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제8식과 보살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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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8식과 보살십지
성철스님의 유명한 말씀인 ‘산은 산이오, 물은 물이다.’는 제8식에서 본 산과 물을 말합니다. 깨달음을 얻어서 대상을 그대로 본 산과 물입니다. 성철스님이 하신 말씀 중에 중요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동정일여, 몽중일여, 오매일여입니다. 동정일여란 움직이거나 참선을 할 때나 일상생활 속에서 변함없이 화두가 들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을 때 화두에 들 수 있지만 다른 것을 할 때는 화두가 들리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하던 간에 화두에 들 수 있도록 동정일여가 되어야 합니다.
몽중일여는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리는 것입니다. 공부가 익어 가면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립니다.
오매일여란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더라도 깨어서 수행할 때와 똑같이 화두가 들리는 것입니다. 이래야 견성성불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철스님은 오매일여의 단계까지 가야 견성성불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문제에 깊이 빠지다 보면 이런 상태에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른 경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약 내가 매우 좋아하는 것에 빠지면 온통 그것밖에 보이지 않고 그것만 생각납니다. 그렇게 되면 꿈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이렇게 화두에 몰두하면 나의 깊은 의식 속에서 화두가 자리를 잡습니다. 꿈속은 일종의 잠재의식으로 제7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7식 속에서 그보다 더 깊이 들어가서 화두를 들고 있을 때 비로소 그 화두가 타파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이든지 화두가 흐트러지지 않고 끊임없이 들립니다. 그래서 제7식을 깨트리고 제8식의 본질인 진여, 법성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 글은 성철스님이 열반에 드시고 난 뒤 읊은 시입니다. 유식 내용하고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올려봅니다.
‘부동지 이전에 이미 장식을 버리고’라는 문장을 봅시다. 제8지인 부동지 전의 제7지가 되면 훈습된 번뇌종자를 함장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진 장식이란 명칭을 버리게 됩니다. 부동지에서부터는 장식 대신 이숙식이라 불리게 됩니다. 제8식은 이숙식이라고도 하고 종자식이라고도 합니다. 장식 또한 제8식의 다른 이름입니다. 장식의 ‘장’이란 어떤 상자 속에 넣어놓은 것과 같습니다. 내가 행위했던 업들이 들어있는 창고입니다. 깨달음의 단계는 초견성의 환희지부터 시작해서 10단계가 있습니다. 10단계를 거치면 부처가 됩니다. 부동지란 그 10개의 단계 가운데 8번째 단계입니다. 내가 눈을 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변화해 가는 것입니다. 부동지 이전에는 내 안의 제8식이 무엇인지 모른 채 꺼내 씁니다. 이 상태의 8식은 장식입니다. 하지만 부동지의 경지에 이르러 내 안에 들어있는 것에 대한 개념이 생기고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게 되면 제8식이 이숙식이 됩니다. 단순히 상자 속에 들어있는 8식이 아닙니다.
‘금강도 후에 이숙식이 공해지며’라는 문장을 살펴봅시다. 금강도의 경지 이후에는 이숙식도 공해진다는 말입니다. 금강도란 변하지 않는 도, 진리를 이룬 단계입니다. 등각보살이 금강대정에 들어선 것을 말합니다. 10지의 단계에 도달하면 등각보살, 묘각보살이 됩니다. 그러나 등각까지도 이숙식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금강도에 도달해도 부처가 될 때까지 이숙식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어야 이숙식이 사라집니다. 내가 내 속의 업을 잘 아니까 마음대로 꺼내 쓸 수는 있어도 업이 없어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숙식이 남아 있는 한 내 업에 대한 인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금강도 후 대원경지가 현발할 때 비로소 이숙식이 완전히 공해집니다. 이숙식이란 선악의 업으로 인하여 받게 되는 과보로써 이숙식이란 명칭은 범부로부터 금강도의 보살에 이르기까지 적용됩니다. 부처되기 전까지 이숙식으로 인해 업으로 인한 인과응보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과응보를 피해갈 수는 없지만 각자가 받는 인과응보는 다 틀립니다. 받는 양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과보가 있어도 이 생에 공부를 해서 진리를 깨치면 그 받을 과보의 양은 줄어들게 됩니다. 똑같은 과보를 받더라도 수행한 사람과 수행하지 않는 사람이 받는 과보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장식일 때는 과보를 그대로 받지만 이숙식이 되면 그 과보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보는 그 내용을 안다고만 해서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내가 그 내용을 알고 지극하게 그 과보를 감싸 안고 긍정하고 받아들여야 달라집니다. 결국 내가 받는 과보를 바꾸는 것은 나 자신이며 나 자신을 바꿔야 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숙식은 오직 불과인 묘각에서만 그 명칭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대원경지에 이르러서야 제8아뢰야식의 근본이 완전히 공해집니다. 그만큼 제8아뢰야식은 형상이 미묘하고 깊어서 알기 어렵습니다.
현재의 우리가 사용하는 의식은 제7식까지 입니다. 서양의 과학, 의학, 심리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것은 제7식까지 밖에 모릅니다. 이것을 뚫고 더욱 본질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유식이고 불교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끊임없이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것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명상이나 참선을 하면 끊임없이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으면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지도 모릅니다. 평소에는 머리카락이 한 가닥 떨어져도 모르지만 적정의 상태에 들면 머리카락이 한 가닥 떨어지는 것도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평소에는 제8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를 끊임없이 가라앉혀 어떤 미묘한 움직임도 감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제8식의 작용도 감지할 수 있게 됩니다. 화두에 몰두하는 것도 내 자신을 끊임없이 가라앉혀 안정화시키는 작업입니다. 흙탕물을 가라앉히면 바닥이 보이듯이 나를 끊임없이 가라앉히면 바닥의 미묘한 움직임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선을 하고 화두에 몰두하는 이유입니다.
결국 초기불교든, 대승불교든, 선불교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수행을 통하여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수행의 단계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보살 10지는 환희지, 이구지, 발광지, 염혜지, 난승지, 현전지, 원행지, 부동지, 선혜지, 법운지입니다. 법운지 위에 등각, 묘각이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루신 경지가 묘각입니다.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면 환희지의 경지입니다. 제8식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제8지인 부동지입니다.
제8지에 이르러서야 장식이 이숙식으로 바뀝니다. 제1지인 환희지까지만 오면 부처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매우 쉽습니다. 기본적으로 제1지와 제8지에서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제2지인 이구지란 더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맑고 깨끗함 밖에 없습니다. 청정법신의 청정이 제1지와 제2지에서 다 나타납니다.
‘대원경지와 무구식이 동시에 발생하여’라는 말을 봅시다. 대원경지의 대원은 대승불교에서 밀교로 넘어가면서 생긴 용어입니다. 대원이란 유루의 아뢰야식이 전환될 때 나타나는 청정하고 원만한 지혜입니다. 부처를 이룰 때 나타나는 원만한 지혜입니다. 부처의 광명은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자비로부터 빛이 흘러 넘치고 지혜가 생깁니다. 그래서 자비심이 없는 사람은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비심이 넘치는 사람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공부를 안 한 사람도 자비심이 가득하면 자비심이 없는 공부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수승합니다. 모든 것의 근본 심성이 자비입니다. 지혜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자비가 흘러 넘쳐 나온 빛입니다. 자비의 척도는 내 속에 든 업의 척도와 같습니다.
무구란 유루의 아뢰야식을 깨친(본) 상태가 무구식 또는 백정식으로 진여를 뜻합니다. 식은 6, 7, 8식 까지 밖에 없습니다. 백정식, 무구식은 후대 사람들이 만든 제9식으로 깨달은 상태를 말합니다. 이 둘은 동시에 발생하며 아뢰야식이 무구식, 백정식이 될 때 대원경지가 나타나며 이 때 바로 무구식, 백정식이 됩니다. 그러므로 9식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눈으로 보는 제8식을 말합니다. 8식에 대한 깨달음의 인식을 밀교에서는 제9식까지 만든 것입니다.
제9식인 무구백정식을 살펴봅시다. 제6식은 요별경식이고 제7식은 말나식이고 제8식은 아뢰야식, 종자식, 장식, 이숙식이라고 합니다. 깨치면 제8식이 제9식이 됩니다. 이것을 무구식이라고도 하고 백정식이라고도 합니다. 결국 제8식과 제9식은 같은 것입니다. 제8식을 깨친 눈으로 보는 것이 제9식입니다. 그래서 제9식은 따로 정의하지 않아도 됩니다.
유위법, 무위법, 유루법, 무루법은 불교에서 가장어려운 내용들로 우리가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제법은 이 세상에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이것을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로 인해 결과가 생깁니다. 그 결과는 종자, 8식의 업의 창고에 저장됩니다. 그런 업들은 유루와 무루로 나눌 수 있습니다. 루란 번뇌, 망상, 업 등을 가리킵니다. 번뇌 망상이 생기는 행위들은 유루이고 번뇌 망상을 유발하지 않는 행위들은 무루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행위는 무루가 되고 우리의 행위는 모두 유루가 됩니다. 중생은 번뇌 망상 속에서, 분별 속에서 모든 행동을 하지만 부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8지인 부동지 이상이 될 때 제7식인 아치, 아집, 아만, 아애가 깨트려집니다. 이 때는 이미 ‘나’가 없는 진정한 보살이며 부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루입니다. 제8지 이전의 모든 것은 유루가 됩니다.
무위법은 모든 현상의 참다운 본질, 체성이며 최종 진리입니다. 만약 법이 생도 없고 멸도 없고 인도 없고 과도 없다면 무위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제법은 무위가 없고 모두 유위입니다. 깨달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무위법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유위법입니다. 인과 연의 화합으로 만들어진 모든 존재입니다. 유찰나로 멸진하며 원인 없이 멸무합니다. 머리 속에서 한 생각을 떠올려 봅시다. 떠올렸던 그 생각이 내가 없애야겠다는 의지가 없어도 그대로 없어져버립니다. 억지로 없애려고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은 소멸해버립니다.
유루법이란 번뇌가 있는 법을 말합니다. 무루법은 번뇌가 없는 법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 온갖 색에 대해 아애(탐욕과 진애)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식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색은 색 수 상 행 식 5온의 색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탐욕과 진애입니다. 탐 진 치에서 치이기 때문에 탐과 진이 생깁니다. 치는 무명으로, 무명이 명으로 바뀌면 탐과 진이 소멸됩니다. 5온에서 탐과 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무루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존재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인과는 유루법과 무루법입니다. 행하고 주고 받는 모든 인과는 8지(부동지) 보살 이상 올라가면 무루법이고 일반 중생은 유루법입니다. 자기의 아집과 탐욕 속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널리 시방의 모든 세계를 비춘다.’는 말을 살펴봅시다. 결국 이 세계를 비추고 있는 본질은 모두 제8아뢰야식입니다. 아뢰야식이 전환하여 대원경지를 이루고 그 광명이 널리 사방의 모든 세계를 두루 비추게 됩니다. 제8식을 제대로 보는 것이 대원경지이며 견성성불하는 것입니다. 제8식 아뢰야식을 제대로 보니 끝도 없는 자비가 일어나고 그 자비가 흘러 넘친 광명이 이 세계를 두루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친 자에게는 항상 후광이 있습니다. 의식이 그대로 있을 때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의식이 완전히 끊어져 제7지 보살의 경지인 원행지에서 무상정이 될 때에도 제7말나식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완전한 색자재의 멸진정은 되지 않습니다. 7지 보살까지 와도 완전하게 의식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해결되지 않고 인과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몽중일여로 꿈속에서는 일여하지만 오매일여는 되지 않습니다. 환희지에 도달해도 오매일여가 된다는 설이 있습니다. 환희지에 도달하면 몽중일여, 오매일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처음은 아뢰야식이니 이숙식이며 일체 종자이다.’는 문장을 봅시다. 가히 알 수 없는 집수와 처와 요이니 항상 촉, 작의, 수, 상, 사와 상응합니다. 알 수는 없지만 나와 대상과 생각들이 항상 촉, 작의, 수, 상, 사를 일으킵니다. 제6식, 제7식, 제8식은 모두 촉, 작의, 수, 상, 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사수이며 무부무기이니 촉 등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사수란 선도 아니고 불선도 아닙니다. 제8식은 청정해서 있는 것을 모를 뿐 알기만 하면 되지만 제7식은 때를 걷어내야 합니다. 항상 전변함이 폭포수처럼 아라한의 지위에서 버려집니다. 이숙식, 일체 종자식은 부동심을 체득한 아라한의 경지에서 버려집니다. 전변함이 폭포수와 같다는 말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뇌 망상이 폭포수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폭포수 같은 번뇌 망상을 못 느낍니다. 폭포수 같이 번뇌 망상이 쏟아지면 멈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폭포수 같은 번뇌 망상을 끊거나 막아내야 합니다. 멈추는 방법은 생각을 고요하게 가라앉혀 진리를 인식하는 순간 거짓말 같이 없어져버립니다. 제8식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끝도 없이 안정시키고 적정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위빠사나와 사마타를 말씀하셨습니다. 위빠사나와 사마타란 지혜롭고 지혜로움을 끝없이 깊게 한다는 말입니다. 잔머리로는 제8식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제8식은 일체의 훈습된 종자가 함장되는 곳이기도 하고 무몰식이라고 하듯이 없어지지도 아니하며 일체의 원인과 결과를 갖추고 있는 근본 장소 또는 중심체로써 우리가 알기 어려운 미세한 활동을 합니다. 이러한 아뢰야식은 51가지 마음 작용 중에서 촉, 작의, 수, 상, 사의 다섯 가지와 상응하여 작용할 뿐이며 감수하는 성질은 선, 불선, 무기 중에서 무기이며 특히 번뇌가 없는 깨끗한 무부무기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무부라고 하는 것은 번뇌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게는 너무나 그 존재 형태가 미세하여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이처럼 미세하여 알기는 어렵지만 그 작용은 마치 폭포수가 끝없이 쏟아지듯이 작용하며 존재하는 것으로 아라한의 자리에 가서야 비로소 없어집니다. 예를 들어 땅 밑에서 아무리 마그마가 요동쳐도 우리는 모릅니다.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작용은 모릅니다. 우리는 속에서 아무리 폭포수 같이 번뇌 망상이 흘러도 모르는 것입니다.
사지四智는 5식, 6식, 7식, 8식을 각각 깨달으면 얻어지는 지혜를 말합니다. 5식은 성소작지이고 6식은 묘관찰지이고 7식은 평등성지, 8식은 대원경지입니다. 4지를 각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밀교의 내용입니다. 성소작지란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묘관찰지는 묘하게 모든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대원경지는 자성이 청정한 것입니다. 평등성지는 마음에 병이 없음입니다. 아치, 아만, 아집, 아애를 잘 다스리면 마음에 병이 없어집니다. 미혹과 집착의 병이 없어집니다. 묘관찰지는 용공이 없으며 무루의 제6식을 말합니다. 제6식이 경계에 대하여 힘쓰는 것이 있으면 집착을 일으킵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더 힘쓰는 것이 있으면 집착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성소작지는 대원경지와 현량이라는 면에서는 같습니다. 앞에서 비량과 현량을 이야기 했습니다. 있는 것을 그대로 보는 것이 현량이며 전5식과 8식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소작지가 대원경지와 같은 것입니다. 같다는 것은 전5식이 제8식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현량이 같다는 말입니다. 성소작지는 청정한 전5식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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