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제18송 전변원리의 심법생기 연유
페이지 정보
본문
27. 제18송 전변원리의 심법생기 연유
인도에서 기원전 500년부터 존재했던 불교가 이슬람의 침공으로 1203년 멸망을 하게 됩니다. 약 1700년 동안 존재했던 불교문화가 허망하게 말살되어 버립니다. 백만여 평의 땅에 세워진 사찰과 불상과 거기에 거주했던 승려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때 인도에서 티벳으로 망명한 승려들에 의해 티벳에서는 새로운 불교의 양상으로 활불 사상이 성립하게 됩니다. 즉 림포체 신앙이 형성됩니다. 지금 달라이 라마는 14세입니다. 누군가가 죽고 태어나고 해서 14번째가 지금의 달라이 달마라는 말입니다. 달라이 라마 1세는 겐둔 뚭빠(1391- 1475)입니다. 1세가 열반에 들어 2세로 환생하고 다시 3세로 환생하고 하여 14세 달라이 라마로 환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의 원래 이름은 여러 명이 환생한 이름을 차례로 붙여서 카왕 로상 예셰 텐징 강쪼가 된 것입니다. 이 사상은 열심히 수행하여 어느 단계에 오르면 자신이 다음 생에 받을 몸을 예견하여 삶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활불 사상으로 림포체 신앙이라는 티벳 불교의 특수한 양상을 만듭니다.
이 사상에 기반하여 티벳 불교는 아직도 가장 활발하게 살아있는 불교의 한 양상으로 있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존재하는 것은 오직 식뿐인데 그래도 세상은 만들어지고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식만 있고 나와 대상은 원래 없다고 지난 시간에 말했습니다. 그러면 식은 어떻게 생길까요? 유식 18송을 봅시다. ‘유일체종식 여시여시변 이전전력고 피피분별생’ ‘일체종자식이 이렇게 전변하여 변하는 힘 때문에 그들에게 분별이 생긴다.’입니다.
의식을 보면 내가 대상을 접하여 일으키는 생각이 있고 현재와 아무 상관없이 일어나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 의식을 일어나게 하는 뿌리가 있습니다. 내 속을 살펴보면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쌓인 업의 종자가 있습니다. 그것이 뿌리입니다. 그 뿌리가 제8식 아뢰야식입니다. 제8식에서 나온 제7식은 나라고 규정하는 주체가 되는 의식입니다. 나를 이루고 있는, 나라고 인정하는 것의 중심이 제7식입니다. 저장창고에 들어있는 무엇이 이 생에서 사용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과학적 증명을 일란성 쌍둥이의 성장을 관찰함으로써 밝혀졌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저장된 업이 있음을 쌍둥이가 태어나자마자 다른 환경에서 키웠는데 세월이 지나 전혀 다르게 성장한 쌍둥이의 성격이나 특징 등이 똑같음을 보고 태어나기 전에 갖고 있는 업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일체 종자식이란 내가 했던 모든 업이 저장된 창고입니다. 내가 일으키는 식은 일체 종자식에 뿌리를 두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내용이 다 다른 이유는 일체 종자식에 저장된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일체 존재를 산출하는 일체 종자식은 제8식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내가 수억 겁 동안 살아오면서 행위했던 모든 업이 내 아뢰야식 속에 일체 종자식으로 저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을 일체 종자식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아뢰야식으로부터 여러 가지 현실의 마음(분별)이 생겨나지만 그것은 아뢰야식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아뢰야식과 현실의 마음이 상호 인과적 작용에 의한 것입니다. 내 속에 저장된 것이 현재 상황과 결합해서 새로운 결과로 나온 것입니다. 그 상황에 맞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식삼십송의 18송에서는 상호 힘에 의해 이렇게 전변 한다고 했습니다. 아뢰야식의 전변에는 아뢰야식 자체의 전변과 현실 마음의 전변이 있습니다. 아뢰야식 자체의 전변이란 아뢰야식이 현실의 마음 작용, 여러 가지 분별을 산출할 수 있는 상태로 변하는 것입니다. 현실 마음의 전변이란 아뢰야식이 변화해서 현실의 마음을 생성하여 그것이 감각, 지각 사고에 작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 말을 상대방이 들어주면 기분이 좋고, 상대방이 들어주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 그것입니다. 말나식을 관통하여 더 깊이 들어가 아뢰야식을 보게 되면 전생과 윤회가 모두 들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이 생을 살아가는 근거가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목표를 설정하고 실천하는 것이라든가, 삶을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진리를 추구하여 견성성불의 목표를 설정하고 수행, 정진하는 것 등입니다.
아뢰야식에 의해 이런저런 분별이 생겨납니다. 아뢰야식은 창고로 내가 수억 겁 동안 행해 왔던 모든 업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그 업들을 근거로 분별이 생기며 그 분별에 따라 다른 업을 끄집어 내어 쓰는 것입니다. 꿈에서 본 생소한 풍경도 사실은 전생을 살아오며 보았던 풍경이 내 속에서 있던 것으로 나타난 것 뿐입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 형상화되지는 않습니다. 앞에서 나와 대상은 원래 없는 것이고 식만 있다고 했습니다.
- 이전글28. 제19송 전변원리의 유정상속 연유 21.08.03
- 다음글26. 제17송 일체유식 21.08.0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