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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제20송 삼종자성의 변계소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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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7,539회 작성일 21-08-03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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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제20송 삼종자성의 변계소집성


지난 시간에 나와 대상의 실체는 없고 오직 식만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왜 세 가지 자성을 말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자성은 식을 떠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 가지 자성이란 유식에서 우리의 성품을 분별한 것입니다. 세 가지 자성에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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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 20송을 봅시다. ‘유피피변계 변계종종물 차변계소집 자성무소유’ ‘이러이러하게 두루 계탁(의식의 작용으로 사물을 잘 헤아리고 분별함)함에 있어서 갖가지 사물을 두루 계탁한다. 이 변계소집의 자성은 실재하지 않는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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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자성을 살펴봅시다. 변계소집성은 망분별된 것으로 원래 없는데 내가 분별로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의타기성은 다른 것에 의한 것으로 다른 인연에 의해 생긴 것입니다. 원성실성은 완성된 것으로 원래 있는 본질, 진여, 불성을 가리킵니다. 

변계소집성은 내가 일으키는 분별에 의해 사물이 분별된 것입니다. 분별하는 종류가 많아서 ‘이러 이러 하게’라고 말합니다. 능변계의 허망분별을 가르키며, 허망분별에 의해서 갖가지 변계된 사물을 두루 계탁합니다. 허망하게 집착된 오온, 12처, 18계 등의 법, 자아의 지성 및 차별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산길을 가다가 떨어져 있는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합니다. 내 분별에 의해 새끼줄을 뱀으로 본 것이 변계소집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 모두 분별합니다. 여러 가지 개념이나 말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사물을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통섭불교원 건물의 가격이 10억 원을 합니다. 이 때 10억이라는 가치는 원래 없는 것인데 변계소집에 의해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고 육체입니다. 안 이 비 설 신에 의해 사물이 보이거나 소리가 들리거나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감각을 느낍니다. 실제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변계소집성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식의 분별에 의해서 망분별된 것입니다. 망분별의 망이란 허망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밖에 사물들이 존재한다고 그릇되게 분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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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대상과 같은 사물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원래는 실재하지 않으나 망분별에 의해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까요? 인도 불교의 10대 논사 가운데 한 사람인 안혜는 ‘이론에 의한 증명’, ‘교설에 의한 증명’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론에 의한 증명은 이증으로 인식대상에 대해 차이가 없어도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일을 통해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물에서 서로 다른 다수의 실체가 있다고 하는 것은 불합리적인 말입니다. 예를 들어 물이 가득 차 있을 때 사람이 볼 때는 물입니다. 하지만 물고기가 봤을 때는 물이 아닙니다. 공기와 같이 봅니다. 다른 생명들이 보면 똑같은 물을 보고도 모두 다르게 봅니다. 사람과 물고기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들에게도 물은 다르게 보입니다. 아귀에게는 물이 고름이나 피로 가득 찬 강이고 천인에게는 물이 보석으로 장식된 토지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의 실체는 원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안혜는 만약 물이라는 사물이 실재한다면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사물이 비존재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물이 실재한다면 모든 존재가 물을 물이라고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교설에 의한 증명은 교증이라고 합니다. 경전에 있는 내용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안혜는 반야경의 ‘진실로 수보리여, 범부나 이생이 집착하는 것처럼 여러 가지 사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를 인용하여 사물의 비존재를 주장했습니다. 사물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의 분별을 통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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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분별에 의해 물질을 만들어냅니다. 마음에 의해 형상화되고 물질화됩니다. 형상화, 물질화는 어떻게 일어날까요? 이것은 네 가지 연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네 가지 연이란 인연, 등무간연, 소연연, 증상연입니다. 인연이란 인과, 연기의 법칙입니다. 내가 생각을 일으키는 단계입니다. 등무간연이란 간격이 없이 바로 일어나는 연입니다. 내가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생각을 지속적으로 해야 형상화가 이루어집니다. 간격이 없이 일어난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한 번 힘을 가하면 지속되는 운동을 하는 관성의 법칙과 유사합니다. 소연연은 대상에 의한 연이고 대상을 말합니다. 내가 마음을 내는 상대를 말합니다. 증상연은 대상과 나에 의한 연입니다. 내가 생각이 일어날 때 다른 것이 생기지 못하도록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연에 의해 마음에서 물질화, 형상화가 이루어집니다. 어떤 한 가지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구체화되도록하는 것이 이 네 가지 인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가지 사물을 보면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확정하는 것입니다. 내 분별에 의해 대상이 물질화하는 것은 이 네 가지 연에 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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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미워하는 것을 예로 들어봅시다. 미워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인연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지속되게 하는 것은 등무간연이고 미워하는 대상, 사람은 소연연입니다. 미워하는 마음 외에 다른 마음이 못 일어나게 하는 것이 증상연입니다.

 변계소집성이란 우리의 망상 속에서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예를 들어 가치란  분별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마음이나 시각에 의해 매겨진 것입니다. 귀중품인 금은 금이 적거나 없는 곳에 가면 비싸지만 금이 많은 곳에 가면 귀중품이 아닙니다. 의타기성은 인연에 의해 생기다가 인연이 없어지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들어봅시다. 자동차를 열심히 타다가 기능이 다 하게 되면 차를 폐기합니다. 그렇게 되면 차가 없어집니다. 인연만큼 존재하다가 인연이 다 하면 없어집니다. 원성실성은 본질 자체입니다. 예를 들어 금에 대한 가치, 시각이 존재하지 않는 금 그 자체를 말합니다. 무엇인가 덮어쓰고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도 같습니다. 본성은 무부무기이고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런데 ‘나’라는 것이 생겨서 선도 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도둑을 잡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둑의 습성, 본성을 알면 도둑을 잡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아야 올바르게 살고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원성실성을 알아야 부처라는 목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금목걸이를 예로 들어봅시다. 금목걸이를 보고 탐욕을 일으켜 훔치고 가격을 매기고 주관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변계소집성입니다. 금목걸이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연기법,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것으로 의타기성입니다. 존재하는 것의 본질을 깨달아 세계가 무위, 무상인 것을 인식하는 것이 원성실성입니다. 유식을 공부하는 것은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을 알고 멸한 후 원성실성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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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태희는 마음에 드는데 하희라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합시다. 내 심소에 저장되어 있는 업이 김태희처럼 생긴 모습은 마음에 들고 하희라처럼 생긴 모습은 별로인 것이지 상대방 모습 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내가 어떤 상대방을 좋아한다면 내가 갖고 있는 업이 상대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상대방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좋아하는 것은 내 업만큼 좋아하게 됩니다. 그것은 상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업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일어나는 주체는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나는 잘 했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생각하는데서 모든 문제가 생깁니다. 내가 이성을 좋아하는 정념이 생겼을 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보면 자신의 업에 축적되어 있는 욕망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 객관적이 되어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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