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강 유식과 화두 > 관응스님의 유식특강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관응스님의 유식특강

제20강 유식과 화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3,045회 작성일 21-08-03 14:51

본문

제20강 유식과 화두



근신·기계에서 각수覺受를 내는 품과 밀가루를 물과 섞

어 밀가루 반죽을 만드는 것을 안위공동安危共同이라 합니

다. 몸도 그렇습니다. 몸도 상황에 따라서 편안한 것이 아

닙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몸은 나와 운명을 같이 합니다. 

몸이 없으면 내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을 안위공동이라고 합니다. 팔식하고 오근은 떠날 

수 없는 사이이기 때문에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써놓

은 것입니다. 또 팔식하고 몸은 같이 있지만 몸이 물질이기 

때문에 감각을 내지는 못합니다. 죽기는 동시에 하지만 팔

식이 근으로 하여금 감각을 내게 한다고 해서 그것을 능생

각수能生覺受라 합니다. 능생각수와 안위공동은 범위가 다

르기 때문에 능생각수는 유근신인 몸만 집수가 됩니다. 안

위공동 편으로 봐서는 종자種子와 기세간器世間은 말짱하

니 안위공동을 같이 합니다. 산하대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

았습니까? 다음 페이지를 넘겨 설명을 다 읽어보십시오. 복

잡해서 머리 식히기 위해서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어제까지 이야기에는 우주전체가 벌어진 것 같았지만 

그것은 혼미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미迷하면 팔식과 5위 

100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식연기라는 것은 마음으로 

연기하는 것입니다. 진여가 연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

윤회를 받는 것은 망妄입니다. 망이란 결정권이 있는 임금

자리가 아니고 그냥 따르는 머슴자리로 모르는 것이 망입

니다. 망은 무명연기로 진여연기하고는 다릅니다. 종합적

으로 망이 연기하는 것입니다. 진여는 연기하는 것이 아닙

니다. 원성실성은 아무리 망을 해도 진여일 뿐입니다. 벌

레가 아무리 망을 해도 원성실성은 그대로입니다. 원성실

성을 모르기 때문에 의타기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사윤회하는 것은 원성실성이 아니라 식으로 하는 것입니

다. 원성실성을 깨닫지 못하면 생사윤회하게 됩니다. 원성

실성을 아는 것은 각이고, 원성실성을 모르는 것은 망입니

다. 망이라는 것이 기신론에도 나오는데 무시무명無始無明

입니다. ‘시始’자는 시간론으로 ‘처음’이란 뜻이 아닙니다. 

무시란 비롯함이 없다, 바탕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콩가루

를 쪼개도 콩가루뿐인 것이 바탕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은 마음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무시무명은 기신론에

서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진眞을 모르기 때

문에 생긴 것입니다. 원성실성에서 ‘원’은 공간적으로 퍼져 

어디라도 사무치는 것을 말하며, 시간적으로 생멸을 떠나

서 불멸하는 것은 허공과 같다고 했습니다. 원성실성은 진

여자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무명이라는 것은 시간적인 것

이 아니라 어두운 기운은 뿌리가 없이 나오는 것으로 모른

다는 의미입니다. 바탕이 있는 것이 아니라 허깨비라는 것

입니다. 무명은 실상이 아니므로 뼈다귀가 있는 것이 아니

라는 것입니다. 뼈다귀가 없다는 것은 무명이라는 뜻입니

다. 양반도 양반노릇을 하려면 양반 뼈다귀가 있어야 양반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송을 쓸 적에 무수호손無

首猢猻을 말하는 것으로 5위 100법은 근본이 없고 깨달음

이 없는 무명으로 인한 것입니다. 머리 없는 원숭이가 거꾸

로 기어간다는 것이 무시무명입니다. 선가에 나오는 내용

도 똑 같습니다. 무명이 체가 아니지만 무명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저 미꾸라지 꼬리에서 행동을 하는 것과 같습니

다. 하늘에 날아다니는 솔개도 그렇게 행동합니다. 어디든

지 유상무상에 꽉 차 있는 것이 원성실성입니다. 어디를 가

든지 실속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꽉 찬 놈이니까 자꾸 찾으

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중간에 잘못되어

도 화두를 들면 됩니다. 마조스님이나 회양스님은 그런 짓

을 하지 않았습니다. 냉정하게 보면 글을 아무리 많이 안다 

해도 우리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알기 어렵습니다. 내가 초

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로 사람이라는 것은 

생물이기 때문에 먹기도 해야 되지만 잠도 꼭 자야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산승도 팔십이 되도록 8시간 안 자면 찝

찝합니다. 생물이 잠을 자거나 밥을 먹거나 옷으로 따뜻하

게 한다고 해서 원성실성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십 년을 앉아서 참선을 해야 여덟 시간 안 잔 것과 똑같습

니다. 공부하다 보면 순간에 깨칠 수가 있습니다. 

중국의 마조스님의 성이 마씨입니다. 강 서쪽에 살았는

데 하루는 제자 백장과 함께 강가를 걷는데 그 때 마침 오

리가 날아갑니다. 저게 무엇이냐? 하고 마조가 백장에게 

묻습니다. 저것은 오리인데 날아가서 안보입니다. 마조가 

백장의 코를 탁 잡아당기니까 ‘아야’ 합니다. 그 순간 깨쳐

버립니다. 무명 속에 꽉 차 있는 것을 다 알게 됩니다. 이

것을 깨친다고 표현합니다. 무명을 깨는 것이 깨닫는 것입

니다. 깨치면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안 보이는 것입니

다. 십 년을 앉아 있어도 깨친 스승을 만나야 됩니다. 내가 

십삼 년을 장좌불와를 했습니다. 저 남산에 있는 돌보다 내

가 더 오래 앉았다는 것입니다. 바늘귀에 실을 꿰는데 쏙 

들어가면 그만인데 안 들어가면 헛손질을 계속해야 합니

다. 결국 깨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십 년, 이십 년을 앉아 

있어도 못 깨치면 똑같은 것입니다. 앉아 있어도 소용이 없

습니다. 

고씨 성의 남자와 장씨 성의 남자가 염소를 먹이는데 고

가는 바둑을 두다가 염소를 잃어버렸고 장가는 책을 읽다

가 염소를 잃어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책을 읽다가 염

소를 잃어버린 것을 바둑 두다가 잃어버린 것보다 더 동정

을 합니다. 그러나 염소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똑 같은 것

입니다. 결국 10년이고 20년이고 앉아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불교는 스스로 깨치는 것을 주장합니다. 마조스님은 젊

었을 때 아침부터 한 자리에 앉아 부처가 되려고 참선을 했

습니다. 이 때 남악 회양선사가 마조를 찾아옵니다. 참선

하고 있다가 나오는 마조를 보고 큰 돌에 벽돌을 갑니다. 

마조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

들려고 한다’고 하니 마조가 피식 웃으며 ‘벽돌은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때 회양선사가 

‘그러면 앉아 있는다고 부처가 되느냐’고 한마디 던집니다. 

생명을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온전히 오지도 못하고 받지

도 못했습니다. 깨치는 것은 바로 사는 자리입니다. 사는 

자리가 되면 전체가 없어지는 것으로 안 보이는 것보다 드

러나질 않았는데 전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

처님은 가까이 있는 몸인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을 죽이고 있습니다. 깨치지 못하면 생

명이 없습니다. 깨우쳐야 정신을 살리는 것입니다. 천지만

물 가운데 드러나서 어디 가도 사는 기운이 나옵니다. 사는 

기운을 깨치니까 저 놈은 어떻게 깨는지를 알게 됩니다. 도

를 알아야 합니다. 활구를 써서 ‘뜰앞에 잣나무’가 되는 것

입니다. 그 때는 책을 보거나 유식을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

다. 나를 때려서 깨닫게 하는 방법으로 방과 할로 그 사람

한테 암시를 주는 것입니다. 화두라는 것이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뒤에는 화두가 그 사람한테 드물게 터질 수도 있

습니다. 대부분 나이가 들어 조사는 되었지만 자기소리가 

안 나옵니다. 활구소리가 안 나옵니다. 옛날 스님들이 그

렇게 했는데 여러분도 해보십시오. 공부가 안되면 살아있

는 기운인지 죽은 기운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 사구가 있습니다. 고려 말 태고 보우 스님은 대단한 

도인입니다. 사는 기운을 찾는 것이 전부입니다. 원성실성

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근경식을 터트리면 유식을 연구

하고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바로 못하

면 바닷가에 가서 모래알 세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짓을 하면 안되지요. 제대로 공부를 해야 됩니다. 모

래알 세는 것이 뭐가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자기에게 맞는 

것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야 합니다. 남의 일 하면서 도둑질

하고 살면 되겠습니까? 자기 일을 해야됩니다. 

중국의 오대산은 유명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가보니 아

무것도 아닙니다. 나무가 없는 벌거벗은 민둥산입니다. 나

무가 없으니 물도 없는 그런 산중이지만 문수보살이 있다

고 그랬습니다.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있다고 해서 밤에도 

쉬지 않고 계속 걸어 몇 천리를 찾아갔습니다. 도중에 행인

에게 문수보살이 정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행인

은 확인해줄 테니까 대신 심부름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몇 

천리를 왔지만 심부름을 해줬습니다. 대문 있는 집에 돼지

를 길렀는데 그 돼지에게 쪽지를 갖다주라는 것입니다. 그

래서 문수보살이 있다고 믿고 찾아 갔습니다. 어느 부자집 

대문 옆에 돼지가 있는데 암돼지로 황소만 했습니다. 돼지

가 순식간에 종이를 주워먹었고 바로 죽었습니다. 그 때 주

인이 나오더니 ‘중놈이 우리 돼지에게 약을 먹여 죽이려 하

는구나.’ 하며 야단입니다. 죽인 게 아니라고 하니까 ‘이놈

이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합니다. 그러자 이왕 돼지가 죽었

으니까 배를 갈라보면 내가 거짓말하는지 안 하는지 알 것 

아니오? 하면서 돼지 배를 가르니 봉투가 들어 있었습니

다. 바로 이야기하면 그 돼지가 문수보살이었습니다. 보살

이 돼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편지를 뜯어서 보니 ‘돼지우

리에 있는 그 돼지가 문수보살이라.’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문수보살이 이런 짓을 할까요? 돼지가 되어 살 수가 있겠

습니까? 돼지의 삶은 만행하는 모습의 한 가지일 수도 있

습니다. 만행을 거두어 본래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꼭 그

렇게 해야된다 혹은 안 되는 것을 주장한다는 뜻입니다. 초

등학생일 때 여덟 시간 안 자면 안 된다는 것을 여태까지 

잊지 않고서 지금도 그대로 합니다. 속히 깨우쳐야 하는데 

깨우치는 것은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깨우치도록 도와주

는 스승이 없습니다. 깨치는 것은 단박에 깨는 것입니다. 

백장이 스승님과 강가에서 산책을 하다가 들오리가 날아가

는 것을 보고 스승이 백장에게 무엇이냐?고 묻는데 백장이 

제대로 대답을 못합니다. 그 때 스승이 백장의 코를 비틉니

다. 이것을 계기로 백장이 깨닫고 보니 코 속 거기에도 불

성자리가 꽉 차 있더라는 것입니다. 알고보면 벌레 꼬리 속

에도 불성자리는 꽉 차 있습니다. 그런 것을 깨치는 것이 

선가의 법입니다. 공자 앞에 문자 쓰는 격이지만 유가에서

도 그런 법이 있어 선가에서 처럼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새처럼 연을 띄웁니다. 연이라는 것은 솔개 ‘연’자인데 

날아가는 솔개 날개 죽지의 사는 자리나 고기 꼬리에 사는 

자리가 다 같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사는 기운이 하나이기 

때문에 대덕이 말하기를 하늘과 땅은 큰 덕을 낳는다는 것

입니다. 생으로 볼 때 성인들은 사는 것이지만 부처님께서 

사는 것은 생명으로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것으로 생명을 

해치고자 하는 것은 외도이고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정도

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을 깨쳐서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것이며 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생명을 

해치는 것이 파계입니다. 우주의 생명체에 손해가 되는 것

이 아니라 이익이 되는 것이 바른 사람입니다. 부처님이 출

현하여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무명속에 앉아서 무명을 덮어쓰고 있는데 잡념이 나오는 

것이 보이겠습니까? 그것은 참선이 아닙니다. 무명을 보는

데 무시무명입니다. 뿌리가 일어났다는 것은 무명풍無明風

으로 무명의 바람인데 우리 마음도 무명풍이라고 합니다. 

물에 바람이 불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깨치는데 잡으려

고 하면 안 되고 간섭을 해도 안 됩니다. 나는 출가해서 첫

눈에 절집 내부를 보고 옳은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직지

사 선방에서는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올바르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불성자리는 나한테

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앉았다 일어났다’ 밖에 하지 않았

는데 망상을 일으켜도 망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잠 자

고 밥먹고 하는 동안에도 망상을 없애려고 하지 않았습니

다. 있는 것을 끊으라고 하는 것이 신수대사이며 없다는 것

을 아는 것이 육조스님입니다. 선방에 갈 때도 사상을 알고 

가는 것이 쉽습니다. 망상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망상이 일

어나지 않습니다. 닦아야 할 무엇이 있다고 자꾸 애쓰는 것

이 신수대사였습니다. 이것은 본래 무인데 없다고 하면 일

어나질 않습니다. 다음은 내가 중이 되어서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이제까지 걱정없이 살았습니다. 내가 잘 

자랐기 때문에 걱정 할 것이 없습니다. 누가 갖다준 것도 

아니고 빼앗아 간 것도 아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

니다. 깨달았다는 소리가 바로 알았다는 소리입니다. 바로 

알면 그만입니다. 

서양의 소크라테스는 지덕합일론을 주장했습니다. 지덕

이 똑같은 것입니다. 중국 명나라 때 왕양명이 지와 행을 

주장하여 지행합일론을 주장했습니다. 지자는 행하는 것

이 스스로 되고 행자는 본인이 종이라도 괜찮습니다. 우리

는 뭐니 해도 깨치는 것을 주장해야 됩니다. 깨쳐놓으면 깨

친 곳에서 살지 깨친 것 밖에는 안 나갑니다. 잠을 자도 근

본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자빠지고 엎어져도 언제든지 연속

되는 것으로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는대로 해

보세요. 깨치면 더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

행지키는 것도 해야되고 자기일도 해야 합니다. 남을 가르

치는 것만 하지 마십시오. 어느 정도 하고 자기 속도 차려

야 합니다. 자기 속도 못 차리는 사람이 남을 가르칠 수 있

겠습니까? 육진 무명속에서 수만 가지 행을 닦아야 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이트 정보

상호.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대표. 김성규 사업자등록번호. 514-82-14810 [사업자등록, 법인등록정보 확인]
Tel)053-474-1208 Fax)053-794-0087 E-mail) tongsub2013@daum.net
주소 : 대구광역시 남구 두류공원로 10(대명동)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성규

Copyright ©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All rights reserved.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1,831
어제
7,616
최대
7,694
전체
1,252,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