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심리학과 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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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작성일 21-07-23 17:04 조회 20,384 댓글 0본문
3. 심리학과 유식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유식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유식의 문제를 현대 과학에서는 심리학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그럼 심리학과 유식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심리학은 일반적으로 우리 마음에서 일으키는 의식, 무의식을 체계화한 것입니다. 유식은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의식을 총 정리한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은 아무리 공부해도 우리의 본질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유식에서는 우리의 깊은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의식은 자신의 주관적인 의도에서 나옵니다. 어떤 사물을 보면 그 순간 눈을 통해 볼 뿐인데, 보고 난 다음 판단하는 것은 의식입니다. 예를 들어 탁자를 봅시다. 탁자를 보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생각으로 판단합니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생각난다거나, 옛 짝꿍을 떠올린다거나, 탁자 때문에 친구와 싸웠던 일 등 각자 나름대로 생각을 일으킵니다. 단지 눈은 대상을 볼 뿐이고 귀는 대상을 들을 뿐이고 코는 대상의 냄새를 맡을 뿐이고 혀는 대상의 맛을 볼 뿐이고 몸은 대상의 감촉을 느낄 뿐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 좋다, 싫다, 나쁘다 등의 판단은 모두 의식이 하는 것입니다. 안이비설신 뿐인 여기에 내 속에 들어있는 어떤 의식과 결부되어 내가 판단을 일으킵니다. 그에 반해 내 의식과 결부되지 않고(응당 소所에 머무르지 않고 그 마음을 일으키는 것) 어떤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것을 무심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도를 깨친 사람을 보고 무심 도인이라고 합니다. 유식 속에는 유심과 무심이 다 들어있습니다.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일으키는 마음과 깨달은 마음에서 일으키는 마음이 전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접근하기 위해 깨달음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알아 보겠습니다.
깨달은 마음을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한 말이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는데 무엇이 부처인가요? 우리의 마음을 바로 볼 수 있는 그 상태가 부처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외별전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도를 얻으시고 45년 동안 법을 설하셨습니다. 45년 동안 법을 설하신 그 내용이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84000이나 되는 경전입니다.
교외별전이란 깨달음의 본질을 경전 밖에서 따로 전했다는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언어를 통해 본질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면 의사 선생님이 처방을 해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처방전만 쳐다보면 병이 낫습니까? 그 처방전을 가지고 약을 먹어야 병이 낫습니다. 경전은 처방전일 뿐입니다. 부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설명했을지 몰라도 그것 자체로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84000이나 되는 경전은 단지 부처가 되는 방법을 설명해놓은 것뿐입니다. 경전 자체는 부처가 아닙니다. 본질은 경전으로 전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불립문자입니다. 불립문자란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업적을 낳을 수 있게 한 것은 기호 언어를 발달시켰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한국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를 아무리 잘 해도 미국에 가면 미국 사람들은 못 알아 듣습니다. 이와 같이 언어는 지역성을 가집니다. 그 지역에 태어나서 그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 익힌 사람은 알 수 있지만 다른 지역에 태어난 사람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학 문제는 한국 학생이 풀어내나 미국 학생이 풀어내나 답은 같습니다. 이 기호 언어는 세계 만국 언어입니다. 수학이라는 기호 언어는 어떤 내용이든 세계 어느 나라에서 전부 통용됩니다. 수학을 바탕으로 모든 지역의 문화가 누적됩니다. 이렇게 인류를 급속도로 발달시킬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기호 언어입니다. 어떤 언어든 분별과 판단을 합니다. 결국 분별, 판단이 우리로 하여금 생멸심을 일으킵니다. 언어를 통해서 받아들이는 모든 것은 생멸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현량과 비량이라는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현량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몸 가운데 안이비설신 이 다섯 가지가 현량입니다. 비량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관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보는 것과는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나름대로 일으키는 생각이 제각각 다릅니다. 이것은 모두 비량입니다. 우리가 감각 기관을 통해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순간 받아들이는 것은 같지만 받아들여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은 다 틀립니다.
제6식 의식, 제7식 말나식은 비량입니다. 제6식 의식, 제7식 말나식에서는 전부 다르게 판단합니다. 자기 속에 누적된 것으로 대상을 판단합니다. 즉 대상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기 속에 저장된 업으로 대상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마음에 든다는 것은 그 사람이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갖고 있는 업에 의해 그 사람이 좋을 뿐입니다. 자기의 업에 맞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냥 있을 뿐인데 우리가 좋다, 싫다 하는 것은 모두 본인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유식에 나오는 전5식, 6식, 7식, 8식을 현량, 비량으로 나누어보면 현량은 전 5식과 제8식이고 비량은 제6식과 제7식입니다. 의식의 모든 분별과 판단은 다르기 때문에 비량입니다. 그러나 바다의 깊은 속과 같은 아뢰야식, 본질로 내려가면 다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조주에게 ‘부처가 무엇인가?’ 묻자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습니다.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던 말을 제6식 의식과 제7식 말나식에서 생각하면 전부 다릅니다. 그러나 제8식 아뢰야식에서 생각하면 그 답은 똑같습니다. 조주가 했던 말이나 다른 누군가 했던 답도 전부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현량이기 때문입니다. 깨치고 도를 이루고 나면 화두의 모든 답이 같습니다. 같다는 것은 정답입니다. 하지만 같다고 해서 모두 같은 답이 아닙니다. 조주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어도 비량인 사람이 ‘뜰 앞의 잣나무’라 하면 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기준 속에서 잘 했다, 못했다가 판단됩니다. 사람들은 똑같은 사건을 가지고 다르게 판단합니다. A와 B가 싸웠을 때 내가 A와 친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무리 똑같은 이야기를 듣더라도 나는 A로 마음이 쏠려 A가 좀 더 잘 했다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만약 B와 가깝다면 B가 맞다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진리, 본질은 어떻게 보더라도 다 같습니다. 예를 들면 6x6이 36이고 7x7이 49인 것은 어떻게 해도 모두 맞습니다. 이와 같이 진리, 본질은 비량이나 현량의 눈으로 보나 전부 같습니다.
유식 30송을 지은 첫 번째 이유는 두 가지 공에 대하여 미혹하고 오류가 있는 사람을 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공은 깨친 마음, 본질입니다. 공을 잘못 이해하면 무기공과 악취공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은 끊임없이 평화롭고(적적) 살아 있어야(성성) 하는데 무기는 아무 생각도 없는 것입니다. 멍청하게 아무 것도 안 하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TV를 볼 때의 상태입니다. 한 군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악취공은 악취를 풍기듯이 잘못된 생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공견(잘못된 생각), 공병(잘못된 생각으로 인한 병)의 위험성에 빠진 것입니다. 공을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무기공이 생기고 대상, 세상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는데서 악취공이 생깁니다.
두 번째 이유는 두 가지 무거운 장애인 번뇌장과 소지장를 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번뇌 망상을 일으킵니다. 내가 일으키는 번뇌망상은 번뇌장이고 대상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 망상은 소지장입니다. 부처가 될 때 나는 비교적 제도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대상을 비롯한 모두를 깨닫게 하고 바로 이해시키는 것은 훨씬 어렵습니다. 우리가 견성을 하려면 번뇌장과 소지장을 해결해야 합니다. 대부분 견성했다고 하는 것은 번뇌장만 해결된 상태고 소지장은 해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열반과 보리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자아와 법에 대한 두 가지 공을 증득하면 장애도 따라 끊어집니다. 공을 터득하게 되면 그에 따라 내가 일으키는 모든 번뇌 망상도 소멸됩니다. 장애를 끊고 나면 두 가지 과가 생깁니다. 바로 열반과 보리입니다. 열반과 보리를 얻으면 끊임없는 지혜, 자비로움, 평화로움이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견성성불을 요즘 말로 표현하면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유와 평화 속에 있지 않습니다. 관계 속에서 조금만 부딪히면 내 마음에 있는 자유와 평화가 무너져버립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롭고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깨친 자의 과보입니다.
번뇌를 끊음으로 참다운 해탈을 증득합니다. 왜 우리는 유식을 공부합니까? 내가 자유롭게 되고 내가 평화롭게 되는 해탈이 목적입니다. 번뇌를 끊으면 해탈을 증득 할 수 있습니다. 미혹한 자에게 유식의 궁극적인 진리를 사실 그대로 알게 하기 위해서 이 유식을 설명합니다. 잘못된 집착들을 없애고 유식의 심오하고 미묘한 도리 속에서 참된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잘못되어 있는 것을 바로 봄으로써 번뇌와 소지장을 끊고 진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주리반특은 부처님 당시 수행자 중 한 명입니다. 인도어로 꿀라빤타까라고 하는데 천민 출신이었습니다. 형도 출가하고 주변 사람들이 출가하니까 따라 출가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형이나 다른 친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잘 외우는데 주리반특은 듣고 나오면 다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외우지 못하는 주리반특은 주변 사람들의 놀림감이 됩니다. 주리반특은 ‘나는 좋다고 따라서 출가했는데 차라리 출가 전 청소하며 살았던 삶이 훨씬 좋은 것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그 후 부처님을 찾아가서 말합니다. “부처님 저는 다시 마을로 돌아가겠습니다.” “왜 그러느냐?” “저는 여태껏 절에 있었지만 부처님 말씀 한 구절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놀림당하며 사는 것보다 마을에 돌아가서 여태껏 살았던 대로 사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 “출가하기 전에 무엇을 했는가.” “청소부였습니다.” “그래 그럼 이왕 마음먹은 거 한 달만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서 내려가거라.” 주리반특이 생각할 때 지금 내려가나 한 달 후에 내려가나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시키는 대로 하기로 합니다. 부처님은 “오늘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고 청소만 해라.”고 합니다. 주리반특은 자신이 잘 하던 것을 시키자 신이 났습니다. 주리반특이 청소한 후에는 절이 매우 깨끗해집니다. 주리반특은 청소를 하면서 부처님께서는 왜 청소를 시켰을까 생각합니다. 마침내 ‘아! 내 마음을 깨끗이 하게 하려고 시키신 것이구나.’하며 부처님께서 청소를 시키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마음의 번뇌를 청소하라는 것이 부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마음의 티끌을 쓸면서 번뇌 망상도 함께 쓸어냅니다. 주리반특은 마음이 청정해지면서 아라한이 됩니다. 부처님은 주리반특이 아라한 과를 터득한 것을 아시고 찾아와 “빗자루는 어떻게 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리반특은 “제 마음의 먼지를 쓸어냈습니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번뇌 망상을 쓸어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리반특은 부처님께 마음 전개에 가장 능숙한 제자라고 칭찬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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