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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2송 능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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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23,230회 작성일 21-07-2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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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2송 능변체


 부처님은 내가 가르치는 법은 바다와 같다고 했습니다. 바다는 들어갈 수록 계속 깊어집니다. 이와 같이 불법은 공부할 수록 깊이가 더해집니다. 물 위에서 노는 것과 깊은 곳에서 노는 차이는 엄청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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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원래 없지만 자아와 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망 된 생각에 의해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것의 모습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식이 전변 된 것에 의지합니다. 식이 전변 된 것에는 견분, 상분이 있습니다. 견분은 대상에 의해서 주어지는 생각이고 상분은 내 스스로 일으키는 생각입니다. 능변식은 세 종류입니다. 이숙식, 사량식, 요별경식이 있습니다. 이숙식은 다르게 익어가는 식입니다. 제8식인 아뢰야식입니다. 사량식은 끝도 없이 생각하는 식입니다. 제7식인 말나식입니다. 요별경식은 뭔가 분별하는 것입니다. 제6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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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 2송을 살펴봅시다. ‘위이숙사량 급료별경식 초아뢰야식 이숙일체종’입니다. 뜻은 ‘이숙식과 사량식 및 요별경식을 말한다. 첫 번째 능변식은 아뢰야식이고 이숙식이며 일체 종자식이다.’입니다. 유식 2송의 앞의 두 구절을 봅시다. ‘위이숙사량 급요별경식’은 이숙과 사량과 요별경식을 이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을 나누어 보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으로 합니다. 의식을 구체적으로 나누면 제6식 의식인 요별경식, 제7식인 사량식, 8식 이숙식인 아뢰야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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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의 전변이란 마음으로 일으키는 모든 마음의 활동을 말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끝도 없이 바뀝니다. 식의 전변을 초기 불교에서는 인연소생법이라고 했습니다. 인연소생법이란 인과 연에 의해 생성되는 법을 말하는데  세친에 와서 식의 전변으로 바뀌게 됩니다. 세친은 모든 존재를 식의 전변 속에  포함시킵니다. 전변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세 가지는 다르게 성숙한 것(이숙), 사량이라 불리는 것, 대상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사량식 제7식 말나식은 현재 일으키는 모든 의식의 바탕,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넘어를 잘 모릅니다. 그 넘어를 아는 것이 제8식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뿌리는 모르고 뿌리에 근원하여 서 있는 줄기만 가지고 나뭇잎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나뭇잎이 6식이라면 줄기 전체는 7식이고 그 뿌리는 8식입니다. 땅 속에 숨어있는 제8식은 모릅니다. 우리는 잎과 줄기만 가지고 평생을 써먹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은 생각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써먹는 것입니다. 제6식은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대상을 접함으로써 일으키는 생각입니다. 2차적으로 대상을 보고 내 머리 속에서 다른 생각이 연상됩니다. 대상과 별개로 다른 생각이 나옵니다. 이것은 제7식에 의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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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변이란 변화하는 것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 봅시다. 머릿속에서 끝도 없는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집니다. 이렇게 변화하는 모든 것이 전변인 것입니다. 어떤 순간에 생각이 일어나면 원인의 찰나가 멸함과 동시에 그 원인의 찰나와 양상을 달리 한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원인의 찰나가 멸한다는 것은 내가 어떤 대상을 접한 순간 대상은 사라지고 그것으로 인해 다른 생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내 기억, 업 속에 들어있던 다른 생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원인 즉 대상을 받아들였지만 그 원인은 사라지고 일으킨 결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전변에는 원인으로서의 전변과 결과로써의 전변이 있습니다. 원인으로서의 전변은 아뢰야식 속에서 종자가 생장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일으킬 때 그 근본 뿌리입니다. 수억 겁 동안 살아오면서 행했던 모든 씨앗이 내 속에 들어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내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사물에 부딪히면 그것을 써먹습니다. 우리는 대상을 접하면 내 속에 잠재된 많은 의식과 결합해서 생각을 일으킵니다. 모든 존재는 살아오며 쌓인 업이 다릅니다. 그래서 같은 대상을 접하면서도 다른 생각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 속에 가지고 있는 씨앗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대상을 접하며 일으킨 생각들은 내 속으로 들어와 씨앗으로 남게 됩니다. 대상을 접해서 자기화를 하는 것입니다. 내 속의 씨앗과 부딪혀 일어나는 결과는 모두가 다 다릅니다. 그것이 바로 결과로써의 전변입니다. 예를 들어 우유통 안에는 우유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의 것을 아무리 내봤자 우유 밖에 안 나옵니다. 만약 내 속에 부처 밖에 없다면  누구와 부딪혀도 부처 밖에 안 나올 것입니다. 만약 내 속에 지옥, 악밖에 없다면 무엇과 부딪혀도 나는 부정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들어와도 나오는 것은 나쁜 것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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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르게 성숙한 이숙식은 아뢰야식으로 저장소인 곳간입니다. 아뢰야식 안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중생은 들어있는 것을 모르고 끄집어 내어 쓰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공부를 깊이 해서 본질, 진리를 알고 제8식을 알면 곳간 안에 불을 켜는 것과 같습니다. 불이 켜지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훤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끄집어 내어 써도 가장 적당한 것을 쓰게 됩니다. 우리는 가진 능력만큼 끄집어 내 씁니다. 내가 선한 능력이 많으면 선한 것을 좀 더 많이 쓸 것이며, 내가 악한 능력이 많으면 악한 것을 많이 쓸 것입니다. 그러나 곳간에 대해 훤히 다 알면 그 가운데 가장 좋은 것만 끄집어 내 쓸 수 있습니다. 

 아뢰야식은 그것을 생하게 하는 원인과 시간을 달리 하기 때문에 ‘다르게 성숙한다.’라고 합니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 줍니다. 그런데 이 생에서 그 돈을 못 돌려 받으면 다음 생애에 받습니다. 그것은 이 상황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달리해서 사건이 전개된 것입니다. 인과는 분명하지만 원인과 결과가 시간을 달리해서 생합니다. 그리고 아뢰야식은 원인과 결과가 성질을 달리해서 생깁니다.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 줬다고 할 때 무조건  돈 그대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값어치에 해당하는 것을 받게 됩니다. 돈을 빌려 줬는데 나를 어딘가에 취직을 시켜줬을 수도 있고, 땅을 싸게 사서 그 돈만큼 이득이 남게 해줄 수도 있습니다. 아뢰야식은 시간과 성질을 달리합니다. 

 사량식은 말나식으로 심층적 자아집착심입니다. 우리를 평생 중생으로 자기밖에 모르면서 살게 합니다. 진리를 제대로 보고 나면 무아와 무상이 됩니다. 하지만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 거기에 업의 창고(제8식)가 들어갑니다. 원래는 나라는 것이 없으나 업의 창고를 보고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업의 덩어리를 나라고 착각하는 것을 아치라고 합니다. 아치가 생기면 자기 밖에 모르는 아집이 생기고 자기가 최고인 아만이 생기고 자기 밖에 사랑하지 않는 아애가 생깁니다. 우리 삶은 이 네 가지입니다. 이것을 벗어나면 부처가 됩니다. 이것을 못 벗어나면 중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려면 아치, 아집, 아만, 아애를 깨트려야 합니다. 이것들 때문에 탐 진 치가 생깁니다. 내가 있다는 아치가 있으니까 거기서 탐심과 진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탐심은 나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물질적인 모든 욕망이고 진심은 정신적인 욕망입니다. 무소유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모두 없는 것을 말합니다. 거지는 무소유가 아닙니다. 재산이 없다고 무소유인 것이 아니라 내가 탐심, 진심, 치심을 일으키지 않아야 무소유인 것입니다. 재산이 있어도 그것을 제 때에 쓰지 못한다면  바로 탐심이고 진심인 것입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요별경식, 육식입니다. 육식은 안이비설신의를 가리킵니다. 바로 우리의 신체구조입니다. 전5식은 안이비설신을 말하고 6식은 의식을 가리킵니다. 6식이 없는 것은 바로 죽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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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은 업이 굳어 그 대상이 되는 경계의 업을 인식하는 능력체입니다. 눈은 어떤 대상을 보고 귀는 어떤 소리를 듣습니다. 하지만 눈으로 소리를 들을 수는 없습니다. 눈은 보는 것 밖에 못합니다. 귀는 듣는 것 밖에 못합니다. 실질적으로 나라는 것은 안이비설신이고 바깥의 대상은 색성향미촉이 있습니다. 사실 안과 색은 같습니다. 같은 것이 안으로 들어오면 안이 되고 바깥으로 나가면 색이 됩니다. 두 개는 같은 것이기 때문에 서로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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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으로 돌아가 봅시다. 보는 것을 담당하는 안식은 성경이고 현량이며 세 가지 성품에 통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대상을 보면 그 대상 경계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성경, 독영경, 대질경입니다. 성경은 거울에 물건이 비치는 것과 같이 자기 모습 그대로가 비칩니다. 어떤 분별도 없는 있는 그대로 비칩니다. 내 생각대로 비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비칩니다. 눈은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 비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비칩니다. 그것이 바로 안식입니다. 눈으로 보는 순간 눈에 비치는 대상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이 전부 분별합니다. 안식은 주관이 없이 객관을 그대로 보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눈은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현량이란 대상을 인식할 때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눈은 거울과 같이 그대로만 비춰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현량이 됩니다.

대상을 그대로 보는 것까지는 같지만 모두 다르게 판단합니다. 의식인 6식은 현량이 아니고 비량입니다. 비량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못 받아들입니다. 의식의 뿌리가 되는 제7식 말나식도 비량입니다. 현재 우리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습니다. 대상을 전부 자기 생각대로 요리해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보고 의견을 나누면 모두 비량입니다. 자기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부 비량입니다. 나라는 저장창고 속에 업이 잔뜩 들어있습니다. 만약 어떠한 사건이 내게 들어오면 생각과 부딪혀 판단을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분별과 생각 속에 평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내 창고, 업은 세 가지 성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선, 불선, 무기입니다. 무기는 선도 아닌 불선도 아닌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것을 분류해 보면 착한 것, 악한 것,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이 있습니다. 

 6식과 7식은 비량이지만 5식과 8식은 현량입니다. 안이비설신 전5식은 판단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입니다. 조주 스님이 부처를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습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고 나서는 조주 스님의 답이나 다른 답이나 똑같이 들리는 것은 아뢰야식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같은 본질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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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과 이식과 신식 셋은 이지二地에 머뭅니다. 안이비설신 중에서 안이신은 이지에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9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9지란 잡거지, 색계4지, 무색계4지입니다. 2지란 욕계의 오취를 뜻하는 잡거지와 색계4지의 초선을 말합니다. 잡거지는 우리가 사는 육도윤회의 세계를 말합니다. 색계에는 초선부터 4선까지 있습니다. 즉 안식, 이식, 신식은 색계의 초선에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오취는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상을 말합니다. 색계의 초선에서는 심사, 기쁨, 즐거움이 다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다 느낄 수 있는 안식, 이식, 신식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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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식은 동일하게 정색근에 의지합니다. 이 말은 안식은 안근에 의지하며 이식은 이근에 의지하며 비식은 비근에 의지하며 설식은 설근에 의지하며 신식은 신근에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영역대로 눈은 보는 능력밖에 안 되고 귀는 듣는 능력밖에 안 되고 혀는 맛만 보고 코는 냄새만 맡고 몸은 감촉만을 느낍니다. 아무리 눈이 좋더라도 눈으로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전부 자기 활동 영역이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들 오근의 의지처는 의입니다. 의가 그들의 활동영역을 인지합니다. 의가 안이비설신을 주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오근은 수명에 의지하여 머뭅니다. 이 안이비설신은 우리가 죽으면 없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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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홉 가지 연과 여덟 가지 연과 일곱 가지 연이 잘 인접한다.’는 말을 봅시다. 9연이란 공, 명, 근, 경, 작의, 분별, 염정, 종자, 근본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인연은 9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공은 허공, 공간을 말하고 명은 밝고 어두움 빛을 말합니다. 근은 인식하는 능력 주체이고 경은 인식 대상입니다. 작의는 근이 경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말합니다. 내가 눈으로 물건을 봅니다. 그런데 왜 눈으로 대상을 봅니까? 안 보일 수도 있는데 눈만 뜨면 대상이 보입니다. 근이 경(대상)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의지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작의, 의지 때문에 눈을 뜨면 대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나아가려고 하는 의지가 없으면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고 코로 냄새를 맡을 수도 없습니다. 관계를 일으키는 본질적인 힘이 바로 작의입니다. 그래서 모든 작용의 바탕에는 작의가 있습니다. 대상에 나아가고 나면 분별이 생깁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번뇌망상을 항상 일으킵니다. 6식과 7식으로 이 세상을 보는 한 끊임없이 분별을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분별하는 모든 것에는 염정이 있습니다.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번뇌에 물들지 않은 것은 깨끗한 것이고 번뇌에 물든 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종자는 번뇌를 일으키는 잠재적인 힘입니다. 근본은 제8식을 말합니다. 이 앞의 모든 것이 근본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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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비설신 가운데 눈은 9연을 다 갖추어야 활동이 가능합니다. 9연 가운데 한 가지만 없어도 눈은 작용을 못합니다. 이식 귀는 명(빛)이 없어도 활동합니다. 8연 만으로 활동합니다. 비식, 설식, 신식은 공(공간)과 명(빛)이 없어도 7연만으로도 활동할 수 있습니다. 아홉 가지 연과 여덟 가지 연과 일곱 가지 연이 잘 인접한다는 말의 아홉 가지 연은 안식이고, 여덟 가지 연은 이식이고 일곱 가지는 비식, 설식, 신식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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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 9연에 의해 작동합니다. 6식은 경, 작의, 염정, 종자, 근본만 있으면 작용합니다. 제7식은 작의, 종자, 근본만 있으면 작용하고 제8식은 경, 작의, 종자, 근본이 있어야 작용합니다. 제7식은 경 즉, 대상이 없어도 작용합니다. 대상을 접하는 것과 상관없이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전5식은 9개, 8개, 7개의 연이 있어야 작용을 했고 6식은 5개, 7식은 3개, 8식은 4개의 연이 있으면 작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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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셋은 합하고 둘은 떨어져서 세상을 관하니’란 말을 봅시다. ‘셋은 합한다’는 말은 비식과 설식과 신식은 대상과 합해야 활동한다는 말입니다. 냄새, 맛, 촉감은 대상과 부딪혀야 작동을 합니다. ‘둘은 떨어져서’라는 말은 안식과 이식은 대상과 떨어져야 활동을 한다는 말입니다. 눈이나 귀는 바로 앞에 붙으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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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는 식과 근을 분별하기 어려우니라.’는 말을 봅시다. 식은 분별작용을 하는 인식 주체로 제8식의 견분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것은 식입니다. 근은 뿌리로, 인식이 발생하는 구조적인 감각기관입니다. 제8식의 상분에 해당합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근이고 이 근에 의해 일어나는 생각은 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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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변하고 공을 관하나 오직 후득지로 얻는 것이며’라는 말을 봅시다. 여기서 후득지와 근본지를 살펴보면 후득지는 세속의 차별상을 요별하는 것입니다. 제6식과 7식에 의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분별하는 것이 후득지입니다. 이 세상을 분별하는 것은 후득지로 얻는 것입니다. 근본지는 진여를 반연하는 것입니다. 즉 진여,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원래 청정한 본연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분별하는 모든 것은 후득지에 속하고, 본질을 알게 되면 근본지를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은 후득지를 통해 근본지로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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