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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제17송 일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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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20,365회 작성일 21-08-03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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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제17송 일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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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식 제17송을 살펴봅시다. ‘시제식전변 분별소분별 유차피개무 고일체유식’ ‘이 모든 식이 전변하여 분별(견분)과 분별되는 것(상분)이 된다. 이것에 의지하여 그것(실아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체는 모두 식 뿐이다.’입니다. 

식의 전변은 세친이 처음 한 말로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식 그 자체입니다. 분별은 내가 일으키는 생각입니다. 상분은 분별되는 것입니다. 주체와 객체, 주관과 객관입니다. 아뢰야식에서 생각이 나오면 견분과 상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실아진법이란 원래 나와 대상이 없다고 가정한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없고 식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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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이 있으니까 내가 있고 대상이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내가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있다고 가설하고 이야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자체분이 전변 된 것인 두 가지 심분(견분과 상분)은 무엇에 의지하여 생기는 것일까요? 이것들은 식이 전변 된 것에 의거하여 가정적으로 나와 법을 세워서 말한 것입니다. 나와 법은 없고 식만이 있을 뿐인데 식을 설명하기 위해 가정하고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식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식을 떠난 별도의 실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직 식만이 존재합니다. 견분은 나, 주관, 보는 것이라면 상분은 법, 객관 보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와 대상입니다. 식의 전변은 분별입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은 다 분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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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이란 것은 유식 30송에서 바수반두가 새롭게 지어낸 식의 전변이라는 것입니다. 바수반두가 바로 세친입니다. 분별이란 우리의 심작용 일체를 말합니다. 그러나 분별은 망분별과 정분별로 나눌 수 있는데, 망분별은 바르지 않은 것이고 정분별은 바른 것입니다. 정견이고 정견이 아닌 것의 차이입니다. 망분별은 그릇된 심작용, 허망한 인식을 의미합니다. 탐진치를 일으키는 분별입니다. 분별은 망분별의 의미로 나쁜 쪽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분별이란 둘로 나누어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원래 아무것도 없는데 나와 대상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7식 말나식에서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주관과 객관의 이원적 대립 위에 주관이 객관을 아타, 피차로 생각하는 작용이 분별입니다. 나와 대상을 설정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분별을 없애야 합니다.

 분별된 것은 원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통 자신의 마음을 떠나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여러 가지 사물은 마음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내가 생각하니까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여러 가지 표상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 나 등의 언어 표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표상에 대응하는 대상이 마음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떠나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와 대상은 전부 실체화된 표상에 지나지 않으며 내 생각에서 만들어져 분별된 것입니다. 내 속에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표상을 갖는 것은 마음뿐입니다. 그래서 분별된 것은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은 오직 식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식입니다. 번뇌와 허망함에 빠진 식은 그 성질을 변화시켜 진실을 꿰뚫어 보는 청정한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식 가운데는 정견도 사견도 있습니다. 청정한 지혜가 된다는 것은 허망하고 올바르지 않은 사견, 식을 없애 올바른 정견, 식만 남게 하는 것입니다. 무부무기로 만드는 것입니다. 원래 본성은 청정한데 살아오면서 쌓인 삶의 흔적, 업이 물들이는 것입니다. 오염된 것을 제대로 보면 오염되지 않은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식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것으로 견성하는 것입니다. 견성한다고 지혜와 복덕을 모두 갖출 수는 없습니다. 이런 지혜와 복덕을 갖추려면 수없이 선행과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환영을 받는 사람들은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수 많은 선행과 자비를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베풀었던 만큼 돌아온 것입니다. 이 미혹의 세계, 현실의 생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비록 마음이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그 마음을 수단으로 하여 실천, 수행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교법을 따르고 요가를 수행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자신의 더러움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속의 더러움을 없애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수행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위빠사나와 사마타입니다. 위빠사나는 관조, 관찰하는 것입니다. 원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사마타는 삼매로 어떤 곳에 내 생각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잘못된 것을 깨뜨리고 본질로 들어가게 해줍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20세기 사람들의 사고 방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과학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본질에 대한 이해를 통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조, 관찰, 집중입니다. 세속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잘 벌기 위해서 관조, 관찰, 집중을 통하면 돈을 벌기 쉬워집니다. 유가행 유식파에서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식, 마음뿐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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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장은 어떻게 증명이 될까요? 보통 부처님의 교설에 근거를 두고 증명하고, 이론에 의한 증명을 합니다. 부처님 교설에 의한 증명은 교증이고 이론에 의한 증명은 이증이라고 합니다. 화엄경에서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다’고  합니다.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말합니다. 이것은 교증입니다. 유식에 대해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한 경전이 해심밀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심밀경에서 자씨 보살(미륵)과 부처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미륵은 부처님께 “위빠사나와 사마타를 통해 견성을 하면 그 마음이 지금 이 마음과 다른 것이 있습니까?”하고 묻습니다. 부처님은 “다른 것이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나는 식의 소연(인연, 원인)은 식의 소현(나타나는 것)이라고 설하기 때문입니다.”고 대답합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통해 깨침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마음 뿐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도 교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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