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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속의 과학, 과학속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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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8,262회 작성일 21-07-15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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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이라는 도덕적 기준을 토대로 하여 선정이라고 하는 종교적 체험을 통하여 혜(慧)라고 하는 생명 본래의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불교를 믿고 따르는 수행자나 신도들의 기본원칙이다. 계율에 철저하지 못하면 오히려 몇 생동안을 참선을 한다고 다리를 틀고 앉아 있어도 목적하는 바와는 정반대로 가슴 속에 탐욕만 가득 채우는 꼴이 되는 것이다. 조과선사와 백낙천의 대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고을 현감으로 부임한 백낙천이 평생을 나무 위에서 수행만 하고 있는 유명한 조과선사를 찾아가 불교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조과선사는 나무 위에서 “모든 선을 행하고 모든 악을 없애며, 자기자신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백낙천은 그것은 세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는 것이다라고 하니 조과선사는 “세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는 것이지만 팔십먹은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려운 것이네.“ 하였다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행위에 있는 것이지 말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불교의 본질은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뛰어남(지혜)과 순수함(자비)으로 나타낼 수 있다. 불교를 이루는 핵심은 깨달음(佛)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法), 그리고 깨달음을 성취하려고 애쓰는 수행자(僧)로 나눌 수 있다.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으로는 사성제의 실천을 들 수 있다. 사성제는 고(苦), 집(執), 멸(滅), 도(道)를 나타내며, 고는 존재 인식에 대한 근본 과제이다. 존재의 실상을 재대로 잘 파악하면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은 없으며(諸行無常), 허물어지지 않는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諸法無我) 것이다. 집은 고가 발생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영원(자신은 죽지 않는 것처럼)하다고 착각을 하고 절대적인 것이 있다고(자신이 축적하는 재산과 부와 같은 것을) 착각을 하는 것은 자신의 욕심과 어리석음 때문에 오는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멸은 고가 해결된 상태, 즉 현실적인 문제들이 극복된 상태를 나타낸다. 우리가 도달할려고 하는 이상적인 상태를 말한다. 도는 이상적인 상태가 되기 위한 실천방법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실천방법으로 오계를 지키도록 권하고 있다. 

나의 삶은 진리를 추구하는데 얼마나 철저한가?(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나의 삶은 청빈하게 사는데 얼마나 철저한가?(도둑질을 하지 말라)

나의 삶은 깨끗하게 사는데 얼마나 철저한가?(음행을 하지 말라)

나의 삶은 바르게 사는데 얼마나 철저한가?(거짓말을 하지 말라)

나의 삶은 생각이 깨어 있는데 얼마나 철저한가?(술을 먹지 말라)

이러한 계율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앉으나 서나, 세속에 있으나 세속을 떠나 있으나 그대로 선정에 들어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 갈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육신이라는 것은 아무 쓸데가 없고 부질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육신이 병이 들거나 허물어져 버리면 아무리 도를 이루고 싶어도 도를 담아 나타낼 그릇이 없으니 없는 것과 같아 도를 이룰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육신에 병이 들지 않도록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상처를 신중하게 다루는 것은 상처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낫게 하기 위한 것처럼 육신을 소중하게 다루는 것은 육신을 잘 다스려 도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육신의 병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므로 마음의 상태가 분명하다면 참선병은 생기지 않는다. 이번 생애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도를 이루겠다는 한 생각 뿐이라면 아무리 혼탁한 문명 속에 버려져도 참선병은 걸리지 않는다. 우리의 오관과 의식을 통하여 쌓이는 문제들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임을 알게 된다.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길을 가다가 선만 그려져 있어도 바둑판으로 보일 것이며, 돌만 보아도 바둑 돌로 보일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 눈에는 술집 간판만 눈에 띌 것이며,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서점만 눈에 띌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아무리 부와 욕망에 휩쌓여 있어도 진정 도를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산만 보일 것이며, 문명의 소음이 아니라 아름다운 새 소리만 들릴 것이다. 병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있다.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수만년 후에라도 세상은 그대로 세상일 뿐이다. 아무리 예토라도 내가 그 곳에 있음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며 나의 깨어있는 생각과 행위로 말미암아 그 곳이 정토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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