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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성유식론, 유식삼십송의 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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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624회 작성일 21-08-03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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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성유식론, 유식 삼십송의 논서


유식삼십송의 구조

유식론에 대한 설명은 부처님께서 아함 12년 다음으로 8

년 동안 설한 방등경 계열에서 유래합니다. 그런데 유식론

의 소의경전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서 추려내어 체계

를 세웠다는 유식삼십송은 성유식론의 근본입니다. 91페

이지 중간쯤에 보면 제 7장 유식론의 주소註疏라는 말이 

나옵니다. 유식삼십송이 600글자인데 이것을 잘 해석하여 

100권으로 만듭니다. 다시 100권을 줄여서 10권으로 만

들었는데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현장법사와 규기법사 둘 

밖에 없었어요. 자기들끼리 쑥떡 쑥떡 하고 만들어 놓았으

니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니까 유

식 내용과 체제가 범벅이 되었는데 어떤 대목이 누구의 학

설이고, 어떤 것이 옳고 그릇 된 것인지 판정하기가 어렵게 

된 것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짓을 해놓고는 원본을 

태워버렸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탄생한 것이 성

유식론 10권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좋은 책으

로 중국 당나라 때 현장과 규기한테 직접 배운 사람으로부

터 소개되고 번역된 것입니다. 

일본에 가면 우리나라 사람이 건너가서 지은 법륭사라

는 절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성유식론을 연구하는데 세상

에 이렇게 좋은 책은 없었습니다. 1000년을 연구한 것에 

전부 주석을 달아놓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잘된 책은 없

습니다. 세친보살이 지었다는 유식삼십송 원문을 여기다가 

써놓고 다시 주석을 달았던 것입니다. 성유식론 10권을 만

들고 보니 그래도 모자라는 부분이 있어서 규기가 성유식

론에 대해서 부족한 것을 보충해서 요의등了義燈 13권을 

지었습니다. 처음부터 13권을 지은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장중추요掌中樞要4권을 지었습니다. 장중추요라 하는 것

은 감춰놓고 혼자서만 본 것을 의미합니다. 장중이라는 뜻

은 손바닥 안에 놓아두었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안

보이고 자기만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4권으로 되어 있었

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신라에서 건너간 원측이라는 스님

이 있었는데 세속 이름이 대영이었습니다. 원측이 오히려 

중국 사람들 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현장은 성인에는 못미

치는 사람이라 자기네 족속인 중국사람 규기에게만 가르쳐 

주고 신라 사람인 원측에게는 안 가르쳐 준 것입니다. 순전

히 오랑캐 속성이지요. 그래서 원측은 문지기에게 돈을 주

고 몰래 마루 밑에 숨어서 규기에게 하는 강의를 도청했다

는 것입니다. 원측은 유식강의를 듣고 더 좋은 방향으로 유

식강의를 서술하였습니다. 원측은 성기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기신론起信論을 먼저 보았으니 법성학法性學을 배우

고 나중에 법상학法相學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원측의 융

통성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중국에 가면 성의삼탑이 있는데 현장과 규기와 원측을 

모셔놓은 탑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인 원측

을 더 따랐다는 것입니다. 어쨌던 규기는 대단한 사람으로 

성유식론을 지은 것을 보면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굉장히 

치밀한 사람이었어요. 현장법사가 십삼 년 동안 인도에 있

다가 중국으로 돌아와서 우연히 길에서 어떤 청년을 만났

는데 청년의 눈이 중동重瞳이었습니다. 서양 사람에게 간

혹 그런 눈이 있는데, 눈동자가 맑으면 사람이 둘로 비치고 

물건도 둘로 보이는데 그것을 중동이라 합니다. 옛날에 항

우가 그랬고, 순임금이 중동이었습니다. 눈이 중동인 사람

은 아주 대단한 것입니다. 규기가 중동이었으니 난리가 난 

것입니다. 현장법사가 청년을 불러서 ‘그대는 중 될 생각이 

없는가?’ 하니까 ‘나는 중노릇을 못합니다. 술 안 먹고 고

기 안 먹고 여자 가까이 안 하면 못 삽니다.’ ‘그럼 그런 것

을 허락할테니 중노릇 할래?’ 해서 중이 된 것입니다. 규기

는 스님 중에서도 호걸이었던 것입니다. 인물도 잘났고 외

출을 하면 술 한 수레 싣고, 경 한 수레 싣고, 여자 한 수

레를 싣고 다녔다고 하여 삼거법사三車法師라고도 합니다. 

현장법사는 그래도 규기에게 중노릇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규기도 나중에는 그 버릇을 고쳤습니다. 그래도 유명한 사

람이니까 삼장법사라고 불렀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에 남산에 도선율사가 살고 

있었는데 한 번은 규기법사가 도선율사를 찾아 갔는데 점

심을 먹고 가라고 청했습니다. 도선율사는 손수 밥을 지어

서 먹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하늘에서 천녀가 밥을 올리

는데 그것을 천공이라 합니다. 천공 받는 것을 자랑하려고 

규기법사를 불러 놓고 점심 대접을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공양 때가 되어도 천공이 안 들어오니까 그만 규기

법사가 가버렸습니다. 규기법사가 가고 나니까 천공이 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빨리 가져오지 않고 왜 지금 가

져오느냐고 하니까 조금 전까지는 화엄신장이 지키고 있어

서 들어올 틈이 없더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술 마시고 

여자를 좋아했지만 규기법사는 법력이 대단했던 사람입니

다. 도선율사는 천공을 받아먹지만 천녀가 규기법사 때문

에 들어 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기가 있는데 자기 혼자만 보는 것이 사기私

記입니다. 공공연히는 못 내놓고 혼자서 남을 가르칠 때 사

사로이 기록해놓고 참고 한다고 해서 사기라고 합니다. 사

기를 한 사람이 죽으면 그것을 강당 앞에 펴 놓고 연구를 

했는데 조선시대의 동화사에 계셨던 인악스님이 그랬습니

다. 전라도에 있었다는 연담스님 같은 이가 모두 사기의 주

인입니다. 

또 요의등了義燈이라 한 것은 앞에서 원측이나 규기같

은 개인의 사상을 말할 때 개인의 소견은 부처님처럼 활달

하지 못하고 좁은 소견이므로 개인의 좁은 소견과 사상을 

깨뜨려 부셔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요의등이라는 것은 원

래 밝은 등잔이라는 뜻입니다. 규기 자신은 밝은 등잔과 같

고 원측의 사상은 개뿔에 불과하여 아주 미미한 것으로 비

하해서 자신을 내세운 것이 요의등입니다. 규기법사의 제

자인 혜소慧沼가 요의등을 지었는데 13권이나 됩니다. 혜

소의 제자인 지주智周스님의 연비演秘라고 한 것이 있습니

다. 지주는 현장의 증손쯤 되겠습니다. 규기법사의 제자인 

혜소가 손자상좌이며 지주가 증손상좌가 됩니다. 손상좌인 

혜소가 고건법당론을 지었습니다. 고건법당론 외에 제파사

상론除破邪相論이 있는데 요의등에서 비판을 한 것입니다. 

성유식론은 이것들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100권을 10권

으로 줄였지만 그 10권도 대단히 많은 분량입니다. 이것을 

처음에는 연배하여 요의등을 하고 또 장중추요 4권에서 베

낀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600자 중에서 우선 300자만 해

석했는데도 이렇게 내용이 많습니다. 이제 600자가 얼마

나 소중한지 알겠지요. 600자를 해석한 성유식론을 다시 

보충해서 해석한 것으로 삼개소가 있습니다. 규기법사가 

지은 장중추요와 혜소가 지은 요의등과 지주가 지은 연비

를 삼개소라고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공부하고 있는 이 책

에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600자를 해석한 것이 이렇게 많은데 일본

에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동학초同學抄는 68권이나 됩니

다. 이런 잘못된 오류가 중국에도 많지만 일본에서는 더 많

습니다. 일본 법륭사에 가면 예전에 한 것을 토씨 하나를 

고치지 않고 지금까지 1200년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중국

에서는 지주智周까지 내려오다가 그 이후 당나라에는 유식

론이 없어져버립니다. 명나라 때에는 지욱법사가 유명합니

다. 연루법사와 같은 사람은 자기 소견대로 해석했기 때문

에 정통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할 이유가 없습

니다. 사실 600자도 많은 것으로 처음에 몇 줄만 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첫 대목에서 유식사상을 밝히고 있기 때문

입니다. 


석난파집釋難破執


119페이지를 보면 거기서부터 유식상을 밝히는 것입니

다. ‘유가설아법由假說我法 유종종상전有種種相轉’이라는 

열 개의 글자가 있습니다. 스무 자가 한 게송인데 반 게송밖

에 안되는 열 개의 글자속에 유식사상이 다 들어 있습니다.

유성내하종有性來下種 인지과환생因地果還生 무정역무

종無情亦無種 무성야무생無性也無生이라. 성性이 있는 데

서 씨가 내리어, 원인되는 곳에 과가 도로 나네. 뜻이 없으

면 또한 씨도 없나니, 성품 없으므로 또한 남도 없느니라.

오조 홍인대사가 육조 혜능에게 써준 게송으로 이 내용

속에 유식사상이 다 들어 있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몰라서 

그렇지 이것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유식삼십송을 안 배워

도 염주 하나 들고도 유식삼십송을 다 얘기할 수 있습니다. 

모르면 못하고 알면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전을 

들고 와도 연관지어 다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뜻을 아는 

사람은 문자를 떼어놓고 그것의 대의를 얘기 할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법성자리인 생명체

입니다. 이것을 유식에서는 원성실성이라 합니다. 원성실

성圓成實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을 삼성이라 하는데 삼성을 다 알면 유식을 다 알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를 통해서 누구한테든지 다 통하는 것

으로 나한테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저기 앞마당에 있는 소

나무의 솔잎 끝부분까지 법성자리가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모양이 있는 것과 모양이 없는 것에도 

다 법성이 꽉 차 있습니다. 경전에는 아주 좋은 소리로 꽉 

차 있습니다. 여러분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외우는 경전에

도 다 들어있습니다. 유식에도 들어있고 화엄경에도 들어 

있습니다. 법성은 태양의 빛이 산에도, 골짜기에도, 물에

도, 돌에도, 다 빈틈없이 비추는 것과 같은 이치로 만물에 

들어있습니다. 

받는 물건은 업의 덩어리로 업상業相이라 합니다. 이것

은 자증분自證分이라고 하는데 유식에서 자증분은 ‘식’ 당

체인데 작용만 하면 안으로 육근이 생기고 밖으로 육경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근과 경은 식에서 나오는 것으

로 모든 중생은 근과 경을 깨치지 못해서 법성 속에 파묻힌 

근경을 깨뜨려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근경에 화두를 대

면 녹아 내립니다. 근경이 녹아들면 세 개가 하나로 보이

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로 못보았기 때문에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못 보았을 뿐입니다. 현장법사가 

책에 써놓은 것을 한 번 보세요. 형탈근진사비상逈脫根塵

事非常이다는 말입니다. 육근과 육경을 멀리 벗어나는 것 

그 일이 심상한 일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보통으로 되는 것

이 아닙니다.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住一場이라, 노끈머

리 이것은 화두로 선두를 잡아서 죄일 때에는 한 번에 바짝 

죄여 무명을 멈추게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불시일번한철

골不是一番寒徹骨’이라. 때에 한 번 찬 기운이 뼈에 사무쳐 

삼동을 지낸 뒤 봄에 피면 생기가 있거든요. 한 번 삼동을 

지내고나야 바짝 고양이 되는 것입니다. 고양이라고 하면 

안 되고 바짝 정진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매

화 밭에 삼동의 차가운 기운이 뼈에 사무치지 않았던들 ‘쟁

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라, 어찌 매화의 코를 찌르

는 은은한 향기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뜻입니다. 

신찬선사가 백장한테 가서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다음

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찬이 몇 년 동안 스승을 떠

나 백장 밑에서 공부하고 돌아와서 은사스님을 시험했습니

다. 하루는 은사스님이 신찬을 불러 목욕을 하겠으니 목욕

물 좀 데우라고 합니다. 은사스님과 신찬은 목욕탕에서 같

이 목욕을 합니다. 신찬이 은사스님의 등을 밀면서 ‘법당

은 썩 좋지만 그 속에 부처가 영험치 못하구나.’합니다. 은

사스님은 속으로 이 놈이 또 엉뚱한 소리를 하는구나 하

고 생각합니다. 목욕을 다한 은사스님이 옷을 갈아입고 의

관을 갖추고 앉아서 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 때 마침 벌 한 

마리가 날아들어서 봉창에 부딪혀 못나갑니다. 그 벌을 보

고 신찬이 한마디 하는데 ‘공문불긍출空門不肯出’이라 문

이 한 쪽에 훤하게 비었는데 못나가고, ‘투창야대치透窓也

大痴’로다 창을 툭툭 부딪치는 것이 크게 어리석도다. 벌

이 100년 동안을 문을 뚫는다 해도 무슨 수로 나가겠습니

까?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은사스님은 신찬

에게 ‘네가 이번에 어디를 다녀왔느냐?’하니 ‘백장스님한테 

다녀와서 뭘 좀 알았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은사

스님이 신찬에게 옷을 갈아입히면서 ‘종을 치고 법상을 차

려라.’ 합니다. 종소리를 듣고 대중들이 모여들자 신찬을 

법상에 올려놓고 백장스님한테 얻었다는 것을 내놓아라고 

합니다. 법문의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영광독로靈光獨

露’하야, 신령스러운 광명이 홀로 비추어 ‘형탈근진逈脫根

塵’이라, 멀리 육근과 육경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근진속에 파묻혀서 사는 것

입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누에가 자기 입으로 실을 토해

서 넓은 허공을 막고 고치 속에 들어앉아서 고치속이 전부

인 줄 알듯이 우리도 육근과 육경속에 들어앉아서 그것이 

전부인 줄 아는 것입니다.

누에고치 속에 든 것은 번데기로 나중에 고치를 뚫고 나

와서 나비가 되어 날아다닙니다. 우리도 육근 육경의 고치

를 뚫고 나와야 견성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앉았으면 그것

이 전체인 줄 알아요. 그 속에 들어앉아서 ‘저 사람 저러는 

것 같구나.’ 하면 그것은 불성이 아니고 아뢰야식일 뿐입

니다. 다음 시간에 아뢰야식이 나옵니다. 그렇게 앉아 있

는 것이 불성인 줄 알고 있습니다. 요즈음 견성했다고 도인 

노릇하는 스님이 너도 불성이 하나 있고 나도 불성이 하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가르치면 안됩니다. 불

성은 여러 개가 아닙니다. 성품은 하나일 뿐입니다. 우리

가 업상으로는 깨치지 못해서 제 7식을 쓰는 것입니다. 불

성이라는 마음을 쓰는 것을 진여자리라 합니다. 진여자리

와 상응이 되는 기운이 부처님의 행동이고 부처님의 말씀

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닫지 못해서 무명 속에 

있는 것입니다. 무명이 아뢰야식입니다. 중생은 무명 속에 

있는 기운을 참 기운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참 기운으

로 알고 불성으로 알기 때문에 너도 불성이 하나 있고 나도 

불성이 하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경전이라도 제대로 좀 봤으면 그런 소리는 안 할텐데 말입

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알고 가르쳐야지 마치 자신의 생각

이 맞는 것처럼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누에의 액체가 입 밖으로 나오면 실이 된다고 했습니다. 

천태지의가 지은 천태사교의에 보면 군화라는 벌레가 있

습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검은 벌레 같은 것입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데 단지 소리가 납니다. 그렇

게만 알면 단박에 깨달을텐데 그것을 못 알아듣습니다. 혹

시 귀를 막고 들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알아

들을 수 있는 것이고 어려운 소리가 아닙니다. 자꾸 특별한 

것이 있는 줄 착각합니다. 몸뚱이 속에 내가 하나씩 들어있

다는 것은 깨닫지 못한 소리입니다. 이것을 오온이라고 하

는데 법 법法자 하나가 있어 나중에 가면 백법으로 나누어

져 오온의 범위를 가지게 됩니다. 나무면 나무 풀이면 풀로 

나무 중에 밤나무란 것이 있는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밤

나무라는 것이 밤나무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 하

나가 밤나무로 통할 때 밤나무 행세를 하고, 소나무로 통할 

때 소나무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생명 하나가 눈으로 통할 

때 보는 것이 되고 귀로 통할 때 듣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허공을 나누어 

넷으로 만들려고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법성자리를 나누

어서 나의 소유물로 만들려고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

이 쪼개져서 사용되는 성질은 업으로 되는 것으로 몸뚱이

가 한덩어리로 붙은 것입니다. 나누어진 조각 하나를 가지

고도 모든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성품 하나를 나눈 것은 

분자가 됩니다. 나누면 분자가 되며 여럿을 모으면 덩어리

가 되어 몸뚱이가 됩니다. 그래서 관련된 것으로 받는 것인

데 그것은 업상으로 받는 것이지 본래는 그런 것이 없습니

다. 잘 알아듣는 사람은 첫 마디에 알아듣습니다. 그러면 

다시 배울 것이 없습니다. 지행합일론은 앞에서도 말했습

니다. 확실히 알아버리면 하지 말라고 해도 잘 합니다. 알

고 깨닫게 되면 내 마음 가운데서 항상 지혜가 나온다는 것

입니다. 아무리 앉아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법성이 현

전이 안 되니까 없는 줄 압니다. 

무상대도인 열반이란 말을 잘 알고 알지요? 열반은 원명

상증조圓明常證照라. 둥글게 훤히 비추어 항상 저렇게 된

다고 그랬습니다. 이승二乘을 구하는 소승들은 그것을 무

작이라 하는데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다

고 합니다. 모든 것이 계속 업을 증진시키는 기교에 속하는 

것입니다. 육식이 육식의 의견대로 하는 것입니다. 불자들

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

려면 계속 정송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으로 기억하는 것

을 송하는 것입니다. 육식이 경근을 통하여 육식으로 나타

내는 의도도 소견밖에 안 된다는 뜻입니다. 

 복잡한 이 책을 다 봐서 무엇합니까? 600자 그것도 많습

니다. 우수수 넘어가고 119페이지에 보면 유가설아법由假

說我法이 나옵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안으로 육근이 생기

고 밖으로 육경이 생기니까 내가 있는 것 같고 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실아실법이 없다는 것입니

다. 없는데 실아실법이 있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몸속

을 살펴보니 몸 속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처럼 들립니다. 

가假로 아와 법을 설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상대

에게 모양을 설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귀경송歸敬頌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이야기하고 오늘은 뒤로 한 장 넘

겨서 116페이지를 보십시오. 제 5장에 귀경송이라고 나

옵니다. 그런데 600자 되는 유식삼십 송은 서분序分, 정종

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삼십 송에

는 간단하게 3분으로 나누어 600자로 해석이 되어 있습니

다. 600자 속에는 몸뚱이인 몸체만 있지 머리도 없고 꼬리

도 없는 것입니다. 특히 중국 사람은 옛날 얘기를 하든지 

글을 만들 때 대개 그 모양을 따서 말이나 글을 만들었습니

다. 이것은 대추씨라고 그린 것인데 대추씨 같습니까? 대

추씨는 뾰족한데 중간이 벌어져 있습니다. 글이 마치 대추

씨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전을 보면 전부 다 이

런 식으로 쓰여 있습니다. 표석결標釋結로 되어 있는데 무

엇을 표한다, 무엇을 해석한다, 무엇을 매듭짓는다 식의 

표석결 방식으로 한 것입니다. 사람도 생긴 것으로 보면 머

리가 있고 몸통이가 있고 발이 있고 짐승은 꼬리가 있습니

다. 여러 가지 모양을 나타내어 사람 속이는 것이지 그것에 

무슨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장난에 놀아나는 것으

로 올바르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의 

혓바닥에 놀아나지 않습니다. 혓바닥을 파는 사람은 시원

찮은 사람입니다. 남의 말에 귀가 얇은 사람은 주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승해勝解가 없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우

리는 언어에 팔려 사는 사람입니다.

서분, 정종분, 유통분 3분의 표석결이 있어야 되는데 

600자에는 서론이 없고 또 끝에 결론도 없습니다. 단순히 

정종분뿐입니다. 성유식론의 앞부분에는 서분 비슷한 내용

을 붙여놨는데 한번 봅시다. 앞에 귀경송이라 되어있습니

다. 성유식론에만 그렇게 되어 있고 유식삼십송에는 없습

니다. 성유식론은 유식삼십송을 해석한 것인데 서분도 있

고 유통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열 사람이 제각각 해

석하고 있습니다. 결론으로는 귀경송 보다는 석결해석본이 

있는데 열사람이 각각 해석했으니 제각각 귀경송이 있는 

것입니다. 논을 짓던지 글을 지을 때나 우리가 편지를 쓸 

때도 반드시 서론 본론 결론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했는

지 몰라도 용하게 귀의삼보로 해놓았습니다. 모두 귀의삼

보로 친구한테 편지를 쓸 때도 삼보에게 귀의한다고 합니

다. 좋은 소리입니다. 귀의삼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론인 

서문을 지을 때에도 열 사람 제각각 귀경송이 있는데 이것

이 귀의삼보 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강의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 할 것입니다. 

이 책의 귀경송은 안혜송입니다. 안혜송은 합유를 한 것

이 아니면서 열 사람 가운데 귀경송이 제일 낫습니다. 그

래서 귀경송을 대표로 뽑은 것입니다. 안혜송이지만 성유

식론 앞 부분에 갔다 놓은 것을 보면 성유식론을 해석한 열 

사람을 대표한 글입니다. 귀경이라는 것은 삼보에게 돌아

가서 공경히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유식성이라 할 때 유식

이란 오직 식의 성은 원성실성으로 마음의 본성을 의미합

니다. 유식에서 성이라 하면 원성실성으로 법성자리인데 

만滿으로는 부처님이요, 분신들인 분分으로 하면 보살들로

서 청정한 자들입니다. 만과 분은 원성실성으로써 표현됩

니다. 청정하다는 것은 깨달은 것이며 깨닫지 못하면 무명

이 됩니다. 유식성에서 만으로 분으로 청정한 자에게 머리

를 조아리는 것이 삼보입니다. 동양 사람은 머리를 조아리

고 입으로 얘기를 합니다. 서양 사람은 손을 이렇게 올리면

서 인사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서로 엉덩이로 한다는 것

은 형식으로 하는 예식입니다. 형식은 다르지만 상대방을 

공경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유식성에 만滿으로 분分

으로 청청한 사람을 일컬을 때 만은 부처님이고 분은 보살

입니다. 성유식론을 놓고 열 사람을 대표로 하여 각각 잘

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식삼십송은 세친이 지었습니다. 

세친의 학설이 삼십송입니다. 삼십송을 해석한 목적은 모

든 유정을 이롭고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아주 멋진 송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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