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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부처님,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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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24,018회 작성일 21-08-03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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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부처님,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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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스스로의 노력과 지혜를 통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보여 줍니다. 해탈과 열반의 길을 보여주며 보리를 증득하여 깨달음의 길을 보여 줍니다. 종교의 역사를 살펴볼 때, 부처님께서 허용한 것과 같은 사고의 자유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불교는 약 2600년의 역사를 겪어 옵니다. 부처님 열반 이후 약 100년 동안은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이 지속됩니다. 그 후 부파불교가 일어납니다. 부파불교가 약 4 – 5백 년 갑니다. 부파불교 후 대승불교가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불교라고 인식하고 있는 대부분은 대승불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금강경, 묘법연화경, 화엄경, 반야경 등 유명한 경전 대부분이 대승경전입니다. 부처님 초기의 불교와 대승불교 이후의 불교는 성격이 많이 달라집니다. 대승 이전에는 부처님은 성자 정도의 위치였으나 대승 이후는 부처님이 신격화됩니다. 부처님 사후 약 100년 후부터 부처님과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들로부터 불교가 종교적 특성을 가지고 부처님이 신격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 신격화가 거의 완성되다시피 합니다. 그러나 연기와 유식은 종교적 관점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인간들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인식하고 대상과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형성되는지 그 체제를 본 것입니다. 존재는 어떻게 생겼고 어떤 역학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본 것입니다. 종교적 내용이 없기 때문에 진리는 모두 같습니다. 2600년 전 부처나 2000년 전 예수나 지금 깨친 사람의 진리는 모두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깨달음이 무엇이며 그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부했습니다. 이것은 대승이다 소승이다 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경전이 편찬되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들이 다듬어집니다. 그 다듬어진 내용에는 다듬은 사람들의 생각이 미치기 때문에 그것들을 보기 전에 원류를 공부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강의를 하면 나중에 배우신 분들은 자신이 인상 깊었던 부분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거나 가르칠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한쪽이 특화된 흐름이 생깁니다. 원류를 가지고 서로 다른 옷이 입혀지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불교도 각 지역마다 다른 불교가 형성됩니다. 이러한 것이 부파불교 입니다. 부처님의 본래 말씀보다 많이 다듬어지고 각색된 내용이 전해지게 됩니다. 부처님의 인간적인 성스러움보다는 종교적인 성스러움이 강조되게 됩니다. 절대자, 신격화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은 신격화된 절대자의 모습이 많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해 자세히 살펴봅시다. 이 세상에는 법칙을 발견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사소한 법칙의 발견이 인간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은 어떤 법칙을 발견하고 그 법칙을 토대로 물질적인 풍요를 이끌어왔습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법칙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부처님의 위대함은 모든 실현과 성취가 인간적 노력과 지성의 결과에 있습니다. 부처님은 누구나 노력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종교, 종파의 지도자로 절대 권위를 누린 것이 아니라 평등한 가르침을 펴신 것입니다. 부처님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가 안식처입니다. 불교는 다른 누군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이 좋아지면 모든 것이 좋아집니다. 불교는 신이나 뛰어난 스승에게 의지하지 않습니다. 중생들은 자신이 무조건 맞고 상대방은 틀리다는 착각을 합니다. 나 자신만 바뀌면 되는데 중생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고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상대방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화가 나고 싸우게 됩니다. 화가 나는 가장 큰 이유는 나는 옳고 상대방은 틀리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는 화가 날 때 이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되면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풀어야 할 모든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해결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것만큼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가진 것을 점점 진리, 부처로 바꾸어 가면 극락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문제가 나에게 있지 대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불교가 어떻게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요? 본인이 잘 하면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본인이 잘 못하니까 대상에게 책임을 전가 시킵니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본인이 잘 하면 세상은 완벽하게 잘 돌아갑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노력과 지혜를 통하여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스스로 깨칠 수 있고 스스로 삶의 행복을 가져 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굴레는 바로 집착의 굴레입니다. 부처님은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고 보여 주었을 뿐입니다. 불교에서는 종교적 신앙심이 없습니다. 앞에서 믿음이란 말을 쓰긴 했으나 부처님은 믿으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본인이 알면 확신이 생기고 확신이 생기면 믿음이 자동적으로 생깁니다. 우리는 자신의 추측, 생각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을 갖지 않고 보면 그대로를 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인간으로서 알아야 할 것을 바로 알아라.’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갖지 않고 있는 그대로로 보고 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다른 종교의 역사를 보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고의 자유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런 인간의 자유정신은 신의 은총, 절대자의 기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리의 실현을 이룸으로써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첫출발은 나는 있다, 없다의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본인의 육체가 있고 사고를 하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면 부처님께서는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문답을 통해서 안 이 비 설 신을 통해 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인식이라는 것이 본인 스스로에서 나온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래란 말은 부처님께서 다른 부처를 지칭할 때 씁니다. 여래란 산스크리트어로 ‘진리에 다다른 사람’, ‘진리를 발견한 사람’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코살라 왕국의 케사붓다라는 작은 마을에 가신 적이 있습니다. 마을의 촌장이 부처님께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예전에 어떤 수행자들과 브라만들이 이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교의를 설명하고 가르치면서 다른 교리는 비난하고 멸시했습니다. 어떤 수행자나 브라만이 와도 똑같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수행자들과 브라만 가운데 누가 진리를 말하고 거짓을 말하는지 의심스럽고 혼란스럽습니다.” 모든 수행자와 브라만이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데 누가 진짜 옳은지 모르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당신들의 의심과 혼란은 당연하다. 의심이란 의심스러운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풍문이나 소문 같은 것에 현혹되지 말라. 종교의 성전의 권위든 단순한 논리나 추론이든 그럴 듯한 겉모습이나 공허한 논리의 기쁨이나 표면적인 가능성이나 그런 관념에 현혹되지 말라.” 본인 스스로 알아 듣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판단하지 말고 스스로 체험하고 판단하여 답을 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건전하지 못하고 잘못되고 악한 것임을 확신한다면 그것을 버리도록 하라. 어떤 것이 선한 것이고 건전한 것임을 확신한다면 받아들이고 따르도록 하라.”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은 과감하게 따르고 내가 틀리다고 생각되면 과감하게 버리라는 말입니다. 옳다고 생각하면 실천하고 틀린다고 생각하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거기서부터 바뀝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속에 쌓인 업들이 우리를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버려야할 것임을 아는 데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틀린 것을 과감하게 버린다면 결국에는 내 속에 옳은 것만 쌓여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바르게 살면 죽고 난 뒤의 인과 또한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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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것은 명확하게 이해하고 통찰하는 것이지만 믿음이란 명확하게 이해하고 통찰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실 공부해서 진리를 알게 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그 진리를 체계적으로 알기  위해서 종교적 의식이 있습니다. 종교적 의식은 덮어 씌워진 것에 불과합니다. x²-x-6=0 의 답은 -2와 3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믿는다고  문제가 풀립니까? 풀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풀리는지 알아야 풀립니다. 이와 같이 절대자나 신을 믿어도 우리 삶의 문제는 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충 편의에 따라 있다고 없다고 치부합니다. 절대자나 신도 그렇고 진리나 인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받드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 속에 자리 잡는 것입니다. 

 대충 있다고 생각하고 무턱대고 믿는 것은 지적인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원리를 알고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연기의 법칙, 인과의 법칙과 같은 원리와 법칙을 알면 문제를 내 속에서 관조해볼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사는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리와 법칙을 모르면 내 삶은 황당함의 연속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왜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부처님의 위대성은 가르침인 불교만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가르침의 다양성을 인정하였습니다. 

나란다의 우팔리라는 니간타 나따붓다(자이나교)의 재가 신자가 있었습니다. 재가 신자란 출가하지 않고 종교를 후원하며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우팔리가 부처님과 만나 업에 대해 논쟁을 하게 됩니다. 우팔리는 나따붓다에게 배웠던 내용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후 우팔리는 부처님께 재가신자로 받아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우팔리와 같은 저명한 사람은 신중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끝까지 거절합니다. 만약 우팔리가 부처님께 오면 우팔리에게 의지했던 나따붓다의 종파가 완전히 망하기 때문입니다. 

우팔리의 이야기에 나온 부처님의 태도처럼 아소카왕도 그랬습니다. 아소카왕은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 국가로 만든 사람입니다. 아소카왕은 불교 신자였지만 다른 종교를 탄압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존중해 주고 심지어 후원도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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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말씀 하나를 봅시다. ‘이름 가운데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것이 다른 어떤 이름을 붙이더라도 향기는 그대로이다.’ 어떤 이름, 개념으로 설명하더라도 그 진리 자체를 이해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장미를 국화라 이름하더라도 장미향이 납니다. 이름을 다르게 붙여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어떠한 명칭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리고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든 진리는 누구의 독점물이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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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대한 의혹은 보지 못했을 때 일어납니다. 보면 의혹이 풀립니다.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확실히 이해하라. 손바닥 안의 보석을 보듯이.’ 손바닥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듯이 확실하게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가르침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중요한 것이지 믿음이 그 이해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와서 보고 알아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틀린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중생들은 기득권을 죽어도 놓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존의 습을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옳은 것을 받아들이고 틀린 것을 버리는데 스스로와 타협하면 안 됩니다. 

 사성제에 대해 살펴봅시다. 사성제는 고집멸도입니다. 오늘은 고에 대해서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성제를 하기 전에 명백하게 이해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만족, 즐거움과 불이익, 손실과 피난, 벗어남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 즐거움이고 불이익이며 무엇에서 벗어나야 자유로워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만족, 즐거움이란 상냥하고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이끌리게 되고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즐거워집니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내 속에서 즐거움과 만족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경험적 사실입니다. 불이익, 손실은 이와 반대입니다. 내게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나를 떠나거나 나를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즐거움, 만족도 사실이지만 불이익, 손실도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 만족과 불만족을 포기하면 그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사성제의 고는 바로 이런 만족, 불만족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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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에는 고고성인 일상적인 괴로움, 변화로 인하여 일어나는 괴고성인 괴로움, 조건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행고성의 괴로움 등이 있습니다.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는 일상적인 괴로움이 있습니다. 변화로 인하여 일어나는 괴로움은 무상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실재하지 않는데 있다고 조건을 만듭니다. 무아에서 조건된 상태의 괴로움이 생깁니다. 부처님께서는 고고성, 괴고성, 행고성으로 모든 것은 고다 라고 설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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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집Samudaya 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집은 고가 발생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원인을 정확하게 알면 해결되는 것이 세상사 모든 문제입니다. 바로 집을 하면 고가 해결됩니다. 

멸 Nirodha 은 고가 해결된 상태입니다. 고가 해결되어 낙이 됩니다. 낙이 극에 달한 상태가 극락이며, 열반인 것입니다. 

멸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이 도Magga입니다. 멸에 이르기 위한 실천방법인 팔정도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준 메시지이며, 교리체계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누구나 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이 유식이 잘 회향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중생에게 이로움이 있기를 부처님 전에 기원합니다. 



회향



기다림은 

만남은 전제로 하지 않아도 좋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인연이란 

허공에 피는 허공 꽃일 뿐. 

인연의 성숙으로

기다림이 필연적으로 만남이 될 뿐. 


성취는 

회향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좋다. 


욕망에 걸리지 않는 

지혜처럼

인과는

우주에 피는 우주 꽃일 뿐.

인과의 결정으로

성취는 필연적으로 회향되는 것. 


그리움은 

교감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좋다. 


모양과 모습에 걸리지 않는 

허공처럼 

애정은 

자비를 향한 몸부림일 뿐 

지혜의 성숙으로

그리움은 그냥 부처와 만나게 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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