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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강 전육식과 말나식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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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968회 작성일 21-08-0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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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강 전육식과 말나식과의 관계



제 일은 안식, 제 이는 이식, 제 삼은 비식, 제 사는 설식, 

제 오는 신식, 제 육은 의식, 제 칠은 말나식, 제 팔은 아뢰

야식이라고 하는데 말나식과 아뢰야식은 당체득명當體得名

이라 합니다. 당체득명當體得名을 두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

다. 이 두 가지는 책 끝부분에 나오는 말인데 미리 안 하면 

얘기가 잘 안 되기 때문에 먼저 합니다. 말나식이나 아뢰야

식은 여섯 가지 이름에 붙였다 뗐다 하는 것으로 육합석六

合釋이라고 부릅니다. 해석할 때 육합석을 붙이면 모이는 

범주가 다르고 떼면 범주가 또 달라집니다. 자꾸 내용이 달

라지는데 모이는 도수에 따라 세상 만법은 이합집산으로 떠

났다가 모였다가, 모였다가 또 흩어졌다에 따라 생기는 것

입니다. 예를 들어서 물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물은 

수소와 산소가 모이는 것에 따라서 다른 것입니다.

화강암이라는 돌이 있습니다. 화강암을 분석을 해보니까 

질돌 성질과 차돌성질, 운모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만

약 세 가지 요소에서 두 가지만 있으면 화강암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세 가지보다 더 많은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돌이 됩니다. 중국의 궤변 학자 공손룡은 황당한 말을 

합니다. 단단한 돌은 돌이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세 가지

에 단단한 것을 하나 더 보탠 견석은 돌이 아니라는 것입니

다. 궤변 같지만 논리에 맞는 소리입니다. 붙이고 떼는 것

에서 생기니까 제 육식인 의식은 의주득명依主得名이라 합

니다. 246쪽에 ‘차명하이此名何異 제육의식第六意識 차지

업석此持業釋 여장식명如藏識名 식즉의고識卽意故 피의주

석彼依主釋 여안식등如眼識等 식이의고識異意故’ 라고 나

옵니다. 또 그 다음에 안경이 있는데, 주인에 의지하여 일

어나는 것을 의주석依主釋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대목리라는 사람이 있어서 직업이 그림 그리

는 것입니다. 업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데 자기 업은 다 배

워서 압니다. 의주석은 주인인데 누구 집 아들이다 혹은 누

구 집 남편이다 할 때는 낮은 놈을 예로 들어 높은 것을 이

야기합니다. 의주득명依主得名 할 때는 높은 사람을 예를 

들고 낮은 사람을 이야기 할 때 사용합니다. 그리고 의사석

依士釋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는 선비 ‘사士’자로 낮은 것

을 예로 들어 높은 것을 이야기 할 때는 의사석이라고 합니

다. 또 쌀이 있으면 쌀을 담는 그릇을 쌀괘라고 합니다. 그

것을 유재석有財釋이라고 합니다. 상위석相違釋, 인근석

隣近釋 등 여섯 가지가 있는데 붙였다 뗐다하는 바람에 의

미가 달라져서 ‘육합석六合釋’이라고 하지 ‘육이합석’이라

고는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붙였다 뗐다하여 의미가 달라

지기 때문에 육합석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논법이 모두 

여섯 가지로 의주석, 지업석, 상위석은 서로 틀린 것을 말

합니다. 상위석, 유재석, 대수석에서 수를 띈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삼보와 육바라밀의 목적은 중생무변서원도 하는데 있다

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무변서원도를 하기 위해서 이

런 짓을 자꾸 하는 것입니다. 아뢰야식은 장식이라고 했는

데 이것은 무명이니까 성불할 때까지는 어두운 기운이 계

속되어 불생불멸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상속은 ‘항전여폭

류恒轉如暴流’라. 이것은 성불 할 때 까지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 말나식도 마찬가지로 객관 팔식이 있는데 

칠식의 견분이 팔식의 견분을 잡아가지고 한 번도 끊어짐

이 없이 똑같습니다. 제 각각 아뢰야식에 따라가서 그 속에

는 항상 종자가 들어 있습니다. 상속이 되고 그것을 귀속시

킬 때에는 종자식이라고 할 때도 있어 장식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말나라는 것은 뜻 ‘의意’자입니다. 뜻 ‘의意’자는 어떤 작

용을 하느냐 하면 다른 말로 표현하면 참 복잡합니다. 사

량이라고 하는데 사량식입니다. 이것은 자꾸 생각하는 것

으로 사량은 곧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따지는 것입

니다. 뜻 ‘의’자는 사량인데 사량을 어떻게 하느냐? 식이라 

하면 칠식이나 팔식도 다 사량을 합니다. 사량을 하는 도수

가 제 팔식의 이름을 지을 때에는 장식이라 하는데 ‘장’자

에는 세 가지 뜻이 나옵니다. 종자를 가진 것으로 그치지 

않는데 다른 식은 그렇게 못합니다. 종자를 가진다는 뜻은 

칠식이나 육식에는 없습니다. 사량도 하지만 지종持種하는 

것은 팔식만 가졌기 때문에 여러 식에 통하는 작용을 팔식

에서 아뢰야식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며 장식이라고도 합니

다. 말나식은 사량의 뜻이며 뜻 ‘의意’자로 식도 사량을 합

니다. 제 팔식은 사량을 안 하는 것 같지만 식이라고 이름

을 붙이면 아주 미미하게 사량을 합니다. 

제 칠식을 사량식으로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

로나 언제든지 사량함으로 항심사량恒審思量이라고 합니

다. 사량을 하되 시간적으로 언제나 한다는 뜻입니다. 사

량을 안 하면 아주 심각합니다. 그런데 제 팔식은 사량을 

하되 항사량은 하고 심사량을 못합니다. 그리고 제 육식

도 심사량을 합니다. 심사량은 온갖 것을 다 생각합니다. 

제 육식은 심사량은 하지만 항사량이 안됩니다. 전오식은 

제 팔식처럼 항상하는 것도 없고 심사량도 못합니다. 식이

라는 이름을 부여했기 때문에 사량식이라는 이름을 준 것

입니다. 제 육식에서도 똑같은 소리가 되는데 그래서 문

제가 생깁니다. 말나식과 아뢰야식은 당체득명當体得名이

고 안이비설신의 여섯 개는 의근득명依根得名입니다. 눈알

이 포도알 같이 되었다는 말이며, 코는 쌍조갑 같이 되었고 

귀는 처음으로 피는 잎사귀의 모양으로 이름을 그렇게 지

은 것입니다. 전부 모양을 가지고 전육식이라고 한 것입니

다. 전육식 여섯 개는 바로 의근득명依根得名입니다. 그러

면 포도알처럼 생긴 것을 안근으로 의지하는 식, 쌍조갑 같

이 생긴 것을 비근으로 의지하는 식, 잎사귀 모양 같이 생

긴 것을 이근으로 의지하는 식등 근을 의지하는 일은 육근

인데 육경도 색식이라고 하며 의근득명입니다. 하여간 의

근득명과 당체득명은 다릅니다. 안근을 의지하는 식, 이근

을 의지하는 식, 비근을 의지하는 식, 설근을 의지하는 식, 

신근을 의지하는 식에 대해서 이해하겠습니까? 

말나식은 말나가 근이 되어 밑천이 됩니다. 말나식에서 

안근이 근을 의지하면 불공의不共依라고 합니다. 전육식을 

이해하는 불공의입니다. 근은 불공의라 하여 다른 사람에

게는 안 줍니다. 안근은 인식하는 안식 범주가 안 밖에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안은 될 수가 없다는 소리입니다. 또

한 코나 귀에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꼭 자기

만 수용하는 것으로 불공의가 다른 사람과 같이 하지 않는 

것을 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 육식을 의식이라고 하는

데 말나를 근으로 하여 인식하는 것으로 곧 사량하는 것입

니다. 칠식도 사량을 하고 육식도 온갖 것을 다 반연을 합

니다. 그러면 분명 당체득명이 틀림없지요? 그러나 육식

은 의근득명인데 제 칠식은 당체득명으로 사량하기 때문

에 자기 업을 가지고 자기가 할 때는 당체득명이고 의식이

라고 할 때는 사량한 제 칠식을 불공의라고 하기 때문에 의

식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 가진 놈은 제 칠식으로 의식이라

고 하고 제 육식도 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섞일까 봐 인도말로 제 칠식을 ‘말나’로 표현하고 육식만을 

‘의식’이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앞에서 근을 의지해서 이름을 짓기 때문에 전육식은 그

렇게 됐는데 식이 작용할 때는 반드시 근이 필요하므로 근

이 없으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눈의 근인 포도알 같은 것이 

없으면 저 밖에 보이는 어떤 모양도 눈을 통하여 볼 수 없

습니다. 이식도 마찬가지로 있어도 모릅니다. 

엄마 뱃속에서 고막에 병이 나면 이 세상 소리를 배우

지 못하고 벙어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뱃속에서부터 벙어

리가 되어서 나온 것은 고막이 다른 사람의 음성을 받아들

이지 못한 것이 그 원인입니다. 우스운 소리 하나 하겠습

니다. 저 언덕에서 당나귀가 소리를 내도 말을 못배웠으니

까 당나귀가 하품을 한다고 합니다. 소리를 못 듣고 모양

으로만 보니까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식은 근

을 세 가지 동그라미를 그려서 능소를 여섯 가지로 썼습니

다. 그러면 전육식은 근이 있습니다. 제 육식에서는 말나

식이 근입니다. 이것 뿐만 아니라 전육식이 작용할 때는 저

것은 ‘소다’ ‘사람이다’ ‘집이다’ 식으로 밖에 못합니다. 전

육식은 경을 비출 때 한 순간 혹은 찰나를 지나지 못합니

다. 저것이 ‘산이다’ 했을 때 산에 나무며 풀이 있음을 전육

식이 읽는 동안에 빛을 쬐면 그 뒤에서 알고 하는 것은 실

제로 제 6의식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오식은 활동

할 때 찰나에는 이것이 비추면 이면에서는 반드시 제 육식

이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자기들끼리 장난하고 있

는 것입니다. 제 육식의 작용에서 근은 말나식이라고 했습

니다. 전육식이 일어날 때 어느 하나만 일어나면 쫓아가서 

뒷받침해줍니다. 즉 사량하는 것은 제 육식에서 나오는 것

입니다. 밑바탕이 되어 의식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

면 전오식이 작용할 때는 반드시 제 육식이 밑받침을 해주

는데 불공의不共依인 전오식이 인식을 해서 한 가지로 작

용을 합니다. 요놈이 언제든지 일어나면 따라가서 명확히 

해주니까 공의共依가 됩니다. 하여간 이 놈이 자본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사업할 때 자본을 대주는 사람이 따로 있

지요? 내가 자본을 대면 물주가 공의가 됩니다. 전육식의 

물주는 말나가 됩니다. 이것이 전부 공의共依가 되는 것과 

불공의不共依가 되는 것이 있어 아주 복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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