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시공간에 대한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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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근본으로 하고 있는 깨달음이란 어떤 것인가?
깨달음이란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한번 살펴보자. 과연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은 무엇을 깨쳤는가?
임금으로 장래가 약속된 미래를 팽개치고, 윤기나는 검은 머리를 자르고 수행자의 길을 걸고자 결심한 태자 싯닷타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부처님의 고민은 왜 늙고 병들고 죽느냐? 하는 문제였으며, 이 고민으로부터 존재본질에 대하여 깨친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친 왜 늙고 병들고 죽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를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시간과 공간에 대한 문제로 직결됨을 알 수 있다. 결국 시간적으로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며, 공간적으로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일정한 형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허물어져 버리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3법인중 제행무상(諸行無常,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며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며 영원한 것은 없다)이라는 것은 시간적인 관점에서 존재본질을 바라본 것이며,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존재와 현상에는 어떤 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연에 의한 관계일뿐 나라고 하는 절대적인 것은 없다)라는 것은 공간적인 관점에서 존재본질을 바라본 것이다. 바로 부처님께서는 시공간적으로 존재본질을 꿰뚫어보셨던 것이다.
우리 인간의 인식의 바탕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표현하자면 시간과 공간이다.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때 까지 하늘을 쳐다보고 있어도 태양은 동쪽에서 뜨서 서쪽으로 지며, 금성이나 화성과 같은 이런 혹성들도 항상 일정하게 태양 주위를 돌고있다. 이와같이 일정하게 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우주의 흐름이 우리들이 느끼기에는 시간이라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형상을 갖고 있는 어떤 물체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으로 공간을 인식할 수 있으며, 형상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운행으로부터 시간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이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아인시타인의 상대론이 나오기 전 까지는 정지하여 있는 변화할 수 없는 절대공간으로 그 자체의 본성이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언제나 동일하며 정지상태를 계속하고 있는 절대적인 정지공간으로 인식하였다(유클리이드 기하학). 이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변화는 시간이라고 불리는 별개의 차원으로 묘사되었으며 시간은 물질세계와 아무런 관계없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일정하게 흘러가는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절대적이고 진정한 수학적 시간은 그 자신의 본성에 의하여 저절로 외부의 것과도 관계없이 한결같이 흘러간다.”라고 인식하였다.
현상과 상황의 이해에 따라 인식은 달라진다. 이에비해 불교의 특징은 진리 자체를 꿰뚫어 인식하는 것이다.
어느날 바라문교도가 부처님을 찾아와 여쭙기를 “부처님이시여, 당신은 모든 과보를 스스로 짓고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우리 바라문교에서는 어떤 사람이 비록 죄를 짓고 살았다 하더라도 죽을 때 우리 바라문교에 귀의하여 우리들이 그가 자재천(바라문교에서 말하는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기도하면 그는 그곳에 태어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당신의 가르침과 어떻게 다릅니까?”하고 질문하였다. 부처님은 조용히 일어나 바라문을 데리고 뒷편에 있는 연못으로 가 돌멩이를 하나 주워 던지면서 바라문에게 물었다.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예, 돌이 연못에 가라앉았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하기를 “ 그럼 너희 바라문들이 이 연못에 와서 주문을 외우면서 ‘돌아, 떠올라라.’하고 기도한다면 돌이 뜨겠느냐?”
“아닙니다. 돌은 뜨지않습니다.”
“바라문이여! 그와 같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악업을 지으면 그것은 무거운 돌멩이와 같아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며, 바른 생각을 하면서 착하게 살았다면 하늘을 날으는 구름처럼 그는 극락에 태어날 것이다.
바라문이여!
결국 누가 어떤 종교를 믿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곧 우주의 진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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