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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응스님의 유식특강

제28강 소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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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975회 작성일 21-08-0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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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강 소연문(7)



인을 친인으로 본 것은 의피전이라는 씨앗으로 인과 연

은 다릅니다. 인의 이름을 연으로 보는 것입니다. 인은 연

도 되고 인도 되는 동시에 연도 됩니다. 그것을 인연이라 

합니다. 연에는 증상연增上緣과 친인연親因緣이 있습니다. 

첫 번째 인연은 친인연으로 잡았습니다. 인연이 될 때 전체

의 80%는 증상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을 하나 붙여

준 것 뿐 다른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인이 곧 친인연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콩을 심을 때 토지인 땅, 사람이 물을 주는 

행위 등 콩이 자라는데 돕는 조건들을 증상연이라고 합니

다. 증상연은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먼저 여력與力이라 

고 하는 것은 힘을 주는 역할입니다. 사람의 힘이나 땅이 

전부 다 그런 힘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씨앗이 발아하고 

성장하는데 힘을 주는 것이 여력입니다. 더불어 ‘여與’자, 

힘 ‘력力’자로 여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장不障하는 것

도 돕는 것이 되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얘기 못하는 것입

니다. 다시 말해서 곡식을 심어 놓았는데 여러 번 태풍이 

불어서 그 곡식을 영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장도 증

상연으로 봅니다. 여력은 힘 주는 것으로 인연은 되지만 해

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돕는 것이 된다는 것

입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석하는 것입니다. 증상연은 

여력에서 종자는 친연이 되고 현행 팔식은 칠식에서 나오

는데 증상연이 됩니다. 종자는 친연이 되고 전체 현상은 증

상연이 됩니다. 팔식을 의지해서 낳는다는 말은 인연과 증

상연이 들어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연이 

일어날 때에 칠식이 도로 칠식이란 것은 무슨 말입니까? 

자체로 보면 견분이 됩니다. 제 팔식을 뜯어보고 ‘나’라고 

집착하는 것이고 소집은 제 팔식 견분이고 능집은 제 칠식 

견분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은 인연으로 인하여 반드시 내

가 있다는 것을 번연하는 것입니다. 


자성행상문自性行相門(7)


‘자성행상문’할 때 자성이라는 것은 당체를 두고 하는 소

리입니다. 자성은 당체로 행상은 당체가 행동하는 것입니

다. 이것을 사량식으로 번역하면 의식이라고 합니다. 뜻 

‘의意’자는 사량한다는 말입니다. 사량을 해도 항심사량恒

審思量입니다. 항과 심, 두 가지를 한다고 그랬습니다. 그

러니까 제 칠식은 항심사량이니까 사량하는 것으로 성性을 

삼고 사량하는 것으로 상相을 삼기도 합니다. 사량하는 것

으로 성과 상을 삼는 것입니다. 


심소상응문心所相應門(7)


제 5절에 가면 심소상응문이 나옵니다. 팔식에 상응하는 

식이 몇 개가 된다고 했습니다. 제 칠식에 상응하는 것은 4

번뇌입니다. 칠식은 네 가지로 번뇌하고 항상이라고 하는 

것은 잠깐이 아니고 늘이라는 말입니다. 늘 상응한다는 말

입니다. 같은 글자로 늘 상응한다는 말은 아치와 아견과 아

울러 아집과 아만과 아애를 일으키며 이것이 근본 심소상

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네 가지 근본번뇌와 상응하는 동시

에 결합을 합니다. 즉 상의집합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것을 우리 말로 표현한다면 --와, --과라는 접속사로 이

것과 저것을 잇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똑 같은 것으

로 안경과 분필이라고 하면 과라는 접속사로 다른 것을 의

미한다는 것입니다. 상의相依가 무엇인지 알겠지요? 상의

만 띄어놓는 것이 아니라 무엇과 무엇이 상의하는 동시에 

합하는 것도 되어 두 가지 뜻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상의집

합이 4번뇌이며 그 다음에 촉과 함께 하는 네 가지는 아치, 

아집, 아만, 아애로 이것의 실제 번뇌는 열 가지나 됩니다. 

열 가지 가운데 실재하고 상응하는 것은 네 가지 밖에 없습

니다. 네 가지를 든 것은 여섯 가지는 없고 촉과 나머지를 

둘로 보지 않습니다. 첫째 해석이 있고 둘째 해석이 있는

데 첫째 해석에서도 두 가지가 나옵니다. 네 가지는 상의집

합에 떼어놓은 것으로 4번뇌에서는 다른 것이 나오는데 여

타입니다. 그러면 뜻을 새길 때에 나머지 촉등이란 것은 촉

이 다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나머지 촉등과 같이 했

다면 이것은 앞에서 팔식 가운데 오변행에 든 것과 근본 4

번뇌와 합하여 아홉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촉등과 같은 뜻

으로 아홉 가지는 상응한다는 말입니다. 또 두 가지 가운데 

첫 번째 해석에서 두 가지가 나오고 둘째 해석에서는 네 가

지입니다. 나머지란 말은 팔식에서 상응하는 것으로 촉등

의 오변행이 여기서는 무부무기가 아닌 유부무기를 토대로 

해서 짤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첫째 해석의 두 가지는 네 가지 근본 번뇌 밖에서 

낸 나머지인 촉이 5변행에 나오고 4번뇌에서 합해 그것들

로 상응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제 팔식에서 촉이 야기

한 것으로 무부무기로 되어 있는데 듣는 것이 없어 그 자체

로는 못 듣는다고 합니다. 무부무기 밖에서 유부무기를 지

적해서 나머지를 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가지의 개

수를 보면 4번뇌와 5변행을 합해 아홉 가지입니다. 첫 번

째 나머지는 촉등이 되는데 무부무기와는 성질이 다릅니

다. 그래서 결국 아홉 개 밖에 안 되지만 아홉개 뿐만 아니

라 다른 것으로도 봅니다. 같은 페이지 아랫줄로 내려가면 

‘무부무기와 섭한다.’가 나오는데 만약에 그것을 가지고 촉

등을 무부무기로 본다면 두 번 중첩이 되는 것으로 맞지 않

습니다. 나머지 ‘여’자를 4번뇌의 근본으로 하고 촉등 5변

행이 있고 그 다음에 나머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연구만 했는데 딱 한 번입니다. 이 밖에 아홉 가지는 나머

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의 뜻을 새길 때 4번뇌하고 

상관이 있는데 이것은 아치와 아집과 아만과 아애와 상응

하니까 나머지의 촉등과 같습니다. 나머지 속에는 많은 의

미가 있습니다. 

다음 페이지로 넘기면 설명이 잘 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번뇌에 대해 네 가지 학설이 복잡하게 다 다릅니다. 나머

지를 가지고 다섯 가지로 생각하는 것도 있고, 여섯 가지로 

생각하는 것도 있고, 여덟 가지로 생각하는 것도 있고, 열 

가지로 생각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의 정의는 여

덟 가지가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아홉 개 외에도 

‘혜慧’가 들어가야 합니다. ‘혜’가 들어가면 열 가지가 되고, 

여덟 가지를 더 하면 열여덟 가지로 상응되는 것입니다. 유

부 삼성변에서는 팔종八種으로 합니다. 근본 ‘본本’은 네 가

지가 있었지만 5변행이 있었고 그 다음에 혜가 하나 더 있

습니다. 아홉 개에서 혜를 하나 더 보태어 열 개가 되는데 

여덟 개를 더 보태 십팔로 상응한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말했던 팔식에는 무부무기인데 칠식은 근본 염染

인 8염八染 중에 물이 들어 자기뿐 만 아니라 남을 해할 때

는 유부무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 칠식은 유부무기에 속

합니다. 자기라는 계에 속하며 세계로 즉 삼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욕계로 욕심쟁이가 사는 곳이란 말입니

다. 남한테 잘 할 줄 모르는 그런 것이 우리의 욕계입니다. 

사선천의 색계와 사천의 무색계는 어떻게 사는지 모양이 없

으니까 보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선정인데 선정을 좋아하는 

곳은 정과 혜를 겸한 것으로 색계입니다. 정이 겸한 것이 

선입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정만 닦는 것이 아니라 혜가 

나와야 선입니다. 선자는 정과 혜가 함께 하는 것이라고 했

습니다. 선禪자는 인도말로 선나禪那라는 뜻으로 인도말의 

음을 써놓은 것으로 의미가 없습니다. 즉 음을 써놓은 것으

로 터닦을 ‘선’자이지 임의로 써놓은 것은 아닙니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제대로 안 듣고 하느님이 시켜서 한

다고 했습니다. 천자가 봄이 되면 태산에 가서 제사를 지냅

니다. 제사 지내는 것은 백성의 뜻이 이렇다 하면서 대신 

혼자서 지내는 것입니다. ‘하느님 봐주세요.’ 하면서 제사 

지내고 백성한테는 하느님이 또 이렇게 명령을 했다고 하

는 것입니다. 정치도 수단으로 하늘에 고하고 또 하늘의 명

령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태산 밑에 운운산 정정산에 조그

마한 언덕이 있습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축을 쌓

아서 제사를 지내고 땅에 제사를 지낼 때는 땅을 깎습니다. 

이것은 추한 것을 없애는 형식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도 집에 금줄을 쳐서 사람을 못 들어오게 하며 향을 피우는 

것은 땅 위에 더러운 것을 없애고 노란 흙이 나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지신한테 제사를 지냅니다. 그것이 

터 닦는 것입니다. 봉선奉禪이라고 할 때에 선이란 터 닦

는 것인데 동일한 축을 쌓는 것을 봉건이라고 합니다. 그러

므로 봉건제도에 선이라고 하는 것은 터 닦는 것입니다. 이

것은 인도 말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인도말에

도 선나라는 것이 있으니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착할 ‘선’

자를 써도 해로울 것이 없고 또 ‘오’자가 생각나는 것은 섬

나라 일본의 ‘오또상’으로 우리말로 ‘오’자를 쓰고 ‘또’자를 

써도 일본 말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중국 제자制字

의 원리인 육서六書를 보면 가차와 전주로 이것은 이에 사

용하는 글자의 음을 빌려서 표현하는 것 뿐입니다. 이것이 

가차문자假借文字입니다. 육서 가운데 선이라는 것은 인도

말로 정定과 혜慧의 통합입니다. 정과 혜를 한 몸에 합하는 

것을 선이라 하며 선방의 참선하고는 상관없다는 것을 알

아야 합니다. 선하는 것에 책임을 넘기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이나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제정일치였습니다. 

제사 지내는 것과 백성에게 정치하는 것이 둘이 아닙니다. 

제사 지내는 책임이 정치하는 것이고 정치하는 책임이 제

사 지내는 것입니다. 일본말로 정치하는 것을 ‘마쓰리’라

고 하는 것도 똑 같은 말입니다. 제사 지낸다는 소리입니

다. 제사 지내는 일이 백성 다스리는 일입니다. 팔공산은 

신라 때 제사 지내는 산으로 중국의 태산과 마찬가지로 나

라의 산으로 제사 지내는 산이라는 것입니다. 심지법사는 

팔공산 동화사의 스님인데 신라왕족 출신입니다. 중악中

岳(경상도성의 팔공산을 가리킴)에 우거하고 있을 때입니

다. 마침 속리산의 영심永心대사가 진표율사의 불골간자佛

骨簡子를 이어받아 과증果證 법회를 개설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 갔으나 이미 기일이 지나 법회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

다. 그리하여 그는 마당에 꿇어 앉아 예배하고 참회하였습

니다. 그렇게 칠 일을 지내는 동안 큰 눈이 내렸지만 심지

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사방 10척에는 눈이 휘날리면서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승려들은 신이神異하게 여겨 당堂

에 들어오기를 허락하였으나 심지는 병을 구실로 사양하면

서 여전히 마당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문득 팔꿈치와 이마

에서 피가 흘러 마치 진표율사가 선계산에서 피흘리던 일

처럼 지장보살은 날마다 찾아 와 위문하는 것이었습니다. 

법회가 끝나고 산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그는 깜짝 놀랐습

니다. 자신의 옷섶 사이에 두 간자가 끼어 있는 것이었습니

다. 영심대사에게 돌아가 아뢰니 영심대사는 말했습니다. 

“간자가 함 속에 있는데 어찌 그럴 수 있는가?”

확인해 보았더니 함은 그대로이고 간자는 보이지 않았습

니다. 

영심대사는 이상하게 여기면서 간자를 겹겹이 싸서 감추

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심지는 떠나갔습니다. 심지대사가 

도중에서 보니 또 먼저와 같았으므로 다시 영심대사에게 

되돌아갔습니다. 영심대사는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부처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 뜻을 받들라.”

심지는 그것을 머리에 이고 산으로 돌아왔으며, 산신이 

두 선사와 더불어 그를 맞이하여 산꼭대기로 인도하더니 

그 아래 엎드려 삼가 간자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심지는 말

했습니다. 

“이제 땅을 가려 부처님의 간자를 모시려 한다. 이는 마

땅히 우리들이 정할 일이 아니니 그대들은 나와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가 간자를 던져 계시를 받도록 하자.”

그들과 함께 산정에 올라 서쪽을 향해 간자를 던지니 간

자는 바람을 따라 날려갔습니다. 신령들은 노래로 회답하

였습니다. 

가렸던 바위가 멀리 물러나 숫돌 같이 편편해지고

낙엽이 날아 흩어지니 앞이 밝아지누나

불골 간자를 찾아 내어, 

정결한 곳에 모시고 치성을 하리라. 

노래 부르기를 마치고 숲속의 샘에서 간자를 찾아 그곳

에 당을 지어 모셨는데 지금 동화사桐華寺(팔공산에 있는 

절) 참당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그곳입니다. 팔자간자는 

구자간자의 본분이고 팔자간자를 개수로 치면 안됩니다. 

공산에다가 팔자를 하나 더 올려서 팔공산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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