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제22송 삼종자성의 불일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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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제22송 삼종자성의 불일불이
남대문 보수공사는 정치 논리에 따른 졸속공정으로 한국인들의 인간성을 잘 보여준 것입니다. 반면 서양은 1세기 동안 지은 건물도 있습니다. 브루넬레스키의 돔이 그 대표적 예로 서양인들의 인간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지게 됩니다.
유식 22송을 봅시다. ‘고차여의타 비이비불이 여등상등성 비불견차피’ ‘그러므로 이것은 의타기성과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무상 등의 성품과 같은 것이다. 원성실성을 보지 않고서는 의타기성은 보이지 않는다.’입니다.
원성실성은 본질, 진여의 개념이었고 식으로 따지면 제8식 아뢰야식이었습니다. 이것이 업에 의해 현상으로 나타날 때 변계소집성, 의타기성으로 나타납니다. 만약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을 이해하고 깨트리면 원성실성을 바로볼 수 있습니다. 변계소집성이나 의타기성은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덧씌워진 상태에서 보는 것입니다. 22송을 살펴보면 ‘의타기성과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는 말은 원성실성이 밖으로 나타난 의타기성은 원성실성과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소승불교, 원시불교에 의하면 중생은 부처가 못됩니다. 부처가 되려면 수억 겁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죽도록 수행해도 언제 될지 모릅니다.
대승불교로 넘어오면 달라집니다. 중국 당나라 때 덕산선감 스님이 있었습니다. 덕산선감 스님은 금강경을 통달하여 별명이 주금강(금강경을 두루 통달하다) 이었습니다. 당시 중국 남쪽에는 선불교가 성행하고 있었고 북쪽에는 기존 교종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남방의 선불교에서는 금방 견성성불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선감 스님은 못마땅해서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자 남방으로 내려가서 용담 선사가 머물고 있던 절에 도착합니다. 선감 스님은 용담 선사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금강경 지식을 마구 늘어놓았습니다. 용담 선사는 실컷 듣다가 밤 9시가 되자 잠을 자자고 합니다. 밖이 어두워 모두 촛불을 하나씩 가지고 갑니다. 그때 마침 용담이 모두의 촛불을 꺼버립니다. 선감은 촛불을 끈 순간 자신이 여태껏 금강경을 외우고 그 지식을 자랑하고 다녔던 것이 아집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허망한 경계에 있었다가 본질을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본래 성품, 진여, 아뢰야식을 본 것입니다.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선감은 자신이 갖고 왔던 금강경을 모두 불살라 버립니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불교의 성격이 크게 바뀝니다. 소승불교에서는 수억 겁을 거쳐도 겨우 부처가 될까 말까 하는데 대승불교에서는 바로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소승에서 부처는 먼 존재였다면 대승에서는 내가 바로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소승에서 대승으로 넘어오면서 누구나 쉽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생겨났습니다.
1. 불일불이
유식 22송의 ‘이것은 의타기성과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는 말이 상당히 익숙하지 않습니까? 반야심경을 보면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것은 결국 같은 말입니다. 원성실성은 본질, 진리, 진여이고 변계소집성, 의타기성은 진여에서 나온 현상입니다. 결국 ‘진리에서 나온 현상은 진리와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세계와 미혹한 세계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이 됩니다. 원성실성은 깨달음의 세계로 청정, 진실의 세계입니다. 의타기성은 미혹한 세계로 부정, 허위, 업의 세계입니다. 이것을 식과 연결시키면 원성실성은 제8식 아뢰야식이며 의타기성은 제7식 말나식입니다. 원성실성은 열반의 세계이고 의타기성은 생사의 세계입니다. 즉 열반과 생사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입니다.
‘진리에서 나온 현상은 진리와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다.’는 말로 돌아가서 이 말을 살펴보면 결국 열반이 곧 생사이고 진리가 곧 현실이고 현실이 곧 진리란 말이 성립됩니다. 진리는 현상과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합니다. 앞에서 나온 선감의 촛불도 그렇습니다. 어두운 가운데 촛불을 켜면 환한 세상 밖에 없습니다. 어둠이 번뇌, 미혹이라면 밝음은 진리, 진여입니다. 어둠이 밝아지면 번뇌가 보리,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밝아지는 순간 어둠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움 자체가 밝아진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번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수행을 해서 지혜를 터득하면 번뇌가 진리로 바뀔 뿐입니다. 번뇌와 진리는 동체로 알면 진리이고 모르면 번뇌인 것입니다. 본질을 알면 열반, 본질을 모르면 생사입니다. 본질을 모를 때는 끝도 없이 생사를 되풀이 합니다. 본질을 알면 열반적정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번뇌가 곧 보리이다.’라는 말이 바로 이것 입니다. 번뇌가 보리가 되는 것이지 보리를 얻으면 번뇌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이 괴로움에 찬 생사의 세계가 그대로 안락한 열반의 세계이다.’고 한 것입니다. 중생도 한 생각만 바꾸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일불이의 진리는 의타기성의 연으로부터 망분별된 것이 제거되지 않으면 볼 수 없습니다. 의타기성은 원래 원성실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두 가지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바꾸어 의타기성의 망분별만 없애면 원성실성이 되는 것입니다. 의타기성은 또한 마음입니다. 마음의 모습에 따라 그것이 생사, 열반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늘을 봅시다. 의타기성이 하늘이라면 구름이라는 변계소집성을 걷어내 버리면 하늘이 태양(원성실성)의 빛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하늘의 모습은 이렇게 달라지지만 태양은 언제나 같습니다. 구름에 가려지든 구름에 가려지지 않든 언제나 태양은 그대로 입니다. 앞에서 열반과 생사가 같은 것이고 번뇌와 보리가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2. 깨치기 전후의 증명
진여와 마음도 그러합니다. 깨치고 알면 내 마음이 진여이고 깨치지 못하면 무명이 됩니다. 세상사가 다 그렇습니다. 중생들은 아집에 의해서 관계를 보며 자기 자신의 고집만을 내세웁니다. 이렇게 되면 지혜를 얻을 수 없어 세상이 생사, 번뇌, 무명이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애를 써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연기적인 관계를 이해한다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연기적인 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연기적인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해심밀경에서 ‘승의제의 상과 제행의 상이 불일불이’하다고 했습니다. 승의제의 상은 진여이고 제행의 상은 중생이 보는 형상입니다. 유가사지론을 보면 ‘상과 진여가 불일불이’라고 합니다. 현양성교론을 보면 ‘승의제와 원성실성, 진여와 유상의 법이 불일불이’라고 합니다. 삼무성론을 보면 ‘5법 중 앞의 4법과 진여가 불일불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전부 진여와 현상(마음)이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한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깨치고 보니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은 무상 무아였습니다. 모든 존재는 항상 일정한 형태 없이 끊임없이 변해가며 나란 것이 없습니다. 제행과 같은 일체적 현상적 존재는 생하여 멸하는 찰나적인 존재입니다. 끊임없이 변합니다. 예를 들어 100년 후 우리가 여기에 존재할까요? 이미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지금 이 형상을 가지고 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변하거나 허물어져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제행의 상태가 바로 무상입니다. 이런 무상한 특성을 무상성이라고 합니다. 무상의 시작이 생이고 종착역이 멸입니다. 무상은 끊임없이 생멸합니다. 이것은 고통스럽고(고) 실체가 없고(공) 나란 것이 없습니다(무아). 현상의 모든 존재는 무상이므로 고이고 공이고 무아가 됩니다. 누구나 이런 성질을 보편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완성된 본질을 보지 못하면 의타기성으로 원성실성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나식, 의식을 근거로 생각을 일으켜도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꿈을 꿀 때는 꿈이 아니고 현실이지만 꿈에서 깨면 꿈임을 알게 됩니다. 본질을 모를 때는 우리가 실재하지 않는 것임을 모릅니다. 내가 본질을 알고 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실재하지 않는 꿈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유식의 지혜는 두 가지입니다. 가행위에서 근본무분별지와 후득청정세간지가 있습니다. 가행위란 산의 정상을 향해 끊임없이 올라가는 것으로 수행, 정진하여 성숙되어가는 단계입니다. 근본무분별지는 산의 정상에 다다른 단계입니다. 진리 자체를 보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모든 지혜의 근원이 되고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없는 일원적인 인식입니다. 진리와 합일된 지혜입니다. 진여에 통달한 지혜입니다. 8정도의 정견과 같습니다. 우리는 정상에 있는데 그치지 않고 세상에 다시 내려와야 합니다. 그것이 후득 청정 세간지입니다. 근본 무분별지를 얻은 뒤에 얻어지는 청정한 지혜입니다. 우리가 정상에 오르는 이유는 정상에서 느낀 마음을 내려와서 펼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부처로 만들기 위해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마음에서 보면 현상계는 잡다한 차별의 세계이고 실재하는 세계로 보입니다. 하지만 근본 무분별지를 터득하면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세계는 없어지고 절대의 세계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깨치지 못한 눈으로 볼 때 이 세상은 유위입니다. 하지만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무위입니다. 중생이 이 세상을 보면 중생의 세상이고 부처가 세상을 보면 부처의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이상적인 부처의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청원 유신 선사의 이야기를 봅시다. 성철 스님의 유명한 말이 ‘산은 산이오, 물은 물이다.’입니다. 유신 선사는 출가하고 30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30년 전 참선을 하지 못했을 때는 산을 보면 산이었고 물을 보면 물이었소, (의식으로 보는 산과 물) 선지식을 접하고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달했을 때 산을 보면 산이 아니었고 물을 보면 물이 아니었소, (세상의 본질이 보일 것 같은 단계) 그런데 이제 다시 세상을 보니 예전처럼 산을 보니 오로지 산이고 물을 보니 오로지 물이었소.” 우리가 밥을 먹을 때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 온갖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때 밥만 먹는 사람이 도를 깨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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