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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응스님의 유식특강

제21강 소연행상문(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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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4,036회 작성일 21-08-03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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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강 소연행상문(8)



소연행상문에서 요了는 행상이며 집수執受와 처處는 소

연으로 요는 식을 얘기하는 것이고 처는 식이 반연하는 것

인데 밖으로 삼라만상이 식에 의해서 생겼다고 했습니다. 

제 팔의 소연을 능생각수能生覺受의 입장에서 류로 나누

면 집수와 처가 되며 법을 들면 종자와 유근신有根身과 기

세간器世間 셋이 됩니다. 안위공동의 입장에서 제 팔이 선

취라면 종자와 유근신도 따라서 선취善趣이며 제 팔이 악

취惡趣라면 종자와 유근신도 또한 악취이기 때문에 종자와 

유근신은 집수이며 기세간은 비집수입니다. 제 팔에서 유

근신인 몸은 집수라고 하는데 오온신이라고도 합니다. 오

온신은 팔식하고 관계가 있는데 팔식은 집수 하는 놈이고  

몸은 집수를 받는 놈입니다. 

팔식은 능집수가 되고 종자와 유근신은 소집수가 되어 

집수하는 놈은 제 팔식이고 집수되는 놈은 오온신입니다. 

내가 염주를 가졌다면 가져진 놈이 염주이며 염주를 가지

는 놈은 나란 말입니다. 이 때 내 손은 능집수고 염주는 소

집수입니다. 오온신은 팔식에 소집수가 됩니다. 그러면 몸

은 소집수가 되고 팔식은 능집수란 뜻인데 비집수, 집수를 

소유하는 것을 육백자로 줄일려고 하니까 글자가 잘 맞지 

않아서 그렇게 쓴 것입니다. 팔식은 능집수가 되고 오온신 

몸은 소집수가 된다는 뜻입니다. 

요는 요별의 뜻인데 식의 행상을 말합니다. 이것은 세 가

지로 체상과 상상과 상모를 뜻합니다. 요자는 능연으로 처

음에는 색이 아니고 몸의 근신기계를 이겨낸 팔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왜 불가지不可知를 맨 위에 써놓았느

냐 하면 그것은 팔식이 작동하는 것을 알 수가 없기 때문입

니다. 그것은 매우 대단한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지만 실제는 어떻게 낳는지 모르고 

낳습니다. 이것처럼 돌아가는 모양새를 모르는 것입니다. 

중생은 잘 모릅니다. 그것은 깨치지 못하여 무명에 덮여있

기 때문에 무명 속에서는 이것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

도 그렇지만 벌레나 짐승은 더 덮혀 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이 사상은 가

만히 있는데 각각 벌레나 사람이 무명에 덮혀 있어 옳게 보

이질 않는 것입니다. 무명에 덮여서 망념이 일어나는 것입

니다. 망념이 일어날 때 처음 일어난 망념이 바로 불각입

니다. 불각이 무명인데 여실히 진여법이 하나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불각이나 무명이나 똑 같은 뜻입니다. 무명이라

는 것은 통달하지 못 했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까 원성실성은 하나인데 모르는 사람 수가 몇 백 명이 되는

지 알 수 없는 숫자입니다. 그것이 불각인 동시에 무명입

니다. 깨치면 지혜가 나오는데 깨치지 못하면 어둡습니다. 

깨치지 못하면 불각이고 무명입니다. 정각을 하면 아뇩다

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해서 환한 기운이 하나로 나오는데 하

나인 밝은 기운으로 어둠이 없어지기 때문에 무명이 아니

라고 했습니다. 환한 기운이 없는 것이 무명입니다. 소위 

무명이라 하는 것은 환한 기운을 내려놓고 통달하지 못 했

기 때문입니다. 통달한 것과 달라서 마음을 쓰는 것이 법성

자리를 쓸 수 있는 상황이 못 됩니다. 상응이 되면 물에 물

탄 듯이 동질이 됩니다. 깨치지를 못 하여 상응이 되지 않

으니까 상응이 안 되는 생각인 어둠이 일어나 밝은 것과 적

대인 상황이 되어 마치 이질적인 기름과 물처럼 합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뢰야식입니다. 이질적으로 나온 

것으로 전체적으로 확대하여 증득을 못 하니까 모자라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딱 하나가 되면 문제가 없는데 덮혀

서 작용을 하니까 하나와 전체가 본질적으로 상응이 안 됩

니다. 

아는 사람이 있고, 모르는 사람이 있고, 있는 사람이 있

고, 없는 사람이 있듯이 상대적이 되어버립니다. 아는 것

도 한계가 있고 듣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소리입니다. 그것

이 폭이 있다면 전폭적으로 같아지지가 않고 몸은 큰 데 덮

는 것은 몸의 절반 밖에 안 되기 때문에 덮히지 않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어버리면 전체로 알아버리는데 

덮히지 않은 상태에서 본 것입니다. 

 첫 수업에 그림자 이야기를 했는데 기억납니까? 해가 반

듯하면 그림자가 없는데 해가 삐딱하니 그림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실물과 달라서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

이지 실물과 같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찍어놓으면 사진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맥도 안 뛰고 피도 돌아가지 않고 기

운이 전파되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자리가 하나뿐만 아니

라 수억의 동물 혹은 육도중생 전부가 그림자 없는 세계를 

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실물이 아닌데도 우리는 

그림자를 보호하려고 도둑질도 하고 거짓말도 하면서 온

갖 짓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그림자

를 보호하는 것 밖에 안됩니다. 이것을 깨치면 어두운 것이 

지워지면서 하나로 합해지는 것이 정각正覺입니다. 합해진 

것을 이해하는 것을 정견이라고 합니다. 

부처님 시대에 육사외도의 사견이 그것인데 삐딱해지는 

것 즉 사견은 탈선된 것입니다. 기차가 레일 위로 지나가면 

정로이고 벗어나면 탈선하는 것입니다. 탈선되는 것은 사

로邪路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견을 얻기 어렵다는 것입니

다. 절에 있든 세속에 있던 정견을 얻으면 되는데 정견을 

못 얻기 때문에 평생을 절에 있어도 불교를 모르는 것입니

다. 절에 있어도 불교를 모른다면 출가하여도 중이 아닙니

다. 외도일 뿐, 머리 깎고 중이 되었으면 하지 말아야 합니

다. 말이 심한 것 같지만 틀림없는 소리입니다. 중이라고 

취급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절에 있더라도 불교를 모르

면 외도이며 절 밖에 있더라도 불교를 알면 불제자라고 합

니다. 그래서 대승을 처음으로 들여온 것이 시교始敎로 법

성게와 반야경은 같은 시교始敎지만 반야경은 공시교空始

敎라고 합니다. 이것은 상시교相始敎로 법상法相을 자꾸 

이야기합니다. 법상이 없다고 이야기 하면 공입니다. 대승

의 최고 문턱인 법화경까지 가면 달라집니다. 

며칠 동안 이야기 한 불교를 종합해 본다면 우리가 깨치

지 못한 것은 무명이며, 무명은 불각입니다. 똑 같은 말이

지만 어떻게 몰랐느냐 하면 무명에 덮여서 익힌 기운인 것

입니다. 아뢰야식은 종자를 담아놓은 그릇입니다. 식을 담

아놓은 그것이 오물오물 일어난 것을 분별망상이라 합니

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해야 됩니다. 말이 복잡하지만 굳

이 이 얘기를 하는 것은 팔년 동안 설명하고 난 다음에는 

상이 없고 식이 없다는 소리가 나와야 하는데 상시교相始

敎에는 아직까지 식이 없다는 소리가 안 나왔습니다. 그래

서 반야경 사상에서는 색성향미촉법인 근신기계根身器界

와 식도 없고 경계도 없다고 했습니다. 식도 없다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상시교는 반야경 사상을 밑받침하기 위해 나

온 것입니다. 모두 반야경에서 나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

다. 그러니까 안으로는 근이 벌어졌고 그것을 집수執受라

고 하며 집수가 밖으로 나오면 처處라고 합니다. 

식에서 우리 몸하고 처가 나왔단 말인데 처는 기계器界니

까 식으로 그것이 나온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명은 18계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불가지不可知입니다. 이 속에 들어있

는 것은 알아지지가 않습니다. 내 뱃속에서 나왔다는 것입

니다. 내 식속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이 낳는 

것을 모르는데 즉 아들이나 딸이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을 알

지 못합니다. 처가 너무 방대해서 모른다는 것입니다. 몸은 

그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방대해서 모르는 것과 아예 모

르는 그 두 가지로 불가지를 덮혀 씌운 것입니다.

앞에서 얘기한 삼분은 재어지는 것과 재는 자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삼분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여러분이 자세

히 알고 싶으면 집에 가서 책을 읽어보세요. 여기서 공부할 

때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증자증분을 가지고 사분을 얘기 

했습니다. 더 지어도 안되며 덜 지어도 안된다고 못을 박아

놓았습니다. 

199페이지에서는 덧붙여 능연 소연을 가지고 이야기했

습니다. 소연 가운데 우리 몸인 유근신에 대해서는 이야기

를 했습니다. 세 가지로 벌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못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업을 가지고 사니까 객관인 소연

所緣이 수다쟁이가 되어 있습니다. 205페이지 끝에 가면 

도표가 있습니다. 집이 있고 산이 있고 또 옆에 사람이 있

고 동물과 식물이 있는 그것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불가지不可知 소연행상문으로 여기서 마쳤습니다. 

잠깐 반야심경의 오온개공을 설명하면서 지금까지 얘기

한 것을 정리하겠습니다. 단지 이것은 알기만 하면 됩니

다. 오늘 이야기는 유식보다 한걸음 더 나가는 것입니다. 

색色을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합니다. 오온의 색이 무엇입

니까? 배 젓는 노는 물을 자꾸 분류하는데 노 젓는 법이 이

랬다 저랬다 달라지는 것이지 노가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

다. 사람은 한 사람인데 똑 바로 찍고 옆으로 찍고 거꾸로 

사진 찍어 놓은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똑 같은 것을 

가지고 이랬다 저랬다 한 것입니다. 색은 오온을 가지고 이

야기 한 것입니다. 며칠 동안 설명한 것을 다시 설명을 한 

것입니다. 다른 것도 다시 설명을 해보면 원성실성은 본각

이라고 해도 괜찮고 마음자리 생명이라 하며 또한 진여 중

용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진여는 마음자리, 생명자리

로 청정하다, 평등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법是法이 평

등平等하여 무유고하無有高下라’한 것은 법의 상, 모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자재라고도 했습니

다. 또 색은 안으로 혹은 밖으로 여러 가지로 다 통하는 것

입니다. 안으로 통하는 것은 ‘근根’이고 밖으로 통하는 것

은 ‘경境’입니다. 색이 바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색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앞부분을 공부할 때 심

왕 심소에서 그 심왕이 법이라고 했습니다. 심왕 다음에 심

소는 식자체입니다. 그러면 색이 어디서 나왔는지 짐작하

겠지요. 이것이 연기법으로 구사론에서 이야기했지만 구사

론은 어디까지나 밖에 실물이 있다고 하니까 우리 마음은 

일찍기 물건을 보고 색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다

음에 심왕 심소는 나오는 위치가 다릅니다. 색이 어디서 나

오느냐 하면 식자상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것을 소변所變이

라 했습니다. 심왕心王과 심소心所가 색을 낳았다는 것입

니다. 색은 이 두 가지의 소변입니다. 색은 소변으로 낳아

진 자식 놈이고 심왕심소는 어머니에 해당합니다. 색이 누

구집 아들이냐고 물으면 심왕심소에서 심왕은 아버지쯤 되

고 심소는 어머니쯤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낳았다는 것입

니다. 그 다음에 몸은 집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육식

을 오식이라고 하든지 육식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육식

은 육근을 타고 앉았습니다. 종자가 같다는 것입니다. 육

식종자나 육근종자는 동일 종자라고 합니다. 갈라놓았지

만 평생 서로 떠나지 못합니다. 서로 좋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수라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식하고 경 가운데에서 

식이 경에 올라앉아서 그렇습니다. 식이 근을 타고 앉아서 

밖으로 경을 반연합니다. 식과 근이 합작을 해서 밖으로 반

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수라고 합니다. 안식이 안을 타

고 앉아서 형상을 봅니다. 이근을 타고 앉아서 소리를 듣습

니다. 눈으로 경을 받아들이고 색을 받아들이고 귀로는 소

리를 받아들이고 코로는 냄새를 받아들이는 이것이 오근, 

오경이 서로 교제할 때 나오는 작용인 수입니다. 

구사론을 공부할 때 말했듯이 몸을 보지 못했습니다. 몸

에 대해서 우스운 얘기가 있는데 부처님 제자 중에 아난이 

있습니다. 한 번은 걸식을 나갔다가 어떤 여자가 아난에게 

혹해서 자꾸 따라오는 것입니다. 아난이 급히 도망을 치듯

이 달아나니까 여자는 자기 어머니와 함께 따라오는 것입

니다. 그래서 며칠 뒤에 아난이 그 여자의 집에 시주를 갔

다가 그 여자 어머니의 주술에 걸리고 맙니다. 부처님께서

는 신통으로 아난을 구해냅니다. 다음날 두 모녀를 불러 부

처님께서 묻습니다. ‘아난이 그렇게 좋으냐?’ 하니까 좋다

는 것입니다. ‘뭐가 그렇게 좋은가?’하니까 넓은 이마와 오

똑한 코 등 다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잘 생긴 아난의 

얼굴을 따라 코를 하나 도려내고 눈을 떼어 내고 피부를 벗

기면 어떻겠느냐? 살을 발라내고 뼈만 남겨놓으면 어떻겠

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보기 싫을 것이라고 대

답합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한 덩어리로 뭉쳐진 

몸에 뭔가 아주 재미나고 예쁜 것이 속에 들었는 줄 알았는

데 해부를 해놓으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명

으로 인하여 곱게만 보였던 것이 부처님께서 해부한 이 몸

에는 36가지 오염물이 들어 있습니다. 똥이 모이고 피와 

땀이 모이고 고름이 모인 이 몸이 뭐가 그렇게 예쁘다는 말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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