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제2송 이숙능변의 삼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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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2송 이숙능변의 삼상문
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두 가지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탄산스님이 어느 날 제자랑 길을 갑니다. 길을 가다 보니 큰 냇가가 있는데 전날 비가 와서 그냥 건널 수 없을 정도로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냇가를 건너려는 한 여인이 못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탄산스님은 별 말을 하지 않고 그 여인을 업고 건네 줍니다. 여인을 건너게 해 준 후 각자의 길을 떠납니다. 여인과 헤어진 후 길을 가다가 제자가 묻습니다. “스님 저희들은 출가사문인데 어떻게 여자를 업고 갈 수 있습니까?” 그러자 탄산스님이 “나는 강을 건너고 여인을 내려놓았는데 너는 아직도 그 여인을 등에 업고 있는가?”라고 했습니다. 탄산스님은 이미 내려놓았는데 제자는 마음속에 아직도 업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남악회양과 마조의 이야기를 봅시다. 회양은 육조 혜능의 제자이고 마조는 회양의 제자입니다. 어떤 젊은 승려가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회양의 귀에 들어갑니다. 마침 회양은 자신의 법을 물려줄 제자를 찾고 있었는데 그 소문을 듣고 젊은 승려를 찾아갑니다. 젊은 승려가 바로 마조입니다. 회양은 마조를 찾아갔으나 마조는 공부에 열중한다고 회양을 맞이하지도 않고 그를 기다리게 합니다. 저녁때가 되어서 마조가 화장실에 가려고 나오다가 회양 선사를 보았습니다. 마조가 인사를 하자 회양은 벽돌을 하나 집어 들고 법당 앞의 큰 돌에 갈기 시작합니다. 마조는 그것을 보고 의아해서 회양에게 “뭐하는 것입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남악회양은 “난 거울을 만들고 있네.”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마조는 피식 웃으면서 말합니다. “스님 그 벽돌은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되지 않습니다.” 회양은 그 말을 듣고 말합니다. “그럼 자네같이 하루 종일 앉아 있기만 해서 부처가 되나?” 그 말을 듣고 마조는 깨달은 바가 있어 회양에게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되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회양은 마조에게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소를 치겠느냐? 수레를 치겠느냐?” 이 말을 듣고 마조는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유식 2송을 살펴봅시다. 전 5식은 안이비설신이고 의식인 6식은 요별경식이고 잠재의식인 7식은 사량식이고 본질적인 근본 의식은 제8식 아뢰야식, 이숙식입니다.
2송의 뒤 두 구절을 보면 ‘첫 번째 능변식은 아뢰야식이고 이숙식이며, 일체 종자식이다.’입니다. 제8식을 보면 삼상이란 것이 있는데 삼상은 제8식에 포함되어 있는 자상自相과 과상果相과 인상因相을 말합니다. 제8식을 자상의 입장에서 보면 아뢰야식이 되고, 과상의 입장에서 보면 이숙식이 되고, 인상의 입장에서 보면 일체 종자식입니다.
아뢰야식은 자상자체로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어 장식이라고 합니다. 제7식과 6식이 사용할 수 있는 저장창고와 같은 것입니다.
이숙식은 과상으로 다르게 익는 것입니다. 인과와 응보가 시간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생에 돈 천만 원을 누구에게 빌려주고 못 받았다면 다음 생에 그 누구에게 돈 천만 원을 돌려받는 것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가치의 다른 것으로 받는 것을 뜻합니다.
일체 종자식은 인상으로 다음 생을 받게 하는 원인이 들어 있는 창고입니다. 갑은 교수가 될 확률이 많은 종자가 들어 있으면 다음 생에 교수가 되고, 을은 사업가가 될 확률이 많은 종자가 들어 있으면 사업가가 될 확률이 높음을 말합니다.
6식 의식은 뇌의 활동입니다. 이것들을 잘 제어하려면 명상과 관조를 해야 합니다. 여기서 삼성, 삼량, 삼경이 나옵니다. 우리의 의식은 삼성, 삼량, 삼경과 통해 있습니다. 삼성은 세 가지 성품으로 선, 불선, 무기입니다. 무기는 선도 아니고 불선도 아닌 것입니다. 아뢰야식에 들어가면 선인지 불선인지 무기인지 아무런 분별이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끄집어 내어 쓰면 작용할 때 상대적으로 선, 불선,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작용하지 않고 내 속에 들어 있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주변 환경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만약 내 속에 선이 30%밖에 없고 불선이 70%가 있습니다. 하지만 옆에 착한 친구가 있으면 선만 자꾸 쓰게 됩니다. 자꾸 착한 마음만 일으키게 됩니다. 내가 악한 마음이 아무리 많아도 다른 사람이 보면 아주 착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주변의 환경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내 속에 있는 이 마음들 중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변 사람을 잘 만나 선한 마음을 자꾸 꺼내 쓰면 그 업에 따라 좋은 생으로 태어날 수 있게 됩니다.
삼량은 현량現量, 비량非量과 비량比量입니다. 현량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비량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못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비교할 비의 비량은 유추와 추리로 사물을 아는 것입니다. 전5식인 안이비설신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봅니다. 우리의 의식인 6식과 7식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못 봅니다. 8식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봅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누가 봐도 다 같습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못 보니까 다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깨우치고 나면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 부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됩니다. 이때 현량이란 개념을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깨우친 사람들이 어떤 화두를 던지든 다 똑같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현량에서 진리를 보기 때문입니다.
6식에는 삼경인 세 가지 경계가 있습니다. 삼경이란 성경, 독영경, 대질경입니다. 성경이란 주관이 없이 객관 그대로 보는 세계입니다. 거울을 놔두고 비추면 주관 없이 있는 그대로 비칩니다. 독영경은 주관적인 영향에 의하여 나타나는 망상적인 경계입니다. 아무런 현상도 없는데 망상으로 일으키는 생각입니다. 대질경은 본질은 있으나 본질 그대로는 나타나지 않는 경계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새끼줄이 있다고 합시다. 본질은 새끼줄입니다. 하지만 내가 새끼줄을 보는 순간 뱀이라고 착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대질경입니다. 6식, 의식은 이 삼성, 삼량, 삼경을 모두 느낍니다. 6식은 마음이 일으킬 수 있는 전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삼계에 윤회를 할 때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하는 현상을 6식에서 가장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감정이 6식입니다. 중생이 삼계에 윤회할 때 받는 생사와 선과 불선의 인과는 바로 제6식의 작용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6식이 끝도 없이 작용합니다.
‘상응하는 심소는 51가지이니 선과 불선에 임할 때 각각 그것을 배정하느니라.’의 문장을 살펴봅시다. 51개의 심소를 봅시다. 첫 번째는 변행으로 작의, 촉, 수, 상, 사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눈을 통해 어떤 대상을 봅니다. 그럼 대상이 내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이 왜 들어올까요? 내가 그 대상을 볼 때 내가 그 대상을 인식하게끔 내 의지가 눈을 통해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작의입니다. 작의가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대상을 볼 수 있습니다. 촉이란 감각이 대상에 부딪히는 것입니다. 촉이 작용하면 그 대상에 대한 느낌이 옵니다. 그것이 바로 수입니다. 느낌은 내 속에 저장되어 있는 모든 업과 작용해서 일어납니다. 느낌이 오면 형상으로 만들어집니다. 그것이 상입니다. 이때 생각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사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 변행 다섯 가지를 거치게 됩니다. 6식이든 7식이든 8식이든 전부 이 변행을 거칩니다.
두 번째는 별경으로 욕, 승해, 념, 정, 혜이고 세 번째 선심소법은 11개입니다. 신, 참, 괴, 무탐, 무진, 무치, 정진, 경안, 불방일, 상, 불해입니다. 네 번째는 번뇌지법입니다. 번뇌지법 여섯 개는 선과 불선 가운데 불선에 해당합니다. 탐, 진, 만, 무명, 견, 의입니다. 기본적인 번뇌지법 가운데 탐진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명이 바로 치에 해당합니다. 다섯 번째는 수번뇌심법으로 20개가 있습니다. 분, 한, 부, 뇌, 질, 간, 광, 첨, 교, 해, 무참, 무괴, 혼침, 도거, 불신, 해태, 방일, 실념, 심란, 부정지입니다. 선심소법은 11개인데 번뇌지법은 총26개나 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을 일으키면 선한 생각보다 불선한 생각을 일으키기 더 쉬운 것입니다. 마음을 내버려두면 선한 생각보다 불선한 생각을 일으키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 수행, 절제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정법은 네 개인데 악작, 수면, 심, 사입니다. 이것이 모두 심소에 작용하는 51가지입니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에 하나씩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삼성과 삼계와 삼수가 항상 전변 하여 근본 번뇌와 수번뇌와 선 등이 총체적으로 서로 연관하니’의 문장을 봅시다. 삼성은 앞에서 설명했고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말하고 삼수는 우리가 받는 느낌으로 고苦와 낙樂과 고도 낙도 아닌 사捨 세 가지입니다. 6식은 우리가 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마음이 생각의 바다라면 그 마음은 6식이 일으키는 모든 것입니다. ‘몸을 움직이고 말을 하는데 홀로 가장 뛰어나서 업을 이끌고 과보를 만족하여 능히 업력을 부르고 이끄느니라.’는 말은 8식을 이끈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살펴보면 우리는 6식, 7식, 8식 가운데서 6식의 말을 듣습니다. 6식이 현상적으로 나타나면서 나의 업을 이끄는 것입니다. 업을 이끌어 어떤 행위를 하면 나타난 행위는 과보를 유발합니다. 내 속에 있는 8식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6식이 하는 것을 보고 그 저장 창고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속에 선과 악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장 창고에 무언가를 빼내 봅니다. 빼내 보면 무엇인가 나올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6식이 하는 것을 보고 8식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6식은 업의 창고를 이끌어갑니다. 내 업의 창고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모르지만 6식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똑똑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를 보면 전생에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태아 때 어머니의 능력이 태아에게 전달됩니다. 반대로 태아의 능력이 어머니에게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여성들이 임신을 하면 평소에 전혀 먹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먹고 싶은 것은 아이의 습성이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불교 역사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 경전을 한자로 번역한 대승인 구마라집이 있습니다. 그는 묘법연화경, 반야경 등 경전을 번역했습니다. 구마라집의 어머니가 구마라집을 임신했을 때 종전에는 전혀 알지도, 한 번도 듣거나 말한 적이 없었던 언어들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아이의 능력이 어머니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하지만 구마라집을 낳자마자 그 능력이 모두 없어져버립니다.
내 속에는 부처부터 지옥까지 다 들어있습니다. 그 들어있는 것을 내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나의 삶은 달라집니다. 만약 내가 선한 마음보다 악한 마음이 많지만 의지가 굳어 내가 목표를 잘 세워놓고 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정진 한다면 나는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선한 마음을 훨씬 더 많이 끄집어 내 쓸 수 있습니다. 이 생에서 한 번 그렇게 살다 보면 내가 갖고 있는 이 업의 창고에 악한 마음보다 선한 마음이 훨씬 더 많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럼 다음 생애에 훨씬 더 선하게 살기 쉬워집니다. 우리가 이 한 생을 사는 것은 수억 겁을 생각해볼 때 변함이 없습니다. 엄청나게 큰 공간 속에 물 한 방울이 우리의 한 생의 삶입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 물 한 방울 때문에 큰 공간이 변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은 화살이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한 삶은 화살이 0.1도 정도 변하도록 사는 것입니다. 0.1도라면 미미해서 변한지 안 변한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0.1도가 변해서 계속 나아가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0.1도가 변해서 부처가 되고 0.1도 변하지 않아서 지옥에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엄청나게 대단한 것 같지만 0.1도의 각도를 바꾸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각도에 의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환희지와 구생혹을 봅시다. ‘초심의 환희지에서 지가 발생하나 구생혹은 오히려 스스로 전과 면을 나타내느니라.’의 문장을 봅시다. 우리는 살다 보면 환희를 느낀 적이 있을 겁니다. 환희는 보통 기쁨을 뛰어넘는 엄청난 기쁨입니다. 환희지는 그 환희보다 더 지극한 환희입니다. 참선과 명상을 통해서 마음의 깊은 내면까지 들어갔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단계에서 그 위의 단계로 훌쩍 오르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 갖고 있는 이 상황을 뛰어넘는 상황입니다. 환희지는 그 뛰어넘을 때 느끼는 기쁨입니다. 그 깊은 공부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느껴서 희열에 차 있을 때의 환희는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 환희를 느끼는 순간 환희는 지혜를 동반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성제라든가 팔정도 등을 명쾌하게 알고 실천하게끔 합니다.
제6식은 무루지가 발생하는 초지 환희지에서 묘관찰지로 전환하여 아와 법에 대한 분별혹을 그치게 합니다. 우리는 평생 번뇌 망상과 분별심을 가지고 삽니다. 6식이 일으키는 모든 것이 분별심입니다. 초지 즉 환희지에 들어가면 분별심이 그치게 됩니다. 그러나 구생혹은 거기에서도 여전히 활동합니다.
뭔가 뿌리 깊이 자리 잡은 것은 이 생에서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안 바뀝니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근본 뿌리는 어떻게 하더라도 돌아서면 그 모습대로 됩니다. 절대적으로 바뀌지 않고 뿌리 깊이 아뢰야식에 연결되어 있는 번뇌 망상, 업이 구생혹입니다. 초지(환희지)에 가면 일반적인 분별혹은 다 없어지지만 구생혹은 초견성을 했다 하더라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껍질은 없어지지만 속에 있는 알맹이는 죽다 깨어나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업의 덩어리 중에서 단단하게 굳지 않은 것은 쉽게 허물어지고 없어집니다. 하지만 단단하게 굳은 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몇 생을 걸쳐 익힌 습은 분별심입니다. 하지만 수억 생을 살아오면서 굳어 있는 번뇌 망상은 구생혹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분별심 중에서는 가벼운 분별심이 있고 뿌리 깊은 분별심이 있습니다. 가벼운 분별심은 조금 노력하면 없앨 수 있으나 뿌리 깊은 분별심은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 구생혹이 깨트려져야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생명이 탄생하면 나라고 고집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나에 대한 어리석음 아치입니다. 근본적으로 내가 없는데 나라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아치가 생기면 아집이 생깁니다. 아만이 생기고 아애가 생깁니다. 평생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생각의 뿌리는 아치이고 아집이고 아만이고 아애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생혹입니다. 구생혹은 선천적으로 익혀 온 번뇌이며 환희지에서는 의식 작용 중 분별혹은 멈추지만 구생혹인 전과 면은 아직 활동을 합니다. 전은 현행을 말하고 면은 종자를 말합니다. 전은 현재 하고 있는 행위, 현행을 말하고 면은 현행을 나타나게 하는 종자입니다. 구생혹이 남아 있는 한 사람의 습은 죽다 깨어나도 깨뜨려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공부를 해서 초지만 가도 세세생생 몸을 받아가면서 더 이상 진리에서 물러나지 않게 됩니다.
7지 원행지를 봅시다. 초지 환희지로부터 시작해서 2지 이구지, 3지 발광지, 4지 염혜지, 5지 난승지, 6지 현전지를 거쳐 7지 원행지에 가면 구생혹이 깨트려집니다. 7식이 갖고 있던 뿌리인 아치, 아만, 아집, 아애가 깨트려집니다. 화엄경을 보면 단계별로 수행 성과를 나누어 놓았습니다.
초지 환희지를 얻은 사람은 일지 보살이고 이 7지 원행지를 얻은 사람은 7지 보살입니다. 7지 보살을 넘어서야 부처가 됩니다. 7지 보살이 되어야 완전한 견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진정한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원행지 이상에서는 순수한 무루가 됩니다. 무루란 번뇌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번뇌가 없는 것입니다. 7지 보살 이상의 부처에서는 어떠한 행위든 생명을 상하게 하는 행위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떠한 행위든 생명을 살리는 행위, 선 밖에 없습니다. 7지 보살 이상 가면 모든 탐 진 치는 0이 됩니다.
화엄경 보살 10지를 보면 초지가 환희지고 2지가 이구지입니다. 이구지란 더러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3지는 발광지입니다. 부처님을 보면 후광이 있듯이 여기에 이르면 빛을 발하게 되며 후광이 생깁니다. 4지 염혜지, 5지 난승지, 6지 현전지, 7지가 원행지이고 8지가 부동지이고 9지는 선혜지이고 10지가 법운지입니다. 이 지구에서 몇 명 정도는 8지 보살 이상을 갔을 겁니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고승인 원효 대사가 8지 보살이라고 합니다. 원행지를 가야 구생혹이 없어집니다. 원행지 7지 보살 이후에는 순수한 무루가 되어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번뇌가 생기지 않습니다. 진짜 무루입니다. 원행지인 7지에서 보살이 무상정에 들어가면 의식의 여러 작용이 완전히 그쳐 분별 혹은 구생혹까지 없어집니다. 이 경지에 이르면 의식 작용이 순수한 묘관찰지로 바뀌어 대천세계를 밝게 비추게 됩니다. 오로지 자비와 광명밖에 없게 됩니다.
제3능변을 봅시다. 제3능변은 차별하여 여섯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6식이 제3능변, 7식이 제2능변, 8식이 제1능변입니다. 6식은 차별하여 여섯 가지가 있다는 말은 안이비설신의를 가리킵니다. ‘경계를 요별하므로 성과 상으로 삼으며 선과 불선과 무기가 된다.’는 말은 현상에서 나타내는 모든 것은 선, 불선, 무기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작용은 변행과 별경과 선과 번뇌와 부정으로 모두 삼수와 상응합니다. 삼수란 선, 불선, 무기입니다. 이 현상이 일어나는 것에는 무상천에 태어나는 것, 무심의 두 선정, 수면과 기절은 제외됩니다.
의식이 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고 의식이 없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 의식은 계속 일어납니다. 기절하는 것은 의식이 없이 죽은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기절했을 때는 의식이 없습니다. 무심의 두 선정이란 우리가 공부를 하여 선정에 든 상태를 말합니다. 무상정, 멸진정에 든 상태입니다. 선정에 들면 의식이 없습니다. 의식이 없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정에 들면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그 상태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상천은 색계 제4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면이란 잘 때도 의식이 생기지 않는 때가 있는데 바로 숙면에 든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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