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제30송 구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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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제30송 유식위의 구경위
다시 유식성을 이루기 위한 다섯 유식위로 돌아가 봅시다. 마지막 단계로 구경위가 있습니다. 구경위란 최상의 바른 깨달음에 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장애를 벗어나 원만한 지혜를 갖추는 것입니다. 구경위의 경지에 이르면 미래세가 다 하도록 유정의 중생을 교화합니다.
구경위를 말한 제30송을 살펴봅시다. ‘차즉무누계 불사의선상 안락해탈신 대모니명법’ ‘이것은 곧 무루이고 계이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며 선이고 상주하는 것이다. 안락하고 해탈신이고 대모니이니 이를 법신이라고 이름한다.’입니다.
다름 아닌 부처를 나타낸 말입니다. 30송은 완성 단계를 말한 것이며 이름의 나열을 말한 것입니다. 무루는 다음 생으로 갈 업의 원인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업은 유루와 무루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위하는 모든 것은 다음 생에 몸을 받는 원인이 되는 유루입니다. 깨친 자의 행위는 다음 생에 태아날 업의 원인이 없는 무루인 것입니다.
계는 모든 존재하는 것이 모여 사는 삼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사의인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의 실상은 진리인데 이것을 선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정확하게 여기서 선은 선을 넘어선 무기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존재를 연기적 입장에서 볼 때 생멸이지만 실상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영원입니다. 그래서 그냥 있을 뿐이며 상주하는 것입니다. 생멸은 고인데 상주이기 때문에 낙이며 확신에 바탕을 둔 편안하고 즐거움이기 때문에 안락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번뇌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다가 가는 것인데 깨치고 보니 번뇌가 없으므로 해탈입니다.
대모니를 봅시다. 부처님을 보고 석가모니라고 합니다. 석가모니란 바로 석가족의 성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니는 성인이란 뜻입니다. 대모니는 큰 성인을 말하는 것으로 가장 위대한 성인에게 부치는 호칭인 것입니다.
법신이란 법의 색신, 법의 몸체를 말합니다. 불성은 자성과 법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 성품을 품고 있는 본체는 자신과 법신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품을 보는 것이 자성이며, 법의 성품을 보는 것이 법성입니다.
30송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이것은 무루이고 계이며’라는 말은 소의를 옮긴 것으로 모든 악한 종자를 없앤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더러움, 번뇌가 일어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전의의 결과로 열반과 보리를 말합니다. 무루는 번뇌를 영원히 끊어서 번뇌가 자라지 않으며 체성이 청정하고 원만하고 지혜로운 것을 말합니다. ‘계’란 함장하다의 뜻입니다. 무엇인가 담고 포함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가운데 한량없는 큰 공덕을 함유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부사의’란 살펴서 생각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길을 초월했기 때문에 전의 증과는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음을 말합니다. 미묘하고 심오하며 스스로 증득하기 때문에 세간의 모든 비유로써 표현할 수 없으며 생각하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단계를 초월한 것입니다. 30송에 나오는 선은 순백한 성품입니다.
본질을 깨우친 청정 법계는 생멸로부터 벗어났고 유위와 무위가 모두 이로운 모습이기 때문에 선입니다. ‘상주하는 것이다.’ 즉 상常은 견고하여 허물어지지 않으므로 견이라고도 합니다. 체상이 변하고 바뀌지 않기 때문에 상주한다는 것입니다. 청정법계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연기의 관점, 실상의 관점입니다. 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은 끊임없이 생하고 멸합니다. 그렇지만 실상의 관점에서 보면 생멸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 우주는 있는 그대로 일 뿐인데 우리 눈으로 볼 때 생하고 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을 연기와 실상의 관점에서 보면 연기는 무상이고 실상은 상합니다. 우리가 보는 가짜 세계는 끝없이 생멸을 되풀이 하지만 진여의 세계는 생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와 진여의 세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번뇌 속에 있으면 끝없이 생멸하는 세계이지만 진여를 보면 진리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낙’은 극락과 열반에 드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고에서 낙으로 가기 위해 열심히 수행하고 공부를 합니다. 청정법계에서는 갖가지 모습이 적정하기 때문에 고하지 않고 낙합니다. 괴로움이나 핍박을 떠났기 때문에 안락합니다. 무상한 것은 고이지만 소의를 옮긴 것은 낙입니다. 소의란 전의입니다. 식이 변해서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세세생생 살면서 편안하고 자유롭고 즐거우면 그 자체가 극락입니다. 이런 사람은 죽어서도 극락에 갑니다. 하지만 살아있을 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극락을 모르기 때문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생을 살 때 잘 살아야 합니다. 해탈신이란 해탈장을 끊고 열반에 든 상태입니다. 법신이란 청정법신으로 소지장을 끊고 깨달음을 성취하여 보리를 증득 한 상태입니다. 부처란 해탈신이고 법신인 것입니다.
법신의 본질은 불성이며 법성을 나타냅니다. 불성에는 자성과 법성이 있으며, 불신에는 법신과 자신(나)이 있습니다. 자신의 본래 성품이 자성이며, 자성을 보는 것이 견성이며 해탈이며 열반인 것입니다. 법신의 본래 성품이 법성이며 법성을 증득 하는 것이 보리이며 부처인 것입니다. 사무쳐 깨치면 자성이 법성이며 법성이 자성을 품고 있음을 알아 둘이 하나임을 알게 되며 원래 둘은 하나일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견성을 하면 신통이 생기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만, 보리를 증득 하면 그냥 신통문이 터져버립니다.
대모니는 큰 성인이라고 했습니다. 대모니가 되면 최고의 적묵성을 갖습니다. 적묵성이란 열반적정의 적과 묵묵함의 묵을 말합니다. 모니 안에 침묵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대모니가 되면 영원히 두 가지 장애(번뇌장과 소지장)를 떠납니다. 그러므로 법신이라고도 합니다. 법신의 본질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입니다. 이 세상에 진리를 펴기 위해 나타난 법신의 응신이 석가모니불입니다. 하나의 화신입니다. 법신을 자세히 나누면 자성신, 수용신, 변화신입니다. 자성신이란 모든 여래의 진실하고 청정한 법계의 수용신이고 변화신의 평등한 의지처입니다. 양상을 떠나 고요하며 모든 희론을 끊었고 과가 없고 진실하며 상주하는 공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것은 법의 참다운 성품입니다.
원래 진언은 ‘옴’ 하나입니다. 이것이 우주 전체의 생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옴을 풀어 쓰면 옴마니반메훔이 됩니다. 옴이 바로 법신,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말합니다. 우주의 중심입니다. 마는 동방 아촉여래로 자성신입니다. 촉지는 항마촉지인입니다. 마귀를 물리치고 지신을 항복시킨 인입니다. 니는 남방화주, 보생여래입니다. 여원인으로 원을 전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반은 아미타불으로 타수용신입니다. 선정인으로 부처되기 위한 지권인입니다. 메는 북쪽으로 불공성취여래, 변화신입니다. 시무외인으로 두려움을 없애줍니다. 그리고 현상 세계에서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훔입니다. 참선을 할 때 대부분 선정인이나 촉지인을 합니다. 호흡을 고를 때는 선정인이 좋고 호흡이 잘 되면 선정인에서 촉지인으로 넘어가면 좋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 세계가 식입니다. 식을 돌이켜 잘 보면 진리를 보게 됩니다. 절에 가면 석가모니불을 모셔
놓은 곳이 대웅전입니다. 지금 이 세상의 가장 높은 사람은 석가모니불입니다. 그래서 다른 부처들은 석가모니불의 아랫자리에 놓습니다. 그러나 비로자나불은 석가모니불과 같은 자리에 놓거나 그 위에 모셔 놓을 수 있습니다.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절에는 석가모니불을 따로 모시지 않습니다.
자성신을 설명할 때 열 가지 양상이 있습니다. 청황적백, 남여, 생주이멸이 열 가지입니다. 업의 모든 양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빨강 노랑 파랑의 삼원색이 있으면 모든 색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한 흰색은 업이 물들기 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세상의 성질은 음과 양과 음양을 합하면 무이기도 하고 양성이기도 한 성질을 나타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겨났다가 존재하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멸하기 마련입니다. 법신을 수용신으로도 나타냅니다. 수용신에는 자수용신과 타수용신이 있습니다. 자수용신은 모든 여래가 무수겁 동안 한량없는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닦아서 일으킨 가 없는 참다운 공덕과 원만하고 청정하고 항상 두루하는 색신입니다. 타수용신은 모든 여래가 평등성지에 의지해 나타낸 미묘하고 청정한 공덕의 몸입니다. 변화신은 모든 여래가 성소작지에 의지해서 변화한 중생의 부름에 따르는 한량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나타난 모든 부처의 몸이 변화신입니다. 어떤 때는 거지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지도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이 세상을 극락으로 만들어 갑니다.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은 필요가 없듯이 목적에 도달하면 공부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공부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유식은 진리, 지혜를 깨치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유식은 뗏목과 같은 존재입니다. 뗏목이 없으면 강을 건널 수 없듯이 우리의 몸과 삶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번뇌하고 고민하는 사이에서 부처됩니다. 우리의 삶을 떠나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있습니다. 유식을 배우는 것은 번뇌 망상을 극복하고 부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입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진리를 맛보아야만 합니다. 태어나기 전에 나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봅시다. 이 답을 얻으면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됩니다. 우리는 현재 뗏목에 의지해서 강을 건너가고 있는 중입니다. 답을 얻는다는 것은 강을 건너 목적지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유식을 배운 것입니다. 유식 30송에 10대 논사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호법 스님이 유식에 대한 논사를 쓰고 마침의 발원을 씁니다. 마지막으로 위대한 열 분의 논사도 함께 찬탄합니다. 호법(護法, Dharmapala), 안혜(安慧, Sthiramati), 친승(親勝, Bandhusri), 화변(火辨, Citrabhana), 덕혜(德慧, Gunamati), 난타(難陀, Nanda), 정월(淨月, Sudhacandra), 승우(勝友, Visesamitra), 최승자(最勝子, Jinaputra), 지월(智月, Jnanacandra)을 찬탄합니다.
또한 모든 유정에게도 부처님의 자비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이상 성스러운 가르침과
다른 논리에 의거하여
유식의 성품과
양상의 뜻을 판별하였습니다.
얻은 공덕을 많은
유정들에게 나누어
함께 속히 최상의 깨달음에
오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하는 목적은 다 함께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부처의 세계로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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