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강 온 우주에 충만한 하나인 불성자리 > 관응스님의 유식특강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관응스님의 유식특강

제10강 온 우주에 충만한 하나인 불성자리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3,121회 작성일 21-08-03 14:34

본문

제10강 온 우주에 충만한 하나인 불성자리



그 자리가 한 자리로 보리자리라고 합니다. 수행을 하여 

깨치고 나면 일체 만물 속을 부검해서 들어가지 않아도 아

는 자리를 보리자리라고 했는데 그 자리는 또한 변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벌레도 그것이 몸뚱이를 잘라서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몸뚱이 속에 내가 있는 것

은 미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말은 부처님께서 깨닫고 한 

소리니까 잘 들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소리이지 내 소리가 

아닙니다. 나한테도 벌레한테도 몸만큼 잘라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 그대로 들어가 벌레가 깨쳐도 그대로 부

처인 것입니다. 용녀가 구슬을 드리고 남방에 가서 성불하

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처하고 우리의 차이는 깨어있는 

것과 깨어있지 못한 차이로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미타불하면서 염불하는 것도 똑 같은 이치입니다. 그

런데 설명하려니 쉽지가 않습니다. 요즈음은 꼭 화두를 해

야 성불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염불해도 성불합니다. 당나

라 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한 승려가 있었습니다. 스

님이 되어서도 불교 공부는 안하고 그림을 좋아해서 자꾸 

뱀을 그렸습니다. 뱀을 그리다 보니 항상 뱀 생각을 했는

데 죽고 나서 그만 뱀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몸에는 60

조의 세포가 있어서 6년 만에 일생을 다 한다고 합니다. 그

러니까 한 마디 말을 할 때도 세포가 여러 개 죽어나갑니

다. 지금 여러분에게 강의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의 세포

는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어나가는 것만큼 

다시 생깁니다. 그래서 60조는 줄어들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공기를 한 바가지 퍼서 저쪽으로 옮겨 놓았다

고 퍼낸 곳이 뻥 뚫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원래 하나

이기 때문에 하나의 모양을 퍼내도 다시 차는 것입니다. 그

러니까 여러분의 몸에서도 세포가 끊임없이 죽어나가도 줄

어드는 것은 없습니다. 결국 나가는 동시에 또 생기는 것입

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안심이 됩니다. 

화두를 들면 꽉 엉겨있던 육근 육경 육식이 술술 풀리게 

됩니다. 화두를 들기 전에는 앞 뒤 모두가 내 생각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런데 화두를 들면 몸뚱이가 안 보이게 됩

니다. 하나인 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저 스님의 머

리가 없어졌다, 팔이 없어졌다, 몸뚱이가 안 보이는 것은 

화두를 들면 그 자리에 화두가 들어가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죽을 때 ‘나’라는 입장을 가지

고 있으면 귀신의 눈에 띄여 잡혀가지만 화두를 들면 하나

의 몸뚱이인 내가 없어지니까 귀신에게 보이지 않게 됩니

다. 화두를 들면 없어져 안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게 나라는 것이 보이면 귀신의 눈에 띄여 잡혀갑니다. 화

두를 타파하면 하나인 몸에 나라는 몸뚱이는 없어지는 것

입니다. 그래서 화두나 진언이나 경문을 해도 되기 때문에 

할 만합니다. 부처님은 진언을 가지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 그 진언 한마디에 다 들어간 것입니다. 팔만

대장경에서는 손톱 끝에 앉은 먼지와 같다고 했습니다. 진

언 한마디 속에 부처님이 깨달은 전체가 다 들어있기 때문

에 진언이 쉽습니다. 부처님 열반 후 천 년동안 진언을 외

웠습니다. 천 년이 지나 인도에서 달마라는 사람이 중국으

로 와서 새로운 선법을 전합니다. 달마는 법이라는 뜻으로 

우주생명체를 의미합니다. 중국에는 노자가 있어 도덕경을 

중심으로 한 무위자연설無爲自然說이 있었습니다. 500년 

경 중국에서는 달마가 행세를 했는데 인도에 가면 달마의 

흔적이 없습니다. 역사적인 달마는 어디서 태어났지요? 달

마는 입에서 입으로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과 다름없는 위

대한 사람이니 달마가 하는 말들이 법이 된 것입니다. 소나

무나 감나무 같은 생명체도 모두 부처인데 그 때까지는 석

가만 부처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벌레 속에도 

불성이 꽉 차 있어 깨달으면 모두가 부처입니다. 법을 바로 

보면 부처이고 생명 자체가 부처로서 부처가 따로 있는 것

이 아니라 생명자체라는 것입니다. 달마는 법인데 법 법法

자를 씁니다. 

앞에서 설명할 때 뱀을 그리고 뱀 생각을 해서 뱀이 되었

다면 여러분도 개나 소를 생각하지 말고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가 되겠지요? 물건을 만들 때에 모양이 보이면 그대

로 따라 갑니다. 우리는 모양을 따라가면서 사는데 평생 따

라가기만 합니다. 그것이 뭉쳐서 더러운 몸뚱이가 되었는

데 자꾸 뭉치면서 변해 갑니다. 변해가는 안에는 종자가 싸

여 있습니다. 부처를 자꾸 생각하면 뭐가 되겠어요? 부처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염불하면 안 된다고 합니

까? 본래 뜻은 모르고 남의 말만 따라 가는 사람이 화두를 

해야 부처가 되고 염불하면 부처가 안 되는 줄 알고 있습니

다. 해인사에 종정을 지낸 고암스님이 계셨습니다. 한 번

은 어떤 여자가 와서 한 10년 간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니까 

잘 때에도 관세음보살이 있고 아침에 일어나도 관세음보살

이 가득하다고 하니까 고암스님께서 이제 염불은 그만 두

고 화두를 들라고 한 것입니다. 10년을 해서 염불이 자리

를 잡았으면 계속 시켜야지 왜 그것을 없애고 다른 것을 시

키는지 모르겠습니다. 

화두라는 것은 아들 딸 하나씩 낳아서 꼭 자신과 같이 만

드는 것입니다. 불교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므로 하던 것을 

꾸준히 하면 결국에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나무에 불을 

붙일 때도 불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 마찰해야지 불이 일어

나기 전에 쉬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가지만 

계속하게 되면 반드시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

서 염불과 참선 모두 부처되는 방법입니다. 

나옹스님의 게송중에 ‘부지하처의안문不知何處擬安門’ 

‘어느 쪽에 문을 달지 알수없구나’라고 했습니다. 부처되

는 법은 문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으로 달마스님은 남쪽에 

작은 문을 하나 만들어 놓고 다른 문으로는 들어가지 말고 

남쪽문으로만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문이든 

들어가면 되지 굳이 안 될 이유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화

두만이 부처된다는 것은 단지 불교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염불을 많이 했습니다. 

나옹 스님은 강원도 사람입니다. 중국에 유학 가서 공부

를 하다가 견성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법문을 많이 

했습니다. 중국의 4조 도신대사, 5조 홍인대사도 속가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었는데 나옹스님도 부모가 일찍 돌아

가시고 어린 동생을 데리고 있다가 시집을 보냈는 데도 그 

매제가 자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나옹스님은 누이에게 

염불을 시킵니다. 그런데 누이는 나옹스님만 믿고 게으름

을 피우며 염불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오라버니가 큰 도

인이니 동생이 농땡이 쳐도 오빠 덕에 극락에 갈 때 데리고 

가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루는 누이가 오라

버니를 찾아갔는데 마침 나옹 스님이 음식을 많이 장만하

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생 생각에는 자기를 대접하려고 그

러는가 보다 했는데 장만한 음식을 나옹스님이 자기 방으

로 가지고 가서 혼자 다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동생에게는 

맛도 안보인 것입니다. 동생이 ‘오라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하자 나옹 스님이 ‘왜 배가 안 부르나?’ 합니다. 

그러면서 내 배 부르면 너도 배 부를 줄 알았는데 하는 것

입니다. 내가 배 부른 것이 너와는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오라버니를 믿고 염불을 하지 않는 동생에게 도를 닦거나 

염불을 하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묘한 가르침입니다. 

염불을 처음으로 하는 것을 신염이라 하고 처음으로 참

선하는 사람을 신참이라 합니다. 오래 된 사람은 구참이라 

하고 군대에서도 고참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오래됐다는 뜻

입니다. 참선하는 방법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염불

하는 것도 참선하는 것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아미타~불’

이라고 부르는데 교육을 받을 때에는 시청각이 되어야 합

니다. ‘아미타~불’ 이렇게 부르고 아미타불 생각을 해야 

하고, 아미타~불 하면서 절을 해야 하므로 3가지 신身, 구

口, 의意 삼업이 다 되는 것입니다. 

법장비구가 부처가 되기 위하여 48대원을 세워놓고 실천

한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마

음을 딱 붙여가지고 염불을 하거나, 참선을 하거나, 화두

를 하는 것입니다. 전깃불은 음극선과 양극선이 있어 음극

선 양극선을 떼어 놓으면 불이 안 오고, 함께 붙여 놓으면 

불이 켜집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는 놈이 접선

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화두를 들면서 접선도 안하

고 앉아 있으면 불이 안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다른 생각

이 틈으로 들어옵니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가지런히 해야 

접선이 됩니다. 생각이 다 해서 생각 없는 곳으로 나아가

면 됩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접선이 되는 것입니다. ‘육문

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에서 육문을 통하여 생명을 키

우고 법성을 키우는 그 기운이 나에게 오면 광명이 됩니다. 

그 기운이 깨어 눈에 가고 귀에 갔는데 광명이 하나로 변

하니까 눈에 가도 광명, 코에 가도 광명, 귀에 가도 광명을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문은 광명을 토해 놓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200년 전에 유대치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제자 중에 수여거사인 강위란 사람이 있었습니

다. 강위의 성은 진주 강씨이며 호는 초범인데 그 뜻이 가

을바람에 거문고를 탕탕 뜯고 앉아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

치와 친한 강위는 참선하는 모임인 선우회를 만들었습니

다. 강초범이 어느 해에 금강산 구경을 갔었는데 내금강 구

경을 다 하고 안두재를 넘어서 유점사에 갔었는데 그 곳에

는 연화정이라는 큰 방이 있었습니다. 따뜻한 봄날에 염불

하는 스님인 노전이 앉아서 염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염

불을 하는데 북을 탕 치면 ‘나무아미타~불’ 하는 것입니

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노전 스님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

습니다. 노전스님이 ‘나무아미타~불’ 하고 북을 탕 치니까 

그 소리를 듣고 ‘나무아미타불’하면서 자꾸 염불을 하고 있

었던 것입니다. 강초범은 그것을 본 사람이고 그 노전스님

은 보여진 상황이니까 상분이라고 하는데 참 재미있는 표

현입니다. 아미타불이 자꾸 반복되는 줄 아는데 아미타불

이 내속에 들어와서 무량수가 되고, 무량광이 됩니다. 벌

레 속에도 무량광이 들어앉아 있듯이 숲 속에도, 풀 속에도 

아미타불이 꽉 차 있는데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멀리 있

는 것이 아니라 부르기만 하면 대답을 합니다. 마음이 몽롱

하여 대상을 잘 알 수 없는 혼침이 되거나, 생각이 밖으로 

빙빙 돌아다니는 도거가 될 때도, 또한 마음이 산란하여 집

중이 안 될 때도 아미타~불하고 불러보면 멀리 달아났던 

생각을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를 내어 염불하는 고성염불이 좋은 것입

니다. 두 가지가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귀가 먹은 것이 아

니기 때문에 아미타불을 자꾸 부르면 좋은 것입니다. ‘무아

공상無我空相’ 즉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공산무인空山

無人’ 즉 빈산에 사람 없는데 ‘수류화개水流花開’더라. 물

은 흘러가고 꽃은 피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과 경

계인 두 가지가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소도 없어지고 자기

도 없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공산무인인데 수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설공산무인제雨雪空山無人霽’라, 주관과 객

관이 다 없어지는 상태입니다. 육근 육경이 형탈근진逈脫

根塵이 되는 것입니다. ‘우설공산무인제’는 비 오고 난 뒤 

경계와 안팎이 다 공한 것입니다. 화두가 되어 둘이 아닌 

것으로, 관심을 잡고 보니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미타

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분이라고 하는 것입니

다. 유가설아법의 가짜 얘기는 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마칠 

시간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이트 정보

상호.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대표. 김성규 사업자등록번호. 514-82-14810 [사업자등록, 법인등록정보 확인]
Tel)053-474-1208 Fax)053-794-0087 E-mail) tongsub2013@daum.net
주소 : 대구광역시 남구 두류공원로 10(대명동)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성규

Copyright ©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All rights reserved.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5,060
어제
7,407
최대
7,694
전체
1,234,6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