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불교에서 본 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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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불교에서 본 유식
미리 말하는데 본 강에 들어가기 전에 예비지식을 가져
야 하기 때문에 유식으로 본 불교가 아니고 불교에서 본 유
식을 이야기 할 것입니다. 유식이라는 것은 불교 가운데 손
톱만한 조각이지 불교를 대표 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님을 먼
저 알아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유식이라는 것은 불교 중
에서 손톱만한 한 조각이지 전체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
이 알아야 됩니다. 불교에서 본 유식을 말하는 것이지 유식
에서 본 불교를 이야기 하지 않아요. 시간이 없어 그것 까
지는 얘기 못하지만 다른 학문과 연관이 있어야 학문이 됩
니다. 유식만 가지고 이야기 하면 유식이 안 됩니다. 집 하
나를 봐도 화면이나 지면에 꽉 채워 두면 집을 알아 볼 수
가 없어요. 어느 정도 공간을 두고 만들어야 집이 나타납니
다. 학문이라는 것은 그 학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되 옆
에 것을 인정 하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선문을 주로 이야기 할 것인데, 나는 원래 경전을 가지고
공부하는 강사가 아닙니다. 직지사에서 출가했기 때문에
선을 만났고 평생 선에 대해서 고심을 했습니다. 선에서 보
는 불교 일반, 통불교에서 보는 유식 정도로 이야기 할 것
입니다. 특히 불교 밖의 다른 종교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
고, 철학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유식의 위
치를 이야기해야겠습니다.
불교에서 유식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 부처님의 일대 시
교가 불교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을 서두에서 어
떻게 시작해야할 지 잘 모르겠지만 부처님의 45년 설교에
대해서 여러 종파의 교판이 있습니다. 천태종에는 천태 교
판이 있고 유식종에는 유식교판이 있고 화엄교에는 화엄교
판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설하신 경전을 어느
시기에 어떻게 설했는가를 연구하는 것을 교판이라고 합니
다. 천태종은 부처님의 45년 동안 설하신 법문의 내용을 시
기에 따라 5시로 나눕니다. 때를 5시로 나누는데 부처님은
깨달은 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교를 깨달은 것처럼 들
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입니다. 무식하니까 강의를
듣는 것이지 유식한데 강의를 듣는 것은 아니지요. 미迷하
다는 소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소리입니다. 미迷와 오悟는
차이가 있는데 강원이나 선원에서 미와 오를 판단하지 않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평생을 공부해도 헛일입니다. 미
와 오는 확실히 다른 것입니다. 깨달으면 인생이 어떻게 보
이고 깨닫지 못하면 어떻다는 것을 쉽게 이야기 해보겠습니
다. 눈을 한 번 감아보세요. 또 떠 보세요. 눈을 감았을 때
와 떴을 때 어때요? 보이는 것이 같습니까? 다르지요? 즉
눈을 감고 보니까 평생을 봐도 모르는 것입니다. 미한 생
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미한 것인가? 미
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어떻게 생겼는
지 모르지요? 몸뚱이 뿐 아니라 생명자체가 사는 자리, 즉
자성 자리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사는 자리를 모
르면서 어떻게 살 수가 있어요? 사는 자리를 모르는데 어떻
게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겠어요? 불교에서 불자는 깨달았
다는 것이므로 알고 사는 종교이지 모르고 살면 안됩니다.
생명의 당체를 알아야 됩니다.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 앉아 있는 사람 중에는 생명 당체를 아는 사람이 하나
도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모르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것
과 아는 것이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은 비교가 안됩니다. 사람들은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의 값
을 똑 같이 계산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의 생각과 깨닫지 못한 사람의 생각은 하늘
과 땅 차이입니다. 깨지 못한 사람은 몸뚱이를 생명으로 압
니다. 몸 안에 생명이 하나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몸뚱이
를 생명으로 알고 있거나 몸뚱이 속에 생명이 있다는 두 가
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도 몸
뚱이를 오온이라고 했습니다. 오온은 불교의 문자가 아닙
니다. 인도에서는 오온이라는 말을 불교와 상관없이 사용
합니다. 오온을 생명이라고 보는 학문이 있는데 그것을 오
온아라고 하여 오온에 즉卽해서 나를 본다는 뜻입니다. 몸
뚱이와 상관없이 몸뚱이 전에도 생명은 있었고 몸뚱이 후
에도 생명은 있기 때문에 오온을 떠나서 내가 있다는 것을
이온아離蘊我라고 합니다. 부처님 나시기 전에도 이런 학
문을 가지고 많은 종교와 철학자가 고민하였다는 말입니
다. 전변설轉變說이라든지 적취설積聚說은 인도학문에 나
오는 말입니다. 그것을 다 배우면 좋겠지만 사실 이것 한
가지라도 이해하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여
러분이 어느 정도 아는 것으로 여기고 강의를 하겠습니다.
부처님 나시기 전에 여섯 부류의 사상들이 있었습니다.
견해를 따지는 것은 여섯 이견이고 사람을 중심으로 하면
육사외도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과 견주어 보니 외도들은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학설로 볼 때는 여섯 이견으로 여섯
가지로 나누고 사람으로 볼 때는 여섯 사람이기 때문에 육
사외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당한 철학과 상당한 전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 나기 전의 사상을 알아야 부
처님 사상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나쁜 것도 같이 보아야 합니다.
좋은 것만 있으면 좋은 것을 모르고 또 나쁜 것만 가지고는
나쁜 것이 알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강의라는 것은 반드
시 당치도 않은 것을 가지고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비유라
고도 하는데 콩을 이야기할 때 콩을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
가 안되면 하는 수 없이 팥을 보여줍니다. 그럼 ‘팥과 비
슷한 것이 콩이니라.’ 하고 설명하면 쉽게 알아듣습니다.
콩이 팥과 비슷합니까? 그런데도 여러분은 다 안다고 생각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에 진취가 없습니다. 콩이 팥
과 비슷하다고 해서 다 설명 된 것도 아니고 다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다 아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
은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배우지 않
으면 끝에 가서는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중노릇을 스무 살부터 해서 환갑을 지냈어요. 처음
에는 설교한다며 여기저기 다니면서 본 것이 많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보다 나이가 적으니까 본 것도 나보다 적습니
다. 오뉴월 햇빛을 쬔 것도 내가 더 오래됐습니다. 그러니
내 강의를 들으면서 자신의 생각보다 못하다고 여기지 말
고 여러분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확실하게 파악하
려고 해야지 말로만 따지는 것은 안 됩니다.
불교는 시간문제가 아닙니다. 말 한마디에도 깨칠 수가
있기 때문에 오래해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교에서
도 하느님 사상으로 그것만 알면 되지 자꾸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 닦고 수정을 하고 가미를 해야 훌륭하
게 되는 줄 알며 또 선방에 가서 앉아 있다고 되는 것도 아
닙니다. 중국 마조 스님의 경우에도 자꾸 앉기만을 주장합
니다. 처음부터 입장을 바로 해 놓지 않으면 수레바퀴 같아
지므로 천리고 만리고 바로 가지를 못합니다. 만약 서울을
가는데 수레를 부산 쪽으로 굴리면 어떻게 되지요? 서울에
갈 수 없듯이 학문도 똑 같은 것입니다. 처음부터 바로 배
워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치시고 나서 깨치지 못한 사람한테 설
명을 해봐야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치고 나니 분명 다릅니다. 이것을 설해야
할까 설하지 말아야 할까 망설이기를 삼칠일을 고민했단 말
입니다.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잰 자와
우리가 잰 자는 다릅니다. 삼칠일은 얼마의 시간입니까? 시
간과 초를 따지면 계산이 나오지만 그런 계산이 아니라 깨
친 것과 깨치지 못한 것의 차이 때문에 계산이 안되는 것입
니다. 삼칠 일 동안 사유하고 고민하다가 녹야원에 가서 처
음으로 5비구에게 불법을 설명했다고 했습니다. 또 화엄경
도 삼칠 일 동안 설했다는 것입니다. 화엄경 설명할 때는
이런 말 안했는데 여기서 삼칠 일이라는 것은 우리 범부들
에게는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
님은 삼칠 일 동안이나 화엄경을 설했는 데도 중생이 못 알
아들어서 경악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궁
자경악화엄시窮子警愕華嚴時라고, 풀어보면 화엄경을 설한
것이 무슨 소리인지 몰라 깜짝 놀랐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화엄경시대라고도 합니다. 궁자에게 화엄경을 설한 것이 제
1시이고 그 다음 녹야원에 가서 5비구들이 알아듣기 쉽도
록 불법을 설했습니다. 부처님이 깨치신 것을 그대로 이야
기 한 것이 아니지요. 부처님께서 깨치신 것은 그대로 두고
중생의 수준에 맞추는 것을 수기隨機라고 합니다. 중생에게
비유로 가르쳤는데 그것을 아함경 시대라고 부르는 것입니
다. 12년 동안 부처님께서 깨치신 내용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 맞추어서 설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12년 동
안 무엇을 설명했느냐 하면 즉 중생에게 맞추다 보니 자꾸
억지를 쓰는 것입니다. 중생의 눈에는 산이 보이고, 귀로
물소리가 들리고, 코로는 냄새를 맡고, 혀는 짜다 싱겁다를
알고, 몸뚱이는 촉각을 통해 좋다 나쁘다를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황악산도 보이고 낙동강이 보이는 것을 마치 보
이는 것처럼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에게 부처님은 깨치고
보니까 그것은 없는 것인데 없다고 하니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없다고 하니까 안 통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여기
서 설명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12년 동안은 할 수 없
이 있다고 가정하고 불법을 설한 것입니다.
그 다음 여러분이 아는 대로 불법을 설한 것을 제3시라
고 합니다. 여기서는 시간과 공간을 설명합니다. 무상은
시간이고 무아는 공간입니다. 시간 공간인데 일반 사람들
이 학문을 배워보니까 세상에서 가르치는 것은 물질을 중
심으로 가르칩니다. 세상 학문을 두고 말한다면 눈에 보이
는 것이나 귀에 들리는 것 등 물질뿐인 것으로만 보는 것입
니다.
그러면 정신은 무엇입니까? 물질 속에서 우러난 물질의
기운의 움직임입니다. 그것을 유물론이라고 하는데 실제
있는 것은 물질뿐입니다. 정신은 단지 물질 속에서 우러나
는 기운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교를 그 정도 밖에 볼 수
가 없어요. 정신은 어디서 나옵니까? 정신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정신이 가슴속 심장에서 나온다고 말했
습니다. 지금은 해골 즉 뇌 속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
은 유물론에서 하는 소리이지 철학에서 하는 소리가 아닙
니다. 서양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아는 것은 안식이라 하
고 귀로 듣는 것과 표정이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나 보이는 물질이 우리 눈에는 고요하게 보이
는데 부처님 눈에는 고요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
다.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12년 동안은 고요하게 있
는 것으로 보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을 자성자리라고 하
고 법성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 밖의 학문에서는 이것을 유물론이라고 부릅니
다. 그전에는 실제로 있는 것은 오직 유唯자로 유식에서는
이 유唯자를 써서 다만 ‘이것뿐’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
니다. 유唯자니 단但자니 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하는 것
입니다. 무엇 하나를 두고 나머지 아닌 것을 제除 하는 것,
무엇을 중심으로 하여 선택하고 다른 것은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유단이자唯但二字는 불가타不假他라’ 유자나
단자는 다른 것을 가정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물
질뿐이다’ 하는 것은 하나에서 나온 것으로 이 세상에 물질
이 아무리 많아도 물질을 시초에 놓으며 정신은 두번째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론과 정신은 후천적인 것이며 물
질에서 나온 것으로 근본은 하나입니다. 우리 눈높이로는
안 보이지만 이 우주에는 큰 생명체가 하나 있습니다. 생명
체는 둘이 아닌데 여러분은 생명체가 몸뚱이 속에 하나씩
들어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면
유식론을 알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깨치고 난 뒤에는 깨달음에 이르는 실천방법으
로 팔정도를 가르쳤습니다. 팔정도 첫 머리에 정견이 나오
는데 바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을 바로 보는 정견을
가져야 바른생활인 정명正命이 나옵니다. 즉 처음 수레바
퀴가 구를 때 잘 굴러야 하는데 잘못하면 엉뚱한 곳으로 굴
러갑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고 있는 곳이 어딘지 알아요?
자꾸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천
당이나 극락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이 문제
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 죽을 생각밖에 없어요. 정치하는
사람들 보면 저렇게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의심이 날 때
가 있습니다.
다시 유식론으로 들어가 보면 이 세상에 눈의 감각 작용
으로 보이는 산이나, 귀로 들리는 물소리 이런 것은 유식
론이 아니란 말입니다. 본래의 생명체가 하나 있는데 다시
말해서 생물은 살아있는 것이니까 마른 나뭇가지처럼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작용, 생명체가 움직이
는 작용으로 인해 그것이 퍼져서 공간이 생기고 시간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실제로는 없는 것인데 생
명체의 움직임인 파동으로 시간과 공간이 생겼다는 것입니
다. 시간 공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에 의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실제로 시간 공간은 생명체의 요동에 따
라서 퍼지는 파동으로 이것이 유심론입니다. 철학이나 종
교는 유심론이며 일원론입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그림자일
뿐입니다. 물질은 곧 생명의 그림자인 파동으로 생긴 것이
며 있는 것 같지만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실제
로 있는 것은 마음하나 뿐입니다. 그것을 기초로 해서 논설
을 펴고 결론을 맺는 것이 유심론이고 물질을 일원으로 해
서 정신이 퍼져 나온다고 하는 것이 유물론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눈을 감고 아무 것도 안 보일
때에 본질이 담겨 있는 그릇이며, 안으로 향하여 아는 것이
안이비설신의의 육근이고 밖으로 향하면 육경인 색성향미
촉법입니다. 귀로 듣는 고요함, 즉 고요하게 있는 것을 알
기 때문에 법체를 공간적으로 보며 또 법체는 실제로 있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삼세라 하며 이것을 법체라 합
니다. 사실 법체라는 것은 공간인데 거짓이니 참이니 하면
서 습관적으로 공간에 붙여서야 되겠습니까?
법화경에 보면 부잣집 아들이 어려서 가출을 하여 거지
처럼 얻어먹다가 마침내 자기 집에 가서 아버지인 줄도 모
르고 밥을 구걸하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고 머슴을
살게 하여 아들을 되찾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처님을 아
버지에 비유한 것입니다. 거름을 치우고 하루에 몇 푼씩 품
삯을 준 것은 바로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아함경을 설할 때
를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실체가 지옥에 있으며
또한 극락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실체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12년 동안 아함경을 설한
것이지 부처님의 일평생을 설하신 것은 아닙니다. 12년 동
안 설한 아함경은 유치원 시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극락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좋은 일을 해야
하고 나쁜 짓을 하면 지옥에 가게 됩니다. 업과 행동으로
실제로 있는 극락과 지옥이 가까워진다는 것을 업감業感이
라 하고 업으로 감득感得을 한다는 것입니다. 업감연기業
感緣起라는 것은 내가 잘못해서 지옥과 극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고요하게 있는 것을 나한테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감은 업으로 감득感得함을 말합니다.
12년 동안 설법하고 난 후에는 방등시가 됩니다. 방등方
等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공부를 잘하면 이치와 실행을
함께 잡아야 하는 것이 맞지만 보통은 한 가지를 하게 됩니
다. 방등은 널리 장통별원藏通別圓 사교를 설하는 것입니
다. 방자는 넓을 방方자로 강설을 사교로 해서 4 가지 장통
별원을 설하는 것입니다. 등자는 겸할 겸兼자의 의미로 이
둔지기利鈍之機라는 뜻입니다. 균등하게 골고루 입혀 준다
는 뜻입니다. 여기서 둔기는 하근기를 나타내며 이근은 재
주 있는 사람을 골고루 가르치는 것으로 방등교라 합니다.
방자는 원교로 널리 찾는다는 것이고 등자는 균등하게 골
고루 입혀 준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아함시 다음에 설하신 내용이 바로
방등시입니다. 유식론은 방등시에 속합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이 8년 동안 설법한 것을 유식으로 만든 것입니다.
유식을 누가 만들었는가는 다음에 나오겠지만 부처님이 일
생 동안 설법한 시기를 요즘에 비교하면 유치원 다음에 초
등학교인데 바로 그 정도 시기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불교
를 대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전체에서 2학년 정도
의 수준을 설명한 것이지 불교전체로 설명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여기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실제로 있
고 지옥과 극락도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인 안이비설신의의
육근과 색성향미촉법 육경이 없다는 것입니다. 식을 두고
안으로 주관되는 안이비설신의와 밖으로 육경인 색성향미
촉법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식이 일어나면 안으로는 근
이 되고 밖으로는 경이 됩니다. 식이 문제인데 여러분이 모
를 뿐 있다는 것은 오직 식 뿐이고 밖인 색성향미촉법의 경
계는 없습니다. 유식무경唯識無境으로 이것을 가지고 8년
동안 이야기한 것입니다. 8년 동안의 이야기인 방등경의
내용을 보면 잘 모르고 한 것 같고 대승경에서도 모르고 한
것이 많습니다.
불교의 입장에서 본 유식의 상황을 이제 이해하겠습니
까? 유식은 불교를 대표할 능력이 없는 학문입니다. 왜냐
하면 유식은 성불하는 근기가 있고 성불 못하는 근기가 있
기 때문에 불교를 대표할 수가 없습니다. 오성각별설五性
各別說에서는 성불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성불 하지 못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말이 안되는 것으로 학
문으로서 유식무경일 뿐입니다. 유식무경만 가지고 얘기하
면 식도 없는 것입니다. 성불하고 난 다음에 식이 나오면
말이 되겠어요? 유식에서는 성불을 해도 식은 남아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 전체에서 유식을
보아야 합니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나온 학설은 편당된 것
으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유식무경을 잘 들으면 며칠 동
안은 이익을 볼 것입니다. 잘 들으면 득이 되어 염소고기가
되지만 잘못 들으면 개고기가 되어서 못 먹게 됩니다.
유교에서 하는 소리인 ‘천지기대득생天地氣大得生’이라.
하늘과 땅이 생기고 기운은 사는 것입니다. 생이라는 것이
문제인데 바로 사는 것, 우주의 큰 기운은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득우생大得偶生’은 공자님의 말
입니다. 유교에는 그런 말이 많습니다. 불교에서 뿐만 아
니라 어느 종교에서든지 일원으로 봅니다. 언제든지 우주
의 근본은 하나이며 생명의 근본도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몸에 각각의 생명이 하나씩 들어 있다는 생
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깨닫지 못해서 일으키는 생각입니
다. 어떤 것이 생명입니까? 여러분은 몸이 생명이라 합니
다. 곤충인 파리는 파리대로 그것이 모두 생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편할 리가 없
습니다. 온갖 것을 다 갔다 놓고 또 자기들이 다 차지해도
상대적이니까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적이 되어야 합
니다. 유물론은 하나로 보아야 하고 또 생명도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태극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주에 있는 모든 생명의 가장
극단되는 위치에 있는 원리를 태극이라고 합니다. 태극은
안으로는 고요하고 밖으로는 움직이는 동정動靜을 이야기
합니다. 태극기를 보면 윗부분은 빨간색이고 아랫부분은 파
란색으로 그것은 동動하고 고요한 것을 표시 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의 십자가는 시간 공간을 죽인 것 밖에 안되
지만 불교에서의 만卍자는 생명을 키우는 것입니다. 팔랑
개비는 바람이 불면 돌아가서 동그랗게 보여 卍자가 된 것
입니다. 기독교적 삶과는 다르지요? 하나는 동動적으로 보
고 하나는 정靜적으로 보아 전부가 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눈과 코 등은 인간과 같이
생겼는데 손재주가 대단한 사람이지요. 사람도 만들고 만
물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했으며
하느님과 똑같이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느님보다
부족한 것이 없어요. 부처님이 창조한 본 뜻을 모르는 사람
들은 에덴동산에 들어가서 선악과를 따먹어야겠지요. 남녀
가 아랫도리를 가리지 않아도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입니
다. 하나님이 똑같이 만들었는데 그것을 몰랐으니까 원죄
라고 합니다. 모르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모르
는 것이 죄라는 말인데 도둑질 한 사람에게 물으면 도둑질
하는 것이 천하에 제일 좋은 직업이라는 식으로 남이 애써
해놓은 것을 좀 갖다 먹은 것이 죄인가? 라는 식입니다. 파
리는 파리다운 생활을 하고 저 뛰어노는 노루는 배가 부르
면 잠을 잘 뿐 제대로 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육조 혜능스님의 제자 하택은 생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는 놈이 사는 놈이
라는 것입니다. 이 몸을 생명이라고 할 때 밥 먹는 생명 따
로 있고 옷 입는 생명 따로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옷
입는 놈과 밥 먹는 놈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인 것을 모르
는 것입니다. 몸에는 생명이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닙
니다. 하나인데 눈에 가면 보고 귀에 가면 듣는 것입니다.
내 몸인 다리도 마찬가지로 불에 들어가면 그 기운이 뜨거
운 기운이 되고 나무에 들어가면 나무가 되고 돌에 들어가
면 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체란 우주전체에 하나
인 것입니다. 만물에 들어가서 하나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밤에 잠을 잘 때 코에 솜을 넣었다 뺐다 해도 잘 모르지요?
또 위장에 들어온 국이나 잡채를 소화시켜 피를 만드는데
A형인 사람은 같은 음식을 먹어도 A형의 피를 만들고, B
형인 사람은 B형의 피를 만듭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잘 모르지만 도술이라는 말을 들어봤지요. 도술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도 ‘그렇게 되는거다’하고 이야기합니다. 원
인을 모르니까 저절로 된다고 합니다.
불교는 자연설이 없습니다. 반드시 작은 일과 큰 일, 나
쁜 일이든지 그 결과가 생길 때는 반드시 원인이 있어서 그
렇게 된다고 합니다. 원인에 연을 보태서 작동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인연에도 비자연, 비인연으로 나와 있습니다.
유식불교를 선문과 연계해서 설명 할테니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오조 홍인대사가 육조 혜능 스님을 마지막 밤에
불러서 이야기한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육조 혜능이 출
가하기 전에 어느 날 시장에 나무 팔러 갔다가 어느 집에서
금강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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