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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제12송 상응수구문의 번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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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28,041회 작성일 21-08-03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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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제12송 상응수구문의 번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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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들은 선한 마음보다 악한 마음이 더 많습니다. 부처보다 지옥에 가는 마음을 쓰기 쉽습니다. 번뇌지법이 선심소법보다 많은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유식 12송을 봅시다. ‘번뇌위탐진 치만의악견 수번뇌위분 한부뇌질간’ ‘번뇌심소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 거만, 의심, 악견이다. 수번뇌심소는 분노, 고뇌, 질투, 인색이다.’입니다. 탐진치는 번뇌심법의 뿌리입니다. 


번뇌

번뇌지법 여섯 가지는 근본적인 더러움에 물든 마음입니다. 번뇌지법 여섯 가지를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1) 탐은 raga이며, 탐할 탐貪이며, 생사윤회하고 있는 자신과 자신이 존재하는데 필요한 도구나 사물에 대하여 탐하고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물질적인 것에 대해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탐욕, 탐애, 갈애가 탐에 속합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여덟 가지 고통인 팔고는 탐으로 인해 이루어집니다.팔고는 크게 무상과 무아에 의해 일어나는데 무상으로 일어나는 것은 생고, 노고, 병고, 사고가 있습니다. 무아에서 일어나는 고는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가 있습니다. 애별리고란 좋아하는 사람과 언젠가 이별하는 고통이고, 원증회고는 원망하는 사람과 언젠간 만나는 고통입니다. 구부득고란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고, 오음성고는 우리 몸이 치성하여 일어나는 고통입니다. 탐에는 개인적 욕망과 조직적 욕망이 있습니다. 개인적 욕망은 내가 개인적으로 부리는 욕망입니다. 세계를 열광시킨 영화 타이타닉의 이야기를 한 번 보세요. 어머니와 약혼남의 탐욕에 희생된 한 여인의 사랑이야기 입니다. 약혼자 잭(디카프리오)의 진정한 사랑은 탐욕에 의해 허무하게 묻혀버립니다. 조직적 욕망이란 제도적 탐욕입니다. 원자폭탄의 제조와 투하에서 인간이 갖고 있는 제도적 욕망의 극치를 볼 수 있습니다. 제도적 탐욕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좌지우지하고 싶은 개인의 탐욕이 더 해진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세계 제2차 대전입니다. 이것은 20세기 지정학적 역사의 분수령으로 역사의 중심이 유럽 사회에서 미국과 러시아로 넘어간 사건입니다. 2차 대전의 결과로 소련의 세력이 동유럽 여러 나라까지 뻗는 결과를 낳았고 중국에서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고 세계의 지배력이 서유럽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2차 대전에서 약 4천만에서 5천만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인간이 가진 탐욕이 낳은 어마어마하고 끔찍한 결과입니다. 

(2) 진은 pratigha이며, 성낼 진嗔이며, 사람이나 생물에 대하여 화 내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비난하거나 피해를 입히는 자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우바사 비구의 이야기를 봅시다. 부처님 당시 왕사성에는 청년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은 부잣집 딸과 약혼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상인들과 함께 장사를 하러 배를 타고 멀리 떠났습니다. 형이 탄 배는 풍랑을 만나 침몰해버립니다. 3년이 지나도 형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부자는 형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딸을 책임지라며 동생에게 맡깁니다. 동생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8년이 지나도 형이 오지 않자 결국 형수 될 사람과 결혼을 합니다. 동생은 그녀와 1년 간 행복하게 잘 살았는데 형이 돌아옵니다. 형이 돌아와서 보니까 자신의 약혼녀는 동생과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형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가득 차게 됩니다. 긴 시간 동안 기다렸던 동생과 약혼녀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 생각한 것입니다. 형이 돌아온 것을 안 동생은 결국 출가를 해버립니다. 출가를 한 동생이 우바사 비구입니다. 동생은 깊은 산 속에 들어가 혼자 살았는데 형은 동생이 있는 곳을 수소문해서 사냥꾼을 시켜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냥꾼이 쏜 화살이 바위에 부딪혀 옆에서 보고 있던 형에게 맞습니다. 악한 진심을 품고 있던 형이 죽은 것입니다. 형은 그 악한 원한과 진심에 의해 뱀으로 환생합니다. 뱀의 몸을 받고도 전생의 원한을 잊지 못하고 동생인 우바사 비구를 죽이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뱀의 몸을 받은 형은 동생을 죽이려고 맴돌다가 동생의 집의 문에 치여 죽습니다. 그다음 형은 독벌레의 몸을 받습니다. 독벌레로 태어나 동생의 집에 숨어 있다가 동생의 머리 위에 떨어져 같이 죽습니다. 원망하는 진심이 환생을 거쳐 그런 참혹한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기쁘고 즐거웠던 마음은 금방 잊혀집니다. 하지만 분노에 의한 원망하는 마음은 길게 남아 있습니다. 좋은 감정보다 원망하는 감정이 더 많이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합니다. 

(3) 치는 moha이며, 어리석을 치痴이며, 즉 무명을 말합니다. 무명이란 진리를 알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존재의 속성이 무아와 무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번뇌에 물든 생존 상태를 낳는 근본 원인입니다. 우리는 인과법칙을 모르기 때문에 무명에 빠집니다. 수행이란 것은 무명에서 연기로 이동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명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탐심과 진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탐심과 진심인 무명, 치심을 가장 기본적인 번뇌심법으로 봅니다. 공부를 해서 지옥으로 가는 마음인 번뇌심법을 다스리고 나면 탐진치가 없어지고 부처가 됩니다. 탐은 계와 대립되고 진은 정과 대립되고 치는 혜와 대립됩니다. 이것들의 차이는 마음을 잘 쓰느냐 못 쓰느냐의 차이입니다. 촛불을 켜면 밝아지고 촛불을 끄면 어두워지는 차이입니다. 

(4) 만은 mana이며, 게으를 만慢이며, 게으르다, 오만하다, 업신여기다의 뜻입니다. 자신의 마음이나 신체를 응시하여 이것은 자기이며 이것은 자기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은 타인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오만불손한 마음입니다. 

제7식 말나식의 근본 성질은 무아를 아로 착각하는 무명, 아치에서 시작합니다. 아치에 의해 아집, 아만, 아애가 생깁니다. 그 가운데 아만이 바로 만입니다. 만은 내가 상대방보다 뛰어나고 내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정견을 방해합니다. 만 때문에 모든 판단은 자기중심이 됩니다. 일기는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데 아주 좋습니다. 일기를 쓰면서 하루를 반성해보면 분명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 일이 생각 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반성하며 ‘내가 이런 짓을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내가 좀 더 잘 했어야 했는데’ 등의 생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는 수 많은 사람은 자기 생각이 무조건 맞다고 여겨 반성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생각이 굳어버립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개혁하고 깨트려야 하는데 이것을 잘 하지 못합니다. 공부를 하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바로 이 만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수행자, 승려들이 출가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기존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모두 내버리고 새로 출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기존에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공부를 한다면 진리에 대한 공부가 훨씬 쉬워집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틀을 모두 부수고 새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근본 마음입니다. 만약 이러한 마음이 아니면 평생 아집, 아만, 아애, 아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진전이 없습니다. 공부가 어려운 이유는 기본 원리도 모르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3곱하기 7이 21인 것은 모두 압니다. 하지만 왜? 어떻게 21이 되는지는 모릅니다. 부처 되는 공부의 기본을 나의 뿌리부터 살펴보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이고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등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만에는 만, 과만, 만과만, 아만, 증상만, 비하만, 사만이 있습니다. 만이란 가문, 재능, 재산에 관하여 자신보다도 낮은 자에 대하여 자신이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과만이란 가문, 재산, 재능 등에 관하여 자신과 대등한 자에 대하여 자신은 다른 점에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만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자기합리화를 하는 것입니다. 만과만이란 가문, 재능, 재산 등에 대하여 자신보다 뛰어난 자에 대하여 자기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아만이란 자신의 마음이나 신체에 대하여 자아 혹은 자아에 속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것에 집착하는데서 생기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증상만이란 수승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데도 자신은 그것을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하고 아는 척하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더 이상 공부를 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들었다고 체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 속에서 정리를 해야 합니다. 자문을 해보면 정리가 잘 됩니다. 비하만이란 가문, 재능, 재산에 관하여 자신보다 뛰어난 자에 대하여 자신은 조금도 못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만이란 덕이 없는데도 자신은 덕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공부나 수행을 조금밖에 하지 않았으면서 스스로가 덕이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교교리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계정혜와 탐진치의 관계를 잘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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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이 불교교리의 구조도입니다. 불교는 무명에서 연기로 가는 가르침이며, 연기를 체득하기 위하여 사성제를 바탕으로 팔정도, 육바라밀, 삼학을 실천하면 되는 것입니다. 

무명과 연기의 문제는 어떻게 모르는 것에서 아는 것으로 가는 가입니다. 연기는 존재가 갖고 있는 법칙을 아는 것입니다. 무명은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상이고 무아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나라고 주장할만한 어떤 독립된 주체는 없습니다. 이러한 법칙을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탐진치가 우리로 하여금 그 법칙을 모르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탐진치를 소멸시키고 무명을 연기로 바꿀 수 있을까요? 부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팔정도를 말씀했습니다.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입니다. 정사, 정어, 정업, 정명은 행에 의해서 탐을 소멸시키고 정정진은 진을 소멸시키고 정념, 정정, 정견은 치를 소멸시킵니다. 팔정도는 대승불교에서 육바라밀이 됩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입니다. 보시, 지계에 의해 탐심이 사라지고 인욕과 정진에 의해 진심이 사라지고 선정과 지혜에 의해 치심이 사라집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연기가 공이란 단어로 바뀝니다. 육바라밀은 선불교로 넘어오면서 계, 정, 혜의 삼학으로 바뀝니다. 탐심을 소멸시키는 것이 계이고 진심을 소멸시키는 것이 정이고 치심을 소멸시키는 것이 혜입니다. 선불교에서는 계정혜를 하며 탐진치를 소멸시키는 방법이 화두입니다. 화두를 깨치고 나면 멸의 상태가 되는데 열반, 적정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적정을 하지 않으면 매일 불안 속에 삽니다. 자신이 영원하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불안이 생깁니다. 삶에서 죽음으로 바뀔 때 가장 큰 불안을 느낍니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이 됩니다. 

(5) 번뇌심법 가운데 견은 drsti이며, 볼 견見이며, 그릇된 견해입니다. 잘못되었기 때문에 악견이라고도 합니다. 이 견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유신견, 변집견, 사견, 견취, 계금취가 있습니다. 

유신견이란 자신의 마음이나 신체를 응시하여 이것은 자기이며 이것은 자기에게 속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내가 있고 내 것이 있다고 착각하는 견해입니다. 이 유신견은 8식이 생겨 7식이 발생함으로써 생깁니다. 변집견은 자기나 자기에게 속한 것이 언제까지나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내 것일 같아 재물을 탐하고 권력을 탐하여 자신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사견은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며, 부모와 지식의 관계등 작용을 부정하며, 참으로 존재하는 것 등을 부정하는 견해입니다. 진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마음이 긍정적인 마음입니다. 인정하고 수용하는 마음에서 긍정적인 마음이 꽃피웁니다. 긍정적인 마음은 선심소법과 가깝고 부정적인 마음은 번뇌심법에 가깝습니다. 견취란 그릇된 견해와 그릇된 견해를 품은 자기존재를 가장 뛰어나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계금취는 삿된 계율을 맞다고 믿으며 그런 계율을 지키는 자신이 가장 뛰어나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정견이 없으면 삿된 계율이 맞다고 믿으며 고집불통으로 썩어 터지게 됩니다. 이것들은 우리를 지옥으로 데리고 가는 종자들입니다. 

(6) 의는 vicikitsa이며, 의심할 의疑이며, 연기와 4제 등 진리에 의심을 품는 마음입니다. 선한 행위를 하면 선한 결과가 오고 악한 행위를 하면 악한 결과가 온다는 인과응보에 의심을 품는 마음입니다. 인과응보를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는 죽다 깨어나도 진리 공부를 못합니다. 우리는 왜 은행을 찾아가 정기적금을 넣습니까? 몇 년 후에 얼마를 탈지 확실하게 아니까 넣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면 어떤 과보가 돌아올지도 아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하지만 선한 행위를 하면 손해 보는 것 같아서 하지 않는 것은 인과응보에 의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과응보를 믿으면 그 순간 세상을 풀어가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약삭빠른 생각들이 다 사라집니다. 만약 이 생에 응보가 돌아오지 않으면 다음 생이나 다다음 생에 돌아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자가 얼마나 많이 붙어서 돌아오겠습니까? 인과응보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부정적인 마음, 지옥 가는 마음이 번뇌지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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