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 역학과 불교 > 불교속의 과학, 과학속의 불교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불교속의 과학, 과학속의 불교

양자 역학과 불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8,365회 작성일 21-07-14 18:53

본문

양자역학의 전통적인 해석은 피관찰체계의 파동함수에 포함된 모든 가능성 가운데 하나만이 현실화되고 나머지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에베르트, 휠러, 그라함 이론은 가능성들이 모두 현실화되지만 우리의 세계와 공존하는 다른 세계에서 현실화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세계에는 누가 존재하는가?  '우리'가 존재한다.

이중절개 실험을 살펴보자.

광원은 광자를 방출한다. 광자는 첫번째 틈새나 두번째 틈새를 통과할 수 있다. 탐지기는 각 틈새에 놓여 있다. 이제 우리는 실험에 가까운 새로운 절차를 보충해야 한다.

만약 광자가 첫번째 틈새를 통과하면 나는 윗층으로 뛰어 올라가고 광자가 두번째 틈새를 통과하면 나는 밑층으로 뛰어내려간다.  그러므로 첫번째 가능한 사건은 광자가 첫번째 틈새를 통과하여 첫번째 탐지기가 작동하고 나는 윗층으로 뛰어 올라 가는 것이고, 두번째 가능한 사건은 광자가 두번째 틈새를 통과하여 두번째 탐지기가 작동하고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이중절개 실험에서 각 틈새로부터 나온 광파의 봉우리와 골이 어떤 지점에서는 서로를 강화시키고 다른 지점에서는 서로를 말소시키는 현실의 형상을 결정하기 위해서 양자적인 실재의 수준에서 서로 간섭한다.

에베르트, 휠러, 그라함의 이론에 의하면 파동함수가 '붕괴'되는 순간에 우주는 두 세계로 갈라진다. 두 세계 중의 하나에서 나는 윗층으로 뛰어올라 가고 다른 하나에서 아래층으로 뛰어내려 간다. 나에게는 별개의 복제판이 두 개 있다. 이들 각각은 서로 다른 것을 행하고 잇고 서로를 알지 못한다. 최초의 세계가 갈라진 이 두 세계는 영원히 분리된 실재의 한쪽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로는 결코 교차되지 않았다.

매번 측정할 때마다 우주는 각 가능성마다 하나씩, 많은 수의 다른 세계로 갈라진다. 각각의 세계는 파동함수를 가지고 그것에 맞게 계산해서 나온 확률에 일치하는 '무게'가 서로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모든 세계는 사건이 그 세계를 분리시키고 결말 낼 때를 제외하고는 일치되어 있다. 에베르트, 휠러, 그라함이론은 양자역학의 복수세계 해석이라고 불리운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우주로부터 나온 것이고, '내'가 세계를 볼 때 '내'가 보는 것은 '나'에게 나타나기 위해 재조정된 우주의 나머지인 것이다. 그 우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 특수한 '나'와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이 특수한 상태는 우주에 있는 '나'의 한쪽과 일치하고 관찰이 이루어질 때마다 우주는 그 속에서 새로 형성된 '나'는 그 특수한 방법으로 우주를 보는 유일한 사람이다. '관찰자'는 파동함수를 분해시키는 특수한 방정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해서 측정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측정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측정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누가 우주를 보고 있는가' 이다. 복수세계 이론은 우주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파동함수를 붕괴시키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복수세계 이론에 의하면 파동함수는 붕괴되지 않는다. 파동함수가 붕괴될 때 '현실화하지 않는' 피관찰체계의 파동함수 안에 포함된 상호배타적인 모든 가능성들은 실제로 현실화된다.

예컨대 파동함수에 포함된 가능성 가운데 하나가 우주의 이쪽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나는 윗층으로 뛰어올라 간다). 아울러 파동함수에 포함된 다른 가능성(나는 아랫층으로 뛰어내려 간다)도 실재의 다른 쪽에서이지만 현실화된다. 실재의 이쪽에서는 나는 윗층으로 뛰어올라 가고 다른 쪽에서는 아랫층으로 뛰어내려 간다. '나'는 다른 하나를 알지 못한다. 양쪽의 '나'는 우주의 그 두 쪽들이 실재의 전체를 구성한다.고 믿는다.

복수세계 이론은 하나의 우주가 있고 이 우주의 파동함수는 그것 자체를 관찰자와 피관찰자로 분해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우주는 여기서 큰 상자 안에 모두 같이 있는 것이고 외부에서 그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상자를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슈뢰징거의 고양이'는 고전물리학,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과 양자역학의 복수세계 해석 사이의 차이점을 요약해준다. '슈뢰징거의 고양이'는 슈뢰징거파동 방정식의 유명한 발견자에 의해 오래 전에 제기된 딜레마이다. 고양이는 상자 안쪽에 놓여 있다. 상자 안에는 가스를 뿜어서 고양이를 순식간에 죽일 수 있는 장치가 있다. 임의로 발생하는 사건(원자의 방사능 소멸)이 가스가 분출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결정한다.

상자의 바깥에서는 상자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상자는 밀폐되었고 실험은 시작된다. 조금 뒤에 가스는 분출되거나 되지 않았거나 했다. 이제 문제는 보지 않고서도 상자 안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고전물리학에 의하면 고양이는 죽었거나 죽지 않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상자를 열고 어떤 경우로 되어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양자역학의 코펜하겐해석은 고양이가 죽었을 가능성과 살아있을 가능성을 모두 포함하는 파동함수에 의해서 표현되는 일종의 망각상태 속에 고양이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상자 안을 보았을 때 그 가능성 가운데 하나만이 현실화되고 다른 것은 사라진다. 이것은 파동함수 속에서 발생하지 않았던 가능성을 나타내는 둥근 부분이 붕괴하기 때문에 파동함수로 알려져 있다.

각각의 가능성이 일어나기 전에 상자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다. 그때까지는 다만 피동함수만이 있다.

복수세계 해석에 의하면 우리가 상자 안을 들여다본 순간 세계는 각각 고양이의 다른 福제판을 갖고 있는 두 개의 부분으로 갈라진다. 고양이를 나타내는 파동함수는 붕괴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살아있고 또 죽어있다.

세계의 한쪽에서는 살아있고 우리는 그것을 보는 것이며 세계의 다른 쪽에서는 죽어있고 우리는 또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양쪽에서 우리의 다른 복제판들은 각각의 사건을 보고있는 것이다.

양자론의 복수세계 해석에 이르면 불교적 깨달음의 세계와 일치하게 된다.

하나에 모두 있고 많은 데 하나 있어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이니

한 티끌 작은 속에 세계를 머금었고 

낱낱의 티끌마다 세계가 다 들었네.

한없이 긴 시간이 한 생각 찰나이고

찰나의 한 생각이 무량한 긴 겁이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이트 정보

상호.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대표. 김성규 사업자등록번호. 514-82-14810 [사업자등록, 법인등록정보 확인]
Tel)053-474-1208 Fax)053-794-0087 E-mail) tongsub2013@daum.net
주소 : 대구광역시 남구 두류공원로 10(대명동)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성규

Copyright ©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All rights reserved.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0
어제
0
최대
0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