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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생애

제 3강 싯타르타 부처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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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993회 작성일 21-07-22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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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강 싯타르타 부처 이루다



반갑습니다. 한 주 잘 계셨습니까? 

제가 이제 이야기 안해도 절도 잘 하시고 참선도 하겠지만  한 번 더 점검하면 새로운 힘이 되어 좀 더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지난 시간까지는 부처님의 일생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8상 성도로써 설명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첫번째가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도솔천에서 내려 오는게 제일 먼저이고 다음에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그 다음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오늘 우리가 공부할 것은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으로 여기까지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지난 주에는 설산에서 고행을 하셨고 오늘 이 시간에는 도를 이룬 내용입니다. 지난 시간에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에서 부처님께서 6년 동안 고행을 하시면서 마지막 6년째는 기력이 완전히 떨어져 쓰러졌습니다. 그때 정반왕이 보낸 우다인이 왔을 때 내 한 몸이 부서지더라도 처음 마음 먹은 대로 끝까지 변하지 않고 수행 정진 하겠다 하시면서 부처님께서 우다인을 돌려 보내고 계속 마지막 수행정진에 들어 갑니다. 후일에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처님께서 숲속에서 몇 년 동안 혼자 공부하시면서 무섭지 않았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우리도 산중에 혼자 공부한다고 앉아 있으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불안과 공포는 깨닫기 전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이든 우리의 마음 속에 항상 내재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도 그것이 궁금하여 묻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도 그때 공부하면서 정말 무섭고 공포 스러웠다. 무서움을 타지 않으려고 가부좌를 하고 있는 데도 짐승소리에 움찔했고  바람 소리에도 두렵고 처음엔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하시면서 ‘내가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말 할테니 너희들도 공부할 때 잘 생각해 봐라. 무엇이 두려웠겠느냐? 바람이 불어도 맹수들이 나를 덮칠 것 같았고 나뭇가지가 흔들려도 맹수가 내 곁에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되는데 나는 그 상황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기기 위해 눈을 크게 부릅뜨고 계속 앞을 응시했다. 응시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바람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실제로 아무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고 그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다.’ 얼마나 인간적이고 솔직한 이야기 입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혼자 공부하실 때 두려움과 공포를 그렇게 이겨낸 것입니다. 산길을 혼자 갈 때도 뒤에 누가 따라 올까봐 무섭고 두렵지요? 하지만 알고 나니까 공포스럽지 않는 것입니다.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은 부처님께서 마지막 도를 이루신 것입니다. 싯타르타는 6년 동안 고행을 합니다. 6년 고행 끝에 얻은 결론은 내가 고행하면서 추구하고 이루려고 하는 마지막 긍극적인 깨달음의 목적이 왜 죽어야만 하는가? 하는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방법을 찾기 위해 싯다르타는 고행을 중단하고 지친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 레란자린 맑은 강에 들어가 몸을 씻습니다. 6년 동안 몸을 씻지 않아 더러워진 몸을 깨끗이 씻습니다. 그때 마침 강가에서 우유를 짜고 있던 수자타라는 소녀에게서 우유를 한 그릇 얻어 마십니다. 한 그릇을 마시고 부처님께서는 ‘수자타라여 나에게 한그릇만 더 다오.’ 해서 더 마십니다. 이 인연으로 해서 수자타라는 평생 부처님의 제자가 됩니다. 우유를 마시고 기력을 회복해 깨달음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갑니다. 부처님도 그렇게 6년의 고행에서도 답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섭니다. 홀로 숲속에 들어가서 보리수 나무 아래서 가부좌를 하고 단정하게 앉습니다. 보리수 나무는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상징적인 나무입니다. 보리수 나무 밑에 있으면서 6년 동안 긴긴 고행 속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마음속의 편안함을 레난자라강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부처님께서 다시 새롭게 맹세합니다. 내가 도를 이루지 않고는 죽어도 이 자리를 떠지 않겠다 라고 결심을 합니다. 태어난 자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죽어도 이 자리를 다시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싯타르타는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깊이 명상을 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마음으로 깊고 깊은 명상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관조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것들이 연기로 이루어졌다하는 연기를 깨닫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결국 6년 동안 긴긴 고행을 거쳤기 때문에 이 새로운 방법으로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수억겁 동안 가지고 있었던 모든 업이 다 없어집니다.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서 선정에 들어가 이루어집니다. 부처님께서 긴긴 세월 고민했던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고뇌와 번민과 그 모든 것이 6년 동안 고행을 통해서 몸 받아 행했던 마지막 결정체가 보리수 나무 아래서  선정에 들어 마지막 결론을 얻게 됩니다. 앞에서 했던 모든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앞에 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오늘 견성성불(見性成佛) 했다고 해서 이제까지 살았던 것이 의미가 없습니까? 똑같이 의미가 있습니다. 견성성불(見性成佛) 한 순간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마지막 선정에 들어서 보니 마왕의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에 이제까지 탐진치(貪瞋癡)를 다스렸던 암흑의 왕들이 큰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빨리 싯타르타가 도를 이루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데 막지 못하면 마왕의 세게는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왕 파순이 싯타르타를 유혹하기 위해서 세 미녀를 보냅니다. 세 미녀는 부처님 곁에서 싯타르타여! 따뜻한 봄이 온 줄도 모르고 어찌하여 젊음의 쾌락을 버리고 아득하고 불가능한 깨달음을 구하시나요? 우리들은 태자님을 즐겁게 하러 왔습니다. 하면서 부처님을 유혹 합니다. 세 미녀가 유혹을 하지만 부처님은 물리칩니다. 이것이 마왕 파순을 통해서 부처님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애욕을 전부 물리치는 것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외부의 유혹이 아니라 탐진치(貪瞋癡)의 덩어리가 하나씩 없어지는 것입니다. 탐욕이 먼저 무너지고 진심이 무너지고 마왕을 항복 받는 4번째 이야기를 보면 ‘너의 몸은 쇠약해지고 늙어 죽을 것이다.’ 마왕이 엄포를 놓습니다. 깨달음은 부질없는 것, 전 세계를 지배하는 능력을 주겠다. 이루기 어렵고 불가능한 도를 이루려고 어찌 이다지 애만 쓰는가? 도를 포기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출가자여 나무 아래서 무엇을 구하는가? 빨리 떠나라. 너는 금강좌에 앉을 자격이 없다.’ 이제 마지막 도를 깨치려고 하니까 마왕이 협박을 합니다. 칼과 활과 창등 무기를 가진 부대를 동원 시켜 싯타르타를 칩니다. 이때 부처님께서 선정인(禪定印)인 결가부좌 상태로 참선, 즉 선정에 들 때  왼손의 손바닥을 위로해서 배꼽 앞에 놓고, 오른손도 손바닥을 위로 해서 그 위에 겹쳐 놓으면서 두 엄지손가락을 맞대는 형식과, 항마촉진(降魔觸地印) 우리가 공부하면서 하는 자세가 선정인 (禪定印)이거나 항마촉진(降魔觸地印)입니다. 부처님께서 6년 동안 고행 하시면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모습이 선정인(禪定印)입니다. 부처님께서 고행 하시면서 참선하는 수행 방법이 선정인(禪定印)입니다. 마지막 도를 이루실 때 부처님의 손 모양이 항마촉진(降魔觸地印)으로 한 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 모습이 땅(地)의 지신을 누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지막 도를 이룰 때의 모습이 바로 항마촉진(降魔觸地印)이나 선정인(禪定印)을 합니다. 마왕들이 협박을 했을 때 싯타르타는 ‘나는 이제 모든 생각들을 다 놓아 버렸다. 너희들 번뇌망상(煩惱妄想)은 불을 바다에 던지는 것과 같다. 마땅히 화내는 마음을 버려라. 불을 차게 만들고 수미산을 무너뜨릴지라도 나의 마음은 움직일 수 없다. 결국 마지막 이야기에서 부처님 마음 속에 있는 탐심과 진심이 무너지는 장면입니다. 원래 인간들의 모든 욕망의 덩어리들을 무엇으로 표현합니까? 탐진치(貪瞋癡)로 표현 합니다. 여기서 탐심과 진심을 무너뜨리기 위한 장면이 마왕 파순의 항복입니다. 근본 무명이 다 깨뜨려지고 나면 부처님께서 깨치신 연기의 세계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결국 나란자라 강변 부다가나의 보리수 아래서 새벽 별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성불을 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결국 이 세상에 연기라는 새로운 진리를 지금 우리가 쉽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치신 내용은 욕심을 버리고 악을 버려 초선의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 하고 공부 해서 뭔가 알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은 초선의 즐거움 입니다.그 다음에 좀 더 우리 마음에 번뇌 망상들이 가라 앉아 선정의 즐거움을 느끼고 이것을 거치면 다음 단계가 제2의 과정입니다. 제2의 과정을 거치면 3선에서 평등의 생각이 들고 괴로움, 즐거움, 기쁨과 슬픔을 전부 멸하게 됩니다. 즐거움 뿐 아니라 자비까지도 멸하게 되는 것이 제3선정입니다. 자신이 마음 속에 가득차는 것이 제3의 경지입니다. 제4선에서는 고요하고 청정함에 어떤 것에도 마음이 번거롭지 않고 과거의 모든 것을 아는 숙명통을 얻습니다. 자신의 전생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전생을 알게 되는 숙명통을 얻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공부한다면 4선까지는 가야 세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빙산에 일각에 불과합니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보다 이 우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죽었다 합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살아있는 세계보다도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더 큽니다. 4선정도까지 가면 지금 눈에 보이는 것보다 좀더 넘어 가지고 아마어마한 세상에 눈을 뜨게 됩니다. 우리도 4선까지는 가 봐야 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날의 초저녁에 제1의 지혜를 이루어 무명을 벗어나서 연기를 깨달았고 제1의 지혜에서 4선까지 들어가서 숙명통이 열린 것입니다.  제1의 지혜를 얻으시고 무명을 깨트리고 연기를 깨달았습니다. 제2의 지혜는 나고 죽는 인연을 명상하시고 사람의 생사와 그 흘러가는 업을 아는 천안통을 얻으시고, 나아가 번뇌(煩惱)가 멸진(滅盡) 하는 지혜를 얻으시고 고(苦)의 원인인 집(集), 고(苦)의 멸(滅)과 고(苦)의 멸(滅)에 도달하는 방법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 연기를 깨달은 것이 제2지혜로 육육법연기, 12연기 연기의 체계를 깨달은 것이 바로 제2지혜입니다. 다음은 제3의 지혜로 애욕과 무명에서 벗어나 해탈하시고 해야 할 일을 다 성취하시여 성불을 하십니다. 연기에 대한 속성이 무상과 무아라는 것들을 다 아시고는 해탈을 하십니다. 고뇌하고 번민하며 걸어 왔던 그 길과 출가수행을 하는 긴시간 동안 고행을 하시면서 깨쳤던 것이 연기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제1지혜 제2지혜 제3지혜까지가 공부했던 그 내용들입니다.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이때까지는 부처님께서 수행을 하셔서 도를 이룬 것이고 그 다음 7번째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을 통해서 우리에게 설법을 하십니다.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은 깨치시고 난 다음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법을 펼치신 그 내용들입니다. 부처님의 생애와 사상은 학문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해 알아야 할  정확한 상식이고 녹원정법상(鹿苑轉法相)에서 알아야 될 내용은 결국 부처님께서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에서 존재의 모든 것은 무상하고 무아다. 무상과 무아라 하는것은 고(苦)라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일체개고(一切階苦)라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치시고 난 다음 고민은 과연 내가 깨친 이 연기가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고라고 이야기한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苦) 라는 것을 설명해서 다른 사람들이 고(苦)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면 고(苦)를 설명해서 벗어나게 할 수 있겠는데 벗어 날 수 없는 고(苦)면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이 세상 사람들이 내가 깨달음의 진리를 설명해 가지고 이해를 하고 받아 들이면 그 사람의 삶이 고(苦)로부터 벗어나면 이야기 하겠는데 도움이 안된다면 깨친 내용은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첫 번째 고민은 내가 깨친 이 연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苦) 대한 구조와 체계를 무상과 무아나 연기로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은  어떻습니까?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고통과 계급적인 불평등함에서 오는 고통,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해 보면 내가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 사람 들에게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을 하시다가 결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苦)라는 것은 연기를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즉 뭐냐하면은 내가 이 연기를 깨쳐서 이렇게 편안한 마음이 되었듯이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 같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存)이라 그랬지요? 그 의미가 얼마나 어마어마하냐면 내가 깨친 이 연기의 도리가 나만 깨칠 수 있는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다 이 연기를 깨치고 깨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苦)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고(苦)라는 것은 해결 가능한 고(苦)라고 인식을 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이 고(苦)라는 것은 해결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십니다. 해결 가능한 것으로 인식을 하니 어떻습니까? 고(苦)를 이해하고 고(苦)를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파악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셨어요? 사성제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사성제법의 제일 중요한 것은  집성제입니다. 너의 고통을 너 스스로 한번 생각해보라. 그 고통스러웠던 고(苦)가 어디서 왔는지 본인 스스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집(集)이 바로 원인입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를 스스로 밝히는 것이 집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존재하고 있는 모든 고(苦)라는 것은 스스로 그 원인을 생각해봄으로써 해결 극복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그래서 고(苦)라는 것은 문제의 제시,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을 고(苦)라고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인식해야 할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 원인을 생각하듯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친 방법입니다. 이러한 가르침들이 45년 동안 계속 지속이 됩니다. 사람마다 다른 내용에서 근본적인 이유는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이유, 원인을 스스로 생각하게 합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가?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그 일이 일어났는가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그 당시 인도사회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태동하게 됩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왜 그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면 지금 내가 받고 있는 많은 고통의 칠팔십프로는 없어져버립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통의 하나만 없어져도 달라지는데 칠팔십프로가 달라진다고 하니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삶은 바뀌지 말라해도 바뀌어 집니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고와 집, 고집성제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들을 보여줍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을 보면 죽은 손자를 안고 슬퍼하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어린 손자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끌어안고 우는 노파가 부처님을 찾아옵니다. 이 노파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부처님이시여! 왜 어린아이가 죽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이렇게 나이가 많아도 살아 있는데 손자가 죽은 그 상황을 납득할 수도 없고 이해도 못합니다. 그래서 그 슬픔을 이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노파가 어린아이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 상황을 보고 ‘어떤 생명이든 어려서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시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노파에게 ‘너는 왕사성에 사는 사람들의 수 만큼 (이때 왕사성의 인구가 백만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표현합니다) 백만 명 손자들을 데리고 살면 행복하겠느냐?’ 하니까 아! 부처님, 그러면 당연히 행복하지요. 제 손자가 한명이여서도 이만큼 행복했는데 백만 명이면 얼마나 더 행복하겠습니까? 당연히 행복합니다.‘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 그러면 너의 손자가 백만 명씩이나 되니까 매일 수백 명이 죽어나가는데 매일 죽어나가는 손자들을 보면서 애통해 하고 슬퍼하면서도 너는 행복하겠느냐? 노파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자기의 어린 손자가 왜 죽어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다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예를 듣고는 죽음의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고, 부처님의 자비에 그 순간 바로 감동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슬펐던 생각이 싹없어지고 그 슬픔에서 벗어납니다. 이 노파는 왜 그렇게 슬펐어요? 집착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슬픔이 어린 손자에 대한 집착 때문임을 스스로 인식하게 됩니다. 인식함으로써 아! 나의 슬픔이 그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온 것이구나. 깨닫게 됩니다. 또 홀로 남겨진 것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노파는 부처님의 재가 신자가 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당시에 누구든지 그 지역에 있던 사람들은 스스로 부처님을 찾아뵐 수 있었습니다. 이 노파도 왕사성의 한 시민이었는데 부처님을 찾아와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문제를 제시합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눔으로 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부처님의 문제 해결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이것은 고타미의 이야기입니다. 고타미는 젊은 엄마로 어린 자식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슬픔이 그 노파보다 훨씬 더 심했습니다. 젊은 엄마가 죽은 애를 안고 부처님을 찾아와서 애를 살려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이 고타미를 한참 쳐다보면서 애통해 하는 고타미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생각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타미야, 내가 주문한 것을 하나만 들어준다면 너의 애를 살려주겠다.’ 고 하십니다. 그러자 고타미는 당장 실천하겠다고 합니다. 그 당시 인도사회에서는 겨자씨가 상당히 많았나 봅니다. 그러니까 겨자씨 이야기가 많이 나오겠지요. 경전에서도 여러 가지 겨자씨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도 경전에 나오는 겨자씨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왕사성에 가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겨자씨를 얻어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지금까지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집에 가서 겨자씨를 구해오라고 합니다. 죽은 어린 자식 때문에 고타미는 거의 미쳐 있어요. 고타미는 자신만 어린 자식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장 구해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달려나갔습니다. 아무리 돌아다녀보아도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돌아다녔지만 어느 집이든 사람 안 죽은 집은 한 집도 없었습니다. 모든 집들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살아있는 사람보다도 죽은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결국 그 많은 집들을 돌아다니다 보니까 어느 집이든 슬픔을 안 겪은 집이 없었습니다. 고타미는 돌아다니면서 부처님께서 자신에게 겨자씨를 구해오라하신 깊은 뜻을 깨닫고 부처님의 그 위대함에 감동을 합니다. 그래서 고타미는 죽은 아들을 땅에 묻고 다시 부처님계신 곳으로 갑니다. 고타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출가를 합니다. 평생 부처님을 모시고 삽니다. 부처님께서 우리가 한토막한토막 이야기를 했는데 이 내용들을 볼 때 부처님께서 깨치시고 난 다음 연기라는 이 가르침을 실제적인 생활에,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하나하나 알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설하신 내용들을 보면서 약 2500년 전에 깨치신 부처님께서 그 당시 가졌던 고민과 과제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한번 보세요. 물질적으로는 대단히 발전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따지고 보면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1400년 전의 원효를 보아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뛰어나고 명쾌합니다. 지금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정신세계에 대한 정확한 분석들이 1400년 전에 이루어졌어요. 부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찾아옵니다. 부처님은 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 무엇을 주어야 할 것인가? 바른 법을 일러 주면 제대로 실천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사람들한테 무엇을 어떻게 인식시킬 것인가? 등의 부처님께서 가지고 있었던 고민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첫째 제일 중요한 것은  ‘왜 사느냐?’ 하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45년 동안 법을 펼쳤을 때 ‘왜 사느냐? 어떻게 사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분명한 삶의 지표를 설정해줍니다. 부처님께서는 왜 사느냐? 하는 문제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올바르게 사는 것에 대해서 부처님의 경전에 여러 번 나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왜 사느냐? 하는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교육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왜 사느냐?’에 당연하게 목적이 생겨버립니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왜 사느냐?’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먹고 살수만 있으면 되었던 시대입니다. 목적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왜 사느냐? 를 인식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제시한 것이 올바른 삶으로 세상을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줘야겠다는 지표를 설정해줘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바라문이 찾아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이 삶의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아직까지 신적이고 신화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처님께서 던진 화두가 ‘왜 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부처님을 찾아온 바라문이 묻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나쁜 짓도 하고 착한 짓도 하고서 죽고 난  다음에 천당에 태어나라고 기도하면 천당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그 바라문을 데리고 절 뒤에 있는 연못에 갑니다. 연못에 데리고 가 돌을 던지니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돌이 가라 앉습니다. 그 가라앉는 돌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바라문이여! 너희 바라문들이 여기에 와서 돌아 뜨라! 돌아 뜨라! 하면서 기도하면 돌이 뜨겠느냐? 하고 묻습니다. 바라문이 대답하기를 ‘부처님이시여, 그 돌은 무거운 속성 때문에 가라앉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다. 만약에 그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악업을 지었다면 그 사람은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질 것이고 만약 착한 일은 했다면 그 사람은 천당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어떤 사상을, 어떤 종교를 믿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올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이 생명의 대 전제이고 대 과제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왜 사느냐?’ 에 대한 해답으로 올바르게 사는 삶에 대한 새로운 지평선을 여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삶의 고통문제입니다. 그러니까 45년 동안 찾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누구든지 이 몸을 받아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의 문제는 개인적인 고통도 있을 것이고 인도라는 특수사회의 집단 혹은 노예계급이나 불가촉천민들의 집단에서 생기는 고통도 있을 겁니다. 개인적인 고통의 문제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노병사 혹은 능력의 빈약에서 오는 고통이  있을 겁니다. 특수교육을 제일 처음 시작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지구상에서 저능아를 위한 교육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의 제자중에서 주리반특이 기억나십니까? 모두가 바보 주리반특이라고 부릅니다. 주리반특은 아무것도 기억을 못했습니다.  주리반특은 친구들이 출가를 하니까 자기도 덩달아 출가를 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시면 한구절 한구절 외우는데 주리반특은 6개월 동안 배운 것 중에 한구절도 머리속에 남아있는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부처님을 찾아가서 부처님이시여! 저는 친구를 따라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출가를 했는데 6개월 동안 살아보니까 저는 출가 수행자 생활이 맞지 않습니다. 마을로 돌아가서 지금까지 제가 했던 일이나 하겠습니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주리반특아, 왜 그런 마음을 가졌느냐? 부처님의 물음에 제 친구들은 전부 다 부처님께서 가르친 그 많은 내용들을 줄줄 외우기도 하고 다 잘하는데 저는 돌아서면 잊어버리고해서 지금 제 머릿속에는 한구절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도 6개월 동안 많은 고통을 견디고 놀림당하는 것도 참았는데 이제 도저히 못 견디겠다면서 가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세상에 있을 때 어떤일을 했느냐? 저는 청소부였기 때문에 빗질은 잘 합니다. 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러면 한 달만 절에 더 있거라 이왕 온 것  지금 돌아가나 한 달 뒤에 돌아가나 똑같으니까 지금부터는 내가 시키는대로 하면서 한 달만 더 있다가 마을로 돌아가라고 하시면서 부처님께서 너는 오늘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고 마당만 한 달동안 쓸어라. 주리반특은 마당은 잘 쓰니까 신이 나서 계속 마당만 씁니다. 그러다가 하루,이틀,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니까 부처님께서 왜 이 빗질을 시켰는지 주리반특이 스스로 느낍니다. 부처님께서 마당을 쓸어라 한 것은 그 마당만 쓸어라 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을 이 마당과 같이 깨끗하게 하라는 것을 한달 동안 빗질을 하면서 스스로 터득합니다. 그래서 바보 주리반특도 평생 부처님의 제자로 남아있게 됩니다. 한달 동안 빗질을 하면서 고마움에 대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얼마나 감동스했겠습니까? 해결되지 않았던 것을 해결하게 되면 기쁨과 감동의 눈물을 흘립니다. 살아가는데 나타나는 고통의 세 번째를 알아보겠습니다. 그 당시는 2600년전입니다. 아직까지 고대국가가 만들어지기 전입니다. 그때까지 부족국가로  신화적인 시대가 끝나지도 않았습니다. 신화적인 역사와 인간중심의 역사가 막 혼동을 일으키고 있을 때입니다. 과연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나 근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이 불확신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인간 자신의 삶에 대한 불확실성은 무엇입니까? 이 불확실성을 깨끗하게 마무리 지은 것이 연기법, 바로 인과법칙입니다. 착한 일하면 착한과보 받고 나쁜 일하면 나쁜과보 받는다. 거기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부처님은 확실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 불확실성을 깨끗하게 해주시지요 바로 45년 동안 설하신 가장 큰 내용들을 요약해 보면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들입니다. 부처님한테 감화를 받아 살았던 그 많은 제자와 이제 오늘은 그 전제로써 어떻게 부처님은 제자들한테 그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제까지 공부했던 내용들을 가만히 보면 부처님은 가르치고 이해와 인식만 시킵니다. 절대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고 안하고의 문제는 자신의 문제입니다. 인식시키고 이해시키는 데까지만 열심히 하시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본인 스스로의 몫입니다. 본인 스스로의 몫을 본인이 해결하면 위대한 부처님의 십대제자가 되고 실천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마을을 떠납니다. 부처님을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이 가장 위대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금 이야기 하는 바로 그 부분입니다. 앞으로 전개되는 모든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노파와 고타미 이야기를 했듯이 그 스스로 부처님께서 이야기하는 내용을 따라서 해보니까 본인 스스로 그 상황을 파악하고 인식하고 감동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상황을 인식하고 이해하게 만듭니다. 이해하고 인식한 것을 실천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의 몫입니다.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모를 때는 부처님이시여! 이것을 극복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런식으로 부처님께 물어보면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 주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본인 스스로 실천하고 극복 하게 됩니다. 집에 공부 잘 하는 사람 한명만 있어도  신나시지요?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면서 산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얼마나 신나는 세상입니까? 그것을 2600년전 부처님께서는 이 지구상에서 최초로 생각해 놓은 것입니다. 그것도 한사람 두사람도 아니고 천명이나 넘는 집단이 거룩한 생각을 하고  거룩한 발자국을 옮기면서 수행을 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이 지구에서 그 삶의 틀을 부처님께서는 이루어 내신 겁니다. 이 지구에서 그 삶의 터를 부처님께서 일구어 내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삶을 알고 되돌아보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말로만 하는 봉사가 아닙니다. 내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와서 하는 봉사만이 이 우주를 구할 수 있습니다. 자기자신도 구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녹원정법상(鹿苑傳法相)의 구체적 내용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강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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