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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제11송 상응수구문의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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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7,507회 작성일 21-08-03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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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제11송 상응수구문의 선


별경은 변행 다음으로 중요한 내용입니다. 별경의 점수가 커트라인을 넘으면 부처가 됩니다. 나의 능력을 나타내는 수치입니다. 우주와 세상의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은 별경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한 번 복습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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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별 5살 때 그린 그림, 1986년 국제전 금상 수상작) 


  1985년 4살짜리 소녀가 그림으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녀는 바로 북한 출신의 오은별입니다. 오은별은 누구에게 사사받은 적도 없는데 훌륭한 그림을 그려냅니다. 전생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이 없었다면 이런 그림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욕은 감각적인 욕망이 아니라 지적이고 종교적인 욕망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겠다’ 이런 것들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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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16살 때 “빛과 같은 속도로 달리면서 물체를 보면 어떻게 보일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이런 생각이 결국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26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 이 문제가 결국 존재에 대한 본질의 체계를 깨달았듯이 아인슈타인에게도 한 가지 의문이 세상을 바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욕입니다. 욕은 이번 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에서도 삶을 결정할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욕이 좀 더 강력하게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갖고 있는 욕에 따라 삶은 달라집니다. 욕이 분명하고 강력하면 평생 그 욕을 따라가며 살 수 있습니다. 부처님과 아인슈타인의 경우처럼 욕, 삶의 목표, 내가 해결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세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생을 살더라도 욕이 분명해야 합니다. 분명한 삶의 목표로 인해 내가 변화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승해는 마음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12살 때 기독교의 불합리적인 문제성을 느끼고 종교 자체를 버리게 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버린 아인슈타인은 우주적 종교를 추구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불교가 우주적인 종교임을 알고 심취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문제에 대해 깊이 이해하면 삶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사건도 내가 깊이 이해하면 확신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이 생기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믿는 것 하나만 보이게 됩니다. 

염은 경험했던 일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으면 그것을 기반으로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기억하고 있다면 문제의 본질을 생각할 수 있는 힘도 생기게 됩니다. 기억력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억력을 통해서 다양한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억력은 그 자체를 통해 다른 생각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등지, 정이란 마음에 동요가 없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상태입니다. 팔정도의 마지막에는 정념, 정정이 있습니다. 앞에서 나온 염이 정념에 해당하고 등지, 정은 정정에 해당합니다. 마음에 동요가 없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상태를 지속하면 등지, 정이 됩니다. 무엇인가에 지속적으로 몰두하면 성취할 수 있습니다. 정이 능력입니다. 이 정이 있으면 돈을 가지려고 하면 돈을 가질 수 있고 권력을 가지려고 하면 권력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집중적으로 꾸준히 하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별경의 마지막 혜는 어떤 사물에 관해 고유의 특징과 다른 사물과의 공통된 특징을 명확하게 구별해서 아는 작용입니다. 정견, 판단이 혜와 가깝습니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판단의 결과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결정하는 것이 욕이라면 그 욕을 성취시키는 것이 승해, 염, 정입니다. 혜는 성취된 상태입니다. 

 별경은 선과 불선과 다르게 또 하나의 것으로 존재합니다. 선과 불선에 대해 살펴봅시다. 선에는 절대선과 상대선이 있습니다. 나를 이롭게 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은 절대선입니다. 나, 상대방, 세상의 모든 것을 이롭게 하는 것은 절대선입니다. 상대선은 나에게는 이로울 수 있으나 상대방에게는 해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간첩이 내려올 때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간첩을 잡아야 선이 되고 북한의 입장에서는 간첩이 잡히지 않아야 선이 됩니다. 절대선은 이와 달리 나도 좋고 상대도 좋은 것입니다. 불교에는 오계가 있습니다. 오계는 살생을 하지 마라, 도둑질을 하지 마라, 거짓말을 하지 마라, 음행을 하지 마라, 술을 마시지 마라. 입니다. 오계는 절대선에 해당합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살생을 하지 마라.’는 어떤 종교의 가르침에도 없습니다. 불교는 이와 같이 절대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이란 나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을 복되게 하고 이익되게 하는 것입니다. 계정혜가 이에 해당합니다. 불선은 그 반대입니다. 불선은 악입니다. 번뇌, 탐진치가 불선에 해당합니다. 만약 계정혜를 극도로 끌어올리면 부처가 되고 탐진치를 극도로 끌어올리면 지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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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식 11송을 보면 선심소법 11개가 나옵니다. 우리의 삶을 선으로 이끄는 성품들이 나옵니다. ‘선이신참괴 무탐등삼근 근안불방일 행사급불해’ ‘선심소는 믿음, 참, 괴와 무탐 등 세 가지 선근과 정진, 경안, 불방일과 행사 및 불해이다.’입니다. 


업 속에 들어서 우리를 선하게 이끌어가는 성품은 이것이다는 말입니다. 

내 속에는 선도 들어있고 불선도 들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 속에 선만 가득 차 있다면 끄집어 내 쓰는 것마다 다 선이 됩니다. 그것이 부처, 보살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을 이익되게 하는 것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내 속에 불선만 가득 차 있다면 끄집어 내 쓰는 것마다 탐욕이고 이기적인 것 밖에 없습니다. 지옥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적당하게 선과 불선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잘 끄집어 내 쓰면 선을 쓰고 잘못 끄집어 내 쓰면 불선을 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한 친구면 선을 많이 쓰게 되고 불선한 친구면 그 친구를 따라 불선을 많이 쓰게 됩니다. 마음속에 선이 많이 있어도 지옥에 갈 수 있습니다. 내 속에 들어있는 것은 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도 불선도 될 수 있습니다. 불선보다 선을 많이 끄집어 내 쓸수록 내 삶은 부처 쪽으로 가게 됩니다. 선심소법은 내 마음속의 선을 끄집어 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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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심소법에는 11개 요소가 있습니다. 

(1) 먼저 나오는 신은 sraddha이며, 믿음입니다. 연기와 사제가 진리라고 믿으며 불법승 삼보에는 덕이 있다고 믿으며 모든 세간, 출세간의 선에는 힘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연기와 사제가 진리임을 믿고 실천에 옮기면 로또 당첨되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실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평생 자기의 업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 속에 믿음이 얼마나 충족되어 있느냐에 따라 삶은 선한 쪽으로 가고 불선한 쪽으로 가기도 합니다. 한 번 먹었던 마음을 끝까지 가질 수 있느냐는 믿음의 정도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600년대 신라 혜초는 믿음 하나로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인도로 떠납니다. 

(2)선심소법 가운데 두 번째 참은 hri이며, 참회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 스스로 반성하여 자신이 범한 잘못을 부끄러워 하는 마음 작용입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자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을 합니다. 이것이 참인 것입니다. 

(3) 괴는 수치심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 세간에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범한 잘못을 부끄러워 하는 마음입니다.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 하는 것과 대상에 의해 부끄러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반성함으로써 새로운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암굴리말라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암굴리말라는 용모도 잘 생기고 똑똑하여 스승에게서 가장 촉망받는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스승의 부인이 암굴리말라가 너무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의 부인이 수작을 걸지만 암굴리말라는 스승의 부인이라서 차마 그 수작에 응하지 못합니다. 스승의 부인은 심술이 나서 남편에게 암굴리말라가 자신에게 수작을 걸었다며 누명을 씌웁니다. 스승에게 혼이난 암굴리말라는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미쳐버립니다. 그 스승은 암굴리말라에게 사람을 100명 죽여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로 만들면 죄를 용서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암굴리말라는 사람을 죽이며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만듭니다. 그러다가 부처님을 만나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암굴리말라는 스스로 참회하며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합니다. 부처님은 미친 암굴리말라를  출가 수행자로 만듭니다. 암굴리말라는 평생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부처님의 제자로 살다 갔습니다. 우리가 참회를 하지 않으면 공부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항상 맞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을 그냥 갖고 공부를 하면 믿음이 오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이 오고 승해를 얻기 위해서는 참회와 반성을 통해야 합니다. 이 생에서 공부를 하려면 내 삶에 대해 송두리째 한 번 돌아봐야 합니다. 내 생각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모습을 세울 수 있을 때 공부가 가능해집니다. 만약 잘못을 하고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죄악을 범하겠습니까? 정치인들이나 범죄자들을 보십시오. 참회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그렇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4) 네 번째는 무탐으로 alobha이며, 탐내지 않는 마음입니다. 무탐의 탐은 탐진치의 탐입니다. 생사윤회를 반복하는 자신이 존재하는데 필요한 도구나 사물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탐의 대표적인 예로 간디가 있습니다. 간디가 인도 대표로 영국 의회에 참석하러 갈 때 공항에서 검문을 받습니다. 그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은 물레, 밥그릇과 염소젖 한 통, 담요 6장 그것 뿐이오.” 간디의 평생 재산인 것입니다. 간디는 이와 같이 탐욕심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중국에 방거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방거사는 중국 최고의 부자였는데 공부를 해보니까 재산이 오히려 공부에 방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거사는 나에게도 해로운 재산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주느냐 하며 동정호에 다 버립니다. 

(5) 다섯 번째 무진은 advesa이며, 화내지 않는 마음입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 혹은 괴로운 것, 괴로움을 낳는 원인 등에 대하여 화를 내지 않는 마음입니다. 무진의 진은 탐진치의 진입니다. 탐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라면 진은 감정에 대한 욕심입니다. 법정스님의 책 ‘무소유‘에 수연스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960년대 시골 버스는 상태가 좋지 않아서 문제가 자주 생겼습니다. 수연스님은 버스를 탈 때마다 드라이버를 주머니에 넣고 버스 창문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드라이버로 창문을 고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연스님이 머무는 선방에는 항상 고무신들이 깨끗하게 정돈되었고, 절이 깨끗했다고 합니다. 또 누군가가 찾아오면 밤늦게 혼자 일어나 손님의 신발을 깨끗하게 닦아줬다고 합니다. 이처럼 수연스님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 상황에서 필요한 것을 행했습니다. 불편함이나 귀찮음 때문에 화 내지 않고 묵묵하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동했던 것입니다. 

(6) 무치는 amoha이며,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입니다. 인과응보의 도리를 알고 사제의 진리를 이해하고 불법승 삼보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불법승 삼보란 부처와 부처의 법과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수행자 집단을 말합니다. 혜능에 의해 불은 뛰어남이며, 법은 올바름이며, 승은 깨끗함으로 확대 해석됩니다. 

(7) 정진은 virya이며, 선한 것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선을 닦고 악을 끊으려고 하는 구체적인 수행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목적을 위해 한 가지 행위를 지속적으로 하면 정진을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정진은 같은 행위를 같은 시간에 일정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행위입니다. 이 생에서 정진을 한 번 해보아야 자신의 업을 뛰어넘어 달라진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스님들은 3개월 결재하고 3개월 해재 합니다. 무문관이란 6년 동안 해재 없이 계속 결재하는 것입니다. 6년 동안 계속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무문관은 정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 경안은 prasrabdhi이며, 신체나 마음이 자유롭고 경쾌하게 작용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을 평안하게 지속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상태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의 수행을 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아주 편안하고 안정된 상태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신체나 마음이 싫어하는 한 소리에 걸려 자유롭지 못하고 경쾌하지 않습니다. 이때 한 소리의 업의 덩어리를 추중이라고 하는데, 수행 등을 통하여 이 추중이 없어지면 경안의 상태가 됩니다. 

(9) 불방일은 sapramadika이며, 악을 끊고 선을 닦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문제가 게으름입니다. 끝까지 부지런히 노력하고 애쓰는 것을 유지해야 합니다. 불방일이란 게으름에 손 놓지 않고 끝까지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천민이었던 쟁기꾼 낭갈라꿀라가 있었습니다. 부처님 당시 많은 천민이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불교에서는 귀족과 천민의 계급 제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낭갈라꿀라는 친구를 따라 출가를 합니다. 낭갈라꿀라는 천민 시절에 입었던 옷을 버리지 않고 나무 위에 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하다가 방심이 들 때 산 속에 찾아가 걸어두었던 옷을 쳐다봅니다. 천민 시절의 힘들었던 일들을 떠올리고 다시 돌아와서 열심히 공부를 하며 수행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방일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 우리의 마음에는 고와 락과 사가 있었습니다. 사는 upeksa이며, 중용의 마음으로 흥분하거나 침울하지 않고 언제나 안정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안정된 뒤에 일어나는 아주 고요한 상태가 심정직입니다. 번뇌와 소번뇌의 작용을 억제하여 마음을 언제나 적정의 상태로 유지하는 작용을 말합니다. 집착에 의해 고 아니면 낙이 됩니다. 집착을 떠나면 고락을 떠난 사의 상태가 됩니다. 

(11) 불해는 ahimsa이며, 생물에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거나 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물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물, 심지어 무생물에까지 불해를 강조하는 것은 불교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 어느 해 안거를 마치고 떠나는 날 아침 어떤 비구가 사리불을 비방합니다. 유행을 떠나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사리불에게 비방의 진위를 묻습니다. 그때 사리불이 세상을 향하여 조용히 한마디 합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출가하여 이제 까지 풀포기도 다치지 않게 한 것이 저의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온 제가 어찌 다른 사람을 비방하겠습니까?” 감동스러운  불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 어떤 스님이 산길을 가다가 도둑들에게 잡힙니다. 도둑들은 스님이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풀로 스님을 묶었습니다. 풀이 약해서 마음만 먹으면 끊을 수 있는데 스님은 묶인 채로 가만히 있습니다. 마침 그 나라 임금이 사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풀에 묶인 스님을 발견합니다. 임금은 신하들을 시켜 스님을 묶은 풀을 풀어줍니다. 임금은  “스님, 이 정도의 풀이라면 스스로 끊을 수 있는데 어째서 묶여 있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스님은 임금이 지나가면서 자신을 구해주기도 했지만 나를 묶은 풀도 살렸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스님은 어떤 생명도 다치게 하지 않는 불해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간디의 아힘사 운동도 이러한 불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디의 아힘사 운동이란 무저항, 비폭력, 불살생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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