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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응스님의 유식특강

제24강 정법안장 열반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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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3,663회 작성일 21-08-0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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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강 정법안장 열반묘심



그러니 답답할 것이 아닙니까? 그 때서야 지나온 과거

를 돌아보니 그 동안 스님 시봉하고 대중 바로잡느라 공부

를 못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자를 앞에 세워놓고 “내

가 허랑방탕해서 공부를 못 한 것이 아닙니다. 염라국으로 

가는 것은 이생에서 마지막입니다.” 그러니까 스님 시봉과 

대중 뒷바라지를 하다가 이렇게 되었으니까 좀 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인 염관스님의 법문을 들어보니 칠 일

만 목숨 걸고 공부하면 무슨 수가 난다고 하니 나를 잡아가

도 칠 일 후에 잡아가면 어떻겠느냐고 사자에게 사정을 합

니다. 그러자 사자가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 이것은 내 마음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같

으면 그러겠는데 나는 심부름꾼이라서, 명령을 따를 뿐이

라고 합니다. ‘내가 마음대로 하기가 곤란하다’고 하면서 

사자는 염라대왕께 가서 말하고 허락을 하면 칠 일 후에 다

시 올 것이고, 허락을 안 하면 갔다가 바로 올 것이라고 합

니다. 그러자 스님은 그 자리에 앉아 ‘이 뭣고’ 화두를 들었

습니다. 

지난 시간에 얘기했듯이 바늘 귀에 실이 쏙 들어가듯이 

‘이뭣고’에 빠져버렸습니다. 7일까지 갈 것도 없이 그 자리

에서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몸뚱이가 사라지고 없

다는 것입니다. 염관스님의 시자가 법당 옆에서 호랑이 같

은 저승사자를 보고 깜짝 놀라는 것은 내가 남아있으니까 

놀라는 것입니다. 내가 없어지면 놀랄 것도 없습니다. 그

래서 헛것을 보는데 공부를 하면 절대 헛것이 안 보입니다. 

남한테 무엇을 해도 예사로 알고 자기한테도 예사로 여깁

니다. 거기에 대해서 미련이 남고 하는 것이 없어져버립니

다. 그것은 바늘 귀에 실이 쏙 들어가듯이 화두 일념으로 

쏙 들어간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합해버렸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림자도 없고 자기라는 것도 없어져버립니다. 마

침 사자가 염라대왕에게 가서 얘기를 하니까, ‘딱하게 됐구

나. 칠 일 후라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하면서 염라대

왕이 칠 일을 봐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칠 일 후에 사

자가 다시 와서 그 시자를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습니

다. 그렇게 공부를 해야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얘기가 있습니다. 파계사에 성전스님이라는 분

이 계셨는데 열반에 들기 몇 해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벌

써 수십 년 전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파계사에서 함께 있

었던 주몽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이상하게 성전스님의 머리

가 없어지고 팔이 없어지고 몸뚱이가 없어지고 그리고 몸

이 사라졌습니다. 완전히 마음도 몸뚱이도 없어지고 사라

져버린 것입니다. 무아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성

인의 학설에 분명히 나오는 사실입니다. 첫째 우리는 깨치

지를 못해서 식이 생기면 색경이 생기는데 그것이 사라지

면 없어져버립니다. 나라는 것은 그것이 표준이 되니까 자

타가 생기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는 자타가 생기고 시간

적으로는 고금이 생기는 것입니다. 고금과 자타가 없는 그 

자리에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 똑 같은 것으

로 내가 해석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법문하실 때 아난이 늘 따라다니며 궁금해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세존께서 ‘정법안장 열반묘심’을 가

섭한테 전해주었는데 그것은 무슨 물건처럼 주는 것이 아

니므로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한 것입니다. 아난은 세존이 

정법안장 열반묘심을 가섭한테 전했다는데 그것이 아무리 

보아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난은 사형

에게 물었습니다. 세존께서 정법안장 열반묘심을 형님한테 

전했는데 그것을 형님이 가졌으니 저에게 좀 줄 수 없습니

까? 하니까 ‘그것은 어렵지 않다. 알고 보면 매우 쉽다.’고 

합니다. 

문 앞에 세우는 찰간은 요즈음 말로 하면 깃발인데 절 앞

에 가면 절을 상징하는 찰간을 세워놓습니다. 이것은 임제

종이다, 조계종이다, 염불종이다 하는 상징을 진대라고 합

니다. 일본사람은 일본깃발을 세우고 한국사람은 한국깃발

을 세우듯이 합니다. 종파에 따라 제 각각 다른 그것이 찰

간입니다. 그것을 세워놓는 것입니다. 그 때도 아마 그것

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난에게 ‘저 문 앞에 가서 찰간을 

일으키고 오너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소린 지 여러

분은 알겠습니까? 아주 쉬운 소리입니다. ‘너 속에 뾰족한 

것이 서 있는데 그것을 내놓아라’는 것입니다. 그 놈을 없

애야 알아듣는 것입니다. 정법안장은 받는 것과 전하는 것

인데 그것을 없애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

을 ‘화두를 타파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부터 가지

고 있는 아집이 있습니다. 자타에도 물론 아집이 있습니

다. 병이 된 아집을 가지고 있으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집이 남아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문사에서 

가르치는 것을 중단하고 여기 와서 이 강의를 들으라고 하

였던 것입니다. 자타는 없는 것인데 자꾸 나라는 것을 부

르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면 자타가 없습니다. 근

경이 없어졌는데 자타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근경

이 없어지므로 공간적으로 자타가 없고 시간적으로 고금이 

없는 자리입니다. 자타가 있으면 능소가 있게 됩니다. 그

래서 내가 있고 능소가 있는 것입니다. 알음아리로 풀기는 

쉽습니다. 공부한다는 것은 알음알이를 떼어내는 작용인데 

여러분이 아집을 가지고 있으면 알음알이가 늘어납니다. 

그것이 법집인데 잘 못들으면 병이 되고 잘 들으면 약이 되

는 것입니다. 약과 병이 둘이 아니라 약병의 합으로 약과 

병을 서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석두스님 제자로는 도오와 유엄이 있는데, 유엄이 처음

에는 마조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중국에서 처사로 유명한 

사람이 바로 방거사입니다. 방거사가 처음에는 석두스님한

테 배우다가 마조스님을 찾아간 모양입니다. 석두스님에

게 ‘우주만법과 벗 삼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를 물었

습니다. 그러자 석두는 손으로 입을 가렸습니다. 방거사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고 마조를 찾아갑니다. 마조스님을 

뵙고 방거사는 석두스님에게 했던 질문을 다시 던집니다. 

‘우주만법과 벗 삼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니까 ‘서

강에 가서 한 입에 서강 강물을 다 마시고 오너라. 그러면 

가르쳐 주마.’ 하였습니다. 이것은 지혜로 아는 것이 아닙

니다. 마시는 놈이나 마시는 물이나 마시는 입인 능소가 없

어집니다. 능소가 없어지면 그것은 만법으로도 안 되는 자

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가 되면 천칠백 공

안을 다 알게 됩니다. 천칠백이라도 그것은 둘이 아닌 똑 

같은 소리입니다. 잘 하면 덕이 되는데 잘못 받으면 병이 

되는 것입니다.

백장스님에게 하루는 어떤 도사가 불쑥 찾아왔는데 머리

카락도 길고 수염도 길게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대는 뭐 

하는 사람이오?’ 하니까 지리를 잘 본다는 것입니다. 좋은 

곳이 있느냐고 물으니까 좋은 곳이 있는데 천명 정도 살 만

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대위산이라

는 곳이라고 합니다. 위산이 그곳에 살았기 때문에 위산영

우가 되었지 처음부터 위산이 아닙니다. 신령 ‘영靈’자 도울 

‘우祐’자를 쓰는 영우입니다. 아 그렇게 좋은 곳이 있으면 

내가 가면 어떻냐고 묻자 ‘스님은 안 됩니다.’ 스님과 터가 

안 맞다는 것입니다. 흙의 기운을 가진 사람은 살 수있지만 

스님처럼 뼈의 기운을 가진 삐쩍 마른 사람은 못 산다는 것

입니다. 뼈의 기운을 금치라고 하고, 흙의 기운을 토치라고 

합니다. 그러면 많은 제자들 가운데 누구를 보내면 되겠는

가 하니 토치를 보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합당한 사

람이 영우였습니다. 영우를 보내겠다고 작정을 했습니다. 

그 당시 하림선각이라는 스님이 입승을 보고 있었는데 빛날 

‘하賀’자 수풀 ‘림林’자 착할 ‘선善’자 깨달을 ‘각覺’자의 하

림 선각이었습니다. 입승인 하림 선각은 방장스님 다음으로 

자기가 제 2인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입승인 자기를 

놔두고 영우를 위산으로 보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툴툴 

거렸습니다. 그러자 백장스님은 그 불경한 놈의 불평을 풀

어야 될 것이 아니냐 하면서 하림 선각을 불렀습니다. 저녁

을 먹고 영우와 하림을 불러놓고 내가 한마디를 일러서 그

대들중에 정답을 말하는 사람을 위산으로 보내겠다고 한 것

입니다. 물을 마시는 병을 정병이라 하는데 정병을 갖다 놓

고 먼저 하림한테 물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림의 대

답은 ‘물병이라고 해도 맞지 않다.’고 합니다. ‘이쪽으로 나

오너라.’하여 하림을 제쳐놓고 영우를 불렀습니다. ‘너 이거 

보고 한마디 일러보라.’ 하니까 발로 툭 차버리는 것입니

다. 그러자 하림을 보고 이것만 봐도 네가 못하지 않느냐? 

하면서 영우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개산을 한 첫해부터 10

년 동안은 개미 한 마리도 안 옵니다. 10년이 지나니까 꾸

역꾸역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금새 이천 명으로 늘어난 것입

니다. 그곳의 땅을 개발하고 농사를 지으려니까 소가 필요

해서 절에서도 소를 길렀던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10년은 해 보고 그만두어야 

합니다. 10년을 하면 뭘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직지사가 

대번에 이렇게 커진 것이 아닙니다. 주지스님이 젊을 때부

터 해 놓은 그 힘으로 수십 년을 거쳐 이렇게 된 것입니다. 

보통 근기로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근기는 수십 년

을 해 봐야 아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든지 한 가지를 수십 

년을 하면 근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청소를 하더

라도 10년은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못한 여우도 

오래되면 둔갑을 한단 말입니다. 저 물가에 사는 뱀이라는 

놈도 물가에서 가만히 뭘 지키고 앉았으니 거기서 여의주

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공부를 하다가 안 된

다고 집어치워야 되겠습니까? 오늘 화두가 안 들린다고 내

일 바꾸면 안 되는 것입니다. 

중국의 소동파가 왜 잘났는지 알아요? 한 가지만 잘 일

렀습니다. 소동파의 집은 부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문장

이 되려면 곤궁해야 되고 곤궁한 가운데 문장이 나온다고 

했는데 소동파는 원래 부자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한 집에 

칠대 이상 이십 가구가 함께 살아갑니다. 구세동인가 하는 

사람도 하여간 식구들이 한 울타리 안에 살았는데 식구가 

수백 명, 수천 명이 됩니다. 그래서 중국에 가면 장가구, 

장가 하는데 장가구에는 입 구口자가 들었는데 식구가 수

십 명에서 수백 명이 한 울타리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

서 가족이 수백 명이 되니까 집을 지을 때도 수백 명이 짓

습니다. 그래서 각자 배당을 합니다. 또 한 울타리 안에 어

른이 수십 명 살고 있습니다. 닭이 처음 울면 일어나서 젊

은 사람들이 세수를 하고 각 방의 어르신들한테 인사하러 

다닙니다. 그것이 소학의 공부입니다. “닭이 울면 일어나

서” 어른께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수백 명이 사니까 집을 

크게 지어서 이 사람 맺고 저 사람 맺고 해서 아들을 낳고 

딸을 낳으니 한가족이 되면서 어른들한테 인사드리고 하는 

것이 소학의 가르침입니다. 

선방에 가서 공부 많이 했으니까, 마을 사람들은 그런 얘

기를 못합니다. 그런 큰 집에서는 햇살을 잘 받도록 남쪽으

로 틔고 북창을 낸 방이 많아 세를 놓습니다. 맹자 어머니

가 삼천지교를 했습니다. 맹자를 기를 때 그 어머니가 세 

번 이사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묘지 근처에서 살았는데 어

린 맹자는 늘 보는 것이 송장 묻는 일 밖에 보지를 못했습

니다. 그래서 맹자가 그런 일을 흉내 내니까 어머니가 여

기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시장 쪽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런데 이번에는 장사하는 것을 자꾸 흉내내고 놉니다. 여기

서도 자식 기를 곳이 못된다 해서 수십 명의 가족들이 사는 

큰집에 세를 들어 살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북쪽이나 

서쪽으로 틘 그런 그늘진 곳에서만 셋방을 얻게 됩니다. 하

루는 주인집에서 돼지를 잡았습니다. 어린 맹자가 어머니

께 돼지를 왜 잡느냐 물었습니다. 내가 어릴 때는 우리 형

님한테 소학을 배웠는데 ‘동쪽 집에서 돼지잡는 것을 물었

다’ 이렇게 배웠습니다. 동쪽으로 창을 내고 남쪽으로 창

을 내는 것은 주인집인데 주인집에 돼지 잡는 것을 물었다

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물으니까 맹자 어머니가 ‘너 줄려고 

잡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맹자 어

머니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자식을 속였단 말입니다. 그

래서 거짓말을 가르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집올 

때 받은 은반지 패물을 팔아 돼지고기를 사서 맹자에게 먹

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교육을 했다는 것입니다. 

소동파의 어머니 정씨는 외출을 할 때마다 아들에게 글

을 가르쳐 주면서 자꾸 읽으라고 했습니다. 한 3,4년을 그

렇게 읽었던 모양입니다. 한 자리에 앉아서 밥먹을 땐 밥 

먹고 똥 오줌 눌 때는 누고 나머지는 그대로 글을 읽어라고 

했더니 어느 날 아이가 없어져버렸습니다. 소동파가 없어

진 이유는 아버지가 소동파에게 ‘넌 그렇게 아는 것이 없느

냐?’ 하니까 아들은 엄마가 한 가지만 자꾸 읽어야 된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어디를 가도 한 

가지밖에 아는 것이 없고 또 아버지도 안 가르쳐주지 않았

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동파는 다른 글이 있는 줄도 몰

랐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화두도 하나만 가지고 하면 되

는데 다른 화두가 있는지 알면 이것저것 자꾸 생각하게 됩

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소동파에게 서고에 도서집이 있는

데 가서 보라고 합니다. 서고에 있는 수 천권 장서 중에 한 

권을 빼서 읽어보았던 것입니다. 그 책을 읽고 또 읽고 하

였습니다. 책 읽는 삼매에 들면 저녁이 되고 어두워도 어두

운 것을 못 느낍니다. 우리나라에서 글 잘쓰는 추사 김정희

에게도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다시 소동파로 돌아가서 어

두운 것을 못 느끼기 때문에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 계속 되는 것입니다. 환한 생각 그대로입니다. 이것

도 공부할 때 오래 참고 반복될 때 하는 소리입니다. 며칠 

동안 글만 읽고 있는 것입니다. 집안에는 식구가 많으니까 

누가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제서

야 아버지는 아들이 생각난 것입니다. 서고에 가보니까 아

들이 거기 앉아서 여전히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랍니다. 이 순간 어두운 것이 침범하게 되는 것입니

다. 생각을 바로 가지고 바로 깨치면 환한 것 뿐입니다. 소

동파의 아버지는 그때서야 부인 때문에 일을 저질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십 년이나 모르고 앉았으면 만권

권자를 만들었을 것인데 겨우 천권권자 밖에 못된 것입니

다. 비록 십분의 일 밖에 안 되지만 그랬다는 얘기가 있습

니다. 본래 재주가 있으니 소동파의 글들이 지금까지도 그

렇게 읽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소동파의 동생인 소철의 문장도 대단합니다. 소철의 나

한찬을 한 번 볼까요. 나한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글로써 그린 것입니다. 

하납반견이요도霞衲半肩而樂道 설미부안이관공雪眉覆眼

而觀空이라. 반쪽 어깨에 저녁노을을 받아 즐기면서 백설 

같이 흰 눈썹은 눈을 덮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납이라

는 것은 뿔을 달고 나오는데 나한의 가사로 나한을 빗대는 

것입니다. 하납을 한쪽 어깨에 척 걸쳐놓고 말입니다. 여기

서 나타낸 것이 나한입니다. 달이 밝은 소나무 밑에서 ‘설

미부안雪眉覆眼’이라. 눈같은 눈썹 즉 하얀 눈썹이 눈을 덮

었는데 공을 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글이지요?

자 다시 위산 영우 이야기로 돌아가서 위산에게는 제자 

앙산이 있었는데, 앙산이 하루는 동쪽 언덕 밑에서 농사짓

는 소를 먹이는데 어떤 청년이 헐떡거리면서 어디로 가고 

있었습니다. 돌아갈 귀歸자 참 진眞자를 쓰는 귀진이라는 

청년인데 조금 있다가 다시 내려갑니다. 앙산이 소풀을 먹

이면서 보니 이상해서 ‘여보게, 젊은이.’하고 불러서 무엇 

때문에 왔다가느냐 하니까 청년이 말하기를 서로 기연(문

답하는 것)이 맞지 않아서 간다고 합니다. 어떤 사실이 있

길래 그러느냐 하니까 내가 집안으로 쑥 들어가니까, ‘너

는 어디서 왔느냐’ 하고 묻길래 어디서 왔다고 주소를 말

했습니다. 그 다음은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길래 귀진

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귀진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데서 

콱 막혀버렸습니다. 그래서 대답을 못하고 그냥 내려갑니

다. 그 때 앙산스님이 내려갈 것 없이 내 시키는대로 한 번 

해보라고 합니다. 귀진이는 뭔가 눈치를 챘습니다. 그래서 

귀진이가 뭐냐고 물으면 입에도 가득찼고 눈에나 귀에나 

코에도 가득 찼다고 하니까 이것은 ‘네 말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방장스님은 금방 알아차려버렸습니다. 그런데 귀진

이는 자신이 한 말이라고 하니까 방장스님이 이 놈을 쳐야

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귀진은 큰일났음을 알고 ‘제 말이 아

닙니다.’ 하니 ‘이놈아 이건 너의 말이 아니라 천명을 지도

할 조사스님의 말이다.’ 라고 했습니다. 대원경지에 들어오

면 환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기도 나고 저기도 나

는 것인데 전체적으로 대원경지가 통해서 우주에 꽉 찬 기

운이 되면 몸 속에 들었다는 생각인 아집이 벗겨져버립니

다. 그러다가 나중에 자기모양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이야기 하나 더 하겠습니다. 남전스님이라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시주를 나가면 그 날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몇 천 명이 날마다 시주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옵니

다. 그래서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어서 농사를 짓기 시작

했습니다. 중국 상주에 가면 양산마루라는 지명이 있습니

다. 용산 밑에 있는데 회양산 봉암사 땅이 거기까지 뻗쳤다

는 것입니다. 마름이라고 하는 직분은 땅을 관리 하는 사

람입니다. 땅을 마루라고 하고 땅을 관리하는 사람을 마름

이라 합니다. 그런데 양산마루가 있는 곳의 봉암사 땅

이 지정국사가 기거할 때 그 땅이 있었습니다. 그 때 남

전스님은 어디든지 농사를 지으면서 농막을 만들었습니

다. 한 번은 농막을 찾아갔다가 들어간지 얼마 안 됐는

데 차장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농막에 차장

이 있을 리가 없어 물으니까 ‘스님이 오실 줄 알았습니

다.’ 하는 것입니다. 간밤에 도량을 지키는 토지신이 스

님이 온다고 미리 보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 참’ 하면

서 땅을 탁 치며 한탄하는 것입니다. 산승이 수행하는데 

힘이 없어서 토지신에게 띄여 탄로가 난 것입니다. 자기

가 올 것을 미리 안 것입니다. 공하여 없어지는 것인데 

그만 토지신 눈에 띄어서 재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

서 글귀를 하나 써주었습니다. 산승의 수행이 약해 토지

신이 엿보는 것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탄하면

서 땅을 친 것입니다. 조금만 수행하면 남한테도 안보이

고 자기 자신에게도 안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말 할 때

나 행동할 때 남들과 부딪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한

테 해로운 소리 안하고, 옆에 누가 사는지 안 사는지도 

구별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어야 수행입니다. 우리가 

미숙할 때는 남을 상하게 하는 말이 나오고, 행동만 하

면 남한테 거슬리는 짓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된

다는 것입니다. ‘참선 수행이 무력하여, 이 몸뚱이의 행동

이 토지신의 눈에 띄도다.’ 그렇게 자탄을 했던 것입니다. 

중국 선방에서는 조실스님이 아침이 되면 밥을 먹고 바

루를 묶어놓고 조참을 합니다. 저녁엔 만참을 하고 때때

로 소참이라고 해서 법문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안 합

니다. 절마다 그것을 해야됩니다. 불입문자라 해도 방향을 

지시해서 가르쳐야 공부가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안 하면 막막하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든 여러분이 공

부를 잘 해야 합니다. 문제는 유식을 공부한다고 시작했는

데 마치 염소고기 파니까 오라고 한 꼴이 된 것입니다. 그

런데 내용은 개고기도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잘만 받아들이면 개고기를 파는데 염소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이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나는 ‘바담풍’ 하더라

도 여러분은 ‘바람 풍’ 해야합니다. 여러분이 잘 받아들여

주기를 부탁하면서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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