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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응스님의 유식특강

제15강 삼류경(성경, 독영경, 대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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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3,266회 작성일 21-08-03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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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강 삼류경(성경·독영경·대질경)



공부 진도가 너무 느려서 걱정입니다. 마음이 급해 많이 

하려고 애쓰는 바람에 앞뒤의 순서가 바뀌고 말이 그냥 부

딪혀버립니다. 앞말과 뒷말이 부딪혀서 범벅이 된 것입니

다. 그렇지만 약표略標와 광석廣釋부분에서 정리가 되어 

다행입니다. 약표만 제대로 하면 됩니다. 약표는 광석을 

축소해 놓은 것입니다. 아무리 큰 건물이라도 작은 사진 속

에 다 들어갈 수 있듯이 약표만 잘 들으면 됩니다. 약표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석난파집釋難破執으로 앞에서 한 

번 설명을 했습니다. 유가설아법은 약표로써 광석의 내용

이 약표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큰 건물이나 사람도 사진을 

찍으면 눈, 코, 입 등 온몸이 사진 속에 다 들어갑니다. 약

표는 사진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약표를 잘 알면 전

체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 다음 표종귀식標宗歸識을 해야 합니다. 5위 100법이

라고 해도 되지만 간단히 말하면 실아실법으로 유가설아

법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피彼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집착하는 실아실법은 가假라고 했습니다. 실아실법은 식의 

소변이며, 식은 능변입니다. 견분상분은 식의 소변이며, 

식의 소변에 의거해서 실아실법을 가짜로 세운 것입니다. 

식의 소변인 견분상분에 의거해서 아와 법을 가립했다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아실법은 아법을 이야기 한 것입

니다. 책에 보면 창능변체彰能變體라는 말이 나오는데 소

변은 식의 소변이고 식은 능변의 식체라는 것입니다. 견분

상분을 두 가지로 이야기했지만 세상법은 견분상분을 빼

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견분상분의 두 가지가 세상 법을 다 

포섭한다는 말입니다. 널리 말하면 5위 100법입니다. 5위 

100법은 곧 견분상분입니다. 중생은 5위 100법 가운데 실

아라고 집착할 만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연으로 가립되었다는 것은 가짜로 세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집을 지을 때에 서까래가 얹혀 있는 것을 보고 집이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서까래, 대들보 이런 것으로 조립

해 놓은 것을 집이라고 합니다. 서까래, 대들보가 있어 지

어놓은 것입니다. 오온이 화합했다고 해서 그 속에 ‘나’라

고 가히 집착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서

까래와 대들보로 건립해 놓은 것처럼 집이라고 가히 지적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만경을 가지고 몸 속에는 내가 있거나 혹은 서까래로 지어

놓은 것을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아실법을 집착하여 단순히 집착할 만한 아와 법이 없

음에도 불구하고 집착하는 것은 뚱딴지 같은 말입니다. 망

념으로 그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이야기했지만 가

립을 할 때 오온의 법이 가립이나 오온의 법체에 대해서 가

히 아와 법이 없지만 여러분이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 이

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으로 말하면 오온 법이 

가아입니다. 의타기성을 오온법이라 했는데 그것이 바로 

가아입니다. 원성실성은 참말로 있는 것입니다. 원성실성

은 본질이며 의타기성이라는 것은 그림자이며 그림자 속에

는 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온은 의타기성인데 오온 속에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산이나 그 집 속에 있거니 

생각하는 것이 실아실법이라 했습니다. 실아실법을 가정할 

만한 것은 없지만, 단지 중생이 망념을 정념으로 알아 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파헤치기 위해서 삼십송이 나

왔습니다. 식의 소변인 견분상분에 의해서 아와 법을 구별

하기로 했단 말입니다. 그러면 견분상분에 의해서 아와 법

을 구별하는데 능변이 식이라 했으니까 망념이나 식이나 

똑 같습니다. 뜻 정情자와 똑 같습니다. 간혹 정식情識이

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만물의 식으로 능변을 했으니까 만

법은 소변이고, 식이 만법을 토해놓았으니까 이것은 능변

입니다. 능변은 식이며 소변은 견분상분입니다. 

능변에는 오직 세 가지 뿐입니다. 능변체를 들어낸다는 

뜻으로 식체識體라고 합니다. 제 팔식을 이숙식이라 하며 

제 칠식을 사량식이라 하고, 제 육식을 요별경식이라 합니

다. 그러면 능변체의 소변은 삼라만상이 안이비설신의로 

통해서 들어오는 색성향미촉법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갈라지는데 먼저 객관은 밖에 있는 것입니다. 삼라만상을 

5위 100법으로 나누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세상을 하

느님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복잡한 소리는 필요 없습니다. 

똑 같은 소리로 하자면 능변이 세 가지인데, 이 때 유식소

변唯識所變이라는 식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

님이 만물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그 하느님이 무엇인가 제

대로 알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아야 됩니다. 여

기서는 삼라만상을 식이 토해놨다고 하니까 식을 알면 다 

아는 것입니다. 식을 모르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식소변

을 모르고 자꾸 소변이 ‘나’로서 속에 들어앉았다는 것입니

다. 산속이나 집에 ‘나’가 들어앉았다고 착각을 하는 것입

니다. 착각일 뿐 실제로는 없단 말입니다. 

지난 번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생리학자가 조사해보니까 

우리 몸속에는 세포가 60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60

조를 뭉쳐놓은 것이 ‘나’인가 혹은 60조를 나눠서 ‘나’라고 

합니까? 60조를 나누어서 나라고 하면 60조 개의 나가 들

어있는 것입니다. 뭉치는게 하나면 무슨 지킴이가 원숭이 

처럼 들어앉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이 없는데 중생은 있다고 집착을 합니다.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생은 망념을 가

지고 있어서 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온도 그러하여 나무

에 붙으면 나무에서 작용을 하고, 풀에 붙으면 풀에 작용

을 하여 ‘의초부목依草附木’이 된단 말입니다. 이곳에 모

두 앉아 있는 것이 도깨비 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우스운 

일입니다. 이것이 실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있다

고 생각하면서 참선 한다고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

은 놓아버려야 합니다. 참선은 그것을 놓으려고 하는 것입

제15강 삼류경(성경·독영경·대질경)

218 | 관응스님의 유식특강 

니다. 하다보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놓아집니다. ‘무’ 하고 

하루 종일 하다보면 자기가 안보이기 때문에 유령처럼 여

겨집니다. 예를 들어 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 냉기가 심했는

데 나중에 형상들이 점점 없어집니다. 달이 뜨면 달빛에 눈 

녹듯이 다 녹습니다. 저 스님의 머리가 없어진다? 배가 없

어진다? 팔이 없어진다? 그렇게 없어지는 것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주 역력합니다. 이것은 파계사 스님한테 

들었던 아주 재미난 이야기입니다. 파계사에서 있었던 일

이니까 파계사 스님들은 다 압니다. 

오늘은 능소가 갈렸어요. 600자로 된 것을 해석한 것이 

성유식론으로 연비演泌, 요의등了義燈, 술기述記에 내용이 

다 들어있습니다. 성유식론의 3개소三個疏는 글자가 수 만 

자가 됩니다. 유식이라는 말과 삼류경만 알면 됩니다. 유

식이라는 것은 능변하는 식이고 삼류경이라는 것은 소연지

경所緣之境입니다. 능변은 사분이며 소연은 소연지경으로 

삼류경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알아도 300자는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알아야 됩니다. 첫째 사분 삼

류경에서 삼류경은 객관으로 밖에 있는 경계를 삼류로 논

한 것입니다. 첫 번째 성경性境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원

성실성으로 본질이 참으로 있는 것을 말합니다. 본질이 없

는 것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라고 하지만 본질은 없는 

것입니다. 본질이 있으면 나누어서 설명한 오온 법이 가

로 뭉친 것을 실제로 알게 됩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오

온 법은 거짓으로 그림자가 있어 제대로 나타나지 않고 여

러 모양을 사진 찍듯이 한 것입니다. 사진은 사진이지 생물

은 아닙니다. 오온에서 그림자를 의타기성이라 합니다. 여

러분은 천 분의 일도 모르는 원성실성을 내 몸으로 알고 그

림자를 벌레로 알고 있습니다. 일체중생이 밤새도록 집착

을 해도 원성실성은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변동이 있으

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몸으로 매일 착각을 해도 원성실성

은 변동이 없습니다. 여기 스님들은 다 배웠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연인을 부를 때는 성동격서聲東擊西를 하는

데 다른 곳에 가면 동서남북 방향에서 서쪽을 동으로 알았

단 말입니다. 동을 서로 착각을 하면 동이 휙 한 번 돌아서 

서쪽으로 갑니까? 위치는 안 바뀐단 말입니다. 그런데 성

동격서聲東擊西를 했단 말입니다. 깨닫고 보니 내가 서쪽

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 동쪽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東

을 서西로 잘못 알았다고 그것이 돌아갔다가 다시 휙 돌아

오지 않습니다. 변동이 없습니다. 깨닫는데 있어서는 내가 

서쪽으로 갔던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동쪽이었다는 것입

니다. 미했다가 깼다가 해도 동은 동일 뿐입니다. 여러분

이 백 분배하고 천 분배하여도 그 자리는 변하는 것이 아닙

니다. 그런 것을 성경이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원성실

성만 성경이 아닙니다. 원성실성에서 나온 것은 다시 말해

서 부처님 경전은 마음으로 덮어 놓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

다. 마음이라는 보자기를 덮어놓지 않은 것을 성경이라 합

니다. 우리가 식을 가졌지만 팔식이나 제 칠식과 전육식 만

으로도 성경을 안다는 것입니다. 현량으로 모두 알고 있지

요. 아무리 안다해도 성경은 불수심이고 중생은 망심이라. 

정을 가진 심이라고 했습니다. 중생은 망념을 따라가는 놈

입니다. 이것만 분명이 알면 되는데 유식에서는 이것이 나

오지 않습니다. 사분만 얘기했습니다. 

현장이 인도를 다녀와서 중국에서 법상종을 창설합니다. 

규기하고 자기들끼리 속닥속닥해서 삼류경을 얘기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얘기된 것이지 인도에는 없습

니다. 사분삼류가 유식을 바르게 했으니까 이제 삼류경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불수심이라 했습니다. 

그 다음 독영경獨影境이라는 것이 있는데 독영이라는 것

은 그림자입니다. 우리가 몽중귀신이라고 할 때 실제로 본

질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성이라는 것은 본질이며 본

질이 없는 것을 망념이라 하는데 망념으로 그 놈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뭐라고 지적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망념으로 지적하는 것입니다. 실제는 없는데 망념

으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독영경은 홀로 망념해서 

없는 것을 있다고 합니다. 토끼뿔 처럼 실제는 없는 것인데 

그런 유사한 것을 생각하여 본질도 없고 종자도 없는 것입

니다. 실제 종자에서 모양이 나온 것이 성경입니다. 이것

은 종자도 현상으로 된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독영은 유식

경이라고도 합니다. 독영은 유식경의 ‘경’자를 쓸 수 없지

만 독영경이라 합니다. 오직 망심에서 나와 유수심이 된 것

입니다. 이것은 전향이 없는 것을 있다고 망념으로 창조하

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종자도 없고 현행도 없는 것을 독영

경이라 합니다. 

다음 대질경帶質境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질경은 본질

을 띄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자와 본질이 있지만 제대로 모

르는 것입니다. 제 칠식 견분이 제 팔식 견분을 들었으니 

팔식 견분이 있어 그 있는 것을 띄지만 제 팔식 견분이 없

는 망념의 식이지 본질은 아닙니다. 그것을 ‘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대질경입니다. 세상에서 보면 제 팔

식의 견분뿐만 아니라 본래부터 종자가 없는데 있는 것처

럼 나타나는 것이 대질경입니다. 예를 들어서 달 밝은 밤에 

저 건너편 소나무 밑에 큰 바위가 있는데 잘못 보고 ‘아이

쿠 호랑이구나!’ 생각하지만 실은 바위를 호랑이로 잘못 본 

것입니다. 본질을 띄기는 띄었어도 그것을 비치는 능변하

는 마음이 그릇된 사고를 한 것입니다. 어이쿠 저 도깨비가 

나왔구나. 사람이 멈춰 섰구나. 나무꾼인가? 사람인가? 도

깨비도 아닌 그런 것을 대질경이라 합니다. 대질도 경자를 

안쓰지만 대질경이라 하여 통념문이라고도 합니다. 망념과 

본질은 질을 말하는 것이고 착각하는 것은 정으로 인지상

정입니다. 대질은 통념문이라 하지만 이것은 정이며 성경

에서 본질은 성이라 합니다. 성경에서 성은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질경에는 본질이 있지만 착각을 하는 정도가 

1분 혹은 5분 이상 할 수가 있습니다. 정과 정의 말을 듣고 

응하여 따르는 사람으로 그 때 ‘나’로 바뀔 때가 있단 말입

니다. 이것이 삼류경의 이야기입니다.

삼류경을 설명했으니 사분의 삼을 공부한 것입니다. 오

늘은 사분四分을 얘기할 것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분이라는 것은 식의 작용입니다. 사분은 마음의 작용을 

네 가지로 나누어 놓은 것입니다. 사실은 좀 더 뒷편에 가

서 공부하면 얘기가 쉬운데 여기서 미리 하려니까 조금은 

힘이 듭니다. 일본사람 선주가 만든 책인 ‘분량결分量決’이 

있습니다. ‘분량결’은 마음의 작용을 다룬 책입니다. 그 한

도를 요만치하고 저만치한 것은 분한입니다. 여러분은 신

분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신분 말고 또 직분이라

는 표현이 있습니다. 신분은 부모든지 아들이든지 거기에 

맞는 직분을 말합니다. 부모가 되던지 자식이 되는 것을 신

분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스님이냐? 아니냐? 하는 것도 

신분의 표현입니다. 위치를 찾아가는 동시에 권한을 찾아

가는 것을 신분이라 합니다. 마음 한가운데 있습니다. 회

사에는 관리 직분이 있어서 부장이 되면 부하 밖에 작용을 

못합니다. 면장은 면장. 도지사는 도지사. 대통령은 대통

령의 권한이 있습니다. 그것을 분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속에도 그런 분한이 있단 말입니다. 사종으로 차별을 

합니다. 

네 가지는 상분, 견분, 자증분, 증자증분으로 마음의 심

리작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과능변果能變, 인능변因能變

에 대한 설명은 뒷편에 가서 해야 되는데 지금 공부하겠습

니다. 능변은 세 가지인데 그 중에 소변은 5위 100법으로 

수 없이 나누어집니다. 심리작용을 살펴보면 심용분한心用

分限을 사종으로 차별했기 때문에 홀명사분忽明四分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는 심리작용을 능변이라 했습

니다. 변하는 것은 곧 낳는다는 뜻이므로 변출變出했다가 

됩니다. 능연에 대하여 이것은 반연한다라고 합니다. 또한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인식하는 것도 네 가지가 있는데 닳

는 것을 과능변, 인능변이라 했습니다.

인식하려면 능연이 있어야 하는데 능연은 작용입니다. 

대상은 소연입니다. 능연은 마음이고, 대상은 소연이니까 

색에 가까운 것이 많습니다. 심도 있고, 색심도 들어있습

니다. 능연이 어떻게 작용을 하느냐 하면 삼라만상을 반연 

할 때 작용하는 능연과 소연에 상대를 했습니다. 반연한다

는 것은 능연과 소연이 서로 떨어지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

다. 능연이 반연하는 것과 반연해야 되는 것은 동시에 작

용이 됩니다. 떨어져서는 못 산다는 것입니다. 눈이 볼 때, 

눈과 근이 타고 앉아서 봅니다. 밖에 경과 동시에 있어야 

됩니다. 근, 경, 식이 하나로 있어야 됩니다. 근경식이 한

데 붙는 것을 촉이라 합니다. 그림이 늘 그렇게 되는 것이 

식입니다. 이것은 식이며 견분이라 합니다. 견상이고 현상 

또는 업이라고도 합니다. 떨어진 근, 경, 식 세 개가 딱 붙

은 것을 촉이라 합니다. 세 가지가 합하면 삼합으로 촉이 

됩니다. 삼합 다음에 촉이 생겨난다고 해서 삼합생촉설三

合生觸說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다 못 볼 뿐이지 이것

만 보면 박사가 되고도 남습니다. 

다시 그림을 그려볼까요? 식과 식 하나에서 견분이 나

왔습니다. 또 식 하나에서 상분이 나왔습니다. 어제 설명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견분상분은 식이 움직이는 것이

며 주먹을 쥐었을 때는 한 덩어리가 됩니다. 그러나 주먹을 

펴면 손가락이 다섯 개로 나누어져 서로 다른 세상인 팔자

타개八字打開가 되는 것입니다. 어제는 달팽이 머리를 애

기했지만 오늘은 내 손을 보세요. 이것은 하나지요? 그런

데 작용만 하면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견분·상분이

고, 다른 하나는 전상·현상이라 합니다. 견분상분과 현상

은 색과 함께 둘씩 나눕니다. 색은 이것도 둘로 또 나누어

야 합니다. 식의 작용은 자기한테서 나왔지만, 식이 작용

할 때는 상분은 다른 말로 근이라 하는데 근은 근경으로 나

중에 바뀝니다. 이 때 식은 능연이 됩니다. 경계는 소연이 

됩니다. 식은 경계를 반영하는 것이 능연이 되고, 이것은 

소연인데 능연하고는 다릅니다. 능연은 스스로 나타나지만 

소연은 반연하는 것입니다. 식은 경에 대해서 능연이 됩니

다. 식은 능연이 되고 상은 소연이 되고 견은 근이 됩니다. 

식이 반연 할 때는 근이 있어서 식을 관계하면 제대로 반연

을 못합니다. 반드시 근을 깔고 앉아서 작용을 합니다. 식

이 있지만, 눈에 만약 동공이 상하면 못 보는 것처럼 반드

시 근이 성해야 되니까 근을 타고 앉아서 작용을 합니다. 

그러면 식이 경을 대할 때에는 소연이 되고, 근은 경을 타

고 앉아서 작용하며 소연이 아니고 소의所依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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