적용됩니까? 승가가 제대로 유지되는데 필요한 것이 계율이고 우리가 부처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정의해 놓은 것이 계율입니다. 결국 불법승 삼보 중에서 승가가 지탱될 수 있고 잘 보존될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근간이 바로 계율입니다. 


 우리가 불교에 귀의한다고 했을 때 불법승 삼보에 귀의합니다. 그 다음 오계를 받습니다. 삼귀의 하고 오계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불자가 됩니다. 바로 부처님과 같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그런 삶을 살겠다고 맹세하는 불자가 됩니다. 우리가 정확히 이해해야 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승입니다. 부처님을 닮고자 부처가 되고자 진리를 추구하는 집단이 바로 승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승가가 제대로 잘 유지되고 보존되기 위해 계율이 필요합니다. 승가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지난 시간에 공부한 사부대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즉 남자 출가수행자, 여자 출가수행자, 남자 재가수행자, 여자 재가수행자입니다. 부처님께서 끝까지 출가를 반대했던 부류가 누구였어요? 여자 출가수행자를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부처님의 이모가 출가하려 했을 때 세 번이나 반대했습니다. 출가를 못 하게 했습니다. 결국 아난의 간청에 못 이겨 출가를 허락합니다. 그 때 출가를 허락하면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불법이 정법이 유지되는 기간이 짧아지기 때문에 여자의 출가를 반대한다고 했습니다.  


 계율이라는 것은 사부대중이 모여서 도를, 불법을, 깨달음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하면 제대로 바른 길을 갈 수 있는지 이것을 조화롭게 해 주는 것이 계율입니다. 계율에서 근본적으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부처가 되겠다는 염원을 하면서 살아가는 자체는 우리의 삶입니다. 내가 하루 잘 산다고 부처되겠습니까? 부처되려면 어떤 감동스러운 하루 때문에 계기는 될 수 있지만 부처되기 위해서는 평생을 잘 살아야 됩니다. 평생만 잘 살면 되겠습니까? 세세생생 잘 살아야 하겠지요. 


인과는 무엇이라 했습니까? 정확하게 인연과에서 인은 연속성의 속성을 갖고 있고 연은 보복성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이라는 것은 내가 이 생에서 한 번 공부를 해 놓으면 다음 생에도 공부하기 쉽습니다. 이 생에서 공부한 것이 다음 생에도 연속이 되어 훨씬 더 공부하기 수월하고 공부 잘 하는 쪽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또 연은 보복성의 특성을 갖고 있다고 했지요. 내가 이 생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다음 생에 우연히 그 사람이 나에게 마음 아프게 하는 보복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과가 갖고 있는 특징인 연속성과 보복성입니다. 

 부처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하루 공부 잘 하고 시험 잘 쳐서 부처되는 일회성이 아니라 평생을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계속해야 됩니다. 우리 삶에서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잘 해야 하는데 하루 정도는 밤샘을 해서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생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다름이 아니라 습관입니다. 습입니다. 습이 결국은 나를 그렇게 만들어 갑니다. 습관이라는 것이 결국은 나를 부처되게 하기도 하고 나로 하여금 지옥으로 떨어지게 합니다. 습관이라는 것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삶의 모습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이 모여서 내 삶을 이루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삶이 이 습관에 의해서 크게 변화 없이 일정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한번은 여러 왕들이 부처님을 초대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부처님께서 여러 왕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어떤 왕은 예쁜 여자와 평생을 같이 살 수 있으면 즐겁다고 하고 어떤 왕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평생 들을 수 있다면 즐겁다고 하고 또 먹는 것을 좋아하는 왕은 맛있는 음식을 평생 먹을 수 있다면 즐거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다 들으시고 하신 말씀이 

  “왕들이시여,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것은 적절입니다.”

 적절한 것, 적당한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적절이라는 것은 적당한 것,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다운 말씀입니다.  


 결국 계율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그 틀에서 계율이 나옵니다.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진리를 추구하면 되겠지요. 내가 부처되겠다는 목적을 갖고 살아가느냐 세속에서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느냐 즉 어떤 삶을 살더라도 적절함이라는 진리는 계율입니다.

 우리가 공부한 것 중에서 절대선과 상대선이 있었지요. 내 자신도 이롭게 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이롭게 하는 것은 절대선이라고 했습니다. 내 자신은 이롭지만 상대방에게는 해로울 수 있는 것은 상대선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가 잘 살기 위해서 이웃 나라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선이지만 다른 나라 입장에서 볼 때는 악입니다. 이것은 상대선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죽이지 마라. 산 목숨을 죽이지 마라. 혹은 거짓말 하지 마라 등등 이와 같이 가장 근본적으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라고 가르치신 이 오계는 절대선입니다. 내 삶만 아름답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더불어 행복하고 아름답게 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오계는 

 첫째,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 

 둘째, 도둑질 하지 말라.

 셋째, 음행을 하지 말라.

 넷째, 거짓말을 하지 말라.

 다섯째, 술을 먹지 말라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지키라고 하신 오계입니다. 

 여기서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는 것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제대로 잘 살 수 있게 하라는 것으로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처음도 끝도 성실해야 되겠다. 우리의 성실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도둑질 하지 마라입니다.

 음행을 하지 말라는 얼마나 청정하게 순수하게 살아가는 문제로 음행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모든 생명들이 똑같이 존엄하다는 것이 음행을 하지 마라입니다.


 거짓말 하지 말라는 얼마나 정직 하느냐의 문제로 진실성을 이야기합니다.

 술을 먹지 말라. 이것은 단지 술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중독성 있는 것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타락하게 하고 부패하게 만드는 중독성 있는 것에 물들지 말라는 것이 술을 먹지 말라입니다. 판단력 분별력이 항상 깨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계의 내용들이 이루어져 있어요. 

 부처님의 교단이 만들어졌습니다. 처음 야사 비구가 출가하면 친구 50명이 따라서 출가했고 가섭 삼형제가 출가함으로써 1,000명이 넘는 거대한 승단이 이루어졌습니다. 부처님께서 거대한 승단을 이루고 계율을 제정했습니까? 그러나 너희들은 무엇 무엇을 지키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계율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은 승단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 8년째 되던 해에 비로소 계율이 만들어집니다. 


 혹시 밀린다왕문경을 기억하십니까? 밀린다왕문경은 인도에서 뛰어난 승려인 나선비구 즉 나가세나 비구와 유럽의 왕이었던 메란드로 왕을 한문으로 번역하면 밀린다 왕이 됩니다. 왕과 나선비구 두 분의 대화 내용으로 이루어진 것이 밀린다왕문경입니다. 여기서 보면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 비구한테 

 “존자여, 부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예견한 분이 맞습니까?” 

 하고 묻자 나가세나 비구가 대답합니다.

 “대왕이시여,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예견하고 계십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부처님께서는 비구승단의 계율을 한꺼번에 제정하지 않으시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정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대왕이시여, 이 세상에 있는 의약을 다 알고 있는 의사가 있습니까?” 즉 뛰어난 의사가 있겠냐고 물으니까 그런 의사가 있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나가세나 비구가 말하기를  

 “의사는 환자에게 병들었을 때 약을 줍니까, 아니면 병이 나기도 전에 약을 줍니까?”

 의사가 환자에게 어떻게 약을 줍니까? 예방하기 위해 환자에게 미리 약을 줄 수도 있지만 병이 났을 때 약을 줍니다. 그러니까 승가의 계율을 어겨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계를 지키라고 이야기 한 것이지 사전에 무엇 무엇을 지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나가세나 비구와 밀린다 왕의 대화 내용입니다. 

 “병이 난 다음에 약을 줍니다. 그래야 환자가 약을 먹고 낫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예견하신 분이지만 적당하지 않을 때는   계율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수행생활 중 누군가가 수행에 지장이 되는 행동을 하였을 때 계율을 제정하여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계율이 제정된 것은 구체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부처님께서 계율을 제정하셨습니다. 


 최초로 계율이 제정되는 것은 수디나라는 비구 때문입니다. 수디나 비구의 집은 매우 부유했습니다. 인도에는 흉년도 들고 홍수도 자주 납니다. 스님들은 걸식을 한다고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아침에 일어나서 일곱 집만 돌면서 밥을 빕니다. 더도 덜도 아니고 일곱 집만 돌고 거기서 밥을 못 얻으면 그날은 굶어야 합니다. 그 해는 흉년이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베이샬리에 계실 때 흉년이 들어서 모든 비구들이 걸식을 해도 하루 이틀 계속 굶게 됩니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것 자체가 없으니까 사람들이 스님께 올릴 공양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디나는 부처님께 청을 합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전부 굶어 죽을 것 같아서 자신의 고향 집에는 먹을 것이 있으니까 가서 한 철 살면 좋겠다고 부처님께 청을 하여 많은 스님을 고향으로 데리고 갑니다. 고향 마을로 돌아가니까 먹는 걱정은 해결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디나는 외아들이었는데 결혼을 한 상태에서 부처님의 불법에 반해 출가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디나가 고향으로 돌아오니까 어머니께서는 가지 말고 같이 살자고 합니다. 수디나가 들어주지 않고 거절하니까 그러면 재산을 물려줄 아들 하나만 낳아달라고 하십니다. 수디나가 생각해 보니까 어머니께서 완곡하게 이야기 하시고 또 재산을 물려 받을 아들이 없으면 갖고 있는 전 재산이 국가에 몰수당한다고 하니까 아들 하나 낳아 주어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청을 들어 아들을 낳습니다. 우기가 끝나고 베샬리로 돌아와서 다시 부처님과 더불어 수행을 합니다. 수디나는 승단에 돌아와서도 얼굴이 밝지도 않고 우울합니다. 같이 수행하던 동료가 보니까 옛날 같지가 않습니다. 부잣집에서 부유하게 잘 커서 구김살 하나 없던 수디나는 항상 명랑했었는데 자기 집에 갖다 온 뒤로는 말도 하지 않고 혼자 생각만 하고 있고 불안해합니다. 다른 동료들이 보다 못해 부처님께 그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디나를 불러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 봅니다. 자기 집에서 있었던 일을 다 말씀드립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대중들을 불러놓고 엄중하게 수디나를 꾸짖습니다.

 “네가 한 일은 옳지 못하다. 그것은 위의가 아니며 출가수행자가 해서는 안 될 일 이다. 그것은 청정한 행동이 아니며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수디나여, 청정한 법을 수행하여 애욕을 끊고 번뇌를 없애야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어찌 잊어버렸느냐?”

결국 수디나가 음행을 하면서 계를 파했습니다. 

 “수디나여, 청정한 법을 수행하여 애욕을 끊고 번뇌를 없애야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어찌 잊어버렸느냐?”

 그러면서 부처님께서 모든 수행자에게 하신 말씀이 

 “차라리 남근을 독사의 아가리에 넣을지언정 여자의 몸에는 대지 마라. 이와 같은 행위는 지옥에 떨어져 헤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애욕은 착한 법을 태워버리는 불꽃과 같으며 지혜의 종자를 없애 버린다. 애욕을 떠나야만 도를 깨닫고 열반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수디나가 어리석어 잘못을 저질렀으니 이제부터는 계율을   제정하여 지키게 하리라.”

 여기서 최초의 계율이 제정됩니다. 부처님께서 불법을 지키라고 최초로 계율을 정한 것은 음행을 하지 말라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부처님께서 왜 계율을 지켜야 되느냐? 계율을 지켜야 되는 데는 열 가지 이득이 있다고 수행자에게 설명 하십니다.


 첫째, 교단의 질서를 잡기 위해서.

인간이 집단을 이루어 도를 추구하는 모임이 승단입니다. 여기서 서로가 지켜야 할 질서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한 명이 흐트러지면 전체가 다 쉽게 흐트러집니다. 그래서 이런 집단이 제대로 지탱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위계질서, 계율이 필요합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교단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서, 교단의 질서가 잡혀야만 교단 내에서 수행 정진하는 모든 사람들이 제대로 수행 정진할 수 있습니다.


 둘째, 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루는 아난이 묻습니다.

 “부처님이시여, 같이 수행하고 있는 이 벗이 도의 절반이라 해도 좋지 않겠습니까?”

 아난이 오랫동안 수행하다 보니까 결국 자기가 이렇게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것은 같이 공부하고 있는 무리가 매우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 부처께 물었던 것입니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이 도의 반은 아니겠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럴 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난아, 아니다. 같이 공부하는 동료들은 도의 전부다.”

 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승가가 제대로 잘 지탱되기 위해서는 수행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하루 생활이 기쁘고 뿌듯하여 행복하다면 모두가 행복합니다. 내가 행복함으로써 이웃 더불어 행복합니다. 내가 계율을 잘 지키고 청정하게 하루 생활을 잘 보내면 나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대중 모두가 기쁘다는 것입니다.


 셋째, 대중의 안락을 위해서.

내가 편안하면 나 혼자 편안합니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더불어 편안합니다. 내가 계율을 지켜 안정되고 즐겁고 편안한 것은 나 혼자만의 즐거움과 편안함이 아니라 함께 있는 무리들의 편안함이고 안락함이라는 것입니다. 


 넷째, 믿음이 없는 이를 믿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공부하면서 한 사람이 진지하게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도 한번 공부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듦니다. 같이 생활하다 보면 따라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믿음이 없는 이를 믿게 하는 좋은 모습입니다. 


 다섯째, 이미 믿고 있는 이는 더욱 믿음을 굳게 가지기 위해서.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도 청정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다루기 어려운 사람을 잘 다루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살다 보면 모두가 제멋대로 인데 집단이 아무 탈 없이 잘 유지되어 가겠습니까? 부처님 당시에도 교단은 분쟁이 일어나 시끄러웠을 것입니다. 분쟁이 일어났을 때 다루기 어려운 사람을 잘 다루기 위해서 계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부처님께서 결국은 솔선수범해서 모범을 보이는 것만큼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귀감은 무엇입니까? 내가 그렇게 삶으로써 그 모습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성격이 원만하지 못한 사람, 제멋대로 행동하는 모든 사람들이 진지하게 수행하는 동료의 모습을 보고 따라 가게끔 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그 진지한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동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일곱째, 부끄러운 줄 알고 뉘우치는 이를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게으르고 잘못이 있어 곁에서 진지하게 수행하는 도반의 모습을 보면서 아! 내가 하루를 부끄럽게 보냈구나, 부끄러운 줄을 알고 스스로 뉘우쳐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로 들어가게 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 계율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덟째, 지금 범한 잘못을 다시는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것도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계율을 범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참회하고 뉘우치면서 다시는 그 계율을 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지금 범한 잘못을 다시는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계율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아홉째, 미래의 잘못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지금 이 습관이 원만하게 잘 돌아가면 미래에 잘못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승단이 원만하게 잘 돌아간다면 미래에 잘못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미래의 잘못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열번째, 바른 법이 오래 가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바른 법이 오래 가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께서 여자의 출가를 반대했던 이유가 바른 법이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른 법이 오래 가기 위해서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승가가 계율을 지켜야 하는 것은 바른 법이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 가지 이득을 설하시면서 음행을 하지마라. 앞으로 어떤 비구가 음행을 하면 그는 근본 죄를 범하게 된다. 여기서 근본 죄란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에 드시기 전에 소소계는 버려도 좋다는 것이 있습니다. 그 많은 계율 중에서 근본에 해당하지 않는 사소한 것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은 그 상황에 따라 변화를 시켜도 좋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계율은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 해도 바뀌지 않습니다. 


 근본 계율은 오계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바뀌지 않는 근본 계율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비구가 음행을 하게 되면 근본 죄를 범하게 된다. 그는 수행자로서의 자격을 잃게 된다. 그는 우리와 함께 살지 못한다.’ 하고 부처님께서 이야기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근본 죄의 첫째 조문을 널리 알렸습니다. 이것이 승단이 이루어지고 난 뒤 다섯 번째 되던 해의 일입니다. 첫 계율이 제정됩니다. 수디나는 처음으로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에 승단에서 퇴출되지는 않았습니다. 부처님과 대중들에게 참회하고 승단에 남게 됩니다.

 그 다음 부처님께서 계율을 제정한 것이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하는 계율을 정합니다. 수디나 사건이 있은 후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다니가라는 비구가 있었습니다. 이 다니가 비구는 나라의 목재를 관리하는 관리에게 절을 짓기 위해 거짓말을 해서 그 목재를 가지고 와서 절을 짓습니다. 부처님 빽을 믿고 제멋대로 하는 것을 보고 그냥 그대로 놔둘 수 없다고 생각한 관리가 임금님께 이야기합니다. 임금님은 허락한 적이 없는데 다니가는 임금님이 허락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이 부처님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부처님께서 다니가를 불러 놓고 사실대로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다니가는 아주 당당하게 말합니다. 나는 절을 짓기 위해 나라의 관리한테 거짓말을 해서 그 목재로 절을 지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사람은 한꺼번에 관리한테 거짓말도 하고 목재를 가져 왔기 때문에 도둑질도 한 것입니다. 결국 다니가는 부처님한테 퇴출당합니다. 죄의식도 없이 당당하게 이야기하던 다니가는 모든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다니가는 승단에서 같이 수행할 수 없음을 선언하고 승단에서 퇴출시킵니다. 결국 다니가가 최초로 승단에서 퇴출되는 사람이 되고 근본 계율이 모두 공표가 됩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산목숨을 죽이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음행하지 마라. 거짓말하지 마라. 술을 먹지마라가 공표된 것입니다. 


그 당시 술이 상당히 유행을 했어요. 왜냐하면 다른 약이 없었기 때문에 술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아픈 것도, 고통도 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쉽게 술을 먹었던 것입니다. 특히 술을 먹지 말라는 계율은 포괄성을 가진 계율이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병이 났을 때 치유의 목적으로 술을 먹는 것은 계를 파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약이 없어서 많이 아플 때는 술이 어느 정도 진통제 역할을 했습니다. 치유의 목적으로, 병을 낫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술을 먹는 것은 허락해 줍니다. 


 여기서 근본 계율인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에 대하여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태어나시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고 하셨지요. 이 말의 궁극의 뜻은 모든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말씀 하신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존엄성 이야기로는 비둘기 이야기가 있었지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로써 부처님이 수행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독수리에게 쫓기는 비둘기가 부처님의 품으로 들어옵니다. 독수리가 수행자에게 비둘기 내놔라. 그 비둘기는 내 저녁거리다. 수행자는 독수리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이 비둘기의 무게만큼 내 살을 떼어 줄테니까 대신 저녁거리로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저울을 갖다 놓고 그 위에 비둘기를 얹어 놓고 자기 살을 떼어 얹어봅니다. 그런데 팔 하나 떼어도 안 되고 다리를 하나 얹어도 안 되고 결국 온 몸을 얹어 놓으니까 저울대가 평행을 이룹니다. 이 이야기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것으로 비둘기의 생명이라고 해서 더 미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이라고 해서 더 고귀한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은 존귀하고 존엄하다는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일대 선언입니다. 부처님의 불법이 세세생생 동안 존재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생명에 대한 존엄성 때문입니다. ‘산목숨 죽이지 마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존엄성을 선포하는 것은 불교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깨치면 똑같아집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 진리를 깨치면 생명에 대한 존엄성은 똑같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성인이라든가 학식이 있는 사람이면 남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라는 것은 진리를 깨치고 나면 자연히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입니다. 무아와 무상을 깨치고 나면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생명에 대한 존엄성, 진리를 깨치고 나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는 진리를 깨치는 종교이기 때문에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 생명에 대한 존엄성은 영원불멸합니다.

 생명에 대한 존엄성은 내가 진리를 인식함으로써 내 속에서 물들어갑니다. 내가 물들어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아를 인식하고 나면 내 속에서는 자비로 채워진다고 했지요. 자비가 가득해지면 모든 생명에 대한 존엄성은 자연히 생겨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인식은 곧 무아에 대한 인식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 도둑질하지 말라. 인간의 성실성에 대한 이야기, 부처님께서 인간의 성실성에 대한 최고의 가치를 부여한 것은 빈녀일등입니다. 가난한 여인의 등불 이야기로 코살라국의 왕이 부처님을 사위성에 초대하여 축제를 엽니다. 부처님이 사위성에 오셔서 석 달 열흘간 축제를 엽니다. 축제동안 저녁이면 거리마다 연등을 달아 놓습니다. 이 가난한 여인은 하루를 벌어 삽니다. 하루는 여인이 보니까 온 마을 사람이 들떠서 등을 달려 기름을 사가는 것을 봅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니까 부처님께서 오셔서 오늘 연등 축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여인도 하루 일하고 번 서푼의 돈을 갖고 기름을 사러 갑니다. 그러나 사위성에는 기름이 다 팔리고 없습니다. 기름 주인은 가난한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집에서 써야 할 기름을 조금 줍니다. 여인은 집으로 가서 등을 만들어 달아 놓습니다. 돈 많은 부자들이 좋은 위치에는 이미 등을 다 달아서 달 곳이 없습니다.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는 구석진 곳에 등을 달고 온 정성을 다해 등을 단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나도 진지하고 성실한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원합니다. 저녁 9시 쯤 되니까 축제가 끝나고 부처님께서 주무실 때 등을 끕니다. 아난과 더불어 부처님의 제자가 등을 끕니다. 아난이 모든 등을 다 껐는데 가난한 여인의 등불 앞에서 아무리 끌려 해도 꺼지지 않습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아난아, 부질없이 애쓰지 마라. 그 등은 어떤 가난한 여인의 큰 원이 새겨져 있는   등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이 여인은 다음 생에 부처가 될 것이다” 하고 성불 수기를 주십니다.

 이 이야기는 성실성이 얼마냐 중요한가를 전해 준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에 마지막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부지런히 애쓰고 노력하라’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다름이 아닙니다. 매일 살아가는 삶 속에서 부지런히 노력하고 애쓰는 이것이 전부이며 끝입니다.  

  그 다음 음행을 하지 말라. 수디나의 이야기는 앞에서 이미 배워 알고 있지요. 이 음행에 대한 기막힌 이야기로 연화색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밧티의 부유한 장자의 딸 연화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연화색녀는 부유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서 미모가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무습나습(?)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딸을 하나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부유한 남편은 딸을 하나 낳고 보니까 그녀의 남편이 자기 어머니와 사통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연화색의 어머니와 사통하는 것을 보고 연화색은 그 집을 뛰쳐나오게 됩니다. 집을 뛰쳐나와서 바라나성의 어느 젊은 장자한테 다시 시집을 갑니다. 이 젊은 장자가 결혼하자고 졸라서 결혼을 했던 것입니다. 이 장자가 연화색녀와 결혼하고 난 뒤 몇 달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아요. 그러다 웬 젊고 아리따운 여자를 데리고 들어옵니다. 그런데 데리고 온 젊은 여자를 가만히 보니까 전 남편과 사이에 난 자기 딸을 사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결국 연화색녀는 첫째 남편에게는 자기와 자기의 어머니가 그런 일을 당했고 젊은 장자에게는 자기와 자기 딸이 또 그런 일을 당합니다. 이 기막힌 사연에 연화색녀는 다시 집을 뛰쳐나와 창녀가 됩니다. 창녀생활을 하다 부처님의 법을 만나 귀의하여 출가하게 됩니다. 

 이 기막힌 사건이 한 생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한 생밖에 모르니까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생을 가만히 되돌아본다면 실질적으로 이 생에서는 부모 자식 관계이지만 그 전 생애에의 일은 잘 알 수가 없어요. 전생에는 부모 자식 관계였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부부로 만나서 알콩달콩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약에 이 생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음행을 하지 마라는 이 내용 속에는 우리가 전생 전생을 살아오면서 맺었던 많은 인연들이 우리하고 과연 어떤 인연이었는지 생각해 본다면 연화색녀만 기막힌 인연이 아니고 어쩌면 우리도 한 눈 뜨고 보면 기막힌 인연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결국 음란한 마음을 가지지 말라 이것은 지혜의 종자를 말려 버립니다. 음행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음행을 함으로써 스스로가 지혜의 종자를 말려 버리게 하고 살생하는 마음은 자비의 종자를 끊어 버립니다. 도둑질하는 마음은 번뇌의 종자를 자라게 하고 거짓말하는 마음은 삼매의 종자를 성숙시키지 못하게 합니다. 즉 내가 부처되기 위해 선정에 들어야 하는데 그 삼매에 들게 하는 삼매의 종자를 성숙시키지 못하게 하는, 맑은 정신으로 지내게 하는 마음을 성숙시키지 못하게 합니다. 술, 중독성 있는 것은 관조의 능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내가 부처되기 위해 내가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 일이  일어난 원인을 알게 하는 그 능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이 음란한 마음만 없으면 생사에서 바로 해탈할 수 있다. 음란한 마음이 없으면 지혜의 종자가 성숙되어 결국에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아난아,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이 산목숨을 죽이지 않으면 생사에서 바로 해탈할 수 있다. 산목숨을 죽이지 않으면 자비의 종자가 성숙되어 결국은 열반에 이르게 된다.”

 공부하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지혜와 자비입니다. 끝없는 지혜와 자비, 끝없는 자비는 산 목숨을 죽이지 않고 모든 생명을 살리는 거기서부터 일어납니다. 

  “아난아.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이 훔칠 마음이 없으면 생사에서 바로 해탈할 수 있다. 훔칠 마음이 없으면 번뇌의 종자가 소멸하여 결국에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우리로 하여금 번뇌의 종자를 소멸하게 하는 것이 바로 훔치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도를 이루게 하는 것이 바로 번뇌의 종자를 제거함입니다. 번뇌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탐심, 진심, 치심으로부터 출발한 이 번뇌가 결국 108번뇌였고 이것이 팔만사천 번뇌를 이룹니다. 108번뇌는 저번 시간에 잠깐 이야기했지만 여기에 대한 설명은 불교사전에 두 가지로 되어 있어요. 기본적으로 108번뇌가 이루어지는 108가지는 먼저 6근과 6경이 부딪혀서 6식이 일어납니다. 6식에서 일반적으로 좋다, 나쁘다, 어떤 감정은 좋은 감정이 일어나고 어떤 감정은 나쁜 감정이 일어나서 좋다 나쁘다가 일어나 6근과 6경과 6식이 합해져서 6촉이 이루어져요. 6촉 다음에는 6수,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 좋다 나쁘다 라는 이 감정이 느낌에 접촉되어 6계가 생깁니다. 그럴 때 이 6수에서는 무엇이 생기느냐하면 좋은 감정이 어떤 경우에는 고도 될 수 있고 낙도 될 수 있고 고락사도 고도 아니고 낙도 아닌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래서 이 두 개가 6수에서 6개하고 곱해지면 6개의 감정이 생깁니다. 이 6개의 감정이 6식이 되니까 안이비설신의 6×6=36, 과거 현재 미래 해서 108번뇌가 됩니다.

  “아난아,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이 거짓말하지 않으면 생사에서 바로 해탈할 수 있다. 거짓말하지 않으면 삼매의 종자가 성숙하여 결국에는 열반에 이르게 한다.”

 정직해야 만이 우리는 깊이 선정에 들 수 있습니다. 정직하지 않는 사람은 깊은 삼매에 들 수가 없습니다. 

 “아난아,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이 술에 취하지 않으면 생사에서 바로 해탈할 수 있다. 중독성 있는 것에 취하지 않으면, 정신이 맑게 깨어 관조하는 능력이 성숙하게 되어 결국에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근본 오계에 대한 설명입니다. 출가하면 바로 10계 즉 사미 10계를 받습니다. 사미 10계라는 것이 근본 오계하고 다음에 나오는 계율 다섯 개입니다.

  “아난아, 여섯째는 몸치장을 하지 마라.”

 부처님의 큰 제자 가섭을 잘 알고 있지요. 가섭은 평생 어떻게 살았어요? 두타 제일로 이 가섭은 평생 동안 누워 잠자지 않았으며 분소의만 입었습니다. 즉 한 번도 새 옷을 입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이 버린 떨어진 옷을 주워 기워 입었고 평생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 세상 최고 수행자의 귀감이 되는 사람이 가섭입니다. 젊은 시절에 가섭도 집이 어마어마한 부잣집이었습니다. 가섭이 멋진 옷을 입고 부처님 곁에 앉아있어요. 그 때 부처님한테 지적을 당합니다. 가섭은 집이 부자라서 멋진 옷을 입고 폼 잡다가 부처님께 한 소리 듣습니다. 그 후로 가섭은 평생 좋은 옷은 한 번도 안 입습니다. 결국 분소의를 입고 평생을 지냅니다. 몸을 치장하지마라 지나치게 옷을 사치스럽게 입지 마라는 뜻도 있지만 승려들도 똑같이 몸을 치장하기 위해서 지나친 가사를 입지 말라는 뜻이 있습니다. 

 일곱째, 노래하고 춤추거나 악기를 다루지 말라. 유희를 하다보면 빠지기 쉬우니까 부처님께서 일곱째의 계율로 금한 것입니다. 가서 구경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덟째, 높고 넓은 평상이나 평평한 곳에 앉지 마라. 우리 평평하고 조금 높은 곳에 앉으면 우쭐해지고 편안한 곳에 있으면 나태해집니다. 이것은 아만을 내지 말고 나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홉째는 때가 아니면 먹지 마라. 부처님께서는 하루에 한 끼 밖에 먹지 않았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먹으면 결국 이 몸뚱이만 불려 놔 공부하는데 방해만 됩니다. 우리의 업이 이 몸뚱이를 만든다고 했지요. 쓸데없이 시도 때도 없이 먹다보면 이 몸뚱이와 더불어 생각도 맑아지지 못합니다. 수행자가 되면 정말 하루에 한 끼나 두 끼 때를 정해놓고 그 때에만 먹어야 됩니다.

 열번째, 금은보화와 같은 재물을 모으지 말라. 결국 재물을 모으면 수행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재물을 왜 모아요? 재물을 모으는 첫째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될 때 있다고 생각하면 재물 모을 필요 없지요. 은행에 돈이 있어서 언제든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돈을 모을 필요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돈을 모으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수행자는 재물을 모으면 안 됩니다. 수행자가 재물을 모으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이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행의 공력이 얼마나 대단하느냐하면 내가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재물은 그만큼 모아집니다. 이 업이라는 것이 예를 들어서 돈이 천만원정도 있다고 했을 때 내가 무엇을 해서 1억을 벌었다면 9천만원은 다 나가버립니다. 업만큼 나한테 남아 있습니다. 수행자가 진지하게 수행을 잘 한다면 아무 걱정 안 해도 복이 그냥 따라 오게 됩니다. 우리가 세속을 살면서 야비한 수단과 잘못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모이는 것만으로도 충만합니다. 그렇게 악착같이 재물을 모으지 않아도 자식한테 다 줄 수 있어요. 재물을 모으지 마라. 출가 수행자는 재물을 모으지 말아야 되고 재가 수행자는 청빈하게 모아야지 엉뚱한 수단으로 재물을 모아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는 이렇게 계율을 지킴으로써 바로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이 열 가지 계율이 지금은 비구 250계, 비구니 348계입니다. 이렇게 많은 계율을 지켜야 되는데 이 근본 오계만 지켜도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집니다. 근본 계율은 승단이, 승가가 지탱되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불법승 중에 불법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승가 밖에 없습니다. 승가가 잘 보존되고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동남아시에서 불교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부처님께서 지키라는 계율을 그대로 지키고 있어요. 어떤 상황이든 가장 기본적인 것을 지키라고 했을 때 지키지 않으면 불교하고 먼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고 형식만 불교의 틀을 덮어 쓰고 있는 것이지 불교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부처님께서 깨치신 기본 내용들, 연기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연기를 앎으로써 불교를 알게 되고 불교를 알면서 실천할 수 있는 실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불법승이라는 것은 부처님과 부처님께서 깨치신 내용과 부처님께서 깨치신 법과 부처가 되기 위해 진지하게 수행하고 있는 집단이 근본적으로 지켜야 될 내용을 지킬 때 비로소 불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지 않을 때는 우리가 부처님 몸속에서 산다 해도 불교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율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계율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만 이루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계율 안 지키고 도가 이루어집니까? 부처되는 것은 한 순간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평생 진지하게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진지하게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습관입니다. 계율이라는 것은 습관을 제대로 잘 유지 시켜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습관을 잘 길들여주는 것이 계율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부처 되겠지요? 


계율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이트 정보

상호.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대표. 김성규 사업자등록번호. 514-82-14810 [사업자등록, 법인등록정보 확인]
Tel)053-474-1208 Fax)053-794-0087 E-mail) tongsub2013@daum.net
주소 : 대구광역시 남구 두류공원로 10(대명동)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성규

Copyright ©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All rights reserved.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1,186
어제
7,616
최대
7,694
전체
1,25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