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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유식과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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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5,276회 작성일 21-08-0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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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유식과 연기 


 오늘은 유식을 총정리하는 시간입니다. 전생에 대해 쌍둥이를 통해 과학적으로 접근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전생이 없다고 가정하고 쌍둥이를 각각  다르게 키웁니다. 한 명은 본래 태어난 집에서 키우고 한 명은 유태인 가정에서 키웠습니다. 40년 후에 보니 둘 다 생물학 교수가 되어 있었으며,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열린 세계생물학 학회에서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둘이 입은 옷차림새도 완전히 똑같았습니다. 둘이 전에 만난 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40년 동안 다른 환경에서 자랐는데도 불구하고 둘은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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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단세포생물의 게놈 지도를 풀어보니 단세포 생물이 죽고 살았던 35억년의 역사가 그 속에 들어있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죽었던 흔적들이 축적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전생이나 인과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국 트윈스버그의 쌍둥이 축제에 세계의 많은 쌍둥이가 모여 얼마나 같은지를 자랑합니다. 이와 같이 일란성 쌍둥이는 업과 모습이 거의 같습니다. 그러나 이란성 쌍둥이도 어떤 경우에는 거의 같습니다. 

 만약 연기, 전생, 윤회, 인과를 안 믿는 사람에게는 없다고 하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안 믿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인과는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적용됩니다. 인과는 어느 누구나 피할 수도 없고 속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과를 제대로 알고 대처해야 합니다. 윤회란 끊임없이 되풀이 해서 생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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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는 삼국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이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전생은 고구려의 추남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추남은 점술가였는데 상당히 유명했습니다. 고구려 왕이 그를 불러 실험을 합니다. 함 속에 쥐를 한 마리 넣고 쥐가 몇 마리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추남은 8마리라고 대답했는데 고구려왕은 그것도 못 맞추냐 하고 추남을 죽여버렸습니다. 그런데 신하들이 가만히 보니 쥐의 배가 부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쥐의 배를 갈라보자고 청했습니다. 쥐의 배를 갈라보니 7마리의 새끼가 나왔습니다. 추남은 쥐의 수를 맞추었으나 억울하게 죽은 것이었습니다. 추남은 죽기 직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만약 나를 죽이면 나는 다음 생에 장수로 태어나서 고구려를 꼭 멸망시키겠다.”  추남은 뒷날 김유신 장군으로 태어났습니다. 김유신과 추남은 아무런 관계성도 없습니다. 이번 생은 김유신 장군이지만 다음 생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주체가 없이 계속 윤회를 반복합니다. 이런 윤회를 무아윤회라고 합니다. 내가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내 업이 윤회하는 것입니다. 이번 생에 내가 살았다면 다음 생은 나의 흔적을 갖고 다른 누군가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내 삶을 보면 전생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내 생을 돌이켜 보면 나의 다음 생(내생)이 어떨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 다닐 때 풀 수 있었던 수학 문제는 세월이 한참 지나서도 풀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생에서 내가 해결했던 문제는 다음 생에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생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는 죽다 깨어나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는 것은 역시 아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역시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공부를 하고 수행을 해서 진리를 깨치면 다 해결됩니다. 만약 우리가 이 한 생만 살고 끝이면 공부나 수행은 하지 않아도 그만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끝없이 윤회하는 삶이기 때문에 공부를 안 한 결과는 다음 생에도 이어집니다. 누구는 진리를 얻어 행복하게 잘 사는데 진리를 얻지 못하여 세세생생 불행하게 살게 되는 겁니다. 이 생에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다음 생에도 똑같이 살게 됩니다. 그래서 공부와 수행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공부, 수행하는 습을 만들어 놓아야 다음 생에 더 낫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연기를 말씀하실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생멸한다고 했습니다. 나라고 할 만한 주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생멸하고 변화하는 것(무상)입니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본질을 알면 명(明)이라고 하고 모르면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무명입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생깁니다. 내가 알고 있는 범위만큼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만약 70%를 알고 있다면 70점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본질에 대해서 아는 것만큼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수억 겁 동안 쌓아온 업만큼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능력과 본질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내 속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밖으로 나와봐야 알 수 있습니다. 나의 행동이나 사고를 통해서 어떤 업과 능력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연기입니다. 존재와 본질에 대해서 명쾌하게 아는 것이 연기입니다. 인생의 모든 것은 판단입니다. 삶의 모든 분별심이 판단입니다. 우리는 갖고 있는 업, 능력만큼 판단합니다. 그 판단이 정견, 바른 것이라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연기를 하면 정견이 됩니다. 정견이 아닌 것은 아집입니다. 자기 고집, 자기 생각입니다. 일반 중생들은 평생 자기 생각이라는 우물 속에서 살아갑니다. 객관성과 보편성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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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통 속에는 기름 밖에 없습니다. 통을 부으면 기름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우유통 속에는 우유 밖에 없습니다. 통을 부으면 우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부처와 보살 속에는 선 밖에 없습니다. 나오는 것마다 다 선입니다. 지옥, 악마 속에는 불선 밖에 없습니다. 나오는 것마다 다 불선, 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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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생은 어떤 때는 선이 나오고 어떤 때는 불선이 나옵니다. 중생 속에는 선과 불선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 수행하는 것은 선으로 채우고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알고 선을 끄집어 내야 합니다. 만약 불선이 대부분이고 선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도 선을 끄집어 내야 하는 것을 알고 선을 끄집어 낸다면 선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그 반대인 경우라도 불선을 계속 끄집어 낸다면 속에 선이 많더라도 불선한 사람, 악인이 됩니다. 병은  불선이 형상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 다 다른 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좋은 가르침을 만나 불선을 쓰지 않으면  병 없이 한 평생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만약 나쁜 사람을 만나 불선을 계속 쓰면 건강한 사람이라도 몹쓸 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렇게 불선과 병이 나타나면 다음 생에도 세세생생 그 불선과 병에 의해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선을 더욱 채우고 불선을 줄여가야 합니다. 우리 속에 선이 많으면 타인, 타물에게 항상 베풀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속에 선이 많은 사람은 보시를 잘 합니다. 하지만 속에 불선이 많고 생각이 바르지 않으면 보시를 잘 하지 못합니다. 

 공부, 수행이란 상당히 단순합니다. 단지 그 단순한 것을 계속 반복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잘 하려면 연습해야 하듯이 공부도 계속 반복해야 합니다. 연습도 중요하지만 생각도 해야 합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의 예습과 복습도 그러한 것입니다. 공부나 수행을 잘 하려면 예습과 복습이 중요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는 계급제도가 있었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한 사람들 가운데는 천민들도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주리반특 존자(주다반탁가, 주도반탁가, 주리반타가, 주리반토)가 있었습니다. 주리반특 존자는 부처님께 특수교육을 받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리반특의 형도 출가자입니다. 주리반특의 형이 출가하자 동네 천민들이 다 출가합니다. 주리반특도 ‘평생 청소를 하느니 형과 다른 사람들을 따라 나도 출가해보자.’고 생각합니다. 출가를 하고 약 6개월 정도 지나자 같이 출가를 했던 다른 사람들은 불교의 교리를 잘 배우며 출가생활을 잘 했습니다. 그러나 주리반특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찾아가서 수행을 그만 두겠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유를 묻자 주리반특은 부처님의 말씀을 하나도 모르겠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렇다면 내가 시키는 것을 한 달만 하고 내려가거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주리반특이 속세에서 했던 청소를 시킵니다. 주리반특은 전혀 알 수 없던 것을 하다 그래도 잘 했던 것을 하니까 신이 났습니다. 그렇게 신나게 청소를 하던 주리반특은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왜 나에게 청소를 하라고 했을까?’ 문득 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바로 부처님께서 청소를 시킨 것은 마음을 청소하라고 시킨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리반특은 마음이 청정하게 되어 아라한과를 얻게 됩니다. 부처님의 뜻을 스스로 터득한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주리반특은 그 다음부터는 청소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런 주리반특을 보시고 “빗자루는 어떻게 했느냐?”고 묻습니다. 주리반특은 “제 마음의 먼지를 쓸어냈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주리반특이 반복적으로 청소를 해서 깨달음을 얻었듯이 우리도 공부와 수행을 계속 반복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예습, 복습과 같은 생각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일어나자마자 30분 정도 참선이나 명상을 해봅시다. 그것이 예습, 복습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공부, 수행을 잘 하기 위해서는 공부, 수행이 생활 속에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미묘 비구니가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신통 제일이 목련 존자라면 비구니로 신통이 제일 뛰어났던 비구니이었습니다. 미묘 비구니는 브라만 출신입니다. 당시 인도에서는 아기를 친정에 가서 낳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 미묘 비구니도 남편과 아이와 함께 친정으로 가다가 들판에서 하루를 묵다가 아기를 낳게 됩니다. 아기를 낳고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뱀들이 남편을 물어 죽인 것이었습니다. 미묘 비구니는 어쩔 수 없이 갓난아기를 업고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갑니다. 그러나 가는 길에 강이 있어서 두 아이를 한 번에 데리고 갈 수가 없어서 일단 큰 아이는 기다리게 하고 먼저 갓난아기를 옮겨 놓습니다. 엄마가 돌아오니 큰 아이는 손을 흔듭니다. 미묘 비구니도 손을 흔들었는데 아이는 그것이 오라는 신호인 줄 알고 강물로 뛰어 들어옵니다. 그러나 아이는 미묘 비구니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큰 아이의 시체를 들고 다시 강을 건너와 보니 갓난아기가 들짐승에 물려 죽어 있었습니다. 미묘 비구니는 남편과 두 아이를 모두 잃고 반 실성한 상태로 친정으로 갑니다. 친정에 가 보니 일주일 전에 친정집에 불이 나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친정이 있었던 자리에서 우두커니 있던 미묘 비구니에게 이웃집 사람이 미묘 비구니를 머무르게 해줍니다. 그러다 이웃집 사람이 중매를 서 미묘 비구니에게 새로운 남편을 찾아줍니다. 그렇게 몇 년을 살다가 남편이 갑자기 병사합니다. 당시 미묘 비구니가 살던 곳에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생매장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미묘 비구니는 꼼짝 없이 무덤 속에서 죽을 처지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밤에 도굴꾼이 도굴을 했는데 살아있는 여자가 있는 것입니다. 도굴꾼은 신이 나서 무덤 안에 있던 금은보화와 미묘 비구니를 데리고 갑니다. 그렇게 미묘 비구니는 도굴꾼과 몇 년을 삽니다. 그러나 도굴꾼은 관리에게 잡혀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게 기구한 인생을 살아왔던 미묘 비구니는 완전히 미쳐 왕사성 거리를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러나 미쳐 돌아다니던 미묘 비구니가 부처님을 보는 순간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부처님의 신통으로 제정신으로 돌아온 미묘 비구니는 출가합니다. 그 후 다른 비구니들이 미묘 비구니에게  일어났던 일은 어떤 과보에 의해 일어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미묘 비구니가 말합니다. “내가 전생에 바라문 집안에 태어나서 돈 많은 부잣집에 시집을 가 아이를 낳지 못했다네. 그러자 남편이 두 번째 부인을 데리고 왔지. 두 번째 부인이 아이를 낳자 나는 질투에 눈이 멀어 아이의 정수리에 침을 꽂아 죽여 버렸네. 그러자 남편과 두 번째 부인이 따지자 나는 그렇지 않다고 시치미를 떼었네. 그 때 전생의 내가 한 말이 ‘만약 내가 아이를 죽였다면 내 부모는 불에 타 죽을 것이고 남편은 독사에게 물려 죽을 것이고 아이는 물에 빠져 죽을 것이다.’이었네. 그 전생의 업이 이번 생에 구현된 것이라네.” 그렇게 말하자 다른 비구니들이 그럼 어떻게 부처님을 만났느냐고 묻습니다. “그 때 그 마을에 수행승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탁발을 오면 정성스럽게 대접을 한 그 공덕으로 부처님을 만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네.”라고 합니다. 이어서 “하지만 지금도 내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찌릿한 느낌이 드는데 그것은 아이의 정수리를 찔러 죽인 과보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다음은 연화색 비구니의 이야기를 봅시다. 연화색 비구니는 웃제니성의 부유한 집에서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연화색 비구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연화색 비구니에게 의탁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연화색 비구니의 어머니가 자신의 남편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된 연화색 비구니는 집을 뛰쳐나와 다른 곳에 시집을 갑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 남편은 전 남편 사이에 낳은 딸을 첩으로 데리고 온 것이었습니다. 황당한 운명에 연화색 비구니는 결국 부처님을 만나 출가를 하게 됩니다. 연화색 비구니는 왜 이번 생에 이런 과보를 받게 되었는가 하고 전생을 살펴보았습니다. 연화색 비구니의 전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 가섭불 당시 한 장자가 있었습니다. 그 장자가 바로 연화색 비구니의 전생입니다. 그 장자는 마음씨는 착했으나 뛰어난 인물 때문에 색을 탐하여 홀로 된 장모를 탐하고 아내를 버린 뒤 뭇 여성들을 편력하며 남자 기생이 되었습니다. 연화색 비구니는 전생의 그 업보를 받아 한 남자를 두고 어머니와 딸과 같이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전생에 꽃놀이를 갔다가 거룩한 사문을 만나 환희심을 내고 출가를 원했던 인연으로 연화색 비구니는 부처님을 만나 비구니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부처님 당시 사위성에 동원정사라는 큰 사원이 있었습니다. 이 사원은 위사카 부인이 기증했습니다. 위사카 부인은 왕사성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상당한 거부였습니다. 이 위사카 부인은 사위성의 부호에게 시집을 갑니다. 위사카 부인의 종교는 불교였는데 시집간 집은 다른 종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이 미워서 그 집 사람들은 위사카 부인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겁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사위성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위사카 부인은 시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이제까지 아버님이 저를 종교로 구박하셨는데 부처님을 한 번 만나보고 계속 그렇게 할 것인지 결정하십시오.”라고 합니다. 친정으로 쫓겨가는 한이 있더라도 부처님을 부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나오니까 시아버지도 마지못해 허락을 합니다. 부처님이 집에 찾아온 날 그 집의 후원을 받고 있던 다른 종교의 사람들도 총집결을 합니다. 시아버지는 부처님이 오셔도 나오지도 않고 뒷방에서 부처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기존에 믿고 있던 종교보다 훨씬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위사카 부인의 시아버지는 마음을 열고 불교를 받아들입니다. 불교를 믿고 보니까 몇 년 동안 구박했던 며느리가 그야말로 보살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눈엣가시였는데 다시 보니까 대견하고 바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마음에 들어 녹자모라는 이름을 줍니다.

 녹자모란 시아버지 자신의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어머니같은 며느리라는 뜻입니다. 며느리가 어머니만큼 위대해서 어머니란 명칭을 붙여준 것이었습니다. 위사카 부인의 시아버지가 불교로 돌아선 사건이 사위성에서 불교를 믿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 후 위사카 부인은 부처님과 아난이 있는 기원정사로 찾아갑니다. 위사카 부인은 모피 외투를 입고 부처님을 찾아갔는데 그것은 시아버지가 해준 것이었습니다. 그 모피 외투는 그 나라의 왕비도 입을 수 없는 비싸고 진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위사카 부인은 깜빡하고 그 외투를 기원정사에 놔 두고 왔습니다. 아난이 외투를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아난은 위사카 부인에게 외투를 가져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위사카 부인은  이왕 기원정사에 놔 둔 것,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외투를 절에 기증합니다. 아난은 워낙 귀한 옷이기에 보시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위사카 부인은 시아버지를 데리고 와서 절에 놔둔 외투를 다시 삽니다. 그 돈을 절에 기증한 것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지은 사원이 동원정사입니다. 위사카 부인의 전생을 보니 과거 여러 생부터 널리 베푸는 시주자였고 부처님의 법을 열성적으로 포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전생으로부터 많은 선업을 쌓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마치 화훼 전문가가 농장에서 꽃으로 꽃다발을 만드는 것 같이 아름다운 일이었느니라.”고 칭찬하십니다. 부처님께서 위사카 부인을 칭찬한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원사가 꽃밭에서 꽃을 주워 꽃둘레를 만들 듯 사람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착한 행위를 많이 해야만 한다.’ 이 위사카 부인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선업만큼 중요한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왕사성에서 하루 동안에 전혀 관계없는 세 사람이 죽었습니다. 관리들이 이 사람들이 왜 죽었는지 조사해 봐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관리들이 빔비사라 임금에게 보고를 합니다. 임금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세 사람이 왜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을 찾아가 그 일을 이야기 합니다. 왕사성에서 길을 가던 어떤 나그네가 새끼를 낳은 암소에게 떠받혀 죽었습니다. 그 암소의 주인은 자신의 소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겁이 나서 그 소를 팔아버렸습니다. 그 소를 산 새 주인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못가에서 잠시 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새 주인이 연못 근처에 가자 소가 뒤에서 주인을 떠밀어 물에 빠져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새 주인의 아들이 화가 나서 소를 망치로 쳐서 죽여버립니다. 소를 죽여 도살장에 팔아넘깁니다. 도살장에서 누군가 그 소의 머리를 사갔습니다. 소머리를 산 사람은 소머리를 나무 위에 걸어놓고 그 밑에서 누워 쉽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 소머리가 밑으로 떨어져 그 사람의 머리에 박혀 죽게 됩니다. 소 한 마리가 세 사람을 죽인 꼴이 되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께 왜 그 소 한 마리에게 전혀 상관없던 세 사람이 죽었는가에 대해 묻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들의 전생 인과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 번 생에서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지만 전생에서 죽은 세 사람은 동업자였습니다. 도매 시장에서 물건을 떼어 시골에 가서 팔아 이문을 남기는 봇짐 장사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장사를 하러 어떤 시골 마을에 갔는데 그 마을에서 한 달간 묵게 해 주었던 노파가 이번 생에 그 소가 된 것이었습니다. 노파는 그 세 사람을 정성껏 뒷바라지 해 주며 그들이 마을에 머물며 장사하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괘씸하게도 이 세 사람은 장사 일이 끝나자 그 노파에게 숙박비도 주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노파는 그들의 짐이 없어진 것을 보고 세 명의 장사꾼들을 쫓아갑니다. 노파가 쫓아오자 그들은 어제 숙박비를 주었다며 노파가 치매에 걸린 것이라고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노파가 그 세 사람을 한 대 때려주려고 해도 저쪽은 남자 세 명이라 오히려 무서웠습니다. 노파는 악에 받혀 다음 생에 어떤 몸을 받더라도 꼭 너희들에게 복수하리라 외치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립니다. 악에 받힌 노파가 소의 몸을 받아서 그 세 사람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여태까지 내게 일어났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모두 인과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과와 관련된 일화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런 인과는 연기와 관계가 있습니다. 연기에는 크게 두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끌어당김의 법칙이며 둘째는 인과응보의 법칙입니다. 인과는 연기가 갖고 있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인과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생에서 공부를 하면 다음 생에 공부 하기가 수월합니다. 이렇듯 이번 생에 한 것은 다음 생에도 하기가 수월합니다. 연속성에 준해서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과응보의 응보는 보복성이 있습니다. 인과가 내가 행한 것에 대해 받는 것이라면 응보는 내가 타인이나 타물에 했던 것을 타인이나 타물이 내게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내가 타인이나 타물에게 어떤 행동을 하면 타인과 타물이 그 행동에 걸맞는 것을 내게 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학생의 삶이 크게 달라져 깨달음과 행복을 얻었다면 선생님은 그 학생에게 무엇인가 보답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내가 하지 않았는데 내게 돌아오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선행을 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도 다름이 아니라 그것이 내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이번 생에 부유하게 살고 훌륭한 외모와 능력, 인품을 받은 사람은 전생에 착하게 살고 타인, 타물에게 잘 베푼 응보를 받은 것입니다. 미국의 교육은 대단합니다. 미국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그들에게 기부 즉 보시에 대해 가르칩니다. 미국의 정치인, 거부들이 기부를 많이 하는 것도 그 교육의 덕입니다. 기부, 보시가 몸에 배여 있습니다. 미국이 세계 제일의 국가가 된 것이 그냥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제대로 된 교육이 없으면 다른 동물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동물들을 살펴봅시다. 동물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 밖에 모릅니다. 중생들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와 가족들 밖에 챙기지 않습니다. 이런 삶을 깨트리고 부처의 삶으로 나아가는 데는 교육과 수행이 필요합니다. 아무튼 우리의 삶은 인과응보가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부, 보시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베푼 것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연기는 끌어당김의 법칙이 있습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이란 방향성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원이 있으면 기도를 열심히 합니다. 기도란 나의 원이 이루어지기 위해 온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는 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이 100이라면 자신은 기도나 노력을 10만큼도 안 하는 것입니다. 내 능력 안에서 하는 원은 기도나 노력을 조금만 해도 이루어지지만 능력 밖의 원은 내가 목숨 걸고 해야 이루어질까말까 할 것입니다. 나의 업 안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무기도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내 업의 방향성을 만드는 것입니다. 흩어져 있던 선과 악과 무기가 기도를 통해 하나로 모여 형태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한쪽으로 모인 덩어리만큼 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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