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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제8송 요경능변의 능변차별문, 자성행상문6, 삼성분별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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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8,182회 작성일 21-08-0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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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제8송 요경능변의 능변차별문, 자성행상문육, 삼성분별문육


 깊은 비밀에 묻혀 있는 제8식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유식과 진여 본성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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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유식을 통해서 진리를 볼 수 있을까요. 누에고치를 예로 들어봅시다. 누에는 고치를 만들어 자신을 안에 가두어 버립니다. 우리의 삶은 누에고치와 같이 업에 의해 스스로를 자신만의 세계에 가두어 버립니다. 누에는 고치를 통해 외부와 자신을 분리시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업에 의해 자신과 대상을 완전히 분리시켜 버립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치면 법성 자리를 얻습니다. 그 전에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벌레나 식물이나 각자 다 다른 세계가 있지만 진리를 깨치면 모든 것이 같습니다. 7식을 거치지 않고 오로지 제8식에서 5변행을 통해서 나온 진리의 답은 다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나 짐승, 벌레, 식물도 하나의 법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꿈을 꾸고 벌레는 벌레로써 꿈을 꾸지만 법성은 하나인 것입니다. 누에고치 이야기를 좀 더 해봅시다. 누에가 입으로 실을 토해서 넓은 허공을 막듯이 안과 밖을 경계 지웁니다. 우리에게는 18계라는 꽃이 있어서 그 속에 들어앉아 눈을 반짝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식이(6, 7, 8식) 살아가면서 짓는 업이 나와 대상을 분리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도 나와 남은 별개가 됩니다. 나와 남을 구별하니까 나만을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식에 의해 삶은 누에고치 같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누에고치가 되기 전에는 한 세상 밖에 없습니다. 막힌 공간이 없습니다. 우리의 식들은 나와 남을 경계 지우고 나와 남을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면 식에 갇히게 됩니다. 제7식에서 생각, 욕망이 생겨납니다. 이것을 깨뜨려야 갇혀 있는 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법성 자리를 제대로 보는 것은 누에고치를 깨트리고 나비가 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나와 남을 경계시하는 세계를 깨트리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 상태가 진여, 법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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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유식을 앎으로써 법성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유식을 공부하는 목적입니다. 나는 안 이 비 설 신 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가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있는 인식 능력체인 안 이 비 설 신 의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안 이 비 설 신 의 6근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색 성 향 미 촉 법입니다. 색성향미촉법이 6경입니다. 6경은 모두 6근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밖으로 눈에 보이는 6경과 안으로 6근이 있는 것 같으나 원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별하기 때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식 때문에 생긴 것이지 원래는 없습니다. 안으로 싹이 된 것은 6근이고 밖으로 생긴 것은 6경입니다. 원래는 6근과 6경도 없지만 식이 있기 때문에 6근과 6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6경과 6근은 원래 법성 자리의 하나입니다. 눈으로 대상을 볼 수 있고 귀로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입으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눈과 대상이 하나이고 귀와 소리가 하나이고 입과 맛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서로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습니다. 나의 몸 6근과 밖에 있는 6경이 없다는 것은 나와 너(대상)가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입니다. 나와 대상이 같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비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저절로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내가 대상과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면 너와 나의 구분이 없어집니다. 자비는 그냥 일어납니다. 너와 내가 남이 아니기 때문에 자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모든 생명에게 도움과 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중생은 죽다 깨어나도 자신만을 사랑합니다. 자신만을 사랑하는 마음에 나와 남의 구분이 없어지면 대상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나를 위해서 사는 삶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위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자타가 허물어져야 됩니다. 형상을 이루고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생각은 인간부터 시작해서 동물, 벌레, 식물이 다 그런 생각을 갖습니다. 하나의 생명체 법성 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업에 따라 분리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를 알면 전부 다 한 자리가 됩니다. 본래 자리, 법성, 진리를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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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치지 못한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법성 자리는 우리 생명체와 합해지지 않는 것으로 헛것입니다. 망념으로 동질이 아닙니다. 법성 자리가 되지 않으면 나와 남은 절대로 동질이 될 수 없습니다. 동질이 되기 위해서는 너와 나의 구분이 허물어져야 합니다. 부처가 되면 망념을 가진 이 몸도 없어져버리고 동체대비가 됩니다. 너와 나의 벽이 허물어지면 나만을 사랑하는 마음이 대상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자기와 같이 사랑과 자비를 일으킵니다. 나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불보살은 벌레도 불성으로 보고 벌레가 벌레의 몸을 하고 있더라도 동체대비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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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이란 참으로 다양하고 묘합니다. 사냥꾼의 이야기를 봅시다. 사냥꾼의 처남이 오랜 만에 누나의 집에 놀러 옵니다. 사냥꾼이 사냥을 마치고 집에 오니 웬 남자의 신발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사냥꾼의 머리 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일어납니다. 사냥꾼은 의혹을 품고,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자신의 부인과 처남이 앉아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머리 속에서 매우 다양한 생각을 일으킵니다. 사냥꾼 이야기는 이러한 마음의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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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명의 꿈 이야기를 봅시다. 어느 날 열 사람이 한 방에서 잠을 잡니다. 이 열 명은 각기 꿈을 꿉니다. 하지만 열 명의 꿈은 다 다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열 명뿐만 아니라 백 명, 천 명이 같은 방에서 함께 자더라도 모두 각자의 꿈을 꿉니다. 모두 다른 꿈을 꿉니다. 모두 자기가 갖고 있는 업의 저장창고에서 생각들을 끄집어 내어 쓰는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각기 다 다르지만 꿈(7식)을 깨트리고 들어가면 그 본질은 같습니다. 그 본질이 진여이고 법성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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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 자리를 보면 나와 밖의 벽이 무너지기 때문에 하나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견성성불입니다. 부처가 되면 이 세상의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불로소득이 생깁니다. 그 불로소득이 육신통입니다. 

육신통에는 신족통, 천안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누진통이 있습니다. 숙명통은 과거에 살아왔던 흔적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이 걸어온 흔적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누에는 고치를 쳐서 바깥 세계와 자신을 분리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고치를 깨고 나비가 되면 모든 것이 보이고 알게 됩니다. 

타심통이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천안통이란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것입니다. 눈앞의 세상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까지 보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깊은 산속에서 염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산의 모든 것이 훤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는 호랑이가 있고 어떤 굴 속에는 토끼가 있고 어떤 곳에서는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 등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안통입니다. 

천이통은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모든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가까운 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먼 곳의 소리도 다 들리는 것입니다. 신족통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무협영화를 보면 사람이 벽을 뚫고 지나갑니다. 갑자기 먼 거리에 있는 곳에 가기도 합니다. 신족통이 열리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누진통이란 세세생생 생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번뇌, 업이 생기지 않습니다. 중생은 업에 의해 몸을 받지만 깨달음을 얻은 보살들은 원에 의해 태어납니다. 


 이제 제3 능변식, 육식을 살펴봅시다. ‘차제삼능변 차별유육종 요경위성상 선불선구비’입니다. ‘제3능변 6식을 구별하면 여섯 종류가 있다. 대상을 요별하는 것을 자성과 행상으로 삼는다. 3성의 성품은 선과 불선과 무기이다.’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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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능변차별문

‘차제삼능변 차별유육종’이며, ‘제3능변 6식을 구별하면 여섯 종류가 있다.’입니다. 

마음 작용은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 아뢰야식이 작용하고 이 작용이 말나식에 전달되어 의식으로 나타나며 구체화 되고 표현화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6식을 세 번째 능변이라 합니다. 6식을 구별하면 여섯 종류가 있다는 것은 안이비설신의에 의하여 인식되는 여섯 가지 식을 의미합니다. 눈으로 볼 때 안식이 작용하고,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이식이 작용하고, 코로 냄새를 맡을 때 비식이 작용하고, 혀로 맛을 볼 때 설식이 작용하고, 몸으로 감촉을 느낄 때 신식이 작용하고, 뜻으로 생각 하여 분별하고 판단할 때 6식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2. 자성행상문육

‘요경위성상’이며, ‘대상을 요별하는 것을 자성과 행상으로 삼는다.’입니다. 

의식을 통하여 현상을 볼 때 생각하는 주체인 자성과 생각되어지는 객체인 행상으로 나누게 됩니다. 


3. 삼성분별문육

‘선불선구비’이며, ‘삼성의 성품은 선과 불선과 무기이다.’

모든 행위는 세 가지 성품으로 나누어집니다. 선, 불선, 무기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선, 불선, 무기로 나누어집니다. 원래 내 속에 있을 때는 모두 무기입니다. 7식, 8식은 무기입니다. 다만 더러움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끄집어 내어 쓸 때는 선, 불선, 무기로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와 생각은 선, 불선, 무기입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것인 전변에 대해 봅시다. 그림을 그릴 때 먼저 대강의 윤곽을 그려놓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립니다. 마지막으로 색칠을 합니다. 6식은 확실하게 색칠하고 그림을 완성한 상태라면 그 전에 구체적으로 그리는 것은 7식이고 대강 윤곽을 그리는 것은 8식입니다. 하지만 윤곽에 불과한 희미한 8식에 의해 끝도 없는 망상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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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식을 앎으로써 그 뿌리가 되는 7식과 8식을 알 수 있습니다. 제3전변은 여섯 종류의 대상을 지각하는 것입니다. 안이비설신의로 일으키는 생각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있습니다. 안식의 대상은 색, 이식의 대상은 성, 비식의 대상은 향, 설식의 대상은 미, 신식의 대상은 촉, 의식의 대상은 법입니다. 현량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고 비량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못 보는 것입니다. 현량은 안이비설신의 5식, 8식이고 비량은 의식 즉, 6식과 7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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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을 분류해 봅시다. 마음을 분류해 보면 선, 불선, 무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업에 의해 선, 불선, 무기를 일으킵니다. 어떤 일이든지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속에 선이 꽉 차면 긍정적으로 보고 불선이 꽉 차면 부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마음속에 부처의 자비심만 들어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선만 나오게 됩니다. 좋은 마음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지옥의 악심만 가득 차 있으면 아무리 좋은 상황을 보더라도 악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마음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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