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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유식과 법성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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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24,261회 작성일 21-08-03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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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1강 유식과 법성게法性偈


장자에 나오는 포정이라는 백정은 19년 동안 소를 잡았습니다. 19년 동안 소를 잡고 나니 길에서 소가 지나가면 가죽은 가죽대로 뼈는 뼈대로 나누어 보였습니다. 어떤 일에 집중하여 경지에 들어가면 윤곽이 보이게 됩니다. 글을 오래 보면 포정에게 소가 나누어져 보이듯이 글이 똑똑 떨어져 보입니다. 말 뜻을 알고 들으면 쉽습니다. 글을 볼 때 갈라져 보는 것을 과목科目이라 합니다. 포정이 소를 볼 때에 갈라져 보이고 분해되어 보이듯이 글도 그렇게 보여 대의를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법성게란 마치 소 한 마리를 두고 어디까지 머리고 어디까지 가죽이고 심줄이고 뼈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의상은 존재의 실상인 법성에 대한 과목을 법성도로 그려 놓았으며, 법성게로 표현하였습니다. 법성게를 분삼分三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법法이고 둘째는 지知이며 셋째는 행行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법은 실상과 연기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심도 있고 책도 있고 불상도 있어 그것들이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집에는 서까래도 있고 대들보도 있어 여러 가지가 어울린 것이 집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실상은 본래 모양이며, 연기는 작용인 것입니다. 유식론에서 실상은 원성실성의 본질이고 의타기성을 연기라고 합니다. 실상은 본질이고 연기는 현상입니다. 겉모양은 연기이고 속 모양은 실상입니다. 유식은 연기입니다. 진여는 실상이고 파동으로 퍼진 것을 연기라고 합니다. 물이 있을 때 물은 실상이며 물에 바람이 불어 파동을 일으키면 연기에 대한 현상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파도는 연기이고 물 자체는 실상입니다. 연기를 통하여 실상을 보자는 뜻입니다. 


법성게의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2.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3.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性) 

4.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5.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時無量劫)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性) 

6.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7.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8. 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 

9.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10.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

11.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12.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量)

13. 이다라니무진보(以多羅尼無盡寶) 

   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 

14.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법성게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실상 — 1. 소증所證, 2. 능증能證

        법   연기 — 소증 3. 능연기

                          소연기 — 4. 호상互相연기, 

                                    차제次第연기 — 5. 세간연기 

법성게                                              6. 출세간연기 


                     7. 능증 


         증  8. 자증덕自證德

             9. 이타덕利他德

             

            

             10. 멸과滅果

        행   수인修因---- 11. 계진契眞, 12. 진수進修, 13. 성덕成德 

             14. 극과極果 


1. 실상의 소증

1.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이라 했습니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으니 실상 속에서 보면 제법은 본래 적적하다는 것입니다.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그 자리는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실상의 소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바깥에서는 파도가 치고 온갖 모습을 연출하지만 바다 깊이 들어가면 고요할 뿐입니다. 깊은 바다는 하나여서 두 가지 모양도 없고 고요할 뿐이며 이름도 명명할 필요가 없으며  모양도 의미가 없습니다. 오고 가는 이 없어 일체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2. 실상의 능증

2.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증지라야 아는 것이지 다른 경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실상 그대로입니다. 실상의 능증을 설명한 것입니다. 실상이라 할 때 보통 중생들은 분별하여 6식 7식 8식으로 알며 증지證智는 부처님이 가지는 평등지입니다. 증證한 지智는 부처님이 가지는 것으로 보살들은 증한 지로 알지만 우리들이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증득한 지혜로 알 뿐이고 나머지 경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실상에 대해서 능연과 소연을 논한 것입니다. 


3. 연기 소증의 능연기

3. 실상은 본체인데 연기에 가서는 소연과 능연으로 나누어 집니다. 유식에서 능연은 8식, 소연은 5위 100법입니다.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진여의 성품은 매우 깊어서 미묘하다는 것입니다. 진성자리는 적적하여 움직임이 없습니다. 연기는 능연기로 진성자리는 깊고 깊어서 본래 미묘합니다. 이것은 기신론 연기와 같습니다. 유식연기에서는 망妄이 연기緣起를 하고 진성은 연기를 하지 않습니다. 대승에서는 이것에 진성이 연기한다고 합니다. 본성은 원성실성이지만 우리가 사는 자리는 의타기성으로 자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연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을 따라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자성은 본래 적적하지만 연기에서 적적에 머물지 않고 작용을 하여 움직임이 있는 곳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연기법에 들어가면 소연, 능연이 있는데 소연 가운데 능연기가 있고 소연기가 있습니다. 소연기는 능연기로 변해서, 즉 실상이 변해서 5위100법이 된다는 것입니다.


4. 연기 소증의 소연기의 호상연기

4. 소연기는 호상연기互相緣起와 차제연기次第緣起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연기는 중론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상자리가 움직이면 한편은 공간으로 퍼지고 한편은 시간입니다. 퍼진 물건끼리 서로 비교해 보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습니다. 가루가 수백 개 수천 개 되지만 삼 단으로 된 수풀, 삼 단으로 된 짚단만 공간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서로 의지하는 것을 호상연기라고 했습니다. 유식론에서도 호상연기가 나옵니다. 서로 맞대는 것은 공간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전념이 툭 꺼지고 후념이 나오듯이 종자가 생종자 할 때에 그것은 차제연기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호상연기는 공간적이고 차제연기는 시간적으로 구분해 놓은 것입니다. 

 법성게에서 호상연기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들었으며 여러 개가 하나이네.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라는 말입니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먼지 하나에도 온 우주가 들어있고 모든 먼지가 역시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많은 가운데 하나 들었다는 것은 하나 속에 시방이 들었듯이 낱낱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파도와 물은 하나입니다. 파도가 천파만파 해도 하나 속에 들어 있습니다. 파도는 여러 개이지만 물은 하나로, 하나 가운데 들었듯이 물결마다 파도마다 물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일체가 물 가운데 여러 가지 파동이 들었고 일중일체가 된 것입니다. 파도가 모두 물입니다. 다중일多中一, 일一에서는 하나를 이야기하는데 물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다多라고 하는 것은 파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 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물 가운데 많은 파도가 들었고 파도마다 모두 물이라고 할 때에 모두는 다 하나입니다. 하나 가운데 일체는 파도고 하나는 물이고 많은 가운데 많은 것도 물이고 파도도 낱낱이 물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가 곧 일체로 물이 파도고 파도가 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집단을 이야기 하는데 하나가 곧 일체로 시간연기적인 것이 공간으로 가는 것은 집단입니다. 이놈을 이렇게 하고 저놈을 저렇게 하듯이 수풀이 여러 가지로 서로 의지하는 것은 하나가 곧 일체로 한 티끌 가운데 이것은 매우 복잡한 것입니다. 십행문에 가면 전유錢喩가 나옵니다. 돈 열 냥을 가지고 있는데 한냥을 빼놓으면 열냥이 안됩니다. 그렇지만 한 푼 한 푼 낱낱이 열 푼을 대표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전유의 비유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국민은 몇 천, 몇 만 명입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 한국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로 누구든지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5. 연기 소증의 소연기의 차제연기의 세간연기

5. 차제연기는 시간적 관점에서 연기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겁이 일념이고 일념이 곧 무량겁이라고 했습니다. 시간적으로 보아 과거, 현재, 미래에서 과거와 현재가 관련되어 있는데 무엇이 현재인가 파악해 보아도 현재라는 것은 없습니다. 물체가 없는 것입니다. 관념이지 어떤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도 마찬가지로 현재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있을 수가 없으며 단지 우리가 느끼는 것이지 현재는 벌써 지나가 버려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을 여러 가지로 벌려서 이무애, 사무애. 이사무애, 사사무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소득이라는 말은 실물이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생은 식심으로 갖는 것이지 실물은 없다는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따져보면 전부 다 그렇습니다. 허깨비일 뿐 알맹이가 들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책상을 부수어 먼지를 내면 그 낱낱의 먼지 속에 책상이라고 할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무도 마찬가지고 책상도 마찬가지로 그것은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유가설아법에서 명언名言으로 설했다고 했습니다. 명언으로 설하는 것은 실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익혔던 성질이 뭉쳐서 그 속에 무엇인가 들어있는 것 같지만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림자로 치면 그것은 변계소집성입니다. 생명을 모르니 생명의 본질에는 무엇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변계소집성은 그림자라는 말입니다. 법이라 할 때에 5위 100법 하든지 5위 1법 하든 간에 모든 것의 벌어진 것을 법이라고 그랬습니다.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잉불잡난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구 세와 십 세가 서로서로 즉하였지만, 그래도 잡난하지 않고 격별히 성립함이로다 입니다. 일념은 앞에서 물결과 파동이야기를 했듯이 무량 겁은 긴 것을 얘기하는 것이고 일념은 짧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왕 시간 속에 사니까 시간을 두고 얘기해 봅시다. 현재에서 지나온 것은 과거이며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미래입니다. 그러면 현재에도 과거, 현재, 미래가 있고 과거에도 현재, 과거, 미래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미래에도 과거, 현재, 미래가 있어 그것을 구 세라고 하는데 삼삼은 구입니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가 구 세입니다. 그 놈을 꿰는 무엇인가 있을 것입니다. 염주를 꿰는 끈과 같이 끈을 보태는 것이 십 세입니다. 그러므로 구 세 십 세는 티끌과 티끌이 시간을 꿰뚫어 공간적으로 합하여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세십세호상즉 해야만 그것이 과거가 현재가 될 수 있고 미래가 현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현재가 과거가 될 수 있고 미래가 될 수 있는 것을 관념상으로 알아봤는데 그것은 구 세 십 세가 서로 붙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또한 뒤집어 과거가 미래 될 수 없고 미래가 과거 될 수 없습니다. 그대로 과거 삼 세는 과거 삼 세이며 현재 삼 세는 현재 삼 세이고 미래 삼 세는 미래 삼 세란 말입니다. 구 세를 꿰뚫어 연결해 놓았는데 혼란스럽지 않고 끼리끼리 잘 나누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구세십세호상즉은 세간연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6.  연기 소증의 소연기의 차제연기의 출세간연기

6. 다음은 출세간연기를 말합니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초발심을 낼 때가 정각을 이루는 것이니, 생사와 열반이 항상 서로 어울림이로다 입니다. 

  출세간연기는 세간연기의 모양과 좀 다릅니다. 냄새도 다릅니다. 생사와 열반이 잘 조화를 하며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상법에 있어서 여러 가지 법성, 연기, 무상 그런 내용을 진리로 정하여 나머지 경계에 드는 것을 부처님이 알고 보살이 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구 세 십 세가 되었지만 이런 법이 있는 줄 누가 알겠습니까? 아는 것을 증證이라고 합니다. 증자는 알아차리는 것으로 주관과 객관인 이理와 사事가 합한 것을 말하니까 알아듣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첫번째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증이란 자기가 증한 것과 증한 것을 남한테 베푸는 것인데 물건을 임지자성任持自性하는 것이 있고 임지하는 동시에 궤생물해軌生物解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의적으로 부처님이 증지했습니다.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실상과 연기가 섞여 있어 분별이 없는 것입니다. 증하고 나니까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닌 하나로 이와 사 즉 본질과 현상이 서로 섞여 불분명하니 분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7. 연기의 능증

7. 연기의 능증에 해당하는 것이 이러한 경지로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시방의 부처님과 보현의 경계이다.’ 입니다. 중생들은 듣고 보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경계를 만들지만 부처는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입니다. 


8. 자증득 

8. ‘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義’ ‘능인의 해인삼매중에 여의와 부사의를 번출함이로다.’입니다. 

나름대로 증한 것이 있고 능인은 설한 것이라고 하니까 잉불잡난이 있어 잘못이 드러난 것입니다. 삼매 가운데 드러나는 것은 중생의 연기와 달라서 우리는 진여 연기속에 파묻혀 있지만 부처는 그것을 드러냈습니다. 그것을 입으로 몸으로 드러낸 것이 팔만대장경인데 번출한 것이라고 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합니다. 속에서 그 기운이 북받쳐서 눈으로 입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번출한 것은 자전식하고 다르지만 그 많은 가운데 여의주 같은 것을 보배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으로 꽉 차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깨친 경지에서 삼라만상은 설명 안 해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석가여래 부처님 입으로 설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번출여의부사의는 대통령이 어디를 나가면 사진을 찍는데 사진 찍는 사람은 여럿이지만 대통령은 하나입니다. 


9. 이타덕

9.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機得利益’ 보배의 비를 내려 중생을 이익하게 하여 허공을 가득 채우니 중생의 그릇에 따라 이익을 얻음이로다 입니다. 

법화경에서 비는 똑같이 내리는데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작은 나무는 작은 나무대로 중간 나무는 중간 나무대로 양에 차도록 맞습니다. 밥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은 세 공기 이상 못 먹습니다. 사람들에게 망심이 왜 생기느냐 하면 원성실성은 하나인데 모자란 것도 없고 남는 것도 없습니다. 그것을 모르니까 여러 모양의 몸을 받는데 파리의 몸도 받았습니다. 파리의 몸을 받고 보니까 충만한 법성자리가 허전합니다. 못 깨치면 허전하여 밖에서 보태야 괜찮은 줄 압니다. 하느님과 똑같이 만드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에덴의 동산에 들어가서 선악과를 따 먹어야 인과가 나타나는 것을 압니다. 깨치지 못하면 저절로 허전해지니까 밖으로 물건을 탐하게 되고 탐하게 되면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로 보지 못하는 것을 불각이라고 했습니다.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機得利益’으로 몸은 살지만 불각이 여기에 가하면 밑자리가 씨가 됩니다. 씨라는 말인데, 아는 것에 병이 들어버립니다. 아는 것이 병들었으니까 모른다는 것입니다. 치痴도 모르는 것입니다. 불각이 치痴가 됩니다. 치가 되니까 큰 것은 잊어버리고 작은 것만 찾습니다. 사람은 사람대로 그 하나의 셈으로 하나를 모르는 것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에 합하지 않으면 하나가 아닌 것이 생겨납니다. 하나에 합하면 부처인데 합하지 못하면 중생입니다. 하나를 모르면 아뢰야식으로 하나를 합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하고 다릅니다. 하나 아닌 것이 생겨서 하나가 아닌 것입니다. 합해서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이 치痴가 되었습니다. 즉 치가 되니까 탐하게 됩니다. 치가 식은 아닙니다. 병으로 탐을 하는 것입니다. 안 되니까 탐을 하고 또 탐을 안 하면 증證이 되는 것입니다. 구지에 가서는 탐 진 치가 아니라 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말씀을 하면 진언이 나옵니다. 망이 아닙니다. 망이 되면 거짓말이 나옵니다. 남한테 나가면 복되는 소리가 나옵니다. 우리는 깨치지 못해서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한테는 망이 되어 복음이 아닌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양설, 혓바닥을 둘로 써먹는데 뱀이 혓바닥 내미는 것이 됩니다. 둘째 기어라는 것은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으로 겉으로 비단처럼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것입니다. 그래도 기어와 양설은 순경입니다. 더 심한 것은 욕이 나오고 악구가 나오는데 이것은 역경입니다. 구口에서는 망妄이 나오고 신身에서는 정情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녀 간에도 벌어지는 것입니다. 벌레도 숫놈 있고 암놈이 있어 새끼치고 가정을 가지는데 희한한 일입니다. 


10. 멸과

10.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 이러한 연고로 행자가 본제에 환원함에 쉴레야 쉴 수 없던 종전의 망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음이로다 입니다. 


불각인 상태에 있으면 그렇다는 것인데 앞에서 증하는 것은 그것까지 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눈을 뜨지 못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증을 알아 해인삼매에 들면 자기가 증해지는 것으로 남한테도 득이 갑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전깃불이 있는데 전깃불이 환한 것은 자증득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눈뜨고 밝은 것을 보는 것입니다. 환한 전깃불은 자기대로, 또 촛불이 자기대로 밝습니다. 밝은 것은 자증득이고 밝은 것이 남한테 밝게 비춰 주는 것은 이타득利他得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악한 사람은 악한 빛을 자증득으로 익혀 남한테 해독을 끼치게 됩니다.  

문아명자면삼도聞我名者免三道라, 내 이름 듣는 이는 나쁜 고통 벗어나며,  견아행자득해탈見我行者得解脫이라, 내 모양 보는 이는 생사번뇌를 해탈합니다. 문아명자라 했을 때 밝은 촛불 보는 것이 면삼도免三道하고, 견아행자라 했을 때 날 보는 사람, 듣는 사람은 해탈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라 했습니다. 그렇게 해놓으니까 중생이 얻어 가지더라는 것입니다. 이타득利他得이 됐습니다. 이와 타는 마치 종지에 물 떠 놓으면 종지에 나쁜 것이 지고 사발에 물 떠 놓으면 사발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수에 따라 물드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아직 부처님 덕을 못봤습니다. 스스로 눈을 떠야 하는데 언제나 꿈속입니다. 

 

부처님의 덕을 언제 보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밤에 악몽을 꿉니다. 호랑이가 달려들면서 물려고 하거나 또는 악귀나 도적놈이 와서 덮칩니다. 그러면 꿈속에선 아무리 도망가고 몸을 비틀어도 꼼짝을 안합니다. 밖에서 오는 핍박은 악입니다. 그러니까 꿈을 깨면 같이 와서 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증에 가서는 부처님의 깨달은 덕을 말합니다. 표에서는 멸과滅果라고 합니다. 고집멸도에서 고는 실과입니다. 나무 끝에 실과가 생기듯이 과거의 과가 고입니다. 과거의 그릇된 신구의身口意 삼업으로 고의 몸뚱이를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소승한테 가르치는 것과 우리한테 가르치는 것이 달랐습니다. 소승은 약하니까 ‘너희들 봐라, 저것이 무섭지 않느냐? 이것이 너희 몸에 붙어있는 온갖 고인 것이다.’ 라고 고를 먼저 걸어 놓습니다. 고과를 파헤쳤는데 과거에 중국에서는 그릇된 이들이 온갖 것으로 저지해 놓아도 몸의 독기로 소도 잡아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모여 신구의 삼업으로 고가 됩니다. 무서운 고를 받는 것이 겁나서 공부를 하고 수행을 하여 선업을 보여 주고 고를 끊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행으로 출세간이 되어 열반이 됩니다. 부처님의 해인삼매 가운데 37조도품으로 서른일곱 가지 도를 닦아야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재주가 있어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부처님은 잠을 깨게 하는, 꿈꾸는 것은 없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멸이라 그랬는데 고를 먼저 보이고 과를 보입니다. 과는 인을 살펴 비추면 인과는 계도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 과목을 멸과라 했습니다. 꿈을 깨고 18계를 벗어 놓으면 열반적정을 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악몽을 꾸다가 꿈을 깨면 악몽은 없어집니다. 즉 멸과를 깨면 잠 밖으로 나오는 것으로 멸과를 토했다는 얘기입니다. 18계를 벗어나 본질에 돌아가면 망상으로 살 때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고, 끊을래야 끊을 수 없던 망상을 가히 두 자로 쓰면 불가不可 파자叵字입니다. 여기서 불은 아닐 불不자가 아닙니다. 가히 쉴래야 쉴 수 없는 망상 그것을 깨고 나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멸과를 깨달은 것을 표지라고 합니다. 또한 이것을 불가파자不可叵字라고 합니다. 불가파자는 가히 쉴래야 쉴 수 없었던 망상을 깨고 나면 모두 없어져 흔적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표했으므로 표했다고 하는 것이고 또 그 다음에 수인을 닦는 인을 했다는 것입니다. 악몽이 중생에게 떠나면 중생이 고통 당한 체계가 싹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싹 끊어진다는 소리는 거기서 인을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를 면하려면 집을 끊어야 하는데 이것은 수인을 해석한다고 표현합니다. 거기에 들어가려면 진에 계합해야 하며 진여 자리를 깨쳐야 합니다. 반연이 없는 선교방편입니다. 


11. 수인의 계진

11.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着如意’는 무연으로 보는 그것을 깨치는 것입니다. 무연선교로 여의주를 딱 잡아야 됩니다. 이런 연고로 종전의 망상이 반드시 다시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무연선교로 여의는 본성이라 하여 본성을 딱 깨친 것이 파자叵字를 하는 것입니다. 파자를 해서 계진이 되므로 진에 계합하는 것입니다. 



12. 수인의 진수

12.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 진리의 세계로 돌아가면 분에 따라 자량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귀가하는 것은 진여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으로 귀진은 귀가에 첫걸음을 놓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차차 집으로 돌아가면서 분을 따라 자량을 얻는 것입니다. 이제 그대로 가면 저절로 수행이 됩니다. 이때부터는 진리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 진수進修입니다. 법화경에 나오는 장자와 궁자의 비유에서 부잣집 아들이 거지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 집에 올 때까지 육도를 윤회했습니다. 빌어먹는 거지가 되어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들어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고향집 문 앞에서 기가 죽은 그때부터 망이 없는 줄 알고 대신 진이 있는 줄 깼으니까 그때부터 하는 짓 마다 진과 계합한 행동이 나옵니다. 귀진歸眞한 다음에는 그저 뭉그러지거나 자빠지거나 늘 그 자리가 진보일 뿐 퇴보는 안됩니다. 진과 계합했으니까 시간이 갈수록 좋은 것만 생겨서 진수라 합니다. 


13. 수인의 성덕 

13. ‘이다라니무진보以多羅尼無盡寶’

 그 다음에 성득成得이라 그랬습니다. 성득에서 개진은 오가 되고, 진수는 소가 되고, 증이 서가 되어 차차 생기는 것 마다 계합하는 재주가 생깁니다. 

‘장엄법계실보전藏嚴法界實寶殿’이라, 계합하는 것은 다량의 무진보를 써서 특히 보전寶殿을 장엄하게 됩니다. 진수를 하면 저절로 성득이 되는 것입니다. 


14. 수인의 극과 

14.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 마지막입니다. 

부처를 이루어 과보가 다한 상태인 극과極果입니다. 

실제로 궁좌는 마침내 중도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중도는 본성이 아니므로 구래로 중생이 되어 어디로 가든 본래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라, 구래로 이름을 부처라 한다는 것입니다. 신부초생이라. 이것은 마지막으로 집에 돌아가서 가만히 앉아 보니까 처음에 앉았던 자기 몸이 태어났던 그 집이 바로 자기 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집에 들어와서 보니까 그전에 집을 나가 돌아다니는 동안의 모든 고통이 다 없어져버렸습니다. 처음으로 스스로 깨달아 알게 되니  지각기신知覺己身하니 본래 처음이고 끝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처음이고 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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