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행위의 과보가 크게 되돌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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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과 소금을 잘 섞어서 주었는데 왜 싫어할까? 섞었을 뿐이지 설탕이 사카린으로 둔갑한 것은 아니다. 설탕은 어떤 상태에서도(정확하게 말하면 설탕으로서의 분자가 변하지 않는 한) 어디까지나 설탕이다. 그렇다면 결국 섞는 것은 나쁘고, 분리된 상태가 좋다는 것이 된다.
설탕과 소금을 섞어 버리면 조미료로서는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혼합한 것은 쓸모가 없지만 그것이 혼합을 싫어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아니다.
분리된 것을 혼합하는 것은 쉽지만, 일단 혼합된 것을 다시 나누기는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분리된 쪽을 더 좋아한다.
찻집에서 커피를 주문하면 설탕과 프림이 따로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따로 담긴 흰 바둑알과 검은 바둑알을 어린 아이가 보면 가지고 놀면서 섞어 버린다. 어른들은 그 알들을 일일이 흰 것과 검은 것을 분리해서 그릇에 담아야 한다.
바둑알은 나누워 놓기 쉽다. 흰 알이든 검은 알이든 손가락으로 집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씩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액체와 기체는 한 번 섞여버리면 다시 원래 상태 대로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L 짜리 칸이 두 개 있는 그릇이 있다고 하자. 한 칸에는 00C인 물이 있고 다른 칸에는 100 C인 물이 들어 있다. 칸막이를 치워버리면 50 C 물 2L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500C인 물 2L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한칸에는 00C, 다른칸에는 1000C 물로 나누어 담을 수 있을까? 500C인 것은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다.
이와같이 0도의 물과 100도의 물을 섞어 50도의 물로 만드는 것은 쉽지만, 50도의 물을 0도의 물과 100도의 물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비가역적 현상은 바로 우주의 존재원리와 진행방향과 관계하는 값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뒤섞여 있는 인과는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이다. 힘이들지만 시간을 정해놓고 일정한 시간 동안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만이 우리의 행위를 분명하게 하며 그 행위에 대한 과보도 분명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각과 행위가 모여 결국 깊숙이 숨겨져 있는 마음의 실체를 찾아내어 견성성불하게 되는 것이다. 공부가 충분히 익고 난 다음에는 시도 때도 없이 수행하는 것도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공부가 익을 때 까지는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공부라야 인과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권투를 할 때 가벼운 쨉이라고 계속 맞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리가 휘철거리고 결국은 케이 오가 되어 게임을 지게 된다. 이와같이 가벼운 쨉이라도 모이게 되면 케이 오가 되는 것이다. 하루에 한시간 하는 참선이라도 만 년이 모이게 되면 삼백육십만 시간을 참선하게 된다. 이렇게 엄청난 시간을 참선하게 되는데 견성하지 않고 무엇이 되겠는가.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한방울의 물이 수 만년을 지나면 바위를 뚫듯이 지속적으로 행하는 수행에 의해서만이 도를 이룰 수 있음을 우리 불자들은 깊이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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