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강 온 우주에 충만한 하나인 불성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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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강 온 우주에 충만한 하나인 불성자리
그 자리가 한 자리로 보리자리라고 합니다. 수행을 하여
깨치고 나면 일체 만물 속을 부검해서 들어가지 않아도 아
는 자리를 보리자리라고 했는데 그 자리는 또한 변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벌레도 그것이 몸뚱이를 잘라서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몸뚱이 속에 내가 있는 것
은 미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말은 부처님께서 깨닫고 한
소리니까 잘 들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소리이지 내 소리가
아닙니다. 나한테도 벌레한테도 몸만큼 잘라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 그대로 들어가 벌레가 깨쳐도 그대로 부
처인 것입니다. 용녀가 구슬을 드리고 남방에 가서 성불하
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처하고 우리의 차이는 깨어있는
것과 깨어있지 못한 차이로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미타불하면서 염불하는 것도 똑 같은 이치입니다. 그
런데 설명하려니 쉽지가 않습니다. 요즈음은 꼭 화두를 해
야 성불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염불해도 성불합니다. 당나
라 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한 승려가 있었습니다. 스
님이 되어서도 불교 공부는 안하고 그림을 좋아해서 자꾸
뱀을 그렸습니다. 뱀을 그리다 보니 항상 뱀 생각을 했는
데 죽고 나서 그만 뱀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몸에는 60
조의 세포가 있어서 6년 만에 일생을 다 한다고 합니다. 그
러니까 한 마디 말을 할 때도 세포가 여러 개 죽어나갑니
다. 지금 여러분에게 강의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의 세포
는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어나가는 것만큼
다시 생깁니다. 그래서 60조는 줄어들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공기를 한 바가지 퍼서 저쪽으로 옮겨 놓았다
고 퍼낸 곳이 뻥 뚫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원래 하나
이기 때문에 하나의 모양을 퍼내도 다시 차는 것입니다. 그
러니까 여러분의 몸에서도 세포가 끊임없이 죽어나가도 줄
어드는 것은 없습니다. 결국 나가는 동시에 또 생기는 것입
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안심이 됩니다.
화두를 들면 꽉 엉겨있던 육근 육경 육식이 술술 풀리게
됩니다. 화두를 들기 전에는 앞 뒤 모두가 내 생각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런데 화두를 들면 몸뚱이가 안 보이게 됩
니다. 하나인 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저 스님의 머
리가 없어졌다, 팔이 없어졌다, 몸뚱이가 안 보이는 것은
화두를 들면 그 자리에 화두가 들어가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죽을 때 ‘나’라는 입장을 가지
고 있으면 귀신의 눈에 띄여 잡혀가지만 화두를 들면 하나
의 몸뚱이인 내가 없어지니까 귀신에게 보이지 않게 됩니
다. 화두를 들면 없어져 안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게 나라는 것이 보이면 귀신의 눈에 띄여 잡혀갑니다. 화
두를 타파하면 하나인 몸에 나라는 몸뚱이는 없어지는 것
입니다. 그래서 화두나 진언이나 경문을 해도 되기 때문에
할 만합니다. 부처님은 진언을 가지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 그 진언 한마디에 다 들어간 것입니다. 팔만
대장경에서는 손톱 끝에 앉은 먼지와 같다고 했습니다. 진
언 한마디 속에 부처님이 깨달은 전체가 다 들어있기 때문
에 진언이 쉽습니다. 부처님 열반 후 천 년동안 진언을 외
웠습니다. 천 년이 지나 인도에서 달마라는 사람이 중국으
로 와서 새로운 선법을 전합니다. 달마는 법이라는 뜻으로
우주생명체를 의미합니다. 중국에는 노자가 있어 도덕경을
중심으로 한 무위자연설無爲自然說이 있었습니다. 500년
경 중국에서는 달마가 행세를 했는데 인도에 가면 달마의
흔적이 없습니다. 역사적인 달마는 어디서 태어났지요? 달
마는 입에서 입으로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과 다름없는 위
대한 사람이니 달마가 하는 말들이 법이 된 것입니다. 소나
무나 감나무 같은 생명체도 모두 부처인데 그 때까지는 석
가만 부처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벌레 속에도
불성이 꽉 차 있어 깨달으면 모두가 부처입니다. 법을 바로
보면 부처이고 생명 자체가 부처로서 부처가 따로 있는 것
이 아니라 생명자체라는 것입니다. 달마는 법인데 법 법法
자를 씁니다.
앞에서 설명할 때 뱀을 그리고 뱀 생각을 해서 뱀이 되었
다면 여러분도 개나 소를 생각하지 말고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가 되겠지요? 물건을 만들 때에 모양이 보이면 그대
로 따라 갑니다. 우리는 모양을 따라가면서 사는데 평생 따
라가기만 합니다. 그것이 뭉쳐서 더러운 몸뚱이가 되었는
데 자꾸 뭉치면서 변해 갑니다. 변해가는 안에는 종자가 싸
여 있습니다. 부처를 자꾸 생각하면 뭐가 되겠어요? 부처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염불하면 안 된다고 합니
까? 본래 뜻은 모르고 남의 말만 따라 가는 사람이 화두를
해야 부처가 되고 염불하면 부처가 안 되는 줄 알고 있습니
다. 해인사에 종정을 지낸 고암스님이 계셨습니다. 한 번
은 어떤 여자가 와서 한 10년 간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니까
잘 때에도 관세음보살이 있고 아침에 일어나도 관세음보살
이 가득하다고 하니까 고암스님께서 이제 염불은 그만 두
고 화두를 들라고 한 것입니다. 10년을 해서 염불이 자리
를 잡았으면 계속 시켜야지 왜 그것을 없애고 다른 것을 시
키는지 모르겠습니다.
화두라는 것은 아들 딸 하나씩 낳아서 꼭 자신과 같이 만
드는 것입니다. 불교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므로 하던 것을
꾸준히 하면 결국에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나무에 불을
붙일 때도 불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 마찰해야지 불이 일어
나기 전에 쉬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가지만
계속하게 되면 반드시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
서 염불과 참선 모두 부처되는 방법입니다.
나옹스님의 게송중에 ‘부지하처의안문不知何處擬安門’
‘어느 쪽에 문을 달지 알수없구나’라고 했습니다. 부처되
는 법은 문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으로 달마스님은 남쪽에
작은 문을 하나 만들어 놓고 다른 문으로는 들어가지 말고
남쪽문으로만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문이든
들어가면 되지 굳이 안 될 이유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화
두만이 부처된다는 것은 단지 불교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염불을 많이 했습니다.
나옹 스님은 강원도 사람입니다. 중국에 유학 가서 공부
를 하다가 견성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법문을 많이
했습니다. 중국의 4조 도신대사, 5조 홍인대사도 속가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었는데 나옹스님도 부모가 일찍 돌아
가시고 어린 동생을 데리고 있다가 시집을 보냈는 데도 그
매제가 자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나옹스님은 누이에게
염불을 시킵니다. 그런데 누이는 나옹스님만 믿고 게으름
을 피우며 염불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오라버니가 큰 도
인이니 동생이 농땡이 쳐도 오빠 덕에 극락에 갈 때 데리고
가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루는 누이가 오라
버니를 찾아갔는데 마침 나옹 스님이 음식을 많이 장만하
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생 생각에는 자기를 대접하려고 그
러는가 보다 했는데 장만한 음식을 나옹스님이 자기 방으
로 가지고 가서 혼자 다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동생에게는
맛도 안보인 것입니다. 동생이 ‘오라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하자 나옹 스님이 ‘왜 배가 안 부르나?’ 합니다.
그러면서 내 배 부르면 너도 배 부를 줄 알았는데 하는 것
입니다. 내가 배 부른 것이 너와는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오라버니를 믿고 염불을 하지 않는 동생에게 도를 닦거나
염불을 하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묘한 가르침입니다.
염불을 처음으로 하는 것을 신염이라 하고 처음으로 참
선하는 사람을 신참이라 합니다. 오래 된 사람은 구참이라
하고 군대에서도 고참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오래됐다는 뜻
입니다. 참선하는 방법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염불
하는 것도 참선하는 것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아미타~불’
이라고 부르는데 교육을 받을 때에는 시청각이 되어야 합
니다. ‘아미타~불’ 이렇게 부르고 아미타불 생각을 해야
하고, 아미타~불 하면서 절을 해야 하므로 3가지 신身, 구
口, 의意 삼업이 다 되는 것입니다.
법장비구가 부처가 되기 위하여 48대원을 세워놓고 실천
한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마
음을 딱 붙여가지고 염불을 하거나, 참선을 하거나, 화두
를 하는 것입니다. 전깃불은 음극선과 양극선이 있어 음극
선 양극선을 떼어 놓으면 불이 안 오고, 함께 붙여 놓으면
불이 켜집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는 놈이 접선
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화두를 들면서 접선도 안하
고 앉아 있으면 불이 안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다른 생각
이 틈으로 들어옵니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가지런히 해야
접선이 됩니다. 생각이 다 해서 생각 없는 곳으로 나아가
면 됩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접선이 되는 것입니다. ‘육문
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에서 육문을 통하여 생명을 키
우고 법성을 키우는 그 기운이 나에게 오면 광명이 됩니다.
그 기운이 깨어 눈에 가고 귀에 갔는데 광명이 하나로 변
하니까 눈에 가도 광명, 코에 가도 광명, 귀에 가도 광명을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문은 광명을 토해 놓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200년 전에 유대치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제자 중에 수여거사인 강위란 사람이 있었습니
다. 강위의 성은 진주 강씨이며 호는 초범인데 그 뜻이 가
을바람에 거문고를 탕탕 뜯고 앉아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
치와 친한 강위는 참선하는 모임인 선우회를 만들었습니
다. 강초범이 어느 해에 금강산 구경을 갔었는데 내금강 구
경을 다 하고 안두재를 넘어서 유점사에 갔었는데 그 곳에
는 연화정이라는 큰 방이 있었습니다. 따뜻한 봄날에 염불
하는 스님인 노전이 앉아서 염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염
불을 하는데 북을 탕 치면 ‘나무아미타~불’ 하는 것입니
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노전 스님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
습니다. 노전스님이 ‘나무아미타~불’ 하고 북을 탕 치니까
그 소리를 듣고 ‘나무아미타불’하면서 자꾸 염불을 하고 있
었던 것입니다. 강초범은 그것을 본 사람이고 그 노전스님
은 보여진 상황이니까 상분이라고 하는데 참 재미있는 표
현입니다. 아미타불이 자꾸 반복되는 줄 아는데 아미타불
이 내속에 들어와서 무량수가 되고, 무량광이 됩니다. 벌
레 속에도 무량광이 들어앉아 있듯이 숲 속에도, 풀 속에도
아미타불이 꽉 차 있는데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멀리 있
는 것이 아니라 부르기만 하면 대답을 합니다. 마음이 몽롱
하여 대상을 잘 알 수 없는 혼침이 되거나, 생각이 밖으로
빙빙 돌아다니는 도거가 될 때도, 또한 마음이 산란하여 집
중이 안 될 때도 아미타~불하고 불러보면 멀리 달아났던
생각을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를 내어 염불하는 고성염불이 좋은 것입
니다. 두 가지가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귀가 먹은 것이 아
니기 때문에 아미타불을 자꾸 부르면 좋은 것입니다. ‘무아
공상無我空相’ 즉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공산무인空山
無人’ 즉 빈산에 사람 없는데 ‘수류화개水流花開’더라. 물
은 흘러가고 꽃은 피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과 경
계인 두 가지가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소도 없어지고 자기
도 없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공산무인인데 수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설공산무인제雨雪空山無人霽’라, 주관과 객
관이 다 없어지는 상태입니다. 육근 육경이 형탈근진逈脫
根塵이 되는 것입니다. ‘우설공산무인제’는 비 오고 난 뒤
경계와 안팎이 다 공한 것입니다. 화두가 되어 둘이 아닌
것으로, 관심을 잡고 보니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미타
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분이라고 하는 것입니
다. 유가설아법의 가짜 얘기는 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마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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