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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제10송 상응수구문의 변행과 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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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23,399회 작성일 21-08-0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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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제10송 상응수구문의 변행과 별경


 5위 100법은 유식을 구체화 시킨 완벽한 체계입니다. 5위라는 것은 존재를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나누면 2위가 되고 유위법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5위입니다. 100법은 마음이 나타낼 수 있는 모든 작용입니다. 화엄경에 나오는 체상용의 원리는 불교 전체와 통합니다. 본질이 있고 본질의 어떤 모양인 형상이 있고 그것의 작용이 있습니다. 5위 100법에서 체에 해당하는 것은 유위법과 무위법입니다. 유위법이 나타나는 형태를 보면 심왕법, 심소법, 색법, 심불상응행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유위법의 상입니다. 100법은 마음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작용입니다. 이것은 용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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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마대사는 중국에 선불교를 연 스님입니다. AD 67년에 중국에 불교가 전파됩니다. 불교는 달마가 중국에 올 때까지 500년 동안 중국화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 과정에서 교종이 완성됩니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설한 그 방대한 경전들이 체계화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 중국 불교와 달마대사가 만나 완전한 중국화 된 불교인 선불교가 탄생합니다. 달마대사는 보리달마라고도 하는데 많은 전설이 있습니다. 달마는 나뭇잎 하나를 타고 강을 건넜다고 하여 일위도강이라고 합니다. 달마는 인도에서 일위도강을 해서  중국으로 건너옵니다. 중국에 와서 가장 먼저 양 무제를 만납니다. 양 무제는 불심천자라고 불릴 만큼 불교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습니다. 중국 전역에 불교를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양 무제는 달마를 보자마자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달마는 한 마디로 아무 공덕도 없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질 것들이라고 합니다. 달마에 의하면 공덕이란 순수한 마음을 깨쳐 진리를 보는 것입니다. 양 무제는 화가 나서 달마를 쫓아버립니다. 그래서 달마는 소림사에 들어가서 면벽수행 9년을 합니다.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해서 9년을 보냈습니다. 달마가 면벽수행을 할 때 신광이란 승려가 찾아와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합니다. 달마가 불심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거절하자 신광은 자신의 팔을 잘라 달마에게 보입니다. 신광은 달마의 제자가 됩니다. 달마는 중국에 있는 동안 수 많은 고관에게 암살 시도를 받습니다. 하지만 달마는 독이 든 음식을 먹어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6번째 시도에 달마는 중국과 인연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죽습니다. 달마는 죽기 전에 자신을 화장하지 말고 웅이산에 묻어달라고 합니다. 달마가 죽고 2년 뒤 송운이라는 사람이 인도에 사신으로 갔다가 파미르 고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송운은 달마와 마주치게 됩니다. 달마는 송운을 보고 “나는 동토와 인연이 다 했다.”고 하며 신발을 주고 떠납니다. 송운이 중국으로 돌아와서 황제에게 그 사실을 아뢰자 황제는 달마의 무덤을 파 보라고 합니다. 파 보니 아무  것은 없고 송운이 가져온 신발의 다른 한쪽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달마가 인도를 떠나기 전에 이견왕을 만나 자신은 중국으로 떠난다고 합니다. 가기 전에  이견왕은 달마에게 부처에 대해 묻습니다. 그러자 달마는 “성품을 보는 자가 부처입니다.”고 합니다. 이 성품은 유식으로 말하자면 아뢰야식 8식에 해당합니다. 그러자 이견왕은 달마에게 성품을 보았냐고 묻습니다. 달마는 이에 대해 이미 보았다고 합니다. 이견왕은 그 성품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달마는 작용하는 곳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모든 것은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딪혀 작용을 해야 나타납니다. 혼자 가만히 놔 두면 탐욕이나 분노가 많아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작용하는데서 나타납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어떤 것도 대상과 관계된 문제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펼쳐보면 모두 관계 속에서 일어납니다. 불교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다루지만 관계를 설명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도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다시 달마와 이견왕의 이야기로 넘어갑시다. 달마가 그렇게 대답하자 이견왕은 “어떻게 작용하기에 왜 저에겐 보이지 않습니까?”고 묻습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모두 작용하는 것을 통해 나타납니다. 

육식에 동반하는 심작용에 대해 봅시다. ‘그것은 모든 마음에 널리 미치는 것과 특별하게 결정한 것으로 선, 번뇌, 부수적 번뇌라는 다섯 종류의 심작용과 그것의 세 가지의 감수 작용을 동반한다.’고 합니다. 

다섯 종류의 심작용이란 변행의 심소, 별경의 심소, 선의 심소, 번뇌의 심소(수번뇌의 심소), 부정의 심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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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 10송을 봅시다. ‘초변행촉등 차별경위욕 승해염정혜 소연사부동’ ‘처음의 변행 심소는 촉 등이다. 다음의 별경 심소는 욕구, 승해, 기억, 집중, 혜의 심소이니 인식 대상의 자체가 같지 않다.’입니다. 


변행 

언제나 동반하는 마음의 최초는 촉 등입니다. 변행은 촉, 작의, 수, 상, 사입니다. 촉은 sparsa이며, 나와 대상이 부딪히는 순간입니다. 촉은 근, 경, 식 삼사의 화합으로 최초로 생기는 미세한 마음입니다. 경으로부터 자극에 의해서 근에 변화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그림을 봅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내 머리 속에 자극을 줍니다. 

작의는 manaskara이며,  마음을 구체적으로 활동시키고 마음을 일정한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작용입니다. 작의의 작용 때문에 근이 경으로 나아갑니다. 작의가 갖고 있는 업만큼 나아갑니다. 이 세상은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촉이 작용할 때는 작용만 있지 너와 나가 없습니다. 주관과 객관의 분별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작의가 작용한 순간 업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이 분리됩니다. 나와 대상(너)이 분리되는 순간이 작의가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초로 따지면 1초보다 더 짧은 순간, 0.1초보다 더 짧은 순간에 머리 속에서 분리가 되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고 나면 느낌이 생깁니다. 그것이 수입니다. 수는 vedana이며, 즐거운 대상은 즐겁고 불쾌한 대상은 괴롭다고 느끼는 작용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의 작용이 수에 있습니다. 이 감수작용으로부터 욕과 애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즐거움은 락이고 괴로움은 고이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은 사입니다. 세 가지를 고락사라고 합니다. 나의 육체와 정신이 통틀어 느끼는 감정은 고락사와 희우입니다. 희는 기쁜 것이고 우는 슬프고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상은 samjna이며, 대상의 특수성 내지 특징을 인지하는 지적 작용입니다. 감각기관을 통해 얻어지는 감각적 소재를 통합하여 하나의 상으로 구체화시키는 작용입니다. 상은 수 뒤에 생기는 것으로 수에 따라 생깁니다. 우리가 감, 사과라는 말을 들으면 형상이 떠오릅니다. 내가 경험한 것들은 형상이 저장되어 떠오릅니다. 아뢰야식에서 경험한 것은 모두 형상으로 저장됩니다. 전생에 경험했지만 이번 생에 경험하지 못한 것들은 저장이 되어 있어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경험하면 금방 익힐 수 있게 됩니다. 

사는 cetana이며, 구체적인 행동을 일으키는 의지작용입니다. 사의 단계를 지나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 변행 5개는 우리가 대상을 접했을 때 기본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다시 한 번 5변행에 대해 정리해봅시다. 촉은 대상을 접한 순간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작의는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진 상태입니다. 그렇게 나누어져 나온 생각은 아뢰야식, 업만큼 나아갑니다. 수는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고, 락, 사가 대표적인 마음입니다. 내가 경험한 만큼 받아들입니다. 나의 업력만큼 느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비단 방석 일곱 개를 깔고 앉습니다. 한 번도 앉아보지 못한 사람은 기분이 매우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매일 좋은 환경에서 살면서 비단보다 더 좋은 것에 앉는 사람들은 비단 방석 일곱 개를 깔고 앉으면 딱딱해서 앉아 있지를 못할 것입니다. 상은 형상, 이미지, 개념을 말합니다. 상은 지적입니다. 무엇을 안다고 할 때 상을 아는 것입니다. 내 속에 상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상에는 공상과 자상이 있는데 공상은 아뢰야식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어떤 대상을 접하여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자상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접한 형상입니다. 이것은 깨달음을 얻어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이나 머리 속에 들어있는 것은 모두 공상입니다. 사는 의도입니다.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작용시키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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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경 

다음은 별경 5개를 살펴봅시다. 우리의 업 속에는 부처로 만들어 주는 성품이 있습니다. 그 성품이 별경 5개입니다. 내 속에 있는 성품 가운데 가장 본질에 가까운 것입니다. 별경은 수행을 추진하는 마음입니다. 별경 다덧 개는 욕, 승해, 염, 등지, 혜입니다. 

욕은 욕구, 욕망을 말합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려고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욕에는 다양한 것이 있습니다. 순수하게 선한 욕이 있고 선하지 않은 욕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부처가 되려고 하는 욕구가 진정한 욕입니다. 본질에 나아가려고 하는 욕입니다. 내 속에 이런 순수한 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만물 속에는 불성이 있습니다. 그 불성을 체득할 수 있는 것은 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가 되려면 그 욕을 뒷받침할 수 있을 만큼 능력을 함양시켜야 합니다. 함양할 능력 가운데 하나가 승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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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해란 원리나 이론 혹은 부처님과 같은 뛰어난 자의 가르침을 배워 의심하지 않고 마음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알면 100% 확신이 생깁니다. 그래서 머리 속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에 사무치는 확신이 생깁니다. 이러한 확신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줏대가 없는 사람은 승해가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먹은 마음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 입니다. 예를 들어 충신, 열사와 같은 사람들은 승해가 있기 때문에 쉽게 도를 깨칩니다. 하지만 승해가 너무 지나치면 광신이 될 수 있습니다. 승해는 신념을 꺾지 않고 초지일관으로 갈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승해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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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은 한 번 경험했던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언제까지나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마음작용입니다. 이것은 기억력과 연관이 있습니다. 억념하는데서 삼매를 얻고 삼매를 통해서 지혜가 생깁니다. 그 기억한 것을 계속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이 삼매입니다.

 삼매를 통해서 지혜가 생깁니다. 그래서 기억을 하면 지혜가 쉽게 생길 수 있습니다. 어떤 하나의 대상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마음이 이런저런 대상으로 옮겨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억념이라는 심작용을 통해서 한 가지에 몰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러한 마음 때문에 삼매에 들 수 있고 지혜가 생깁니다. 억념 때문에 삼매에 들고 삼매 때문에 지혜가 생깁니다. 

부처님의 수제자인 아난은 한 번 기억한 것은 세세생생 잊어버리지 않는 대단한 기억력의 소유자였습니다. 부처님은 다음 세대에 법을 전하기 위해서 기억력이 좋은 아난을 곁에 두고 법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경전들을 보면 ‘내가 이렇게 들었노라.’하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것은 아난이 기억해서 전한 것입니다. 또 다른 기억력, 염이 뛰어난 사람으로 구마라집을 뽑을 수 있습니다. 구마라집은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고 언어능력도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습니다. 어머니가 구마라집을 임신했을 때 몇 가지 외국어가 저절로 알아졌습니다. 구마라집을 낳고 난 뒤에는 그 능력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체는 젊을 수록 기억력이 뛰어납니다. 나이가 들 수록 기억력이 감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젊어서부터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하는 공부는 젊어서 하는 공부의 몇 배의 노력을 해도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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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지란 삼매, 정을 말합니다. 한 가지 일에 생각을 집중하는 마음작용입니다. 마음에 동요가 없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지혜를 낳는 원인이 됩니다. 왜 우리가 삼매에 들어야 합니까? 그것은 집중하는 힘에 의해 지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상의 마음을 산심(산란한 마음)이라고 하고 삼매에 들어간 마음을 정심이라고 합니다. 전자를 부정하고 후자를 긍정합니다. 그래서 진실을 통찰하는 지혜는 반드시 삼매의 마음을 반복하고 닦음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등지, 정의 상태에 들면 귀신에게도 보이지 않습니다. 예전에 염관선사의 제자인 휘일스님은 절에 들어온 후 개인적 수행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염관선사의 뒷바라지만 계속 했습니다. 하루는 휘일스님이 일을 마치고 누워 있는데 저승사자가 나타납니다. 휘일스님은 줄곧 염관선사의 뒷바라지만 했지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서 매우 억울했습니다. 그 때 휘일은 스승에게 들었던 한 마디가 생각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일주일만 제대로 공부하면 삼매에 들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휘일은 저승사자에게 일주일만 제대로 공부하게 죽음을 늦춰달라고 부탁합니다. 저승사자는 그것은 자신의 권한 밖이니 염라대왕에게 말해서 된다고 하면 일주일 후에 올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일 오겠다고 하고 가버립니다. 저승사자가 떠나자마자 휘일은 목숨 걸고 일주일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공부한지 하루 만에 삼매의 상태에 들었습니다. 휘일은 그 상태를 유지하며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저승사자는 휘일을 잡으러 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휘일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승사자는 휘일스님을 못 찾고 돌아가버렸다고 합니다. 경허스님의 이야기를 봅시다. 경허스님이 살아계셨던 당시에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당시 스님들은 한 달 동안 탁발한 음식으로 석 달 정도를 먹고 살았습니다. 경허스님은 탁발하러 간 제자들을 방안에서 보고 나서 그대로 선정에 들어버립니다. 1달 후 제자들이 돌아와 보니 경허스님이 자신들을 보낼 때 그 모습으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경허스님이 제자들이 가는 것을 보실 때 손을 문이 열리고 닫히는 곳에 걸쳐놓고 있었는데 바람에 문이 열리고 닫혀 손은 피투성이가 되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등지, 선정, 삼매에 들면 한 달이 아니라 몇 개월, 몇 년도 그 상태로 있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팔정도를 말씀하실 때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정념과 정정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념과 정입니다.


 등지를 이루고 나면 지혜가 생깁니다. 혜란 어떤 사물에 대해 고유의 특징과 다른 사물과 공통된 특질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아는 작용입니다. 지식과 지혜는 다릅니다. 하지만 지식은 지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식을 많이 알면 지혜는 터득하기 쉬워집니다. 사물의 특질을 바르게 인식하는 수단에는 성자의 가르침, 추리, 직접 지각의 방법이 있습니다. 추리는 정념에 가깝고 직접 지각은 정정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루는 고타미라는 여인이 죽은 자신의 어린아이를 안고 부처님을 찾아옵니다. 고타미는 부처님께 아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부처님은 살려줄테니 시키는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은 고타미에게 겨자씨를 얻어오라고 합니다. 인도에서는 겨자씨가 아주 흔한 물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조건을 붙입니다.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서 얻어 오라고 합니다. 고타미는 급한 마음에 응낙을 해버리고 겨자씨를 구하러 갔습니다. 고타미는 겨자씨를 얻으러 이 집 저 집에 다니면서 사람이 죽지 않았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모든 집에서 가족, 친척 누군가는 죽었다고 말합니다. 사람 안 죽은 집이 하나도 없고 심지어 어떤 집에서는 자신과 같이 어린아이가 죽은 집도 있었습니다. 고타미는 어느 누구든지 다 죽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슬픔도 누구나 다 겪는 슬픔이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고타미는 깨달음을 얻고 아이를 장례 치르고 출가를 합니다. 추리란 스스로 바른 도리를 쫓아 바르게 사색함으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관(관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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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첫째 성인의 가르침을 들음으로써 얻어지는 지혜가 있고, 둘째 관조함으로써 얻어지는 지혜가 있는데, 위빠사나를 통하여 인연관을 함으로써 얻어 지는 지혜이며, 셋째는 삼매를 닦음으로써 얻어지는 지혜로 사마타를 함으로써, 화두를 듦으로써 얻어지는 지혜입니다. 세 번째 지혜는 말이나 개념을 떠나 사물 그 자체에 의해 파악하는 가장 뛰어난 지혜이며, 이것을 통하여 소지장이 소멸됩니다. 지혜를 증득 하면 의심도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의심도 번뇌의 일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별경이 없기 때문입니다. 별경이 성숙되지 않으면 의심하는 마음이 자꾸 일어납니다. 우리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 별경을 내 것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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