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강 어떤 놈이 송장을 끌고 왔느냐? > 관응스님의 유식특강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관응스님의 유식특강

제40강 어떤 놈이 송장을 끌고 왔느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005회 작성일 21-08-03 15:26

본문

제40강 어떤 놈이 송장을 끌고 왔느냐?



제암스님이 ‘어떤 놈이 송장을 끌고왔느냐?’ 고 물었습니

다. 그런데 자꾸 딴소리를 하니까 옆에 나이 많은 비구니가 

그런 소리 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찾아야 되는데, 즉 ‘몸뚱이 끌고 온 놈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찾아야 되는데 나이가 많은 비구니가 자꾸 꾸지

람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는 분명히 무엇이 하나 

들어앉아 있어서 끌고 온 놈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

것으로 인하여 밝은 곳을 보고 도를 깨치고 그것으로 인해

서 알아차리라는 소리입니다. 그것이 밑천이 되는 것은 절

대로 아닙니다. 법성을 깨닫게 하는 방법으로 유식을 하는 

것이지 저쪽으로 가게 하는 무슨 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얘기했지만 화두를 들어 저쪽으로 가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식도 저쪽으로 가게 하는 방법일 뿐입

니다. 그러니까 석가모니는 동쪽 하늘에 뜬 별을 보고 깨쳤

지만 동산스님은 발로 돌을 차서 깨쳤고 용암스님은 산골

짜기를 올라가다가 분홍빛 복숭아꽃을 보고 견성했습니다. 

장경스님은 문 앞이 밝은 것을 보고 견성했습니다. 그 밝

은 것이 견성하는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농부가 

일을 하다보니 산에서 토끼 한 마리가 내려와서 왔다갔다

하다가 농부의 밭에서 죽었습니다. 농부는 밭을 매다가 난

데없이 토끼를 얻었단 말입니다. 이것은 토끼를 잡는 것과

는 다릅니다. 나무 아래서 또 토끼가 죽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다고 토끼가 죽겠습니까? 토끼가 밭에 와서 죽는 것도 

줄탁동시啐啄同時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밝은 

것으로 인해서, 또 복숭아꽃을 보고, 돌을 차서 견성하게 

된 것도 모두 줄탁동시의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것이 견성하는데 우연한 인연으로 꼭 그렇게 만든 것은 아

닙니다. 돌을 차서 견성하면 돌을 차 보세요. 견성이 됩니

까? 그것과 마찬가지로 참선한다고 앉아 있으면 공부가 되

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자를 비워야 됩니다. 

내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백장스님의 제자가 스

님 밑에서 공부하다가 백장스님이 돌아가시니까 위산스님

의 제자가 되어 공부를 했는데 이름이 향엄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똑똑해서 담아놓은 것이 많아요. 그저 온갖 것을 

한량없이 쌓아놓은 것을 종자라고 하지요. 이 사람의 분별

심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했던 모양입니다. 하루는 위산스

님이 ‘너 한마디 일러보라’하니까 향엄스님은 100가지 대

답을 합니다. 그러나 위산스님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맞

는 소리가 아니다, 깬 소리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

서 향엄스님은 화가 나서 내가 여기까지 알기 위해 얼마나 

세상을 돌아다니고 공부를 했는데 전부 다 틀렸다고 합니

까? 하면서 ‘스님이 날 위해서 한마디 일러주십시오.’ 라고 

합니다. 그래도 한 마디 일러주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일

러주면 내 것이지 너의 것이 되겠느냐? 합니다. 그러자 향

엄스님은 자신의 물건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남양 충북사

로 가서 토굴을 지어놓고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밥도 먹고 얼굴도 씻어야 하고 마당도 쓸어야 했었습니다. 

하루는 마당을 쓸다가 빗자루에 돌이 하나 걸려서 돌을 치

운다고 던졌는데 건너 편에 있는 대나무에 탁 부딪치자 그 

소리에 깨쳐버렸습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별 보고 깨친 

것과 같이 깨친 것입니다. 깨치고 나니 시원합니다. 거기

서 위산스님이 계시는 곳까지는 수백 리나 됩니다. 그래서 

위산스님 계시는 쪽으로 향을 피우고 절을 했습니다. 그때 

만약 위산스님이 나한테 한마디 설명을 해주었다면 깨치지

를 못했을 것입니다. 이 설명을 잘못 들으면 공부에 큰 방

해가 됩니다. 그때 일러줬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에 감사하며 향을 피우고 수백 리 밖에서 절

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것을 담아가지고도 못씁니다. 견성하

는 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제 공부할 때 얘기했잖아

요? 복숭아 속에서 꽃 향기가 나온 것과 같다고 그랬습니

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데 번뇌망상으로 성불하는 것이 아

닙니다. 번뇌를 없애려고 공부를 하는 것인데 실제로 번뇌

망상은 유에서 무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유에서 무로 나

간다고 생각하면 그건 복숭아에서 풀이 나온 것과 마찬가

지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그렇게 되면 위산

스님이 매우 섭섭하지요. 그렇게 유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유에서 어쩌다가 뒤집으면 무가 되

는데 무릇 매화와 마찬가지입니다. 복숭아와 매화나무는 

비슷합니다. 억지소리로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비슷하다는 

것이지 꼭 같은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안 가르쳐주니까 혼

자서 애를 쓰다가 돌이 나무에 탁 부딪친 소리에 깨친 것입

니다. 탁 부딪치고 깨친 뒤에 이런 소리가 나옵니다. 즉 빗

자루에 부딪친 돌이 대나무에 가서 탁 부딪치니 일경망소

지一境忘所知라. 그전의 분별망상이 싹 가셨습니다. 그 자

리를 보면 정주유식에 가서 실제로 들어가면 소지가 없어

집니다. 일경망소지로 알고 있었던 것이 다 분별망상의 종

자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종자에서 자꾸 나오던 것이 술

술 망소지忘所知가 됩니다. 문수보살을 모시고 있던 선재

동자가 저 남방에서 문수가 되어 미륵보살한테 가서 내가 

온 힘을 다해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마지막으로 가르쳐달라

고 했습니다. 그러자 미륵보살이 손가락으로 튕기는 순간 

오면서 그렇게 고생했던 것이 어디로 가고 없어집니다. 그

런 생각을 하면 다시 가서 해오라고 합니다. 그렇게 고생해

서 온 것이지만 마지막에 그러면 또 가서 배워야 합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근본지로 이치를 알고 후득지로 사를 다 

한다는 것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탁 부딪치니 없어졌는데 다시 닦거나 할 것이 없습

니다. 다시 닦고 다지면 가짜라고 합니다. 보이질 않기 때

문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있어도 항상 본래면목입

니다. 절대로 변변찮은 곳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하는 일마다 자취가 없습니다. 어디까지는 눈으로 

보고 귀에 듣는 그놈이 자꾸 막힐 때 그때 저절로 무심이 

되어버리니까 처처멸處處滅이라. 하는 일마다 자취가 없습

니다. 정말 마땅히 주하는 곳이 없어져 마음가는대로 무심

이 됩니다. 

그런데 아뢰야식이 하는 짓이 청색백색靑色白色밖의 일

이라. 우리가 다 아는 저 사람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찬

을 해주는 것입니다. 칭찬 해주는 것 자체가 멀쩡해야 됩니

다. 우리 몸은 청정한 무엇인가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전

부 지저분한 기운으로 뭉쳐 있습니다. 번뇌망상 종자와 식

의 뭉치가 이 속에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유식입니다. 

충청도 제암스님 얘기를 했는데 잘못하면 그것이 인망미

진因妄未盡하기 쉬워요. 이 속에 무엇이 들어서 그러는 줄 

압니다. 이것은 습기인 줄 모르고 끄집어내어 쓰면 번뇌망

상이 되고 사무처서 없어지면 허물이 안됩니다. 임제종에

서 인망미진하지 않고 잘 깨달은 사람은 그렇게 되지만 깨

닫지 못한 사람은 잘못 가르치게 됩니다. 이 속에 들어있

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가득한 진여법성이 이것을 통해 나

오는 것입니다. 이 속에 들었다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입으로 말하기 전에 소리로 들

어앉았다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부터 소리가 들어

앉은 것이 아니라 이것은 번뇌망상의 습기인 것입니다. 그

래서 우주에 가득찬 청정한 기운이 자극을 받으면 저절로 

나오고 바라를 치면 바로 바라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종

을 치면 종소리가 나오고 전부 만물을 통해서 나오는 것입

니다. 그러면 우주에 꽉 찬 것이 사방을 통해서 나오는데, 

사람의 말은 사람의 기운으로 나오고 종을 치면 종소리가 

나고 벌레는 벌레소리가 나고 사람은 사람소리가 나는데 

이것이 하나를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습기

가 뭉쳤고, 벌레는 벌레습기가 뭉쳤는데 습기를 통해서 벌

레는 벌레소리 사람은 사람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

은 하나지 절대로 낱낱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만물에 실존하는 것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입니

다. 이것을 잘 깨달은 사람이 부처님입니다. 그런데 못 깨

달은 사람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다다

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놈이 누구인가?’

하면서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화두가 전부 그렇게 된 것입

니다. 따로 법이 있는 것으로 알면 안됩니다. 한 가지 방편

으로 화두가 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분필 속에는 분필

가루 뿐이고 콩속에는 콩가루 뿐이지 다른 것이 없습니다. 

나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습기에 젖어서 그것 

때문에 마음을 먹고, 마음이 행동했던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림자만 있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아집이라는 것은 거기

에서 나오는데 이것은 즉 내가 잘 그린 그림자와 같다는 것

입니다. 사람이나 벌레가 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마음에 

찌든 흔적이고 이 몸뚱이는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사람

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마음으로 업으로 지

어낸 한 작품일 뿐입니다. 작품을 가지고 그 사람을 대표

할 수는 없잖아요? 잘 그려진 그림이 그 사람을 대표할 수

는 없습니다. 마음이 만들어낸 그림자인 것입니다. 조각을 

잘하는 어떤 사람이 비둘기 100마리를 조각 했습니다. 그

것은 실제로 100마리가 나무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비둘기가 없는데 비둘기가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요. 아무리 화가가 비둘기를 그리고 조각가가 만들어 놓아

도 만든 작품에는 혼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분의 몸은 작품일 뿐입니다. 벌레 몸이나 사람 몸이나 공화

사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작품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자꾸 

무엇이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 됩니다. 이것을 깨우치면 큰 

소득이 있을 것이고 깨우치지 못하면 내가 이제 까지 한 강

의가 헛일이 되고 여러분도 헛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

아야 됩니다. 속에 있는 것, 즉 우리는 덮여 있어서 작용을 

할 줄 모르지만 깨친 자들은 속에 있으면서 작용을 할 줄 

압니다. 

글자라면 견줄 바가 없을 만큼 많이 아는 사람이 무업스

님입니다. 그런데 무업스님이 다른 글자는 다 아는데 ‘직심

시불直心是佛’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심시불에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네가 모르겠다는 그 마음이 직심이

며 그 마음이 직심시불이다.’ 라고 합니다. 모르는 그 글자

를 쓸 줄을 몰라서 그렇지 아는 사람이 쓰는거나 모르는 사

람이 쓰지 못하는 그 글자는 같은 것입니다. 그 글자가 두 

가지가 아니라 알면 쓰고 모르면 못쓰는 것입니다. 아는 사

람은 불조, 부처님, 도사이고 모르는 사람은 우리 범부들

입니다. 우리 밑으로는 벌레 같은 류가 있습니다. 어떤 사

람이 돈을 많이 벌어서 장롱 속에 넣어두었는데 잊어버렸

습니다. 잊어버렸으니 쓸 줄도 모르고 못씁니다. 장농 속

에 있는 것을 아는 날에는 쓰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

람은 쓰는 것입니다. 원성실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아야 

쓰는데 우리는 잊어버리고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업

스님이 직심시불을 도무지 모르겠다 하니 ‘네가 알지 못한 

그 마음이 바로 직심시불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

음입니다. 또 다른 말을 하면서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어

떤 것이 조사가 서쪽으로 온 뜻입니까?’ 라고 한 제자가 묻

습니다. ‘내가 머리가 아파서 모르니 내일 오면 가르쳐 준

다.’고 하니 제자가 속아 넘어갑니다. 가는 놈이 미친 놈이

지 갈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판단을 해야하는

데 저 문앞에 나가니까 ‘젊은 수좌여!’하고 부르는 것입니

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뒤돌아보는 놈을 옛날 조사가 하는 

대로 한 차례 때려 정신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종신용기從身用器, 이것은 몸에 맞추어서 쓴다는 것인데 

유미능진자有未能盡者요, 능히 다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주자의 글인데 참 좋은 말입니다. 이것은 누구

한테 주는 것도 아니고 사용해도 닳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

서 불성과 다를 것이 없어요. 알면 쓰는 것으로 알아야 됩

니다. 

유식을 제대로 공부하고 나면 법성이 몸에 하나씩 들었다

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깨침

으로 이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또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에 꽉 차서 허공이 생기기 전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나한테서 지금도 나오

고 있습니다. 밑의 꼬리뼈 속에 들어서 작용을 합니다. 저 

날아다니는 새는 날개 속에 그 기운이 사무쳐 있습니다. 그

것은 사람이 써도 나오고 벌레에게서도 나오는데 모두 하나

입니다. 그 자리를 끌어당겨서 쓰지 못하고 자신들의 망상

에 묻혀서 살면 범부가 됩니다. 있든지 없든지 내버려 두고 

알맹이를 쓸 줄 아는 것이 유식공부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

식 강의를 제대로 하려면 한 달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지금 

내 나이가 84살인데 앞으로는 이런 얘기를 못해요. 어쩌면 

이것이 내 평생에 마지막 강의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임

했습니다. 또 내가 직지사 중암에 들어앉자 있으면 아는 사

람이 자꾸 찾아옵니다. 그래서 어디 토굴 하나를 지어서 비

켜갈 생각이오. 이 다음에는 날 만나러 오면 만날 수가 없

습니다. 내가 살아서 쉬는 이 숨이 오늘 밤에 끝날지 내일

까지 갈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것 아닙

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이 몸을 가지고 있을 때 열심히 공

부를 해야 됩니다. 이것이 헛된 몸뚱이라도 이 몸을 통해서 

공부를 해야 하고 이 몸으로 수행을 해야지 이 몸을 놓치면 

공부하기 어렵습니다. 사람 몸을 가졌으니까 이런 강의를 

듣는 것이지 만약에 우리가 미끄러져서 벌레가 되었다면,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강원에서 스님 강의를 들을 수 있겠어

요?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강의는 오늘로써 마쳤지만 직지사에서 이렇게 좋은 

강당을 지원해주었습니다. 이 강당을 주지스님이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나도 한몫했

지만 이 장소를 제공한 주지스님의 공이 큽니다. 그리고 이

번에 강의를 주최한 것은 명심회 스님들인데 그 스님들의 

공도 참으로 큽니다. 그 스님들이 자신의 돈으로 이 책을 

출판한 것입니다. 책뿐 아니라 여러 가지로 마음을 많이 썼

습니다. 어째든 부처님 말씀을 여러분이 잘 알아듣도록 무

진 애를 썼습니다. 마지막으로 강의에 참석한 모든 스님의 

노력에 박수 한번 칩시다. 일주일 이상 여기서 변변찮은 말

을 들어준 것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

랍니다. 유식을 통하여 불교를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이트 정보

상호.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대표. 김성규 사업자등록번호. 514-82-14810 [사업자등록, 법인등록정보 확인]
Tel)053-474-1208 Fax)053-794-0087 E-mail) tongsub2013@daum.net
주소 : 대구광역시 남구 두류공원로 10(대명동)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성규

Copyright ©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All rights reserved.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1,415
어제
7,616
최대
7,694
전체
1,252,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