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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응스님의 유식특강

제25강 사량능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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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929회 작성일 21-08-03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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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강 사량능변



거체출명문擧體出名門


나누어 준 프린트물을 읽어보라고 했는데 읽어봤는지 모

르겠습니다. 이 속에는 그저 이론을 따지려고 하는 것이 아

닙니다. 잔소리가 많은 것은 부처님을 본받아서 ‘중생무변

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를 하는데 바로 중생을 없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생무변서원도’가 부처님의 최

고 목표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자기 몸뚱이 하나도 

건지기가 힘듭니다. 자기 몸 하나를 건지는 데도 본인이 책

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생무변서원도’는 중생이 끝이 없는데  

내 힘으로 모두 건지겠다 하는 것이 원래 부처님의 성불한 

목표로 우리한테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집안의 가장이 되면 다른 가족보다 노력을 더 해야 합니

다. 인류를 다 내 힘으로 건지겠다고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

까? 인류를 내 힘으로 건지겠다고 원을 세운 두 사람 중 한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인류 외에도 이 땅덩어리에는 육

십만 가지 생물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류와 

더불어 육십만 가지 생물이 사는 것이 지구인데 그런 생물 

가운데 인류 하나만 건지겠다는 생각보다 일체 중생을 다 

내 힘으로 건진다는 것이 더 큰 원이 아니겠습니까? 인류

가 육십만 종 가운데 하나라고 하면 그건 육십만 배나 많은 

생물을 내 힘으로 건지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류를 건

지겠다는 말보다 일체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 ‘중생무변서

원도’라 했던 것입니다. 중생무변서원도를 하려면 먼저 조

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대전제로 중생을 내가 건져야겠

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중생이 몸을 가지고 생활을 하

다 보면 고통이 따릅니다. 그 고통을 내가 없애주고 대신에 

락樂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중생에게 고통을 빼내고 락을 

넣어주려면 왠만한 힘을 가지고는 어렵습니다. 

중생무변서원도 하려면 힘과 더불어 세 가지 조건이 있

습니다. 먼저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를 해야합

니다. 우리가 생명의 진여자리를 몰랐기 때문에 그릇된 몸

뚱이가 생긴 것입니다. 망상의 몸뚱이를 끊어야 되는 것입

니다. 목적은 번뇌무진서원단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을 번뇌무진서원단이 되게 하려면 먼저 자신이 번뇌를 끊

어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을 못 건집

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물을 벗어나야지 건질 수 있습니

다. 다리가 도피안이라고 그랬던가요? 극락을 가려면 번

뇌망상의 다리를 건너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는 번뇌

망상으로 된 중생이 사는 곳입니다. 한 번 갔다 와 보세요. 

그러면 달라질 것입니다. 

다음 목적은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을 해야 합

니다. 번뇌무진서원단은 소극적으로는 나쁜 것을 없애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좋은 것을 대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려면 좋은 것도 해야 하지만 나쁜 것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몸에 나쁘다는 것을 알아야 끊어집니다. 유식하면 번

뇌무진서원단인데 번뇌로 된 몸에 법문무량서원학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을 한 사람

이 ‘중생무변서원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원

을 한 번 세워봅시다. 부처님이 원을 세웠듯이 우리도 부처

님 같은 원은 안 되더라도 요만큼이라도 되어야겠습니다. 

내가 써 놓은 축원은 날마다 식전에 하는 것입니다. ‘문아

명자면삼도聞我名者免三道’하고 ‘견아형자득해탈見我形者

得解脫’ 이것이 얼마나 좋은 소리입니까? 새벽마다 했지만 

뼈에 사무치진 않았습니다. 모두 발심이 시원찮은가 봅니

다. 내 이름만 들어도 삼악도를 면하고 내 모양만 봐도 해

탈해서 지옥에 안 떨어지도록 원을 세워야 하는데 그저 네

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것은 원성실성을 깨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

다. 그래서 엉뚱한 망상이 해골에서 쑥쑥 나오니까 그것을 

‘루漏’라 하는데 샐 ‘루’입니다. 눈으로 코로 자꾸 새어나온

다는 말입니다. 그 놈의 씨앗을 멸종시켜야 합니다. 우리

의 목적은 지금이라도 남한테 덕이 되는 행동을 하는 것입

니다. 일체중생을 다 건졌는데 땡중에게 욕 좀 한다고 해서 

마음 상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 했지

만 어느 정도 유식을 터득하고 나면 모양이 안 보인다고 했

습니다. 모양이 보이면 아직 멀었습니다. 모양을 나타내려

면 남한테 덕 되는 모양을 내야 해탈을 하게 됩니다. 그래

서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자가 되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돈 많

은 부자는 아무리 성품이 악하다 해도 남한테 덕이 됩니다. 

거지는 아무리 마음씨가 좋아도 남한테 덕을 주지 못합니

다. 부자 옆에 살면 부자가 아무리 욕심쟁이라도 물건 하나

를 들어다주고도 품을 받게 됩니다. 없는 사람은 그렇게 하

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이 풍부해야 합니

다. 절에 평생을 다니면서 집 한 채를 못 지어도 나중에 저

절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뿐만 아니라 전라도나 강원도

에 사는 사람들이 직지사에 와 보고는 깜짝 놀랍니다. 이

렇게 좋을수가! 극락 같다고 합니다. 이렇게 좋은 곳이 있

는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또 불국사에는 다보탑, 석가탑도 

있고 석굴암에는 부처님도 계십니다. 서양사람이나 동양

사람들이 석굴암 부처님을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무조건 불교를 믿어버립니다. 

인간세상에 몇 백 년, 몇 천 년을 왔다가는 사람들을 보십

시오. 빈그릇으로 왔다가 무엇을 담아서 갑니까? ‘허왕실거

虛往實去’라고 합니다. 빈 것으로 왔다가 허왕, 실왕할 때 

열매 실實자는 무엇을 담아서 간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허

왕실거가 되어야 합니다. 문아명자면삼도 하고 견아형자득

해탈 해야하는데 주지스님도 그렇지만 덕명스님도 절에 있

을 때 다 배웠지만 중생무변서원도를 하려니까 불교만 가지

고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안으로 이것 저것 십삼 년을 공부

했는데, 부처님은 6년 동안 고행을 했으며, 현장은 17년을 

인도에 갔다왔다고 그랬습니다. 13년을 절에 사는 스님이 

속가에 가서 하루밤이라도 묶어 보세요. 그 불편함이 말이 

아닙니다. 이불을 덮고 자려고 해도 이불이 불편해 잘 수가 

없고 밥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입으로는 어떻게 안 되는 

그것이 고행입니다. 혼자 잘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공

부하는 내용은 여러분이 들어보지 못했던 출처가 많습니다.

인간이 모르는 문제가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는 아

주 욕심이 많고 가난한 사람 곁에서도 사람들이 덕을 보는

데 말입니다. 불교는 이렇게 좋은 문화재를 만들어 놓았습

니다. 학문이라는 것은 정신력을 개발하는 것인데 정신 개

발 학문이라는 것은 참 묘한 것입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도 나한테 다 덕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 남

산에 돌 계단이 있는데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

까? 이 몸이 눈으로 귀로 집합한 종자가 모여서 되었다면 

남산에 좋은 돌 기둥이 우뚝 서 있는 것은 남산에 좋은 빛

입니다. 그 기운에 의하여 내가 정화가 되는 것으로 정말 

돌맹이 하나로, 소나무 한 그루 심어 둔 것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옆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나한테 전부 덕이 되는데 덕 되

는 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기가 없으면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공기가 나한테 얼마나 덕을 배푸는 것인지 

알아야겠습니다. 태양이 없으면 썩어서 살지 못합니다. 무

정까지도 나한테 덕을 입히고 도움을 주는데 유정이야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유정 무정 모두 나의 스승이고 나의 부

모입니다. 이런 사상은 좀 바꿔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

은 나의 부모이고 나의 스승인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살

아갑니다. 즉 은혜를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좋은 종자를 

심을 때는 좋은 결과를 보게 됩니다. 

좋은 곳에 직지사 같은 절을 지어 놓으면 얼마나 많은 사

람들에게 덕을 주는지 모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저녁에

도 일하고 새벽에도 일한다고 하는데 고단해서 어떻게 그

렇게 하는지 참 희한하단 말입니다. 그런데 모두 새벽에 빠

지지 않고 듣는다고 합니다. 보통으로는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이든지 감사한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 고

맙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면 하루도 불편한 것이 없습니다. 

고마운 종자가 생성이 됩니다. 고마운 세포가 생겨 혈액속

에서 왕성해집니다. 그런데 남을 미워하면 미워하는 세포

가 생겨 좋을 것이 없습니다.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마음 즉 

부처님도 감사하지만 일체중생이 나한테 감사한 일을 끼치

고 고마운 일을 해준다고 생각할 때 좋아지는 것입니다. 나

도 이 세상에 나와서 한 사십까지는 남을 미워했습니다. 그

런데 어느 날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이 아니라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유식을 배우고 좋은 법문

을 듣고 보니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는 그런 생각마져 없어지니까 다른 사람 욕도 안하게 되었

습니다. 잘못해도 그냥 봐 주고 그것을 탓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먼저 난 것을 선생이라 합니다. 먼저 ‘선先’자

와 날 ‘생生’자를 씁니다. 여러분한테 내가 선생입니다. 선

생은 먼저 난 사람으로 경험이 많다는 것입니다. 먼저 난 

사람한테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생이라고 합니다. 학

교에서 분필로 공부 가르치는 사람만 선생이 아니라 옆에 

있는 은인, 이웃집에 사는 하루라도 먼저 태어난 사람은 자

기보다 경험이 많으니까 선생인 것입니다. 말도 할 줄 모르

고 행동도 잘 못할 때 옆에서 먼저 난 사람을 보고 말을 배

우고 행동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옆 사람을 보고 

말도 배우고 행동도 배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훌륭한 

것은 배움이 많은 것이 아니라 현장 경험이 많은 것입니다. 

남보다 더 잘 하고 장기가 많은 것은 밖에서 먼저 난 사람

한테서 배운 것입니다. 

아직 ‘이숙능변異熟能變’을 공부하지 못했습니다. 사량은 

무엇을 가지고 사량이라고 합니까? 이숙능변이 제 팔식이

고 사량능변思量能變은 제 칠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제 

칠식을 사량능변이라 했습니다. 제 칠식에 대해서는 오늘 

다 공부하겠습니다. 책 한 장을 넘기면 팔단에 대한 도표가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거체출명문擧體出名門’이라는 말

이 나오는데 거체라는 것은 ‘사량능변’으로 이것은 칠식을 

명하여 말나식이라 합니다. 말나의 출체를 보면 차제이능

변次第二能變은 거체擧體이고 시식명말나是識名末那라 하

는 것은 출명出名입니다. 유식에서는 아주 정확합니다. 인

명론법이 되어서 분명합니다. 하나라도 빼거나 더 해도 말

이 안 되는 것입니다. ‘차次’ 하는 것은 제 팔식 다음의 뜻

으로 제 칠식을 나타냅니다. 제라는 것은 제1이며 그 다음

으로 ‘차’자는 제2이니까 제 2는 칠식에서 이 식의 이름이 

말나입니다. 칠식에는 이름 짓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

다. 여기서는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안식할 때 ‘식’자는 

제 칠식을 쓰고 제이第二라 할 때는 말나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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