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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제29송 수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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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8,060회 작성일 21-08-03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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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제29송 유식위의 수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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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 29송은 수습위를 말한 것입니다. ‘무득부사의 시출세간지 사이조중고 변증득전의’ ‘얻은 바가 없고 사량 분별할 수 없는 것이 출세간지라고 한다. 두 가지 조중한 것을 버리기 때문에 문득 전의를 증득한다.’입니다. 

지혜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수습위는 무심이며 무득의 단계입니다. 무념이고 무상인 상태가 무심이며, 무심이기 때문에 무득입니다. 중생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지만 견성하고 도를 얻으면 추구하고 얻을 것이 없어집니다. 원래 있는 그대로, 얻을 것이 없어집니다. 6식이든, 7식이든, 8식이든 꼭 작용하는 것이 다섯 개의 변행입니다. ‘촉, 작의, 수, 상, 사’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던 다섯 변행이 작용합니다. 6식, 7식, 8식은 전부 내 속에 수억 겁 동안 쌓여 있던 업에 의해 작용합니다. 다섯 개의 변행이 작용하는 순간 업이 작용합니다. 변행은 업과 작용해서 일어납니다. 수습위에서 말하는 무심의 단계란 변행이 업의 작용과 연결되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업의 작용이 끊어진 단계입니다. 업에 의해 대상이 비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되면 본질을 보게 됩니다. 무엇인가 작용을 해서 내 속에 축적되고 저장이 되어야 그것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을 보면 쓸 필요와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얻을 것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무득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 든 것만 내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내 안에 넣으려고 합니다. 이것만 내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구태여 내 안에 축적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인식하는 것(능취), 인식하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무심이며 인식되는 것(소취)을 인식하지 않는 것이 무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9송에 나온 출세간지는 곧 세간을 떠난 세간적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세간을 초월한 것입니다. 유식에 머문 마음은 주관과 객관이 대립하는 세간적인 마음이 아닙니다.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없는 무분별지입니다. 전의란 자기 존재를 번뇌의 상태에서 청정의 상태로 변화시키는 과정, 결과를 말합니다. 대상과 부딪혀 일어나는 것은 모두 식입니다. 이 식이 전부 지혜로 바뀌는 것입니다. 본질을 알게 되면 업의 창고가 그대로 지혜의 창고로 바뀌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어둠에서 불을 켜면 그대로 밝아집니다. 어둠이 다른 곳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업이 다른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업이 지혜로 바뀌는 것입니다. 번뇌가 청정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전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전의는 식이 지혜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덟 개의 식이 변하여 네 가지 지혜를 얻습니다. 5식은 성소작지, 6식은 묘관찰지, 7식은 평등성지, 8식은 대원경지의 지혜를 얻습니다. 우리는 안 이 비 설 신을 통해 어떤 것을 만들고 일으킵니다. 성소작지를 얻으면 만들고 일으키는 것이 모든 것에 좋게 작용합니다. 묘관찰지는 묘하게 모든 것을 관찰하여 자유자재로 의혹을 끊게 하는 지혜입니다. 평등성지는 다 똑같은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평등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견성하면 대원경지가 됩니다. 본질은 원래 청정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본질도 그대로 보여 주면 사람들이 잘 이끌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름답게 나온다면 사람들은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본질이 아름답게 나오는 것이 바로 식이 전의한 지혜들입니다. 우리는 식을 아름다운 지혜로 가져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밀린다왕문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 존자가 손을 다쳐 붕대를 싼 모습을 보았습니다. “존자여 당신은 손에 상처를 입어 붕대로 싸맸는데 상처가 그렇게 소중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나가세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대왕이시여 상처가 소중한 것이 아니라 손의 상처를 낫게 하기 위해 귀하게 싸맨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식이 좋아서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가 나으면 정상이 되듯 식을 알면 지혜가 되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뇌 망상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내 속에 들어있는 것을 잘 쓰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기심이 앞서기 때문에 항상 잘 쓸 수 없습니다. 무심의 상태가 되면 이기가 없어져 객관으로 보편적으로 보게 됩니다. 

29송에서 ‘두 가지의 추중한 것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두 가지의 추중한 것이란 번뇌장과 소지장을 말합니다. 번뇌장을 끊으면 해탈하여 자유를 얻고 소지장을 끊으면 보리를 증득 합니다. 번뇌장이란 내가 일으키는 번뇌 망상 덩어리입니다. 정의적인 마음의 번뇌로 자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집착함으로써 생깁니다. 나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번뇌를 해결하면 해탈을 하게 됩니다. 초기 불교에서 아라한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해탈한 도인입니다. 자기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입니다. 소지장이란 세상에서 일어나는 번뇌 덩어리입니다. 이것은 지적인 마음의 번뇌로 마음을 떠나서 사물이 실재한다고 보는 집착에서 생깁니다. 내가 갖고 있는 번뇌 덩어리는 번뇌장이고 세상(대상)이 갖고 있는 번뇌 덩어리는 소지장입니다. 29송에서 두 가지 추중한 것을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번뇌장을 버리고 해탈하면 자유로워지고 소지장을 버리고 열반하면 평등해집니다. 그래서 해탈을 하고 열반을 해야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동산 양개 스님의 이야기를 봅시다. 육조 혜능 아래서 다섯 개의 선불교의 종파가 갈라져 나옵니다. 이 가운데 조동종을 연 사람이 동산 양개입니다. 동산 양개는 어려서 출가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스승 밑에서 반야심경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안 이 비 설 신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동산은 자신의 눈과 코, 귀를 만져보니 다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자 동산은 스승에게 “스님 분명 눈, 코, 귀, 혀, 몸은 다 있는데 왜 없다고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스승은 동산의 날카로움에 감탄하고 더 덕이 높은 스님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산 양개는 굉장히 사실적이고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보통 어린 스님은 아무리 출가를 해도 성인이 되기 전에는 정식적인 승려가 아닙니다. 성인이 되면 승려를 계속할 것인지 세속으로 돌아갈 것인지 결정하게 됩니다. 동산 양개는 승려가 되기로 결심하고 견성하기 위한 결심한 내용을 써 어머니께 작별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를 받아본 동산의 어머니도 동산에게 마음 먹은대로 수행하여 부처되라는 편지를 보냅니다. 이 모자가 주고 받은 편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움 편지 중 하나로 남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듣자오니,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올 때는 모두 부모에 의탁하여 삶을 받았으며,

만물이 생겨날 때는 모두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는 힘을 빌었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아니면 태어나지 못하고 천지가 없으면 자라나지 못하니,

모두가 길러주는 은혜에 젖어 있으며 모두가 덮어 주고 실어 주는 은덕을 받았습니다. 

오호라, 일체의 중생과 만 가지의 형상들은 모두 무상(無常)에 속하기에

태어나고 죽는 것을 여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려서는 곧 젖을 먹여준 정이 무겁고 길러준 은혜가 깊으니

만약 재물을 가지고 공양하고 돕더라도 결국에는 보답하기 어려우며,

만약 베어 낸 살로 음식을 지어 시봉하더라도

어찌 오래도록 장수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효경》에 이르기를,

"날마다 세 가지의 희생물을 잡아 봉양하더라도 여전히 효를 다하지 못한다" 하였으니,

서로 끌어당기며 잠겨들면 영원히 윤회의 길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므로

망극한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면 출가하는 공덕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삶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애증(愛憎)의 물줄기를 끊어버리고

번뇌로 가득 찬 고통의 바다를 뛰어넘어

천생(千生)의 부모에게 보답하고 만겁(萬劫)의 자애로운 육친에게 보답한다면

삼계(三界)의 네 가지 은혜를 갚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한 아들이 출가(出家)하면 구족(九族)이 천상(天上)에 난다" 했습니다.

양개(良价)는 금생(今生)의 몸과 생명을 버리더라도 맹세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영겁(永劫)의 근진(根塵)*1으로 반야(般若)를 깨쳐 밝히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부모님께서는 마음으로 들으시고 기꺼이 버리시어 뜻으로 새로이 인연을 짓지 마시고

정반국왕[부처님의 父]을 배우시며 마야모후(부처님의 모)를 본받으십시오.

다른 날 다른 때에 부처님의 회상에서 서로 만날 것이오니

지금 이 때에는 잠시 서로 이별하는 것입니다.

양개(良价)는 오역죄(五逆罪)를 저지르고자 부모공양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한 까닭에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을

제도할 것인가"라고 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부모님의 마음에 이 자식을 다시는 기억하지 마십시오.


  팔복전에 대해 살펴봅시다. 복전이란 복을 심고 가꾸는 터전입니다. 복전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경전, 은전, 비전입니다. 경전은 우리가 공경하고 받들어야 할 복밭이고 은전은 은혜로운 복밭이고 비전은 비천하여 내가 도와줘야 할 복밭입니다. 비전은 최후의 수단입니다. 은전과 경전을 제대로 하지 않고 비전을 먼저 하면 안 됩니다. 경전은 부처님, 성인, 승가가 있고 은전에는 부모, 스승, 수행자가 있습니다. 비전에는 걸인, 병자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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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달위 다음에 수습위가 나옵니다. 전의를 짓는 단계입니다. 진여 자리로 돌아가는 단계입니다. 능취와 소취의 이취가 없어져 보리와 열반이 한 덩어리가 되면 비로소 그림자는 사라지고 실물만 남게 됩니다. 이 단계에 오면 무득이고 무소득이 됩니다. 아무리 행을 하고 베풀어도 이득이 없어 소득이 없습니다. 귀가수분득자량입니다. 보살 십지를 닦는 단계로 자기 본질,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향에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보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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