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제5송 사량능변의 거체출명문, 소의문7, 소연문, 자성행상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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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작성일 21-08-03 18:06 조회 25,063 댓글 0본문
13. 제5송 사량능변의 거체출명문, 소의문칠, 소연문, 자성행상문,
유식의 제8식을 이해하기 위하여 중요한 개념들을 전반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것은 제6식이 작용한 것입니다. 6식을 작용하게 하는 원동력은 제7식 말나식입니다. 제7식이 나라고 생각하고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고 들은 후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수업하면 어떤 학생은 전부 다 알아듣고 어떤 학생은 반도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바탕으로 받아들이고 인식합니다. 나타나게 하는 주인이 제7식입니다. 현재 인식을 보면 ‘나’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알게 됩니다. 제7식보다 더 깊이 작용하는 것이 바로 제8식입니다. 어떤 행동을 하고 작용을 할 때 6식, 7식, 8식이 함께 작용합니다. 6식은 나타나는 현재 의식이고 7식은 현재 의식을 나타나게 하는 원동력이고 그 7식이 있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제8식입니다. 8식의 작용은 너무 미미해서 우리는 잘 모릅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바탕은 제7식입니다. 여태까지 나온 정신, 잠재의식에 대한 분석은 제7식에 대한 논의이고 규명입니다. 원래 청정한 본래 자리가 바로 제8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몸에 들어와서 오염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흔적인 업만큼 그 색으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오염된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라고 나타나는 것은 6식, 나라고 생각하고 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7식, 그의 근본 뿌리가 되는 것은 제8식입니다. 제7식은 제2능변식이라고도 합니다.
제5송에서 제2능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차제이능변 시식명말나 의피전연피 사량위성상’ 이 말의 뜻은 ‘다음은 제2능변이다. 이 식은 말나식이라 이름하고 그것(아뢰야식)에 의지해서 유전하고 그것을 반연한다. 사량하는 것은 자성과 행상으로 삼는다.’입니다.
1. 거체출명문
‘차제이능변 시식명말나’이며, ‘다음은 제2능변이다. 이 식은 말나식이라 이름한다.’입니다.
감지할 수 없는 깊은 의식인 제8식이 작동하면 그 움직임이 제7식에 전달됩니다. 그래서 제7식은 제2능변이며, 이름을 말나식이라고 합니다.
6식은 제7식의 표현입니다. 내 안에 들어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제7식은 뿌리에 있는 제8식의 반연입니다. 자성이란 나 자신의 존재입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행상이란 나라고 하는 것을 주관에 비추어서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음에 비친 객관의 영상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작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표현할 때 나를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남을 도와주자고 할 때 ‘도와주자.’, ‘도와줘서 뭐하게?’하는 것들이 자신의 표현입니다. 나를 지배하는 일관된 모든 의식인 사량하는 모든 것을 잠재의식이라고 합니다. 잠재의식이 바로 행상을 말합니다. 말나식은 심층적 자기집착심입니다. 우리가 평생 나라는 것에서 못 벗어나는 이유가 제7식 때문입니다. 나를 깨트리는 작업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제7식은 아뢰야식에 의해 생기고 그것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것이 사량이라는 식입니다. 끝도 없이 생각하는 것이 제7식이라는 것입니다. 제7식은 사량(생각)하는 것을 본성으로 합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7식이면 나라고 생각되는 것을 표현한 것이 6식입니다. 사량이라고 불리는 7식은 아뢰야식에서 나오지만 자기를 산출한 아뢰야식은 인식하지 못하고 7식을 자기라고 집착합니다. 제7식은 제8식에서 생긴 자신을 나라고 착각하여 나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형성하게 합니다. 말나식은 자신의 근원적 마음인 아뢰야식을 인식대상으로 삼아 그것을 자아라고 그릇되게 생각합니다. 원래 나가 없는데 나가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은 말나식 때문입니다. 이 작용은 의식의 영역으로는 오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작용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아집착심은 선천적인 것이며 이미 생겨나 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2. 소의문칠
‘의피전’이며, ‘그것(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유전하며’입니다.
그것은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아뢰야식이 일으키는 생각을 끊임없이 유전하여 좀 더 분명하게 합니다. 생각을 일으키고 일어난 생각이 어떻게 연속되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즉 마음이 형상화 되는 과정입니다.
이 소의는 네 가지의 인연의, 소연연의, 증상연의, 등무간연의에 의하여 일어납니다.
인연의는 주체에 의해 보시를 하자는 선한 생각을 일으키거나 고기 잡으러 가자는 악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인연의입니다.
소연연의는 이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대상입니다. 이 대상은 작용이 미미합니다.
등무간연의는 보시하자는 선한 생각을 일으킬 때 보시해서 뭘 해 그자가 게을러서 저렇게 사는데 하면 보시하려는 생각이 끊어지게 됩니다. 이때 선한 생각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등무간연의입니다.
증상연의는 보시하자는 생각이 일어났을 때 그 외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이 되어 주는 것이 증상연의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저장창고 들어있는 마음들이 생각으로 형상화되고 지속적으로 그 생각을 하여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자나 깨나 언제나 활동하는 심층 심리입니다. 제7식은 나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나라고 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은 원래 하나이나 너와 나로 분리됩니다. 나와 너의 분리를 깨트리고 관계를 인식하면 제8식을 알게 되고 연기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말나식의 본질은 사량이라 불리는 식입니다. 끝도 없이 생각하는 것이 말나식인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을 본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생각을 합니다. 말나식이 나를 인식하여 항상 생각을 일어나게 합니다. 사량하다는 동사를 명사형으로 번역하면 ‘의’가 됩니다. 의는 의식입니다. 사량은 단순히 생각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심층 심리이기는 하지만 생사 윤회하는 한 언제나 깊고 명확하게 아뢰야식을 자기로 간주하면서 계속 집착하고 있습니다. 말나식은 단순히 생각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활동하는 확고하고 철저한 자아의식입니다.
3. 소연문
‘연피’이며, ‘그것을 반연한다.’입니다.
그것은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아뢰야식이 일으키는 생각을 끊임없이 유전하여 좀 더 분명하게 제6식으로 나타나게 반연을 합니다. 끊임없이 반연함으로써 존재하며 관계하며 유지하는 것입니다.
4. 자성행상문칠
‘사량위성상’이며, ‘사량하는 것은 자성과 행상으로 삼는다.’
사량하는 주체이고 식체인 자증분이 자성이 되며 사량하는 능연의 작용인 견분이 행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념적으로 자기라고 인식하는 작용은 그런 심층적 자아집착심의 하나로 물거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없는데 나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물거품에 불과합니다. 나라고 집착하는 부분만이라도 객관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청정해질 것입니다. 나라고 집착하는 데서 탐욕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든 것을 제대로 못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하는데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을 객관화시켜야 합니다. 잘 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다면 끝없는 탐욕과 집착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어떤 관계에서든지 나의 집착과 탐욕에 따라 행동합니다. 상대방도 똑같습니다. 상대방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나의 입장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연기의 출발입니다. 집착, 탐욕이 객관화 되어 깨트려질 수 있습니다. 제7식은 아무것도 없는 물거품입니다. 원래 나가 없는데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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